戦国時代・安土桃山時代
戦国時代になると、南蛮貿易などを通じた食品の輸入が本格化した。この時代には新大陸(南北アメリカ大陸)の食材ももたらされている。ジャン・クラッセ (Jean Crasset) の『日本西教史』には「日本人は、西洋人が馬肉を忌むのと同じく、牛、豚、羊の肉を忌む。牛乳も飲まない。猟で得た野獣肉を食べるが、食用の家畜はいない」と書かれている。宣教師フランシスコ・ザビエルは日本の僧の食習慣を真似て肉食をしなかったが、その後の宣教師は信者にも牛肉を勧め、1557年(弘治3年)の復活祭では買った牝牛を殺して飯に炊き込んで信者に振舞っている[15]。『細川家御家譜』には、キリシタン大名の高山右近が小田原征伐の際、蒲生氏郷や細川忠興に牛肉料理を振舞ったことが書かれている。曲直瀬道三の養子曲直瀬玄朔は医学書『日用食性』の中で、獣肉を羹(具がメインのスープ)、煮物、膾、干し肉として食すればさまざまな病気を治すと解説している。ただし当時の医学書には中国文献の引き写しも多く、日本では手に入らない食材なども書かれており、実際に行われていたかどうかは明らかではない[3]。また、戦国時代末期の日本語を収録した『日葡辞書』には「Cacho ブタ」と記されており[16]、地方によっては豚(家猪)が飼われていたものと見られる。
また、戦国末期からは阿波などで商業捕鯨が始まっている[1]。阿波の三好氏の拠点勝瑞城の館跡地では、牛馬に豚や鶏、鯨、犬や猫などの骨が数多く出土しており、食用だけでなく鷹の餌や、愛玩用として家畜が飼われ、肉が市場に流通していたと考えられている[17]。徳島県藍住町教育委員会は、当時の食事を研究し、三好義興が京都で将軍を歓待した時の料理を再現した。その時の材料には、ウズラやシャモ、クジラ、サケが使用された[18]。
ただし京などで獣肉が一般的に食されていたとは言えず、例えば秀吉が後陽成天皇を聚楽第に招いた際の献立にも入れられていない。特に牛馬の肉を食べることは当然の禁忌であり、1587年(天正15年)、秀吉は宣教師ガスパール・コエリョに対して「牛馬を売り買い殺し、食う事、これまた曲事たるべきの事」と詰問し、それに対してコエリョは「ポルトガル人は牛は食べるが馬は食べない」と弁明をしている[3]。
http://ja.wikipedia.org/wiki/%E6%97%A5%E6%9C%AC%E3%81%AE%E7%8D%A3%E8%82%89%E9%A3%9F%E3%81%AE%E6%AD%B4%E5%8F%B2#.E6.AD.A6.E5.A3.AB.E3.81.AE.E6.99.82.E4.BB.A3
전국시대・安土桃山시대
전국시대가 되면,남만 무역등을 통한 식품의 수입이 본격화했다.이 시대에는 신대륙(남북아메리카 대륙)의 식품 재료도 초래되고 있다.쟌・쿠랏세 (Jean Crasset) 의 『일본서교사』에는「일본인은, 서양인이 말고기를 꺼리는 것과 같이, 우, 돈, 양의 고기를 꺼린다.우유도 마시지 않는다.렵으로 얻은 야수고기를 먹지만, 식용의 가축은 없는」라고 쓰여져 있다.선교사프란시스코・자비엘은 일본의 승려의 식습관을 흉내내 육식을 하지 않았지만, 그 후의 선교사는 신자에게도 쇠고기를 권해1557년(코우지3년)의부활제에서는 산 암소를 죽이고 밥에 밥을 짓고 신자에게 행동하고 있는[15].『호소카와가 댁보』에는, 크리스찬 영주의다카야마 우콘이오다와라 정벌때,가모 우지사토나호소카와 다다오키에게 쇠고기 요리를 행동했던 것이 쓰여져 있다.마나세 도산의 양자마나세 겐사쿠는 의학서『일용 식성』 중(안)에서, 수육을 국(도구가 메인의 스프), 조림, 회, 건육으로서 음식 하면 다양한 병을 고치면 해설하고 있다.다만 당시의 의학서에는 중국 문헌의 투사도 많아, 일본에서는 손에 들어 오지 않는 식품 재료등도 쓰여져 있어 실제로 행해지고 있었는지 어떠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3].또,전국시대 말기의 일본어를 수록한 『일포 사전』에는「Cacho 돼지」라고 기록되어 있어[16], 지방에 따라서는 돼지(가 저)가 길러지고 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전국 말기부터는아와등에서상업포경이 시작되어 있다[1].아와의미요시씨의 거점쇼즈이성의 관철거지에서는, 우마에 돼지나 계, 고래, 개나 고양이등의 뼈가 많이 출토하고 있어, 식용 뿐만이 아니라 매의 먹이나, 애완용으로서 가축이 길러져 고기가 시장에 유통하고 있었다고 생각되고 있는[17].토쿠시마현아이즈미쵸 교육위원회는, 당시의 식사를 연구해,미요시의흥이 쿄토에서 장군을 환대 했을 때의 요리를 재현했다.그 때의 재료에는,메추리나샤모,고래,연어가 사용된[18].
다만 경등에서 수육이 일반적으로 음식 되고 있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고, 예를 들면 히데요시가고요제이 천황을도요토미히데요시가 조영한 대저에 불렀을 때의 메뉴에도 들어가 있지 않다.특히 우마의 고기를 먹는 것은 당연한 금기이며,1587년(덴쇼(연호)15년), 히데요시는 선교사가스파르・코엘요에 대해서「우마를 매매 죽여, 먹는 일, 이것 또 부정한 일나무의 일」와 힐문해, 그에 대한 코엘요는「포르투갈인은 소는 먹지만 말은 먹지 않는」와 변명을 하고 있는[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