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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戸時代


捕鯨を描いた『古式捕鯨蒔絵』


江戸時代には建前としては獣肉食の禁忌が守られた。特に上流階級はこの禁忌を守った。例えば狸汁は戦国時代には狸を使っていたが、江戸時代にはコンニャク、ごぼう、大根を煮たものに変わっている。


1613年(慶長18年)、平戸島に商館を開設したイギリスのジョン・セーリス (John Sarisは陸路で大阪(osaca)から駿河(Surunga)に向かう行程で書かれたとみられる日本人の食習慣に関する記述の中で、豚が多く飼育されていることに言及している[19]1643年(寛永20年)の刊行とされる『料理物語』には、狸、鹿を具とした汁料理が紹介されている。1669年(寛文9年)に刊行された料理書『料理食道記』にも獣肉料理が登場する[3]1686年(貞享3年)に刊行された山城国の地理書『雍州府志』には、京都市中に獣肉店があったことが記されている[3]。江戸後期の国学者喜多村信節は、著書『嬉遊笑覧』の中で、元禄前の延宝天和の頃には江戸四ツ谷に獣市が立ったことを述べている。


獣肉食の禁忌のピークは、生類憐れみの令などが施された17世紀後半の元禄時代である。この法令自体は徳川綱吉の治世に限られ、影響も一時のもので終った。ただし特に犬を保護した事についての影響は後世まで残り、中国朝鮮半島で犬肉が一般的な食材になっている一方で、日本では現代に至るまで犬肉は一般的な食材と看做されなくなった。

18世紀の書『和漢三才図会』第37「畜類」の冒頭豕(ぶた)の条では育てやすい豚が長崎や江戸で飼育されていることが述べられているが、大坂在住の著者は「本朝肉食を好ま」ないため近年は稀だとする。牛の条の注には、日用としては駄目だが禁止する必要はないとも書かれている。1733年(享保18年)に伊達家の橘川房常が書いた『料理集』には牛肉を粕漬けあるいは本汁として使うことができるが、食後150日は穢れる旨が書かれている[3]彦根藩は「赤斑牛の肉だけは食べても穢れない」との理屈を付けて、毎年の寒中に赤斑牛の味噌漬けを将軍と御三家に献上している[20][21]


本居宣長は古代の肉食について研究した


18世紀には、なぜ獣肉食が駄目なのか、獣肉食の歴史はどのようなものだったかについての研究も行われた。儒者熊沢蕃山は没後の1709年(宝永6年)に刊行された著書『集義外書』の中で、牛肉を食べてはいけないのは神を穢すからではなく、農耕に支障が出るから、鹿が駄目なのはこれを許せば牛に及ぶからなのだ、との見解を示している。藤井懶斎は儒者の立場から、没後の1715年(正徳5年)に刊行された『和漢太平広記』の中で、孔子に食肉を供えるはずの行事釈奠で肉を供えないのでは儒礼とは言えないとの見解を示している。香川修庵1731年(享保16年)、著書『一本堂薬選』の中で、日本書紀や続日本紀の中に肉食が行われていた記録があることに言及した。本居宣長1798年(寛政10年)に完成した『古事記伝』の中で、古代の日本人が肉食をしていたことに言及している。江戸中期になると蘭方医学も獣肉食に影響した。


名所江戸百景に描かれた江戸の比丘尼橋(現八重洲)付近にあった猪肉店


19世紀小山田与清の著『松屋筆記』には猪肉を山鯨、鹿肉を紅葉と、そのほか熊、狼、狸、イタチ、キネズミ(リス)、サルなどの肉が売られたことが記されている。1829年(文政12年)完成の地理書『御府内備考』には麹町平河町神田松下町に「けだ物店」があった旨が書かれている。19世紀の寺門静軒の著『江戸繁昌記』にも、大名行列が麹町平河町にあったももんじ屋(獣肉店)の前を通るのを嫌がったことが記されている[1]。ここでは猪、鹿、狐、兎、カワウソ、オオカミ、クマ、カモシカなどが供されていた[3]。また内臓も被差別部落民に分配され食べつくされている[9]1827年(文政10年)に出版された佐藤信淵の『経済要録』に「豕(豚)は近来、世上に頗る多し。薩州侯の邸中に養ふその白毛豕は、殊に上品なり」と書かれているように、一部では豚の飼育も行われていた[22]佐藤はこの著作で畜産の振興と食用家畜の普及を提言しているが、牛馬に関しては全く食用の可能性に言及していない。福翁自伝によれば、福澤諭吉が適塾で学んだ江戸末期の1857年(安政4年)、大阪に2軒しかない牛鍋屋は、定客がゴロツキと適塾の書生ばかりの「最下等の店」だったという[23]1863年(文久3年)に池田長発らが遣欧使節団としてフランスに派遣された際も、一行は肉食はもちろん、パンも牛乳も日ごとに喉を通らなくなっていったとの記録がある[24]1908年(明治41年)に刊行された石井研堂『明治事物起原』によると、1860年代に横浜の居酒屋「伊勢熊」が外国商館から臓物を安く仕入れて串に刺し、味噌や醤油で煮込んで売り出し、繁盛したという[20]

江戸幕府は外交的配慮から、朝鮮通信使に対して道中はイノシシ肉でもてなすものの、江戸城の正餐では日本の本膳料理を出していた。また、ペリーハリスにも本膳料理を出していた。ただし江戸最末期の1866年にはパークスとの会食で西洋料理を供している[9]



                                 日本版Wikiより

http://ja.wikipedia.org/wiki/%E6%97%A5%E6%9C%AC%E3%81%AE%E7%8D%A3%E8%82%89%E9%A3%9F%E3%81%AE%E6%AD%B4%E5%8F%B2#.E6.AD.A6.E5.A3.AB.E3.81.AE.E6.99.82.E4.BB.A3





食用豚の飼育も

あちこちで行われていたようです(嗤)。





朝鮮人涙目!(爆笑)




このシリーズ、これにて終了!

















귀찮기 때문에 환사본 일본의 육식 문화 그 4



에도시대


포경을 그린『옛 식포경 금칠한 그림』


에도시대에는표면으로서는 수육식의 금기를 지켜졌다.특히 상류계급은 이 금기를 지켰다.예를 들면 너구리고기를 넣고 끓인 된장국은 전국시대에는 너구리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에도시대에는 곤약, 우엉, 무를 익힌 것으로 변해있다.


1613년(게이쵸18년),히라도섬에 상관을 개설한 영국의 존・세이리스 (John Saris)  는 육로에서 오사카(osaca)로부터 스루가(Surunga)를 향하는 행정으로 쓰여졌다고 보여지는 일본인의 식습관에 관한 기술 중(안)에서, 돼지가 많이 사육되고 있는 것에 언급하고 있는[19].1643년(에도초기의 연호20년)의 간행으로 여겨지는 『요리 이야기』에는, 너구리, 사슴을 도구로 한 국물 요리가 소개되고 있다.1669년(간분9년)에 간행된 요리서 『요리 식도기』에도 수육 요리가 등장하는[3].1686년(죠쿄3년)에 간행된 야마시로노쿠니의 지리서『요슈부뜻』에는, 쿄토시안에 수육점이 있었던 것이 기록되고 있는[3].에도 후기의 국학자기타무라노부요는, 저서『희유소람』 중(안)에서, 겐로쿠전의연보에도초기의 연호의 무렵에는 에도 요츠야에 짐승 장이 선 것을 말하고 있다.


수육식의 금기의 피크는,동물련봐의 령등이 베풀어진17 세기 후반의겐로쿠 시대이다.이 법령 자체는도쿠가와 쓰나요시의 치세에 한정되어 영향도 한때의 것으로 끝났다.다만 특히 개를 보호한 일에 대한 영향은 후세까지 남아,중국이나한반도에서 개고기가 일반적인 식품 재료가 되어 있는 한편으로, 일본에서는 현대에 이를 때까지 개고기는 일반적인 식품 재료와 간주해져서 없어졌다.

18 세기의 책『일한삼재도회』 제37「축류」의 모두멧돼지(돼지)의 조에서는 기르기 쉬운 돼지가 나가사키나 에도에서 사육되고 있는 것을 진술되고 있지만, 오오사카 거주의 저자는「본조육식을 호」없기 때문에 근년은 드물다고 한다.소의 조의 주에는, 일용으로서는 안되지만 금지할 필요는 없다고 쓰여져 있다.1733년(향보18년)에 다테가의타치바나가와방상이 쓴『요리집』에는 쇠고기를 야채와 술지게미의 절임 혹은 본국물로서 사용할 수 있지만, 식후150일은 더러워지는 취지가 쓰여져 있는[3].히코네번은「적반우의 고기만은 먹어도 더러워지지 않는」와의 도리를 붙이고, 매년의 한중에 적반우의 된장 절임을 장군과 세 대가에게 헌상 하고 있는[20][21].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고대의 육식에 대해 연구했다


18 세기에는, 왜 수육식이 안된가, 수육식의 역사는 어떠한 것이었는지에 대한 연구도 행해졌다.유생쿠마사와 시게야마는 사후의1709년(호우에이6년)에 간행된 저서『집의외국 서적』 중(안)에서, 쇠고기를 먹어선 안 되는 것은 신을 예에서가 아니고, 농경에 지장이 나오기 때문에, 사슴이 안된 것은 이것을 허락하면 소에 이르기 때문이다, 라는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후지이 라이사이는 유생의 입장으로부터, 사후의1715년(쇼토쿠5년)에 간행된『일한 태평광기』 중(안)에서,공자에게 식육을 올려야할 행사석전제로 고기를 올리지 않아서는 유례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카가와 오사무암1731년(향보16년), 저서 『한 개당약선』 중(안)에서, 일본 서기나 속일본기안에 육식을 하고 있던 기록이 있는 것에 언급했다.모토오리 노리나가1798년(너그러운 정치10년)에 완성한 『고사기전』 중(안)에서, 고대의 일본인이 육식을 하고 있었던 것에 언급하고 있다.에도 중기가 되면네델란드 의술 의학도 수육식에 영향을 주었다.


명소 에도백경에 그려진 에도의 비구니교(현야에스) 부근에 있던 저육점


19 세기오야마다 도모키요의 저『마츠야 필기』에는 저육을 멧돼지 고기, 록육을 단풍과 그 외 웅, 랑, 리, 족제비, 키네즈미(리스), 원숭이등의 고기가 팔렸던 것이 기록되고 있다.1829년(분세12년) 완성의 지리서 『옛날 에도 시대의 에도 성안 비고』에는 코우지마치히라카와초칸다 마츠시타쵸에「다 물점」가 있던 취지가 쓰여져 있다.19 세기의데라카도 세이켄의 저『에도 번창기』에도,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가는 일이 코우지마치 히라카와초에 있던모모응 글자가게(수육점)의 앞을 지나는 것을 싫어했던 것이 기록되고 있다[1].여기에서는 저, 록, 호, 토, 강 거짓말, 늑대, 곰, 영양등이 제공되고 있던[3].또 내장도피차별 부락민에게 분배되어 다 먹어 치워지고 있는[9].1827년(분세 10년)에 출판되었다사토노부히로의『경제 요록』에「멧돼지(돼지)는 근래, 세상에 파다 해.삿슈후의 저중에 양그 백모 멧돼지는, 특히 상품이든지」라고 쓰여져 있도록(듯이), 일부에서는 돼지의 사육도 행해지고 있던[22].사토는 이 저작으로 축산의 진흥과 식용 가축의 보급을 제언하고 있지만, 우마에 관해서는 전혀 식용의 가능성에 언급하고 있지 않다.복옹자전에 의하면, 후쿠자와유길이에도후기 난학의 기숙사에서 배운 에도 말기의1857년(안정4년), 오사카에 2채 밖에 없는 왜전골 냄비가게는, 정객이 고로키와 에도후기 난학의 기숙사의 학생뿐인「최하등의 가게」였다고 하는[23].1863년(분큐3년)에이케다장발등이 유럽에 파견함 사절단으로서 프랑스에 파견되었을 때도, 일행은 육식은 물론, 빵이나 우유도 날마다 목을 통하지 않게 되어 갔다는 기록이 있는[24].1908년(메이지41년)에 간행된 이시이 겐도『메이지 사물 기원』에 의하면, 1860년대에 요코하마의 선술집「이세곰」가 외국 상관으로부터 장물을 싸게 구매하고 꼬치에 찔러, 된장이나 간장으로 삶어 팔기 시작해, 번성했다고 하는[20].

에도 막부는 외교적 배려로부터,조선 통신사에 대해서 도중은 멧돼지육으로 대접하지만, 에도성의 정찬에서는 일본의첫번째 주가 되는 상 요리를 내고 있었다.또,페리하리스에도 첫번째 주가 되는 상 요리를 내고 있었다.다만 에도최말기의1866년에는파크스와의 회식으로 서양 요리를 제공하고 있는[9].



                                 일본판 Wiki보다

http://ja.wikipedia.org/wiki/%E6%97%A5%E6%9C%AC%E3%81%AE%E7%8D%A3%E8%82%89%E9%A3%9F%E3%81%AE%E6%AD%B4%E5%8F%B2#.E6.AD.A6.E5.A3.AB.E3.81.AE.E6.99.82.E4.BB.A3





식용돼지의 사육도

여기저기에서 행해지고 있던 것 같습니다(치).





한국인우목!(폭소)




이 시리즈, 이것에서 종료!
















TOTAL: 4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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