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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ja.wikipedia.org/wiki/津軽選挙


津軽選挙(つがるせんきょ)は、青森県津軽地方で頻発する金権選挙である。

津軽地方で起こる政争で、同県南部地方の政争や八戸市の八戸戦争と対比されることが多いが、津軽選挙は物質主義から発生する個人主義、さらに派生して利己主義といった理由から小規模であることが多い。しかし一方で件数は非常に多く、自治体運営に大変な混乱や支障を招いたケースが散見される。

手口としては陰での贈収賄や買収といった一般的な汚職の他に、地縁も血縁も関係なく現金を配る、有権者に配るビラに現金をしのばせる、といった金を配るのが当たり前のような選挙活動が挙げられる。

近年の選挙浄化の視点や小選挙区比例代表並立制の導入、県政レベルでのバランス感覚といった面から影を潜めつつあるが、未だに完全に無くなってはいないのが現状である。以下に代表例を列挙する。


警察沙汰になった事例

黒石市長選当選無効訴訟事件 - 1953年。

鶴田町分町住民投票水増し事件 - 1956年。

旧金木町長選不正開票事件 - 1958年。「選管を制する者は選挙を制する」が町民の流行語になった。

旧柏村長選不正代理記載事件 - 1967年。

鰺ヶ沢町長選替え玉不正投票事件 - 1967年。

鶴田町長選投票増減事件 - 1967年。

鰺ヶ沢町二人町長事件 - 1971年。

旧金木町不在者投票悪用事件 - 1972年。

五所川原市長選挙不在者投票用紙一括送付事件 - 1973年。

旧中里町長選開票所乱入事件 - 1975年。

旧木造町急性選挙性文盲症流行事件 - 1979年。

旧森田村民自殺事件 - 1979年。

旧市浦村選挙長雲隠れ事件 - 1979年。性急な人事異動や投票所変更が行われた。

旧浪岡町存廃問題勃発事件 - 2005年。

平川市長選公職選挙法違反事件 - 2014年。前市長と後援者と市議15人が公職選挙法違反で逮捕され(6人は勾留中・9人は訴追)、定数20人の本会議開催に必要な議員10人を集められなくなるなどした。

升田世喜男代議士選挙運動突入事件 - 2014年。

これらを詳細に記録した書物も数多く出版されている。


巧妙な手口

津軽選挙では開票作業者が票を食べることによって得票数をごまかしたり、おにぎりに紙幣を隠したりしていた。また、孫がおばあちゃんに自転車を買ってとねだると「もうすぐ選挙があるから、ちょっと待て。選挙が終わったら買ってあげる」と返答され、実際に選挙後に自転車を買ってもらった逸話が存在する。

また、伊奈かっぺいは『土曜ワイド』でこう語っている。「定数20に対して、立候補者も20人で無風選挙が続いていたので、その20人が1人100万円ずつ出して、計2000万円を新たに立候補しようとした人に渡して、立候補しないことになったこともあります。なぜか。選挙になったら、100万円では済まないので、100万円ずつの方が費用はかからないからです。私は、その町を知っています」


旧田沢・竹内派と木村派の抗争史

津軽選挙は、戦前には既に兆候があった。初代民選青森県知事となる津島文治は、地元旧金木町の名家である津島家の出身で、弟の太宰治(津島修治)は時代の寵児となっていた。文治が衆議院総選挙に初当選した際、料亭で酒盛りしつつ金木町長と軍資金を分配し、その結果酔った町長が2階から小便をしたために警官の頭にかかった。連れて行かれた交番で札束が町長の懐から落ちて御用となり、文治は留置場で当選を辞退する羽目になっている。戦後は昭和の大合併によりポストが激減し、生活手段を巡って「カネのかかる選挙」が常態化した。八戸戦争との最大の違いは、財政出動による恩恵を受けなかった「反体制派」や「抵抗勢力」が徹底的に粛清されたことであった。

中選挙区時代は非常に津軽選挙の色合いが濃く、権謀術数が絡み複雑な政略が展開された。「待ちの政治家」竹内俊吉新知事は青森空港の新空港建設にあたり鶴田町と弘前市の境界地域に移転させる予定であったが、盟友・田沢吉郎(津島文治の娘婿)が旧浪岡町と青森市の境界地域に存在した旧空港周辺の大地主であったこともあり、俊吉の息子の竹内黎一との選挙協力の観点から動けず、俊吉の側近であった北村正哉新知事により最終的に移転が撤回されている。

一方旧青森2区は「田竹時代」の田沢と黎一に加え日本共産党の津川武一や日本社会党の山内弘が犇めく激戦区であり、そこに木村守男が割って入る状況であった。このため第39回衆議院議員総選挙では国会で入閣適齢期とされていた黎一が地元で「足フパリ」と呼ばれる強烈なネガティブ・キャンペーンを受け落選するという事態が生じている。その後木村は北村の五選を阻止し、青森県知事に就任する。

2001年、木村は「新世紀にふさわしい県民歌を」として、「田竹時代」の1971年に県成立100周年を記念して制定された「青森県賛歌」の廃止と新県民歌の制定を提唱した。木村が田沢・竹内色の一掃を企図して意欲を見せていた「青森県賛歌」廃止に対しては県議会で異論が相次ぎ、木村が提唱した新県民歌に関しては「青い森のメッセージ」が制定されたものの当初は廃止の方針が示されていた「青森県賛歌」は存続が決定した。しかし、県勢要覧や県民手帳には「青い森のメッセージ」のみが掲載されるようになり「青森県賛歌」は実質“封印”状態とされたまま現在に至っている。そうした状況の中で、2003年に今日「県政史上最大の政治決戦」であったと位置づけられる木村の女性スキャンダルが発覚する。この政争は旧田沢・竹内派の津島雄二(太宰治の娘婿)と木村派の木村太郎(木村守男の息子)の争いでもあった。詳細は八戸戦争を参照。

なお、2011年の平川市選挙区における青森県議選や2013年の平川市長選でも抗争が再燃した形となった。このうち平川市長選について、当選した長尾忠行市長側(旧田沢・竹内派)から3人、落選した大川喜代治前市長側(木村派)から2人の計5人の平川市議が、2014年2月19日に公職選挙法違反容疑で逮捕される事態となるなど波紋が広がっている。同年4月1日には新たに1人の市議、5月1日には落選した大川喜代治前市長、5月21日には3人の市議、更に7月16日には6人の市議が逮捕され、議員定数20名中15名が逮捕されるという事態に陥った。その後の7月27日に行われた市議会議員補欠選挙では、幸福実現党元公認候補の石田昭弘が投開票の結果当選し、党の初の議席獲得に貢献している。


青森県の地方政治が、今の日本の駄目な政治の原点。

拝金政治先進国、日本万歳!!!!


일본의 정치의 이미지가 나빠진 이유

https://ja.wikipedia.org/wiki/츠가루 선거


츠가루 선거(점거)는, 아오모리현 츠가루 지방에서 빈발하는 금권 선거이다.

츠가루 지방에서 일어나는 정쟁으로, 동현 남부 지방의 정쟁이나 하치노헤시의 하치노헤 전쟁과 대비되는 것이 많지만, 츠가루 선거는 물질주의로부터 발생하는 개인주의, 한층 더 파생해 이기주의라고 하는 이유로부터 소규모인 것이 많다.그러나 한편으로 건수는 매우 많아, 자치체 운영에 대단한 혼란이나 지장을 부른 케이스가 산견된다.

수법으로서는 그늘에서의 뇌물증여나 매수라고 한 일반적인 오직 외에, 지연도 혈연도 관계없이 현금을 나눠주는, 유권자에게 나눠주는 빌라에 현금을 감춘다, 라고 하는 돈을 나눠주는 것이 당연과 같은 선거 활동을 들 수 있다.

근년의 선거 정화의 시점이나 소선거구 비례 대표 병립제의 도입, 현 행정 레벨로의 밸런스 감각이라고 하는 면으로부터 그림자를 감추면서 있다가, 아직도 완전하게 않게 되지는 않은 것이 현상이다.이하에 대표예를 열거한다.


경찰 소식이 된 사례

쿠로이시시장 선거 당선 무효 소송 사건 - 1953년.

츠루타쵸분정주민 투표 증가 사건 - 1956년.

구카나키마치장 선거 부정 개표 사건 -1958년.「선거관리를 억제하는 사람은 선거를 억제한다」가 읍민의 유행어가 되었다.

구카시와무라장 선거 부정 대리 기재 사건 - 1967년.

아지가사와마치장 선거 대역 부정 투표 사건 - 1967년.

츠루타쵸장 선거 투표 증감 사건 - 1967년.

아지가사와마치 두 명 촌장 사건 - 1971년.

구카나키마치 부재자 투표 악용 사건 - 1972년.

고쇼가와라시장 선거 부재자 투표 용지 일괄 송부 사건 - 1973년.

구나카사토쵸장 선거 개표소 난입 사건 - 1975년.

구키즈쿠리쵸 급성 선거성 문맹증유행 사건 - 1979년.

구모리타무라 민자살사건 - 1979년.

구시우라무라 선거장 도주 사건 - 1979년.성급한 인사이동이나 투표소 변경을 했다.

구나미오카마치 존폐 문제 발발 사건 - 2005년.

히라카와 시장 선거 공직 선거법 위반 사건 - 2014년.전 시장과 후원자와 시의회 의원 15명이 공직 선거법 위반으로 체포되어(6명은 구류중·9명은 소추), 정수 20명의 본회의 개최에 필요한 의원 10명을 모아지지 않게 되는 등 했다.

마스다세희남 국회의원 선거 운동 돌입 사건 -2014년.

이것들을 상세하게 기록한 서적도 많이 출판되고 있다.


교묘한 수법

츠가루 선거에서는 개표 작업자가 표를 먹는 것에 의해서 득표수를 속이거나 주먹밥에 지폐를 숨기거나 하고 있었다.또, 손자가 할머니에게 자전거를 사와 조르면 「곧 있으면 선거가 있다로부터, 조금 기다려라.선거가 끝나면 사 준다」라고 대답되어 실제로 선거 후가 자전거를 사준 일화가 존재한다.

또, 이나있어는 「토요일 와이드」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정수 20에 대해서, 입후보자도 20명이서 무풍 선거가 계속 되고 있었으므로, 그 20명이 1명 100만엔씩 내고, 합계 2000만엔을 새롭게 입후보 하려고 한 사람에게 건네주고, 입후보 하지 않게 된 적도 있습니다.왜일까.선거가 되면, 100만엔으로는 미안하기 때문에, 100만엔씩(분)편이 비용은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나는, 그 마을을 알고 있습니다」


구타자와·타케우치파와 키무라파의 항쟁사

츠가루 선거는, 전쟁 전에는 이미 징조가 있었다.초대 민선 아오모리현 지사가 되는 츠시마 분지는, 현지 구카나키마치의 명가인 츠시마가의 출신으로, 남동생의 다자이 오사무(츠시마 슈우지)는 시대의 총아가 되고 있었다.문치가 중의원 총선거에 첫당선 했을 때, 요정에서 술잔치 하면서 카나키마치장과 군자금을 분배해, 그 결과 취한 촌장이 2층으로부터 소변을 했기 때문에 경관의 초에 걸렸다.데리고 가진 파출소에서 돈뭉치가 촌장의 품으로부터 떨어져 용무가 되어, 문치는 유치장에서 당선을 사퇴하는 처지가 되어 있다.전후는 쇼와의 대합병에 의해 포스트가 격감해, 생활 수단을 둘러싸 「돈이 드는 선거」가 상태화 했다.하치노헤 전쟁과의 최대의 차이는, 재정 출동에 의한 혜택을 받지 않았다 「반체제파」나 「저항 세력」이 철저하게 숙청된 것에서 만났다.

중선거구 시대는 매우 츠가루 선거의 색조가 진하고, 권모술수가 관련되어 복잡한 정략이 전개되었다.「기다리는 정치가」타케우치 šœ 요시신 지사는 아오모리 공항의 신공항 건설에 해당해 츠루타쵸와 히로사키시의 경계 지역에 이전시킬 예정이었지만, 동지·타자와 모치로(츠시마 분지의 사위)가 구나미오카마치와 아오모리시의 경계 지역에 존재한 구공항 주변의 대지주인 적도 있어, šœ길의 아들 타케우치려일과의 선거 협력의 관점으로부터 움직이지 못하고, šœ길의 측근에서 만난 키타무라 마사야 신지사에 의해 최종적으로 이전이 철회되고 있다.

한편 구아오모리 2구는 「전죽시대」의 타자와와 려일에 가세해 일본 공산당의 츠가와 타케시1이나 일본 사회당의 야마우치 히로시가 분인 듯하는 격전구이며, 거기에 키무라 모리오가 나누어 들어가는 상황이었다.이 때문에 제3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국회에서 입각 적령기로 되어 있던 려일이 현지에서 「다리 후파리」라고 불리는 강렬한 네가티브·캠페인을 접수 낙선한다고 하는 사태가 생기고 있다.그 후 키무라는 키타무라의 5선을 저지해, 아오모리현 지사로 취임한다.

2001년, 키무라는 「 신세기에 어울리는 현민노래를」로서, 「전죽시대」의 1971년에 현 성립 100주년을 기념해 제정된 「아오모리현 찬가」의 폐지와 신현민노래의 제정을 제창했다.키무라가 타자와·타케노우치색 일소를 기도 하고 의욕을 보이고 있던 「아오모리현 찬가」폐지에 대해서는 현의회에서 이론이 잇따라, 키무라가 제창한 신현민노래에 관해서는 「푸른 숲의 메세지」가 제정되었지만 당초는 폐지의 방침이 나타나고 있던 「아오모리현 찬가」는 존속이 결정되었다.그러나, 현의 정세 요람이나 현민 수첩에는 「푸른 숲의 메세지」만이 게재되게 되어 「아오모리현 찬가」는 실질“봉인”상태로 여겨진 채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그러한 상황속에서, 2003년에 오늘 「현 행정 사상 최대의 정치 결전」이었다고 자리 매김되는 키무라의 여성 스캔들이 발각된다.이 정쟁은 구타자와·타케우치파 츠시마 유지(다자이 오사무의 사위)와 키무라파 키무라 타로(키무라 모리오의 아들)의 싸움이기도 했다.자세한 것은 하치노헤 전쟁을 참조.

또한/`A2011년의 히라카와시 선거구에 있어서의 아오모리현 의원 선거나 2013년의 히라카와 시장 선거에서도 항쟁이 재연한 형태가 되었다.이 중 히라카와 시장 선거에 대해서, 당선한 나가오충행 시장측( 구타자와·타케우치파)으로부터 3명, 낙선한 오오카와 키요하루 전시장측(키무라파)으로부터 2명 합계 5명 히라카와 시의회 의원이, 2014년 2월 19일에 공직 선거법 위반 용의로 체포되는 사태가 되는 등 파문이 퍼지고 있다.동년 4월 1일에는 새롭게 1명의 시의회 의원, 5월 1일에는 낙선한 오오카와 키요하루 전시장, 5월 21일에는 3명의 시의회 의원, 더욱 7월 16일에는 6명의 시의회 의원이 체포되어 의원 정수 20 명중 15명이 체포된다고 하는 사태에 빠졌다.그 후의 7월 27일에 행해진 시의회 의원 보궐 선거에서는, 행복 실현당원공인후보의 이시다 아키라홍이 투개표의 결과 당선해, 당의 첫 의석 획득에 공헌하고 있다.


아오모리현의 지방정치가, 지금의 일본의 안된 정치의 원점.

배김 정치 선진국, 일본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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