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初代”金日成は陸士出身 日本の旧陸軍士官学校 卒業名簿に本名記載
産経新聞 10/30(日) 7:55配信
■北の伝説的抗日運動家、政権が名声利用
「金日成(キム・イルソン)」と名乗り、大正から昭和初期にかけて旧満州(現中国東北部)で抗日独立運動を指導したとされる人物が、日本の旧陸軍士官学
校出身であることを示す資料が29日までに発見された。北朝鮮の最高指導者に就いた金日成主席は、いわば「初代金日成」ともいえるこの人物の名前や名声を
踏襲して権威付けを図ったとされ、今回の発見は、金政権がよって立つ抗日闘争史の根幹を揺るがすものともいえそうだ。
この人物は本名を「金顕忠(ヒョンチュン)」といい、日本の陸士出身との説があったが、確かな証拠はなく、その出自は長く謎とされてきた。
一方、第二次大戦後に北朝鮮の首相や主席となった金日成は本名を金成柱(ソンジュ)といい、初代金日成と直接の関係はない。旧ソ連軍が都合のいい人物を
指導者にするため、伝説の抗日運動指導者に仕立て上げたとされる。北朝鮮は、金顕忠の抗日活動も、金主席1人が行ったように歴史を書き換えてきた。
今回、東京都内の陸士関係者の子孫宅から見つかった「陸軍中央幼年学校本科第八期卒業生徒人名表(明治四十二年五月)」の末尾には、「韓国学生 金顕忠
二二、〇〇」と記されている。同じく「明治四十四年五月 陸軍士官学校第二十三期生徒卒業人名」には「騎兵」の最後に、「朝鮮学生 金顕忠」とあった。
当時の陸士の教育システムは約2年課程の中央幼年学校から陸士に進み、2年後に卒業して見習士官となり、数カ月後に少尉に任官するというもの。金顕忠は22歳ちょうどで中央幼年学校を卒業し、2年後に陸士の騎兵科を卒業したことが資料から読みとれる。
資料には、陸士23期の故大野宣明氏が昭和38年に「複写」したとあり、原本からの複写とみられ、信頼度が高いと考えられる。陸士23期の全生徒名が記載され、配属先も書かれているが、金顕忠については配属先が記されていない。
金顕忠は当時、大韓帝国となっていた朝鮮から日本の中央幼年学校に留学し、そのまま陸士に進んだ。だが、在学中の明治43(1910)年に韓国が日本に併合されたことから、卒業後しばらくして朝鮮に帰り、抗日運動に身を投じるようになったと推測される。
抗日運動では、「金光瑞(グァンソ)」あるいは「金●天(ギョンチョン)」と名乗ったといわれる。金日成は馬にまたがって抗日運動を指導するイメージがもたれているが、金顕忠は騎兵の出身で、乗馬は得意だった。
その後、金顕忠がどうなったかは不明で、一部にはソ連で処刑されたとの説もあるが、研究家の間では、金主席を含め、数人の「キム・イルソン」と名乗る人物が抗日運動を引き継いだとみられている。(編集委員 大野敏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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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用語解説】「初代金日成」と金日成主席
初代金日成については、非常に紳士的で日本語や中国語を操り、旧満州で青年らに軍術を授けたといったさまざまな伝説が残っている。「キム・イルソン」を
名乗る人物はその後、複数現れ、「金一星」「金日星」「金一成」などとも書かれた。金日成主席は1912年4月生まれで、初代といえる金顕忠と年齢が離れ
ている。戦後、旧ソ連軍のおぜん立てで、平壌の大衆の前に現れた際、「老練な英雄」とのイメージとかけ離れた若さに「偽者だ」と落胆する声が上がったとい
う。
●=敬の下に手
“초대”김일성은 육사 출신 일본의 구육군 사관 학교 졸업 명부에 본명 기재
산케이신문 10/30 (일) 7:55전달
■북쪽의 전설적 항일운동집, 정권이 명성 이용
「김일성(김・일 손)」라고 자칭해, 타이쇼로부터 쇼와 초기에 걸쳐 구만주(현중국 동북부)에서 항일 독립 운동을 지도했다고 여겨지는 인물이, 일본의 구육군 사관학
교출신인 것을 나타내는 자료가 29일까지 발견되었다.북한의 최고 지도자에게 오른 김일성 주석은, 말하자면「초대 김일성」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인물의 이름이나 명성을
답습하고 권위 부여를 도모했다고 여겨져 이번 발견은, 김 정권이 따라 서는 항일 투쟁사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인물은 본명을「금현충(홀틀)」라고 하여, 일본의 육사 출신과의 설이 있었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고, 그 출자는 길게 수수께끼로 여겨져 왔다.
한편, 제2차 대전 후에 북한의 수상이나 주석이 된 김일성은 본명을 카네나리기둥(손쥬) 이라고 하여, 초대 김일성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구소련군이 적당한 인물을
지도자로 하기 위해, 전설의 항일운동 지도자로 만들어 냈다고 여겨진다.북한은, 금현충의 항일 활동도, 김주석 1명이 간 것처럼 역사를 고쳐 써 왔다.
이번, 도쿄도내의 육사 관계자의 자손택으로부터 발견된「육군 중앙 유년 학교 본과 제8기 졸업생 바람둥이명표(메이지 42년 5월)」의 말미에는, 「한국학생금현충
22, 〇〇」라고 기록되고 있다.같은「메이지 44년 5월 육군 사관 학교 제2십3 기생도 졸업 인명」에는「기병」의 마지막으로, 「조선 학생금현충」와 있었다.
당시의 육사의 교육 시스템은 약 2년 과정의 중앙 유년 학교로부터 육사로 진행되어, 2년 후에 졸업해 견습 사관이 되어, 수개월 후에 소위에게 임관 한다고 하는 것.금현충은 22세 정확히로 중앙 유년 학교를 졸업해, 2년 후에 육사의 기병과를 졸업했던 것이 자료로부터 읽어낼 수 있다.
자료에는, 육사 23기의 고 오노 선명씨가 쇼와 38년에「복사」했다고 있어, 원본으로부터의 복사로 보여져 신뢰도가 높다고 생각할 수 있다.육사 23기의 전학생명이 기재되어 배속처도 쓰여져 있지만, 금현충에 대해서는 배속처가 기록되지 않았다.
금현충은 당시 , 대한제국이 되고 있던 조선으로부터 일본의 중앙 유년 학교에 유학해, 그대로 육사에 진행되었다.하지만, 재학중의 메이지 43(1910) 년에 한국이 일본에 병합 된 것으로부터, 졸업 후 잠시 후 조선에 돌아가, 항일운동에 몸을 던지게 되었다고 추측된다.
항일운동으로는, 「카네미츠서(그소)」있다 있어는「돈●하늘(골톨)」라고 자칭했다고 한다.김일성은 말에 걸쳐 항일운동을 지도하는 이미지가 기대고 있지만, 금현충은 기병의 출신으로, 승마는 자신있었다.
그 후, 금현충이 어떻게 되었는가는 불명하고, 일부에는 소련에서 처형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연구가의 사이에서는, 김주석을 포함해 몇사람의「김・일 손」라고 자칭하는 인물이 항일운동을 계승했다고 보여지고 있다.(편집 위원 오노 토시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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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 해설】「초대 김일성」와 김일성 주석
초대 김일성에 대해서는, 매우 신사적이고 일본어나 중국어를 조종해, 구만주에서 청년등에 군술을 하사했다고 한 다양한 전설이 남아 있다.「김・일 손」를
자칭하는 인물은 그 후, 복수 나타나「금1별」「금일 별」「금1성」 등이라고도 쓰여졌다.김일성 주석은 1912년 4 월생으로, 초대라고 할 수 있는 금현충과 연령이 떨어져
(이)라고 있다.전후, 구소련군의 밥상 세워로, 평양의 대중의 앞에 나타났을 때, 「노련한 영웅」와의 이미지와 동떨어진 젊음에「가짜다」와 낙담하는 소리가 높아졌다고 있어
.
●=경아래에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