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news.donga.com/3/all/20060118/8267102/1
1952年に入りながら日本漁民は 4月 28日を指折り数えて待った。 アメリカサンフランシスコで日本が連合国側と第2次世界大戦終決のために 1951年 9月 8日締結した講和條約がその日発効するからであった。 日本を占領したアメリカのダグラスマッカーサー将軍は日本漁民が ‘本土’ 周辺の決まった線を脱して操業することができないようにした。 ‘マッカーサーライン’に命名されたこの線は講和條約発酵と同時に廃止されるはずであった。
1952年 1月 18日。 100日後なら東海は日本漁民の菜園になる段であった。 すぐこの日海向こう、電話(戦火)に包まれた大韓民国の臨時数も釜山で青天家歌のような消息が飛んで入った。 大韓民国大統領李承晩が ‘定めた国際的先例に基づいてと国家の福祉と防御を永遠に保障しなければならない要求によって’ 海岸で 50~100マイルにのぼる海上に線を引いて ‘隣接海洋に対する主権宣言’をしたのである。
日本としては色を失うことであった。 日本はこれを ‘李承晩ライン’と呼んで撤廃を強力に要求した。 友邦であるアメリカ、イギリスも責めたが李承晩はひょっともしなかった。 むしろ韓日間の平和のためのことと言いながら ‘平和線’と呼んだ。 日本政府が漁民に ‘李承晩ライン’を無視しなさいと言うと韓国政府は軍艦まで動員して ‘平和線’を越える日本漁船を容赦なく捕えた。 その過程で日本漁民 1人がしんだりした。 1961年まで拿捕された日本漁船は 300船が超えて抑留された日本人は 4000人に近かった。
平和線は漁業保護の間一髪が生んだ産物である。 当時国内漁船を皆加えた総トン数は 10万 t. それさえも大部分が無動力船であった。 日本は総トン数 200万 tになかでもかなり多い数が韓国警察船より早い ‘先端’だった。 マッカーサーラインが消えれば韓国の漁業が沈むことうけあいであった。
それでも平和線が漁業の保護のみを狙ったのではない。 平和線の中に独島を含ませたのが絶妙であった。 講和條約の ‘日本があきらめる地域’に独島を入れてくれという要求が拒否されると選手を打ったのである。 切羽詰った日本は十日後 ‘韓国の一方的な領土侵略’と言いながら ‘独島問題’を争点化したがもう機先を制圧された後であった。
抗日闘士李承晩の快挙である平和線が韓日国交正常化条約調印(1965年 6月 22日)と一緒に歴史の中に消えるとうちの国民は鬱憤を吐いた。 “得たことはお金であり、失ったことは平和線である。”
http://news.donga.com/3/all/20060118/8267102/1 1952년에 들어가면서 일본 어민은 4월 28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이 연합국측과 제2차 세계대전 종결을 위해서 1951년 9월 8일 체결한 강화조약이 그 날 발효하기 때문에서 만났다. 일본을 점령한 미국의 다그라스막카서 장군은 일본 어민이 본토 주변이 정해진 선을 벗어나 조업할 수 없게 했다. 막카서라인에 명명된 이 선은 강화조약 발효와 동시에 폐지될 것에서 만났다. 1952년 1월 18일. 100일 후라면 토카이는 일본 어민의 채소밭이 되는 단이었다. 곧 이 날해 저 편, 전화(전화)에 싸인 대한민국의 임시수도 부산에서 청천가가와 같은 소식이 퍼져 들어갔다.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이 정한 국제적 선례에 근거해와 국가의 복지와 방어를 영원히 보장해야 하는 요구에 의해서 해안에서 50~100마일에 달하는 해상에 선을 그어 인접 해양에 대한 주권 선언을 했던 것이다. 일본으로서는 아연실색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이것을 이승만 리인이라고 불러 철폐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우방인 미국, 영국도 꾸짖었지만 이승만은 불쑥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일간의 평화를 위한 일이라고 하면서 평화선이라고 불렀다. 일본 정부가 어민에게 이승만 리인을 무시해 주세요라고 하면 한국 정부는 군함까지 동원해 평화선을 넘는 일본 어선을 가차 없이 잡았다. 그 과정에서 일본 어민 1명이 죽거나 했다. 1961년까지 나포된 일본 어선은 300선이 넘어 억류된 일본인은 4000명에게 가까웠다. 평화선은 어업 보호의 절박함이 낳은 산물이다. 당시 국내 어선을 모두 더한 총 톤수는 10만 t. 그것마저도 대부분이 무동력선이었다. 일본은 총 톤수 200만 t에 그 중에서도 꽤 많은 수가 한국 경찰선보다 빠른 첨단이었다. 막카서라인이 사라지면 한국의 어업이 가라앉는 것 보증이었다. 그런데도 평화선이 어업의 보호만을 노린 것은 아니다. 평화선안에 독도를 포함하게 한 것이 절묘했다. 강화조약의 일본이 포기하는 지역에 독도를 들어갈 수 있어 줘라고 하는 요구가 거부되면 선수를 쳤던 것이다. 칼날밑 양면 손잡이 따진 일본은 10일 후 한국의 일방적인 영토 침략이라고 하면서 독도 문제를 쟁점화했지만 이제(벌써) 기선이 제압된 다음에 있었다. 항일 투사 이승만의 쾌거인 평화선이 한일 국교 정상화 조약 조인(1965년 6월 22일)과 함께 역사안에 사라지면 우리 국민은 울분을 토했다. “얻은 것은 돈이며, 잃은 것은 평화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