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donga.com/fbin/output?sfrm=1&n=200601180130 << 韓国サイトだ♪
1952年に入ると日本の漁民らは、4月28日を指折り数えて待った。 米サンフランシスコで日本が連合国側と第二次世界大戦終結のため1951年9月8日に締結した講和条約が、その日に発効するからだった。日本を占領した米国のダグラス・マッカーサー将軍は、日本の漁民らが本土周辺の決まった線を超えて操業することができないようにした。
「マッカーサー・ライン」と命名されたこの線は、講和条約発効と同時に廃止されることになっていた。
↑ここ重要↑
1952年1月18日。100日後には日本海は日本漁民らの畑になるところだった。 まさにこの日、海の向こうの、戦火に包まれた大韓民国の臨時首都釜山から、青天の霹靂のようなニュースが飛び込んできた。 大韓民国の李承晩大統領が、「確定した国際的先例に基づき、国家の福祉と防御を永遠に保障しなければならない要求によって」、海岸から50〜100マイルの海上に線を引き、「隣接海洋に対する主権宣言」を行なったのだ。
日本側は唖然茫然だった。 日本はこれを「李承晩ライン」と呼んで、撤廃を強力に要求した。
友邦である米国や中華民国も非難したが、李承晩はびくともしなかった。 むしろ韓日間の平和のためのものだとして、「平和線」と呼んだ。 日本政府が漁民らに「李承晩ライン」を無視するように言うと、韓国政府は軍艦まで動員して「平和線」を越える日本漁船を容赦なく捕えた。 その過程で日本の漁民1人が死んだりした。 1961年までに拿¥捕された日本漁船は300隻を超え、抑留された日本人は4000人に近かった。
平和線は、切迫した漁業保護が生んだ産物だ。 当時、国内の漁船全体の総トン数は10万トン、それさえも大部分が無動力船だった。 日本は総トン数200万トンで、そのうちかなりの数が韓国警察船より速い新鋭船だった。 マッカーサー・ラインが消えれば韓国の漁業が沈むことは必定だった。
とはいえ、平和線は漁業保護のみを狙ったものではない。 平和線の内側に独島を含めたのが絶妙だった。
講和条約の
「日本が放棄する地域」に独島を入れるようにとの韓国の要求が拒否されると、先手を打ったのだ。
↑ここも重要↑
切羽詰った日本は10日後、「韓国の一方的な領土侵略」だとして「独島問題」を争点化したが、もはや機先を制された後だった。
抗日闘士李承晩の快挙である平和線が、韓日国交正常化条約調印(1965年6月22日)とともに歴史の中に消えると、我が国の国民は鬱憤を吐いた。 「得たものは金であり、失ったものは平和線だ」と。
理解できたかな?
卑怯な韓国が、竹島を不法占拠しているんだよ♪
(嘲笑
http://www.donga.com/fbin/output?sfrm=1&n=200601180130 << 한국 사이트다♪
1952년에 들어가면 일본의 어민등은, 4월 28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미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이 연합국측과 제이차 세계대전 종결을 위해 1951년 9월 8일에 체결한 강화 조약이, 그 날에 발효하기 때문이었다.일본을 점령한 미국의 더글라스·막카서 장군은, 일본의 어민등이 본토 주변이 정해진 선을 넘어 조업할 수 없게 했다.
「막카서·라인」이라고 명명된 이 선은, 강화 조약 발효와 동시에 폐지되게 되어 있었다.
↑여기중요↑
1952년 1월 18일.100일 후에는 일본해는 일본 어민등의 밭이 되는 곳(중)이었다. 확실히 이 날, 바다의 저 편의, 전화에 싸인 대한민국의 임시 수도 부산으로부터, 청천의 벽력과 같은 뉴스가 뛰어들어 왔다. 대한민국의 이승만 대통령이, 「확정한 국제적 선례에 근거해, 국가의 복지와 방어를 영원히 보장해야 하는 요구에 의해서」, 해안으로부터 50~100마일의 해상에 선을 그어, 「인접 해양에 대한 주권 선언」을 행했던 것이다.
일본측은 아연하게 망연했다. 일본은 이것을 「이승만 리인」이라고 부르고, 철폐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우방인 미국이나 중화 민국도 비난 했지만, 이승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일간의 평화를 위한 물건이라고 하고, 「평화선」이라고 불렀다. 일본 정부가 어민등에 「이승만 리인」을 무시하도록(듯이) 말하면, 한국 정부는 군함까지 동원해 「평화선」을 넘는일본 어선을 가차 없이 잡았다. 그 과정에서 일본의 어민 1명이 죽거나 했다. 1961년까지 나포 된 일본 어선은 300척을 넘어억류된 일본인은 4000명에게 가까웠다.
평화선은, 임박한 어업 보호가 낳은 산물이다. 당시 , 국내의 어선 전체의 총 톤수는 10만 톤, 그것마저도 대부분이 무동력선이었다. 일본은 총 톤수 200만 톤으로, 그 중 상당한 수가 한국 경찰선보다 빠른 신예선이었다. 막카서·라인이 사라지면 한국의 어업이 가라앉는 것은 반드시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평화선은 어업 보호만을 노린 것은 아니다. 평화선의 안쪽에 독도를 포함했던 것이 절묘했다.
강화 조약의
「일본이 방폐하는 지역」에 독도를 들어갈 수 있도록(듯이)라는 한국의 요구가 거부되면,선수를 쳤던 것이다.
↑여기도 중요↑
칼날밑 양면 손잡이 따진 일본은 10일 후, 「한국의 일방적인 영토 침략」이라고 해 「독도 문제」를 쟁점화했지만, 이미 기선을 제지해진 후였다.
항일 투사 이승만의 쾌거인 평화선이, 한일 국교 정상화 조약 조인(1965년 6월 22일)과 함께 역사안에 사라지면, 우리 나라의 국민은 울분을 토했다. 「얻은 것은 돈이며, 잃은 것은 평화선이다」라고.
이해할 수 있었는지?
비겁한 한국이,타케시마를불법 점거하고 있어♪
(조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