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親王の上海臨時政府亡命が成功していれば大韓帝国は続いていたかもしれない
2016年08月22日11時40分
[ⓒ 中央SUNDAY/中央日報日本語版]
李錫総裁が17日、全州韓屋村(チョンジュ・ハノクマウル)にある「皇孫の家」承光斎を後にしている。 |
「なぜ朝鮮がこのように力なく滅びたのでしょうか? 祖父の高宗(コジョン)皇帝を親日派が『無能な国王』と呼びました。それが第一の理由です。この
ことで王朝はかなり格を下げられてしまいました。世界に519年も続く王朝の歴史を持つ国はありません。このことが忘れ去られようとしています」。
高宗を「祖父」、興宣(フンソン)大院君を「曽祖父」と呼ぶ朝鮮の「最後の皇孫」李錫(イ・ソク)社団法人「皇室文化財団」総裁
(75)の言葉だ。李総裁は高宗の5人目の息子・義親王の12男9女の11男だ。高宗のもとに産まれた9男4女のうち、成人まで育った子供は純宗(スン
ジョン)と1907年に皇太子に封じられた英親王、義親王、徳恵翁主の3男1女のみだ。高宗の一人娘であり「最後の皇女」だった徳恵翁主は李総裁の叔母に
あたる。
映画『徳恵翁主』に対する歴史美化議論が広がるなかで、今月17日、全羅北道全州(チョルラブクド・チョンジュ)の韓屋村(ハノクマ
ウル)にある「皇孫の家」承光斎で李総裁と会った。承光斎は1897年、大韓帝国を宣言した高宗皇帝時代の年号である光武から「光」を取り、つなぐという
意味の「承」を合わせ「高宗皇帝の意志を継承する家」という意味を持つ。李総裁はこの日、猛暑にもかかわらず伝統の韓服姿で文化探訪客に「朝鮮王朝519
年」について熱弁を振るっていた。
英親王と徳恵翁主のおいである李総裁は先月30日、ソウルのある映画館で『徳恵翁主』を観覧した。試写会に先立ち、李総裁は京畿道南
楊州市(キョンギド・ナムヤンジュシ)の洪裕陵(ホンユルン)にある父親の義親王と徳恵翁主の墓参りをした。「8月15日が父の祭事なので前もって墓参り
をしました。叔母の徳恵翁主の墓地が(義親王の墓から)10メートルも離れていません。そこでチョル(敬意を示すお辞儀)をして報告をしました」。
権丕暎(クォン・ビヨン)の小説『朝鮮王朝最後の皇女 徳恵翁主』を原作にした映画『徳恵翁主』は19日基準の累積観客数が444万
人を突破し、興行は順調だ。だが、映画に自身の血縁が登場する李総裁の思いは一般の観客とは違わざるをえない。しかも106年前、日帝によって大韓帝国が
滅びなかったなら、李総裁は2004年から自身が留まっている495平方メートルの「民宿型韓国式家屋」承光斎ではなく、43万2703平方メートルの
「雄壮な宮廷」景福宮(キョンボックン)で王族の一員として大韓帝国を治めていたかもしれなかった。
このような背景のためか、李総裁は立憲君主制改憲を主張した。2006年8月に李総裁が創設した皇室文化財団は「朝鮮皇室復元運動」も行っている。最近では、全国で復元運動を支持する「独立軍」も1万人余り集めたという。次は李総裁との一問一答。
--映画を見た感想は。
「私は映画『徳恵翁主』を作ったホ・ジノ監督と撮影前に会っておくべきだったと思いました。悲しく滅びた王朝なので何か特別な感じが
あるべきなのに、映画はフュージョン料理のようなスタイルです。歴史を正確に知ってから映画を作るべきだったのに。叔父の英親王も上海臨時政府に行く機会
がありました。それも曖昧にして省いています。徳恵翁主もみじめに対馬島主と強制結婚させられたが初夜からむちで打たれたと聞きました。傲慢だということ
で。だから後年は精神錯乱に認知症まで患って亡くなりました。観客にある感情を与えるためには深くしっかりと歴史を勉強をした後に映画を撮るべきではな
かったかと考えます」
--徳恵翁主は実際にはどんな人だったのか。
「女性として何というか、魅力のある方です。高宗皇帝にとって(徳恵翁主は)高齢のときにできた子供です。六十になる時だったでしょ
うか。あどけない言葉や仕草をよく見せていたとのことです。昌徳宮(チャンドックン)で彼女のかわいらしい仕草を見た高宗皇帝はストレスをみな忘れたとい
います。日本は勉強の名目で徳恵翁主と英親王を日本に連れて行きましたが、学校が休みの時でも帰しませんでした。英親王を産んだ厳妃(オムビ)も火病
(ファッピョン、一種の精神疾患)で亡くなりました。本当に残念な歴史です」(中央SUNDAY第493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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共和制から立憲君主制に?ワンチャンあるかもよww
도리 황태자의 샹하이 임시 정부 망명이 성공하고 있으면 대한제국은 계속 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2016년 08월 22일 11시 40분[ⓒ 중앙 SUNDAY/중앙 일보 일본어판]
이 주석 총재가 17일, 전주 한옥마을(전주・하노크마울)에 있는「황손의 집」승광재를 뒤로 하고 있다. |
고종을「조부」, 흥선(분 손) 대원군을「증조부」라고 부르는 조선의「마지막 황손」이 주석(이・소크) 사단법인「황실 문화재단」총재 (75)의 말이다.이 총재는 고종의 5명째의 아들・도리 황태자의 12남 9녀의 11남이다.고종의 아래에서 출생한 9남 4녀 가운데, 성인까지 자란 아이는 순종(슨 존)과 1907년에 황태자에게 봉쇄된 사카에 황태자, 도리 황태자, 덕혜옹주의 3남 1녀만이다.고종의 외동딸이며「마지막 황녀」였던 덕혜옹주는 이 총재의 숙모에게 맞는다.
영화『덕혜옹주』에 대한 역사 미화 논의가 퍼지는 가운데, 이번 달 17일, 전라북도 전주(쵸르라브크드・전주)의 한옥마을(하노크마 울)에 있는「황손의 집」승광재로 이 총재와 만났다.승광재는 1897년, 대한제국을 선언한 고종 황제 시대의 연호인 광무부터「빛」를 취해, 잇는다고 한다 의미의「승」를 맞추어라「고종 황제의 의지를 계승하는 집」라고 하는 의미를 가진다.이 총재는 이 날,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전통의 한복차림으로 문화 탐방객에「조선 왕조 519 해」에 임해서 열변을 털고 있었다.
사카에 황태자와 덕혜옹주의 와 있다 이 총재는 지난 달 30일, 서울이 있는 영화관에서『덕혜옹주』를 봐 람 했다.시사회에 앞서, 이 총재는 경기도남 양주시(콜기드・남얀쥬시)의 코 유타카능(혼유룬)에 있는 부친의 도리 황태자와 덕혜옹주의 성묘를 했다.「8월 15일이 아버지의 제사이므로 미리 성묘 (을)를 했습니다.숙모의 덕혜옹주의 묘지가(도리 황태자의 무덤으로부터) 10미터나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거기서 쵸르(경의를 나타내는 인사)를 하고 보고를 했던 」.
권비영(쿠・비욘)의 소설『조선 왕조 마지막 황녀덕혜옹주』를 원작으로 한 영화『덕혜옹주』는 19일 기준의 누적 관객수가 444만 사람을 돌파해, 흥행은 순조롭다.하지만, 영화에 자신의 혈연이 등장하는 이 총재의 생각은 일반의 관객과는 다르지 않을 수 없다.게다가 106년전, 일제에 의해서 대한제국이 멸망하지 않았다면, 이 총재는 2004년부터 자신이 머물고 있는 495평방 미터의「민박형 한국식 가옥」승광재가 아니고, 43만 2703평방 미터의 「웅장인 궁정」경복궁(경복궁)에서 왕족의 일원으로서 대한제국을 치료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이러한 배경이기 때문에인가, 이 총재는 입헌 군주제 개헌을 주장했다.2006년 8월에 이 총재가 창설한 황실 문화재단은「조선 황실 복원 운동」도 가고 있다.최근에는, 전국에서 복원 운동을 지지하는「독립군」도 1 만여명 모았다고 한다.다음은 이 총재와의 일문일답.
--영화를 본 감상은.
「 나는 영화『덕혜옹주』를 만든 호・지노 감독과 촬영전에 만나 두어야 했다고 생각했습니다.슬프게 멸망한 왕조이므로 무엇인가 특별한 느낌이 있다 한데, 영화는 퓨전 요리와 같은 스타일입니다.역사를 정확하게 알고 나서 영화를 만들어야 했는데.숙부 사카에 황태자도 샹하이 임시 정부에 갈 기회 하지만 있었습니다.그것도 애매하게 해 생략하고 있습니다.덕혜옹주도 봐 글자째에 대마도주와 강제 결혼 당했지만 첫날밤부터 회초리로 맞았다고 (들)물었습니다.오만하다고 하는 것 그리고.그러니까 후년은 정신착란에 인지증까지 병을 앓아 돌아가셨습니다.관객에게 있는 감정을 주기 위해서는 깊고 제대로 역사를 공부를 한 후에 영화를 찍어야 하는 것에서는 샀다고 생각하는 」
--덕혜옹주는 실제로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여성으로서 뭐라고 하는지, 매력이 있는 분입니다.고종 황제에 있어서(덕혜옹주는) 고령 때로 할 수 있던 아이입니다.60이 될 때였다겠지 인가.천진난만한 말이나 행동을 잘 보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창덕궁(창덕궁)으로 그녀의 사랑스러운 행동을 본 고종 황제는 스트레스를 모두 잊었다고 있어 있습니다.일본은 공부의 명목으로 덕혜옹주와 사카에 황태자를 일본에 데리고 갔습니다만, 학교가 휴일때라도 돌아가지 않았습니다.사카에 황태자를 낳은 엄비(옴비)도 화병 (팝폴, 일종의 정신 질환)(으)로 돌아가셨습니다.정말로 유감인 역사입니다」(중앙 SUNDAY 제 4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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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제로부터 입헌 군주제에?원 장있다일지도w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