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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江(ハンガン)の奇跡”が日本おかげ?… “朝鮮近代化させた”のような帝国主義的発想

    イ・ジンソク記者 キム・ジョンフン記者 ソン・ジョンミン記者

入力:2015.03.27 02:00

[”日支援で韓成長”日動画がごり押しである理由]

①日次官は賠償金性格…純粋な援助で見るのが難しくて
②当初農業に投入される資金政府が説得して浦項製鉄たてたこと
③日、IMF時は経済状況外面…米・ヨーロッパ比べて多くのお金抜き出して
④西欧より暴圧的植民支配…資源・食糧収奪に徴兵まで

そしてこの資金には植民支配と収奪に対する賠償金的性格が敷かれていて純粋に開発途上国に対する援助だと見るには難しい側面がある。 日本は1965年韓国政府に無償3億ドル(当時為替レートで約1080億ウォン)の請求権資金と、有償2億ドル(約720億ウォン)の公共借款を合わせて5億ドルを提供することにした。 これは日本がフィリピンに支給した5億5000万ドル賠償金と比較される。 フィリピンなどは2次大戦期間中日本に占領されたが、韓国は35年間植民地状態で日本帝国主義収奪政策に犠牲になった。

日本は経済成長のための初期資金が切実だったパク・チョンヒ政府の境遇を有利に利用して不充分で不完全な賠償金を至急だったことから評価される。

チェ・ナムソク韓国経済研究院研究委員は”日本次官が経済開発初期に役に立ったのを認めても、”漢江(ハンガン)の奇跡”は政府主導の強力な成長政策と韓国人特有の教育の熱意および勤勉性、国民貯蓄を基盤とした大規模投資と企業家精神などが総合された結果で現れたと見ることが合う”と話した。



①開発初期次官の70%はアメリカとヨーロッパから入った

パク・チョンヒ政府が1次経済開発5ヶ年計画を始めた1962年から10年間韓国に入ってきた海外公共借款は合計11億9300万ドルであった。 このお金が高速道路と橋梁、鉄道、ダムなど産業の大動脈を建設するのに使われた。 日本の自画自賛と違いアメリカ発公共借款が7億2300万ドルで61%を占める。 IBRD(国際開発銀行)等国際金融機構は1億6600万ドル(14%)を支援した。 日本は2億5600万ドル(22%)だ。 日本の主張のとおり60年代経済開発初期に日本で2億5600万ドルという大きい金額が入ってきたことは合う。 しかし日本から入ってきた公共借款には韓国・日本請求権協定にともなうユサン次官が含まれている。

政府次元の公共借款と民間企業がわが政府の保証を受けて外国で借りてきた商業次官を全部合わせても事情が別段変わらない。 同じ期間公共借款と商業借款を合わせた金額は32億1400万ドルだ。 アメリカで13億5800万ドル(42%),日本で7億8700万ドル(25%),ヨーロッパで7億2600万ドル(23%)が入ってきた。

②日本資金は日本の利益に役に立つように使われた

当時パク・チョンヒ政府は日本資金を初期経済開発に効果的に活用した。 日本政府の広報動画で議論されたポスコと昭陽江(ソヤンガン)ダム、ソウル地下鉄1号線に日本資金が必要なのは事実だ。 賠償金性格の5億ドル(無償3億ドル+有償2億ドル)の中で1億2000万ドル程度が浦項(ポハン)製鉄を建設するのに要っていった。 本来は農業分野に投入されるお金であったのに、当時政府がその間韓国の製鉄所建設を反対した日本を説得して浦項(ポハン)製鉄を作ることで用途を変えて使った。 産業公海(公害)問題に直面した日本の立場で鉄鋼工業設備を販売する大きくて安定したプロジェクトが必要だったために浦項製鉄建設に同意したという研究(釜山外大パク・ヨング教授)もある。 昭陽江(ソヤンガン)ダム建設資金290億ウォン中104億ウォン(2160万ドル)また、日本政府が利子を受けて貸したユサン次官を活用した。 1974年ソウル地下鉄1号線(ソウル駅~清涼里(チョンニャンニ)駅)を作る時入ったお金330億ウォン中150億ウォンは日本海外協力基金(OECF)で次官を持ってこ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年4%台の低い金利だったが、日本も初期投入された電車186両を日本企業の日立で製作するなど収益を取りまとめた。

③1965年国交正常化以後韓国・日本貿易不均衡累積額4900億ドル

国交正常化以後日本企業らは投資と輸出入パートナーで韓国企業らと協力関係を拡大した。 しかし”技術提携”という名前の協力関係は日本企業の立場では老後技術と老後設備を移転する機会であった側面もある。 パク・チョンヒ政府が重化学工業と輸出主導型成長戦略を展開しては中間材輸出利益が大きかった。 日本が韓国との交易で享受した利益を見せる端的な数字が国交正常化以後昨年4月まで累積した対日貿易赤字だ。 4944億ドルに達する。

日本は経済協力を強調するが、去る1997年外国為替危機当時韓国の経済的困難を冷遇した。 当時財政経済院次官だったカン・マンス前企画財政部長官は去る1月出版した”現場でみた経済危機対応実録”で”外国為替危機当時日本の資金回収はあまり大きかったしとてもはやくて耐えられなかった”とした。 カン前長官によれば、1997年海外金融機関は国内銀行に貸した短期借入金の半分以上である375億ドルを回収した。 最大短期借入(差し入れ)船だった日本が最も大きい問題を作った。 短期借入金(218億ドル)の60%である130億ドルを回収した。 ヨーロッパが173億ドル中45%である76億ドル、アメリカが56億ドル中38%である21億ドルを回収したことに比べてはるかに規模が大きくて回収速度が速かった。

④植民地収奪で独立直後世界最貧国状態から出発した韓国

日本の植民地収奪は資源と食糧に終わらないで徴兵と徴用等を通した人的資源蹂躪まで重なって独立直後韓国の経済状況を最悪の状態に追い詰めた。 しかし日本右翼一部では植民支配時期食糧増産、工業投資、教育拡大などで韓国経済発展の基礎を作ったという呆れ返る主張もする。 虚数列忠南(チュンナム)大教授の研究によれば、解放当時日帝工業資産のうち韓国にあったことは全体の25%に過ぎず、その上に光復(解放)後混乱と6・25韓国動乱(朝鮮戦争)の時ほとんどの破壊された。 また、日本人の大規模田畑所有と米穀収奪で農業人口1人当り農産物受取量は植民支配期間かえって3~15%減った。 日帝末期韓国人の小学校初等と進学は増えたが、中卒以上学歴は全体の1%に過ぎなかった。日本の植民支配は民族抹殺政策と苛酷な収奪など西欧列強と比較してはるかに暴圧的だった。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3/27/2015032700437.html

【韓国】「日本のおかげ」広報動画は植民地近代化論と同じ発想

日本の借款は一種の賠償金、純粋な援助とは見なせず
通貨危機時に韓国の苦境を無視、欧米より大規模に資金回収
西欧よりも暴圧的な植民地支配、資源・食糧収奪に徴兵まで


日本の外務省が広報動画で「日本の支援が韓国の経済成長の土台になった」という趣旨の主張したことをめぐり、
韓国の専門家らはさまざまな理由を挙げ「こじつけ」だと指摘している。まず、規模で見ると戦後の韓国の経済再建
に決定的な役割を果たしたのは、日本よりもむしろ欧米の援助だった。

また、日本から韓国への借款には過去の植民地支配と収奪に対する賠償金的な意味合いがあり、開発途上国へ
の純粋な援助とは見なし難い面がある。日本は1965年、韓国政府に無償3億ドルの請求権資金と有償2億ドルの
公共借款を合わせ、計5億ドルを提供することを決めた。日本はフィリピンに5億5000万ドルを賠償している。
フィリピンなどは第2次世界大戦中に日本に占領されたが、韓国は35年にわたり植民地として日本帝国主義の
収奪政策の犠牲になった。

日本は、経済成長のための資金を切実に欲していた朴正熙(パク・チョンヒ)政権の立場を有利に利用し、不十分
かつ不完全な賠償金を支払ったと評価される。

韓国経済研究院のチェ・ナムソク研究委員は「経済開発の初期に日本からの借款が助けとなったことを認めると
しても、『漢江の奇跡』(朴正熙氏が主導した高度成長)は韓国政府の力強い成長政策、韓国人特有の教育熱や
勤勉さ、国民の貯蓄を基盤とする大規模投資、起業家精神などがもたらした
ものだと見るのが正しい」と説明した。

■開発初期の借款、約7割は欧米から

朴正熙政権が「第1次経済開発5カ年計画」を開始した1962年以降の10年間に韓国が導入した海外からの公共
借款は、総額11億9300万ドルだった。この資金は高速道路や橋、鉄道、ダムなどのインフラ建設に投じられた。
日本の自画自賛に反して、米国からの公共借款が7億2300万ドルで全体の61%を占めていた。国際復興開発銀行
(IBRD)などの国際金融機関からの借款が1億6600万ドル(14%)だった。日本は2億5600万ドル(22%)だ。日本の
主張通り、60年代の経済開発初期に日本から2億5600万ドルという大金がもたらされたことは間違いないが、
日本からの公共借款には韓日請求権協定に基づく有償借款が含まれている。

政府レベルの公共借款と、民間企業が韓国政府の保証を受けて外国から借りた民間借款を合わせても、状況は
さほど変わらない。同期間の公共借款と民間借款の合計額は32億1400万ドルで、米国からの借款が13億5800万
ドル(42.3%)、日本からが7億8700万ドル(24.5%)、欧州からが7億2600万ドル(22.6%)だった。

■日本からの資金は日本にも利益もたらす

朴正熙政権は、日本からの資金を初期の経済開発に効果的に活用した。外務省の広報動画で取り上げられた
浦項総合製鉄所、昭陽江ダム、ソウル地下鉄1号線の建設に日本の資金が投じられたのは事実だ。賠償金として
の意味合いを持つ5億ドル(無償3億ドル、有償2億ドル)のうち、1億2000万ドル程度が浦項総合製鉄所の建設に
使われた。元々は農業分野に投じられる資金だったが、当時の政府が韓国の製鉄所建設に反対していた日本を
説得し、同製鉄所の建設に使い道を変更した。産業公害問題に直面した日本にとって、鉄鋼工業設備を販売する
安定した大型プロジェクトが必要だったため、浦項総合製鉄所の建設に同意したとする研究
(パク・ヨング釜山
外国語大教授)もある。

昭陽江ダムの建設資金290億ウォンのうち104億ウォンも、日本政府からの有償借款を活用した。また、74年に
ソウル地下鉄1号線(ソウル駅~清凉里駅)を建設する際に投じられた330億ウォンのうち、150億ウォンは日本
の海外経済協力基金(OECF)からの借款だった。年4%台の低い金利だったが、日本も初期に使われた地下鉄
車両186両を日立製作所が製造するなど、利益を手にした


■国交正常化後の対日貿易赤字4900億ドル

65年の韓日国交正常化以降、日本企業は投資・貿易パートナーとして韓国企業との協力を拡大した。だが
「技術提携」という名の協力関係は、日本企業にとって遅れた技術と老朽化した設備を移転する機会だった
もある。当時、朴正熙政権が重化学工業と輸出が主導する成長戦略を推進したため、中間財輸出の利得が
大きかった。日本が韓国との貿易で得た利益を端的に示すデータが、国交正常化から昨年4月にかけて積み
上がった対日貿易赤字額だ。4944億ドルに達する。

日本は「経済協力」を強調するが、97年のアジア通貨危機のときには韓国の経済的苦境を無視した。当時、
財政経済院の次官だった姜万洙(カン・マンス)元企画財政部(省に相当)長官は1月に出版した著書
『現場で見た経済危機対応実録』で「通貨危機の際、日本による資金の引き揚げはとても大規模で素早く、
耐え切れなかった
」と語っている。姜氏によると、97年、韓国の銀行が外国の金融機関から借りていた短期
借入金のうち、半分以上の375億ドルが引き揚げられた。中でも、最大の借入先だった日本が短期借入金
(218億ドル)の60%に当たる130億ドルを回収した。欧州が173億ドルのうち45%に当たる76億ドル、米国が
56億ドルのうち38%に当たる21億ドルを回収したのに比べ、はるかに規模が大きく、回収スピードも速かった。

■植民地時代の収奪のせいで独立直後は最貧国に

日本による植民地からの収奪は資源や食糧にとどまらず、徴兵や徴用といった人的資源の蹂躙(じゅうりん)
にまで及び、独立直後の韓国経済を最悪の状態に追い込んだ。だが、日本の一部の右翼は植民地時代の
食糧増産、工業投資、教育拡大などが韓国の経済発展の基礎を固めたというあきれた主張を振りかざして
いる。忠南大のホ・スヨル教授の研究によると、植民地から解放された直後、日本の工業資産のうち韓国側
にあったのは全体の25%にすぎず、それさえも解放後の混乱と6・25戦争(朝鮮戦争)の最中に大半が破壊
された。


また、日本人による大規模な田畑の所有と米穀(コメなど)収奪で、農業従事者1人当たりの農産物収穫量
は植民地支配の期間にむしろ3-15%減少した。植民地時代末期、韓国人の小学校初等科への進学は
増えたが、中卒以上の学歴を持つ人は1%にすぎなかった。日本による植民地支配は民族抹殺政策、
過酷な収奪など、西欧列強に比べはるかに暴圧的だった

李陳錫(イ・ジンソク)記者

http://www.chosunonline.com/site/data/html_dir/2015/03/27/2015032701738.html
http://www.chosunonline.com/site/data/html_dir/2015/03/27/2015032701738_2.html
http://www.chosunonline.com/site/data/html_dir/2015/03/27/2015032701738_3.html


카피원조사

"한강(한강)의 기적"가 일본 덕분?… "조선 근대화 시켰다"와 같은 제국주의적 발상

    이・진소크 기자 김・존 분 기자 손・젼민 기자

입력:2015.03.27 02:00

["일 지원으로 한성장"일 동영상이 무리한 관철인 이유]

①일진관은 배상금 성격…순수한 원조로 보는 것이 어려워서
②당초 농업에 투입되는 자금 정부가 설득해 포항 제철 세운 것
③일, IMF시는 경제 상황 외면…미・유럽 비교해 많은 돈 뽑아내
④서구보다 폭압적 식민 지배…자원・식량 수탈에 징병까지

그리고 이 자금에는 식민 지배와 수탈에 대한 배상금적 성격이 깔리고 있어 순수하게 개발도상국에 대한 원조라고 보려면 어려운 측면이 있다. 일본은 1965년 한국 정부에 무상 3억 달러(당시 환율로 약 1080억원)의 청구권 자금과 유상 2억 달러( 약 720억원)의 공공 차관을 합해 5억 달러를 제공하기로 했다. 이것은 일본이 필리핀으로 지급한 5억 5000만 달러 배상금이라고 비교된다.필리핀 등은 2차 대전 기간중 일본에 점령되었지만, 한국은 35년간 식민지 상태로 일본 제국주의 수탈 정책에 희생이 되었다.

일본은 경제성장을 위한 초기 자금이 절실했던 박・톨히 정부의 경우를 유리하게 이용해 불충분하고 불완전한 배상금을 시급했던 일로부터 평가된다.

최・남소크 한국 경제 연구원 연구 위원은"일본 차관이 경제 개발 초기에 도움이 된 것을 인정해도,"한강(한강)의 기적"는 정부 주도의 강력한 성장 정책과 한국인 특유의 교육의 열의 및 근면성, 국민 저축을 기반으로 한 대규모 투자와 기업가 정신등이 종합 된 결과로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맞는"이라고 이야기했다.



①개발 초기 차관의70%는 미국과 유럽에서 들어갔다

박・톨히 정부가 1차 경제 개발 5년 계획을 시작한 1962년부터 10년간 한국에 들어 온 해외 공공 차관은 합계 11억 9300만 달러였다. 이 돈이 고속도로와 교량, 철도, 댐 등 산업의 대동맥을 건설하는데 사용되었다. 일본의 자화자찬과 달라 미국발공공 차관이 7억 2300만 달러로61%를 차지한다. IBRD(국제 개발 은행) 등 국제 금융 기구는 1억 6600만 달러(14%)를 지원했다. 일본은 2억 5600만 달러(22%)다. 일본의 주장대로 60년대 경제 개발 초기에 일본에서 2억 5600만 달러라고 하는 큰 금액이 들어 온 것은 맞는다. 그러나 일본에서 들어 온 공공 차관에는 한국・일본 청구권 협정에 따르는 유산 차관이 포함되어 있다.

정부 차원의 공공 차관과 민간기업이 우리 정부의 보증을 받고 외국에서 빌려 온 상업 차관을 전부 합쳐도 사정이 특별히 변하지 않다. 같은 기간 공공 차관과 상업 차관을 맞춘 금액은 32억 1400만 달러다. 미국에서 13억 5800만 달러(42%),일본에서 7억 8700만 달러(25%) 유럽에서 7억 2600만 달러(23%)가 들어 왔다.

②일본 자금은 일본의 이익에 도움이 되도록(듯이) 사용되었다

당시 박・톨히 정부는 일본 자금을 초기 경제 개발에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일본 정부의 홍보 동영상으로 논의된 포스코와 소양강(소얀간) 댐, 서울 지하철 1호선에 일본 자금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배상금 성격의 5억 달러(무상 3억 달러+유상 2억 달러) 중(안)에서 1억 2000만 달러 정도가 포항(포항) 제철을 건설하는데 필요하고 갔다. 본래는 농업 분야에 투입되는 돈이었는데, 당시 정부가 그 사이 한국의 제철소 건설을 반대한 일본을 설득해 포항(포항) 제철을 만드는 것으로 용도를 바꾸어 사용했다. 산업 공해(공해) 문제에 직면한 일본의 입장에서 철강 공업 설비를 판매하는 커서 안정된 프로젝트가 필요했던 위해(때문에) 포항 제철 건설에 동의 했다고 하는 연구(부산외대박・영그 교수)도 있다. 소양강(소얀간) 댐 건설 자금 290억원중 104억원(2160만 달러) 또, 일본 정부가 이자를 받아 빌려 준 유산 차관을 활용했다.1974해서울 지하철 1호선(서울역~청량리(청량리) 역)를 만들 때 들어간 돈 330억원중 150억원은 일본해외 협력 기금(OECF)으로 차관을 가져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연4%대의 낮은 금리였지만, 일본도 초기 투입된 전철 186량을 일본 기업의 히타치에서 제작하는 등 수익을 정리했다.

③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한국・일본 무역 불균형 누적액 4900억 달러

국교 정상화 이후 일본 기업등은 투자와 수출입 파트너로 한국 기업등과 협력 관계를 확대했다. 그러나"기술 제휴"라는 이름의 협력 관계는 일본 기업의 입장에서는 노후 기술과 노후 설비를 이전할 기회인 측면도 있다. 박・톨히 정부가 중화학공업과 수출 주도형 성장 전략을 전개하고는 중간재 수출 이익이 컸다. 일본이 한국과의 교역으로 향수한 이익을 보이는 단적인 숫자가 국교 정상화 이후 작년 4월까지 누적한 대일무역 적자다. 4944억 달러에 이른다.

일본은 경제협력을 강조하지만, 지난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한국의 경제적 곤란을 푸대접 했다.당시 재정 경제원차관이었던 캔・만스전 기획 재정 부장관은 떠나는 1 츠키데판 한"현장에서 본 경제위기 대응 실록"로"외환 위기 당시 일본의 자금 회수는 너무 컸고 도저히 빠르고 견딜 수 없었다"로 했다. 캔 전장관에 의하면, 1997년 해외 금융기관은 국내 은행에 빌려 준 단기 차입금의 반이상인 375억 달러를 회수했다. 최대 단기 차입(넣어) 선이었던 일본이 가장 큰 문제를 만들었다. 단기 차입금(218억 달러)의60%인 130억 달러를 회수했다. 유럽이 173억 달러중45%인 76억 달러, 미국이 56억 달러중38%인 21억 달러를 회수했던 것에 비교라고 아득하게 규모가 커서 회수 속도가 빨랐다.

④식민지 수탈로 독립 직후 세계 최빈국 상태로부터 출발한 한국

일본의 식민지 수탈은 자원과 식량에 끝나지 말고 징병과 징용등을 통한 인적자원 유린까지 겹쳐 독립 직후 한국의 경제 상황을 최악 상태에 추적했다. 그러나 일본 우익 일부에서는 식민 지배 시기 식량 증산, 공업 투자, 교육 확대등에서 한국 경제발전의 기초를 만들었다고 하는 어안이 벙벙해지는 주장도 한다.허수열충남(틀남) 대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해방 당시 일제 공업 자산 중 한국에 있던 것은 전체의25%에 지나지 않고, 그 위에 광복(해방) 후 혼란과 6・25 한국 동란(한국 전쟁)때 대부분의 파괴되었다. 또, 일본인의 대규모 전답 소유와 미곡 수탈로 농업인구 1인당 농산물 수취량은 식민 지배 기간 오히려 3~15%줄어 들었다. 일제 말기 한국인의 초등학교 초등과 진학은 증가했지만, 중졸 이상 학력은 전체의1%에 지나지 않았다.일본의 식민 지배는 민족 말살 정책과 가혹한 수탈 등 서구 열강과 비교라고 아득하게 폭압적이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3/27/2015032700437.html

【한국】「일본의 덕분」홍보 동영상은 식민지 근대화론과 같은 발상

일본의 차관은 일종의 배상금, 순수한 원조라고는 보지 못하고
통화 위기시에 한국의 곤경을 무시, 구미보다 대규모로 자금 회수
서구보다 폭압적인 식민지 지배, 자원・식량 수탈에 징병까지


일본의 외무성이 홍보 동영상으로「일본의 지원이 한국의 경제성장의 토대가 된」라고 하는 취지가 주장한 것을 둘러싸고,
한국의 전문가등은 다양한 이유를 들어「억지 써」라고 지적하고 있다.우선, 규모로 보면 전후의 한국의 경제 재건
에 결정적인 역할을 완수한 것은, 일본보다 오히려 구미의 원조였다.

또, 일본에서 한국에의 차관에는 과거의 식민지 지배와 수탈에 대한배상금적인 의미가 있어, 개발도상국에
의 순수한 원조라고는 보기 어려운 면이 있다.일본은 1965년, 한국 정부에 무상 3억 달러의 청구권 자금과 유상 2억 달러의
공공 차관을 합해 합계 5억 달러를 제공할 것을 결정했다.일본은 필리핀에 5억 5000만 달러를 배상하고 있다.
필리핀 등은 제2차 세계대전중에 일본에 점령되었지만, 한국은 35년?`관A민지로서 일본 제국주의의
수탈 정책의 희생이 되었다.

일본은, 경제성장을 위한 자금을 절실하게 바라고 있던 박정희(박・톨히) 정권의 입장을 유리하게 이용해, 불충분
한편 불완전한 배상금을 지불했다고 평가된다.

한국 경제 연구원의 최・남소크 연구 위원은 「경제 개발의 초기에 일본으로부터의 차관이 도움이 된일을 인정하면
해도, 『한강의 기적』(박정희씨가 주도한 고도 성장)는한국 정부가 강력한 성장 정책, 한국인 특유의 교육열이나
근면함, 국민의 저축을 기반으로 하는 대규모 투자, 기업가 정신등이 가져온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올바른」라고 설명했다.

■개발 초기의 차관, 약 7할은 구미로부터

박정희정권이「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를 개시한 1962년 이후의 10년간에 한국이 도입한 해외로부터의 공공
차관은, 총액 11억 9300만 달러였다.이 자금은 고속도로나 다리, 철도, 댐등의 인프라 건설에 투자되었다.
일본의 자화자찬에 반하고,미국으로부터의 공공 차관이 7억 2300만 달러로 전체의 61%를 차지하고 있었다.국제 부흥개발 은행
(IBRD)등의 국제금융기관으로부터?`후 차관이 1억 6600만 달러(14%)였다.일본은 2억 5600만 달러(22%)다.일본의
주장대로, 60년대의 경제 개발 초기에일본으로부터 2억 5600만 달러라고 하는 큰 돈이 초래된(일)것은 틀림없지만,
일본으로부터의 공공 차관에는한일 청구권 협정에 근거하는 유상 차관이 포함되어 있다.

정부 레벨의 공공 차관과 민간기업이 한국 정부의 보증을 받고 외국에서 빌린 민간 차관을 맞추어도, 상황은
그다지 변하지 않다.동기 사이의 공공 차관과 민간 차관의 합계액은 32억 1400만 달러로, 미국으로부터의 차관이 13억 5800만
달러(42.3%), 일본으로부터가 7억 8700만 달러(24.5%), 유럽으로부터가 7억 2600만 달러(22.6%)였다.

■일본으로부터의 자금은 일본에도 이익도 늘어뜨린다

박정희정권은,일본으로부터의 자금을 초기의 경제 개발에 효과적으로 활용했다.외무성의 홍보 동영상으로 다루어졌다
포항종합제철소, 소양강 댐, 서울 지하철 1호선의 건설에 일본의 자금이 투자된 것은 사실이다.배상금으로서
의 의미를 가지는 5억 달러(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가운데, 1억 2000만 달러 정도가 포항종합제철소의 건설에
사용되었다.원래는 농업 분야에 투자되는 자금이었지만, 당시의 정부가 한국의 제철소 건설에 반대하고 있던 일본을
설득해, 동제철소의 건설로 용도를 변경했다.산업공해 문제에 직면한 일본에 있어서, 철강 공업 설비를 판매한다
안정된 대형 프로젝트가 필요했던 모아 두어 포항종합제철소의 건설에 동의 했다고 하는 연구
(박・영그 부산
외국어대교수)도 있다.

소양강 댐의 건설 자금 290억원중 104억원이나, 일본 정부로부터의 유상 차관을 활용했다.또, 74년에
서울 지하철 1호선(서울역~청량리역)을 건설할 때에 투자된 330억원 가운데, 150억원은 일본
의 해외 경제 협력 기금(OECF)으로부터의 차와`시였다.연 4%대의 낮은 금리였지만,일본도 초기에 사용된 지하철
차량 186량을 히타치 제작소가 제조하는 등, 이익을 손에 넣었다
.

■국교 정상화 후의 대일무역 적자 4900억 달러

65년의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일본 기업은 투자・무역 파트너로서 한국 기업과의 협력을 확대했다.하지만
「기술 제휴」라고 하는 이름의 협력 관계는,일본 기업에 있어서 지각한 기술과 노후화 한 설비를 이전할 기회였던
도 있다.당시 , 박정희정권이 중화학공업과 수출이 주도하는 성장 전략을 추진했기 때문에, 중간재 수출의 이득이
컸다.일본이 한국과의 무역으로 얻은 이익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데이터가, 국교 정상화로부터 작년 4월에 걸쳐 쌓아
오른대일무역 적자액이다.4944억 달러에 이른다.

일본은「경제협력」를 강조하지만,97년의 아시아 통화 위기 때에는 한국의 경제적 곤경을 무시했다.당시 ,
재정 경제원의 차관이었던 강만수(캔・만스) 원기획 재정부(성에 상당) 장관은 1월에 출판한 저서
『현장에서 본 경제위기 대응 실록』로「통화 위기때,일본에 의한 자금의 인양은 매우 큰 의심 `K모로 재빠르게,
다 참을 수 없었다
」라고 말하고 있다.강씨에 의하면, 97년, 한국의 은행이 외국의 금융기관으로부터 빌리고 있던 단기
차입금 가운데, 반이상의 375억 돌을 돌아올 수 있었다.그 중에서도, 최대의 차입처였던 일본이 단기 차입금
(218억 달러)의 60%에 해당되는 130억 달러를 회수했다.유럽이 173억 달러중 45%에 해당되는 76억 달러, 미국이
56억 달러중 38%에 해당되는 21억 달러를 회수했는데 비교해 아득하게 규모가 크고, 회수 스피드도 빨랐다.

■식민지 시대의 수탈의 탓으로 독립 직후는 최빈국에

일본에 의한 식민지로부터의 수탈은 자원이나 식량에 머무르지 않고, 징병이나 징용이라고 하는 인적자원의 유린(유린)
에까지 및, 독립 직후의 한국 경제를 최악 상태에 몰아넣었다.하지만, 일본의 일부의 우익은 식민지 시대의
식량 증산, 공업 투자, 교육 확대등이 한국의 경제발전의 기초를 굳혔다고 하는 질린 주장을 내세워
있다.충남 대학의호・스욜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식민지로부터 해방된 직후, 일본의 공업 자산 중 한국측
에 있던 것은 전체의 25%에 지나지 않고, 그것마저도 해방 후의 혼란과 6・25 전쟁(한국 전쟁)의 한중간에 대부분이 파괴
되었다.


또, 일본인에 의한 대규모 전답의 소유와 미곡(쌀 등) 수탈로, 농업 종사자 1 인당의 농산물 수확량
(은)는 식민지 지배의 기간에 오히려 3-15%감소했다.식민지 시대 말기, 한국인의 초등학교 초등과에의 진학은
증가했지만, 중졸 이상의 학력을 가지는 사람은 1%에 지나지 않았다.일본에 의한 식민지 지배는 민족 말살 정책,
가혹한 수탈 등,서구 열강에 비해 아득하게 폭압적이었다.

리진 주석(이・진소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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