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国の元慰安婦は日韓合意をどう思っているのか直接聞いた
NEWS ポストセブン 2月5日(金)7時0分配信
日韓合意を「当事者」不在の政治解決と指摘する声は多い。では、当事者、つまり元慰安婦たちはいかなる声を持つのか。直接確認したメディアは少ない。彼 女たちの立場を考慮する必要はあるにしても、取材者としては直接対面して、その思いを届けることが求められるはずだ。ジャーナリスト・安田浩一氏がソウル に飛んだ。
* * *
深い皺(しわ)の刻まれた腕が伸びる。カン・イルチュルさん(89歳)は私の手のひらを包み込むように握った。
しゃがれ声で私に尋ねる。
「日本から来ましたか?」
たどたどしい日本語だった。
私が頷くと、節くれ立った指にぎゅっと力が入る。
真冬の午後の穏やかな陽が、オンドルの効いた部屋の中に差し込んでいた。テレビはバラエティ番組を映している。恐る恐る慰安婦問題の「日韓合意」について尋ねた。
イルチュルさんは表情をほとんど変えなかった。握りしめた私の手を自分のほうに引き寄せ、まるで子どもをあやすように上下に揺らした。 「こうやってね、手を握る。そうすればわかる。大事なことです」
当事者はここにいるのに──手のひらを通して、その思いは伝わってきた。
ソウルからバスで約1時間。京畿道広州市の「ナヌムの家」を訪ねた。元慰安婦10人が共同生活を送っている。イルチュルさんもそのひとりだ。90歳に近い老人が能弁であるはずがない。彼女は私の手を握り続けながら「こうすることが大事」と繰り返した。
深く刻み込まれた皺は、人生の荒波を表している。そして、同じようにイルチュルさんの全身に刻印された日本語を、日本という国を、思った。昨年12月 24日、「年内に慰安婦問題解決に向けた日韓交渉が行われる」と報じられた時から、「ナヌムの家」は内外マスコミの注視を受けてきた。
「(交渉開始は)まったく予想していなかった」と話すのは、「ナヌムの家」のアン・シングォン所長である。元々はロッテグループの会社員だったというアン所長は、てきぱきと事の経緯を説明する。
「私もネットで交渉が始まることを初めて知ったんです。26日にはハルモニ(おばあさん)全員に集まってもらい、意見を聞きました。全員が驚いていましたよ。なぜ当事者である自分たちを差し置いて事態が動いているのか、と」
12月28日、ソウルで開かれた日韓外相会談で慰安婦問題の「合意」が発表される。日本側が「心からのおわびと反省」を表明、韓国政府が設立する元慰安婦支援の財団に日本側は政府予算で10億円を拠出する、といった内容だった。
「これも結局、私はハルモニたちと一緒にテレビのニュースで知ることになるのです」 同29日、外交部のチョ・テヨル第二次官がようやく「ナヌムの家」を訪ねる。チョ次官は元慰安婦たちに「足を運ぶのが遅くなった」と詫びた後、「交渉は 相手がいることなので、大局的な観点から中身は理解してほしい」と訴えた。
「でも、ハルモニたちはほとんど納得していなかった。どうして自分たちの意見を聞いてから交渉しないのかと口々に漏らしました」
次官は「ハルモニたちに叱られながら」(アン所長)、施設を後にしたという。
◆元慰安婦に会わなかった朴大統領の未熟
今回の「日韓合意」に関して私個人としては、わずかであっても何かの希望を見出したいとは思っていた。被害救済に外交が無力であっていいはずがない。ただし当事者不在の単なる政治決着ならば、「受け入れられない」との声が出るのも当然だ。
慰安婦問題を取材してきた韓国の大手紙記者は「個人的には最善とは言えなくとも次善ではある」と合意を評価しつつ、次のように述べる。
「実は韓国社会でも長きにわたり、慰安婦問題への関心は高くなかった。だからこそ、ハルモニたちへの説明抜きでも外交解決できると、朴槿恵大統領は踏んだのではないか」
合意直後の世論は評価の可否について半々に分かれていた。が、年内合意を急いだことへの“拙速さ”が伝えられるようになってからは否定的な意見が目立つようになった。元慰安婦に事前説明がなかったことへの批判は強かった。
「そのことで朴大統領は“冷たい”といったイメージを与えてしまった。これが金大中(キムデジュン)や盧武鉉(ノムヒョン)ならば、事前に元慰安婦たちと会い、しっかり抱きしめてから交渉に向かったかもしれません。朴大統領の政治家としての未熟さが出てしまった」(同)
そこに桜田義孝議員の「(慰安婦は)職業としての娼婦だ。ビジネスだ」といった発言が報じられる。私はこんな光景を目にした。
1月14日の夕方である。ソウル市内の居酒屋で食事しているとき、ちょうど店内のテレビが「桜田発言」を緊急ニュースとして流した。その瞬間、それまで穏やかに談笑しながらチャミスル(焼酎)を飲んでいた中年男性のグループが、急に大声を上げた。
「ムヒョ(無効)!」
日韓合意の「無効」を訴えていたのだ。声の主である自営業者(50歳)は「日本政府の人間からこんな発言が飛び出すようじゃダメだ。口先だけの合意なら意味がない」と苦々しい表情を浮かべた。
果たして、朴大統領はこうした韓国の世論に反し、合意内容を履行できるのだろうか。
◆「こんなに虚しい結果になるとは」
1月13日、私は日本大使館前の「水曜集会」を取材した。慰安婦問題に取り組んでいる「挺身隊問題対策協議会」(挺対協)など市民団体が、毎週水曜日に おこなっている定例集会である。雪がちらつく厳寒にもかかわらず、大使館前には約千人もの人が集まった。「合意は無効だ」と記されたプラカードが林立す る。
集会には6人の元慰安婦が参加した。そのひとり、キム・ボクトンさん(89歳)がマイクを手にして声を張り上げる。
「私たちの意見も聞かずに進めた合意に絶対反対です。こんなに虚しい結果になるとは思ってなかった」
肌を突き刺すような冷たいビル風を受けて、作家のユン・ジョンモさんは寒さに震えながら元慰安婦の声に耳を傾けていた。慰安婦を題材とした作品で知られるユンさんは「失望している。河野談話から少しも進んでいない」と険しい表情を見せた。
集会には中高生ら若い世代の姿が目立った。閉会すると、大使館前に設置された慰安婦の少女像の周りで、大学生たちが毛布をかぶりながら、「泊まり込み」の態勢に入った。万が一の強制撤去に備え、交代制で像を守っているのだという。
大学生のチョン・ホギョン君(23歳)は「慰安婦の受けた苦痛を記憶として残さないといけない」と日本語で説明した。彼は日本の伝統文化に興味を持ち、 高校時代から日本語を習っている。3月には日本を訪ね、各地の「ひなまつり」を見て回る計画を立てているという。そんな“知日派”の彼であっても、少女像 の撤去を合意の条件とするような動きは「許せない」と強調する。
こうした合意反対世論を「当然だ」と訴えるのはソウル大法科大学院のヤン・ヒョナ教授だ。
「日本政府は“責任を痛感”としているだけで、国家責任をあいまいな表現で回避している。韓国政府も当事者を除外したうえで、これを追認してしまった」
同じく中央大のイ・ナヨン教授(社会学)も「歴史の教訓といった視点が欠落している。“不可逆的”という言葉に象徴されるように、問題の終結だけを急いだものだ」と合意を批判する。
一方、学者のなかには合意を評価する声も少なくない。たとえば、ニューライト(新保守派)として知られるソウル大のイ・ヨンフン教授は「いつまで問題を長引かせるのか」と苛立ちを隠さない。
「かつて日本を破滅に追いやった民族主義が、いまは韓国で蘇っている。民族主義に染まった一部の運動団体によって、無理やりに世論が形成されている。もともと韓国人の多くは慰安婦問題に興味がなかったのですから」
また、日本政界に知己も多い日本研究者も、「みんな本当は慰安婦問題に疲れている。問われれば慰安婦に同情するが、本音では、いつまでもこだわる必要はないと思っている」と話す。
◆「少女像=反日」ではない
元慰安婦たちは韓国内でも、長らく好奇の目で見られてきた。今回、合意への賛否を聞いても、私はなおいっそう彼女たちの「疎外」を思った。実際に、そうした声が朴政権への支持率に直接反映されるわけではなく、4月の総選挙も与党圧勝が予測される。
ところで問題の少女像である。日本では「反日」の象徴のごとく語られているが、よくは知られていない話がある。
「伝えたいのは“反日”というメッセージではありません」
そう話すのは少女像の製作者、彫刻家のキム・ウンソンさんだ。少女像をよく見ると、裸足のかかとの部分が地面から浮いていることがわかる。これは社会からずっと見捨てられてきた元慰安婦の「孤独」を表しているのだという。
「日本政府の冷淡さだけが問題ではない。慰安婦たちは韓国政府や社会の無責任さにも傷つけられてきたんです」
被害の重みと社会の偏見によって、「孤独」な少女は地に足をつけることができないでいる。ちなみにキムさんはベトナム戦争における韓国軍のベトナム民間人虐殺を謝罪する像も制作し、近く、韓越両国内に設置する予定だという。
「都合の悪い歴史であっても、目を背けてはいけないと思うのです」と静かに語った。内省的な言葉は、しかし私たち日本人にも突き刺さる。
これまで韓国内で慰安婦だと認定されたのは238人。多くは他界し、いまや生存者は46人。平均年齢は90歳だ。時間は止まらない。なんとか元慰安婦たちの名誉と尊厳を回復し、解決へと向かうことはできないものか。
「手を握ればわかる」。
私はカン・イルチュルさんの言葉に、一つのヒントが隠されているようにも思うのだ。
●安田浩一(やすだ・こういち)/1964年静岡県生まれ。週刊誌、月刊誌記者などを経て2001年よりフリーに。2012年、講談社ノンフィクション賞を受賞した『ネットと愛国 在特会の「闇」を追いかけて』は、在特会の実態を初めて世間に知らしめた。
※SAPIO2016年3月号
http://zasshi.news.yahoo.co.jp/article?a=20160205-00000011-pseven-kr&p=1
取材対象者の云うことを
鸚鵡返しに繰り返すだけなら
小学校の壁新聞記者だってできる(嗤)
手を握っただけで真偽が判るくらいなら
警察や裁判所は要らないぞ!
あひゃひゃひゃ!
한국의 원위안부는 일한 합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직접 (들)물었다
NEWS 포스트세븐 2월5일 (금) 7시 0 분배신
일한 합의를「당사자」부재의 정치 해결이라고 지적하는 소리는 많다.그럼, 당사자, 즉 원위안부들은 어떠한 소리를 가지는 것인가.직접 확인한 미디어는 적다.그 여자들의 입장을 고려할 필요는 있다로 해도, 취재자로서는 직접 대면하고, 그 생각을 보내는 것이 구할 수 있을 것이다.져널리스트・야스다 코이치씨가 서울 에 날았다.
* * *
깊은 주름(해 원)이 새겨진 팔이 성장한다.캔・이르츄르씨(89세)는 나의 손바닥을 감싸도록(듯이) 잡았다.
쉬어 소리로 나에게 묻는다.
「일본에서 왔습니까?」
더듬거린 일본어였다.
내가 수긍하면, 마디 주어 선 손가락에 꽉 힘이 들어간다.
한겨울의 오후의 온화한 햇빛이, 온돌이 효과가 있던 방안에 쑤시고 있었다.텔레비전은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비추고 있다.조심조심 위안부 문제의「일한 합의」에 임해서 물었다.
이르츄르씨는 표정을 거의 바꾸지 않았다.잡아 닫은 나의 손을 자신 쪽에 끌어 들여 마치 아이를 어르도록(듯이) 상하에 흔들었다. 「이렇게, 손을 잡는다.그러면 안다.소중한 일입니다 」
당사자는 여기에 있는데──손바닥을 통하고, 그 생각은 전해져 왔다.
서울로부터 버스로 약 1시간.경기도 광저우시의「나눔의 집」를 방문했다.원위안부 10명이 공동 생활을 보내고 있다.이르츄르씨도 그 날 새다.90세에 가까운 노인이 능변일 리가 없다.그녀는 나의 계속 손을 잡으면서 「이렇게 하는 것이 대사」와 반복했다.
깊게 새겨진 주름은, 인생의 거센 파도를 나타내고 있다.그리고, 똑같이 이르츄르씨의 전신에 각인 된 일본어를, 일본이라고 하는 나라를, 생각했다.작년 12월 24일, 「연내에 위안부 문제 해결을 향한 일한 교섭을 하는」와 보도되었을 때부터, 「나눔의 집」는 내외 매스컴의 주시를 받아 왔다.
「(교섭 개시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나눔의 집」의 안・싱 소장이다.원래는 롯데 그룹의 회사원이었다고 하는 안 소장은, 척척일의 경위를 설명한다.
「 나도 넷에서 교섭이 시작되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습니다.26일에는 할머니(할머니) 전원에게 모이게 해, 의견을 들었습니다.전원이 놀라고 있었어요.왜 당사자인 스스로를 그대로 두고 사태가 움직이고 있는지, 라고 」
12월 28일, 서울에서 열린 일한 외상 회담에서 위안부 문제의「합의」가 발표된다.일본측이「진심으로의 사과와 반성」를 표명, 한국 정부가 설립하는 원위안부 지원의 재단에 일본측은 정부 예산으로 10억엔을 거출한다, 라고 하는 내용이었다.
「이것도 결국, 나는 할머니들과 함께 텔레비전의 뉴스로 알게 됩니다 」 동29일, 외교부의 조・테욜 제2차관이 간신히「나눔의 집」를 방문한다.조 차관은 원위안부들에게「발길을 옮기는 것이 늦어진」와 사과한 후, 「교섭은 상대가 있는 것이므로, 대국적인 관점으로부터 내용은 이해해 주었으면 하는」라고 호소했다.
「에서도, 할머니들은 거의 납득하지 않았다.어째서 스스로의 의견을 듣고 나서 교섭하지 않는 것인지로 각자가 흘렸던 」
차관은「할머니들에게 야단 맞으면서」(안 소장), 시설을 뒤로 했다고 한다.
◆원위안부를 만나지 않았던 박대통령의 미숙
이번「일한 합의」에 관해서 나개인으로서는, 적어도 무엇인가의 희망을 찾아내고 싶다고는 생각했다.피해 구제에 외교가 무력해 좋을 리가 없다.다만 당사자 부재의 단순한 정치 결착이라면, 「받아 들여지지 않는」라는 소리가 나는 것도 당연하다.
위안부 문제를 취재해 온 한국의 대기업지 기자는「개인적으로는 최선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차선인」와 합의를 평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실은 한국 사회에서도 긴 세월에 걸쳐, 위안부 문제에의 관심은 높지 않았다.그러니까, 할머니들에게의 설명 빼고도 외교 해결할 수 있으면, 박근 메구미 대통령은 밟은 것은 아닌가 」
합의 직후의 여론은 평가의 가부에 대하고 반반으로 나누어져 있었다.하지만, 연내 합의를 서두른 것에의“졸속”가 전해지게 되고 나서는 부정적인 의견이 눈에 띄게 되었다.원위안부에게 사전 설명이 없었던 것에의 비판은 강했다.
「그것으로 박대통령은“차가운”라고 하는 이미지를 주어 버렸다.이것이 김대중(김대중)이나 노무현(노무현)이라면, 사전에 원위안부들과 만나, 확실히 꼭 껴안고 나서 교섭으로 향했을지도 모릅니다.박대통령의 정치가로서의 미숙함이 나와 버린」( 동)
거기에 사쿠라다 요시타카 의원의「(위안부는) 직업으로서의 창녀다.비즈니스다」라고 하는 발언이 보도된다.나는 이런 광경을 보았다.
1월 14일의 저녁이다.서울시내의 선술집에서 식사하고 있을 때, 정확히 점내의 텔레비전이「사쿠라다 발언」를 긴급 뉴스로서 흘렸다.그 순간, 그것까지 온화하게 담소하면서 체미술(소주)을 마시고 있던 중년남성의 그룹이, 갑자기 큰 소리를 질렀다.
「무효(무효)!」
일한 합의의「무효」를 호소하고 있었던 것이다.목소리의 주인인 자영업자(50세)는「일본 정부의 인간으로부터 이런 발언이 튀어 나오도록(듯이)는 안된다.말씨만의 합의라면 의미가 없는」와 불쾌한 표정을 띄웠다.
과연, 박대통령은 이러한 한국의 여론에 반해, 합의 내용을 이행할 수 있는 것일까.
◆「이렇게 허무한 결과가 된다고는 」
1월 13일, 나는 일본 대사관앞의「수요일 집회」를 취재했다.위안부 문제에 임하고 있는「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정 대 협) 등 시민 단체가, 매주 수요일에 행하고 있는 정례 집회이다.눈이 조금씩 날리는 엄한에도 불구하고, 대사관앞에는 약천명의 사람이 모였다.「합의는 무효다」라고 기록된 플래카드가 하야시다치 .
집회에는 6명 원위안부가 참가했다.그 날 취해, 김・나 톤씨(89세)가 마이크를 손에 넣어 소리를 지른다.
「우리의 의견도 듣지 않고 진행한 합의에 절대 반대입니다.이렇게 허무한 결과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
피부를 찌르는 차가운 빌딩풍을 받고, 작가의 윤・젼모씨는 추위에 떨리면서 원위안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위안부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 알려진 윤씨는「실망하고 있다.코노 담화로부터 조금도 진행되지 않은」와 험한 표정을 보였다.
집회에는 중고생등 젊은 세대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폐회하면, 대사관앞에 설치된 위안부의 소녀상의 주위에서, 대학생들이 모포를 쓰면서, 「묵어」의 태세에 들어갔다.만일의 강제 철거에 대비해 교대제로 상을 지키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대학생 정・호골군(23세)은「위안부가 받은 고통을 기억으로서 남기지 않으면 안 된다」와 일본어로 설명했다.그는 일본의 전통 문화에 흥미를 가져, 고교시절부터 일본어를 배우고 있다.3월에는 일본을 방문해 각지의「히나마츠리」를 보고 돌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한다.그런“지일파”의 그여도, 소녀상 의 철거를 합의의 조건으로 할 것 같은 움직임은「허락할 수 없는」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합의 반대 여론을「당연하다」라고 호소하는 것은 서울 대법과대학원의 얀・효나 교수다.
「일본 정부는“책임을 통감”로 하고 있는 것만으로, 국가 책임을 애매한 표현으로 회피하고 있다.한국 정부도 당사자를 제외한 데다가, 이것을 추인 해 버린 」
같은 중앙대의이・나욘 교수(사회학)도「역사의 교훈이라고 하는 시점이 결핍 하고 있다.“불가역적”라는 말에 상징되도록(듯이), 문제의 종결만을 서두른 것이다」와 합의를 비판한다.
한편, 학자 속에는 합의를 평가하는 소리도 적지 않다.예를 들어, 신보수주의(신보 마모루파)로서 알려진 서울 대학의이・욘 분 교수는「언제까지 문제를 오래 끌게 하는지」와 가립를 숨기지 않는다.
「일찌기 일본을 파멸에 쫓아 버린 민족주의가, 지금은 한국에서 소생하고 있다.민족주의에 물든 일부의 운동 단체에 의해서, 억지로에 여론이 형성되고 있다.원래 한국인의 상당수는 위안부 문제에 흥미가 없었습니까들 」
또, 일본 정계에 지기도 많은 일본 연구자도, 「모두 사실은 위안부 문제에 피곤하다.추궁 당하면 위안부에게 동정하지만, 본심에서는, 언제까지나 구애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라고 이야기한다.
◆「소녀상=반일」는 아니다
원위안부들은 한국내에서도, 오랫동안 호기의 눈으로 볼 수 있어 왔다.이번, 합의에의 찬부를 (들)물어도, 나는 더 한층 더 그녀들의「소외」를 생각했다.실제로, 그러한 소리가 박정권에의 지지율에 직접 반영되는 것은 아니고, 4월의 총선거도 여당 압승이 예측된다.
그런데 문제의 소녀상이다.일본에서는「반일」의 상징과 같이 말해지고 있지만, 자주(잘)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전하고 싶은 것은“반일”라고 하는 메세지가 아닙니다 」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소녀상의 제작자, 조각가 김・운손씨다.소녀상을 잘 보면, 맨발 의 것인지일까하고의 부분이 지면으로부터 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이것은 사회로부터 쭉 버림받아 온 원위안부의「고독」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일본 정부의 냉담함만이 문제는 아니다.위안부들은 한국 정부나 사회의 무책임함에도 손상시킬 수 있어 왔습니다 」
피해의 중량감과 사회의 편견에 의해서, 「고독」소녀는 땅에 다리를 붙일 수 없다.덧붙여서 김씨는 베트남 전쟁에 있어서의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사죄하는 상도 제작해, 근처, 한월양국내에 설치할 예정이라고 한다.
「사정이 좋지 않은 역사여도, 눈을 돌려 안 된다라고 생각합니다」와 조용하게 말했다.내성적인 말은, 그러나 우리 일본인에도 꽂힌다.
지금까지 한국내에서 위안부라고 인정된 것은 238명.많게는 타계해, 지금 생존자는 46명.평균 연령은 90세다.시간은 멈추지 않는다.어떻게든 원위안부들의 명예와 존엄을 회복해, 해결로 향할 수 없는 것인가.
「손을 잡으면 아는 」.
나는 캔・이르츄르씨의 말에, 하나의 힌트가 숨겨져 있도록(듯이)도 생각한다.
●야스다 코이치(다・고이찌)/1964년 시즈오카현 태생.주간지, 월간지 기자등을 거쳐 2001년부터 프리에.2012년, 코단샤 논픽션상을 수상한『넷과 애국 재특회의「어둠」를 뒤쫓아』는, 재특회의 실태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리게 했다.
※SAPIO2016 연 3월호
http://zasshi.news.yahoo.co.jp/article?a=20160205-00000011-pseven-kr&p=1
취재 대상자가 말하는 것을
흉내에 반복하는 것 뿐이면
초등학교의 벽신문 기자도 할 수 있다(치)
손을 잡은 것만으로 진위가 알 정도라면
경찰이나 재판소는 필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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