武士の時代
鎌倉時代になると、武士が台頭し、再び獣肉に対する禁忌が薄まった。武士は狩で得たウサギ、猪、鹿、クマ、狸などの鳥獣を食べた。鎌倉時代の当初は公卿は禁忌を続けており、『百錬抄』の1236年(嘉禎2年)の条には武士が寺院で鹿肉を食べて公卿を怒らせる場面が出てくる。しかし時代が下ると公卿も密かに獣肉を食べるようになり、『明月記』の1227年(安貞元年)の条には公卿が兎やイノシシを食べたとの噂話が載せられている。乳製品は以後明治までほぼ食べられなくなった[1]。12世紀後半の『粉河寺縁起絵巻』には、肉をほおばり、干肉を作る猟師の家族が描かれている[14]。禅宗の影響で、動物性の材料を一切用いない精進料理も発達した。精進料理は単なる植物食ではなく、「猪羹」など獣食に見立てた料理もあった[9]。一方で神社の物忌み期間中の獣食は厳しくなり、平安時代には禁止されていなかった鹿や猪肉までもが禁令に含まれ、その期間も数十日程度にまで長くなっている[3]。
南北朝時代の『異制庭訓往来』には、珍味として熊掌、狸沢渡、猿木取などの獣掌や、豕焼皮(脂肪付きのイノシシの皮)を焼いたものなどが掲載されており、『尺素往来』には武士がイノシシ、シカ、カモシカ、クマ、ウサギ、タヌキ、カワウソなどを食べていたことが記されている。医学も進歩して『拾芥抄』には2月のウサギ、9月の猪肉を食べないように記載されている[1]。僧侶もひそかに肉食をするようになり、特にウサギは鳥と同様の扱いになって、『嘉元記』の1361年(南朝:正平16年、北朝:康安元年)の饗宴記録にもウサギ肉について記載されている。
一方で、屠児(穢多、 屠殺業者)に対する差別も広がった。獣肉食や鷹狩の衰退から、屠児の仕事は不要な牛馬を処理して皮を取るものへと変わっていき、獣肉は経済的な理由から主 に屠児自身が食べるようになった。13世紀に編纂された『天狗草紙』、『塵袋』、『名語記』など、えたに関する記載が増えている。『名語記』には「河原の 辺に住して牛馬を食する人」、『塵袋』には「非人、かたひ、えたなと、人ましろひもせぬ、おなじさまのものなれは、まきらかして非人の名をえたにつけたる 也」と解説されており、牛馬を食したり殺生業を営む人は一般人と交わることが憚られた。このころにはまだ有識者の間では「えたの本義は餌取」との認識が あったが、15世紀中ごろになると、辞書『下学集』には「穢多。屠児也。河原者」と解説されており、また、『壒囊鈔』には「常には穢多と書く、けかれをほき故と云」と解説されていて、むしろ「穢れているから穢多なのだ」という認識に変わっている[3]。
屠殺業者に対する差別意識が高まったことから、屠殺業者自身が仏教的な罪悪意識を持ったり、逆に差別に対抗する動きも出ている。とりわけ鎌倉仏教にはそれを課題とした宗派が多い。主に12世紀に活躍した浄土宗の開祖法然は 『一百四十五箇条問答』の中で、魚や鳥や鹿を食する事に関して「食さないほうがいいが、この世ではやむをえないこと」と答えていたり、あるいは「干肉が忌 み深いというのは誤り」と語っている。これは浄土宗信徒に獣肉食をする人が多かったことを意味している。また、法然の弟子で浄土真宗の宗祖親鸞は『大般涅槃経』を参考にして浄肉(食べてもよい肉)・不浄肉の区別を試みている。また時宗の開祖一遍は畋猟漁捕を業とする者を信者に多く持っていた。また南北朝期の神道書『神道集』でも「肉食は比の如く罪無し」と解説されている[3]。
日本版Wikiより
http://ja.wikipedia.org/wiki/%E6%97%A5%E6%9C%AC%E3%81%AE%E7%8D%A3%E8%82%89%E9%A3%9F%E3%81%AE%E6%AD%B4%E5%8F%B2#.E6.AD.A6.E5.A3.AB.E3.81.AE.E6.99.82.E4.BB.A3
坊主も肉食していたんだって!(嗤)
PS
超鮮土人がうるさいので写真追加
近江(彦根)牛の味噌漬け
鴨のすき焼き
旨そうだ!(嗤)
무사의 시대
가마쿠라 시대가 되면, 무사가 대두해, 다시 수육에 대한 금기가 엷어졌다.무사는 수로 얻은토끼, 저, 록, 곰, 너구리등의 조수를 먹었다.가마쿠라 시대의 당초는 공경은 금기를 계속하고 있어 『백련초』의1236년(가테이2년)의 조에는 무사가 사원에서 록 고기를 먹고 공경을 화나게 하는 장면이 나온다.그러나 시대가 내리면 공경도 은밀하게 수육을 먹게 되어, 『명월기』의1227년(안사다모토년)의 조에는 공경이 토끼나 멧돼지를 먹었다는 준화가 실리고 있다.유제품은 이후 메이지까지 거의 먹을 수 없게 된[1].12 세기 후반의『코카와절재수 그림 두루마기』에는, 고기를 베어 물어, 말라 고기를 만드는 사냥꾼의 가족이 그려져 있는[14].선종의 영향으로, 동물성의 재료를 일절 이용하지 않는다정진 요리도 발달했다.정진 요리는 단순한 식물식이 아니고, 「멧돼지국」 등 수식에 진단한 요리도 있던[9].한편으로 신사의 금기 기간중의 수식은 어려워져, 헤이안 시대에는 금지되지 않았던 사슴이나 저육까지도가 금지령에 포함되어 그 기간도 수십 일정도에까지 길어지고 있는[3].
남북조 시대의『이제 왕래물의 일종』에는, 진미로서웅장,너구리 사완도,사루기취등의 수장이나,멧돼지소피(지방 첨부의 멧돼지의 가죽)를 구운 것등이 게재되고 있어『척소왕래』에는 무사가 멧돼지, 사슴, 영양, 곰, 토끼, 너구리, 강 거짓말등을 먹고 있었던 것이 기록되고 있다.의학도 진보해 『십개초』에는2월의 토끼, 9월의 저 고기를 먹지 않게 기재되어 있는[1].승려도 몰래 육식을 하게 되어, 특히 토끼는 새와 같은 취급이 되고, 『가겐기』의1361년(남조:쇼헤이 16년, 북조:고안 원년)의 향연 기록에도 토끼육에 대해 기재되어 있다.
한편, 도아(예다, 도살 업자)에 대한 차별도 퍼졌다.수육식이나 타카가리의 쇠퇴로부터, 도아의 일은 불필요한 우마를 처리하고 가죽을 배달시키는 것으로 변해가, 수육은 경제적인 이유로부터 주 에 도아 자신이 먹게 되었다.13 세기에 편찬 된『텐구 이야기 책』, 『치리부쿠로』, 『명어기』 등, 천민에 관한 기재가 증가하고 있다.『명어기』에는「강변의 옆에 주 해 우마를 음식 하는 사람」, 『치리부쿠로』에는「사람축에 들지 못한 사람, 분히, 천민인과 사람해라 끈하지 않는, 동일님의 것 될 수 있어는, 장작등인가 해 사람축에 들지 못한 사람의 이름을 천민 조림인 야」와 해설되고 있어 우마를 음식 하거나 살생업을 영위하는 사람은 일반인과 사귀는 것이 꺼려졌다.요즘에게는 아직 유식자의 사이에서는「천민의 본의는 이취」라는 인식이 있었지만, 15 세기 중순이 되면, 사전 『정도가 낮은 학문집』에는「예다.도아야.거지」와 해설되고 있어 또,『壒囊초』에는「항상은 예다라고 쓰는, 쉬어를 나무 고와 운」와 해설되고 있고, 오히려「더러워져 있기 때문에 예 많은 것이다」라고 하는 인식으로 변해있는[3].
도살 업자에 대한 차별 의식이 높아진 것으로부터, 도살 업자 자신이 불교적인 죄악 의식을 가지거나 반대로 차별로 대항하는 움직임도 나와 있다.특히가마쿠라 불교에는 그것을 과제로 한 종파가 많다.주로 12 세기에 활약한정토종의 개조호넨은 『1백 45 조목 문답』 중(안)에서, 물고기나 새나 사슴을 음식 하는 일에 관해서「음식않는 편이 좋지만, 이 세상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라고 대답해 있거나, 혹은「말라 고기가 기 봐 깊다고 하는 것은 잘못」라고 말하고 있다.이것은 정토종 신도에게 수육식을 하는 사람이 많았던 일을 의미하고 있다.또, 호넨의 제자로정토진종의 종조신란은『대반열반경』를 참고로 해 정육(먹어도 괜찮은 고기)・부정육의 구별을 시도하고 있다.토키무네의 개조한결같은은 전렵어포를 업으로 하는 사람을 신자에게 대부분 가지고 있었다.또 남북조기의 신도서 『신도집』에서도「육식은 비 (와) 같이 죄없음」와 해설되고 있는[3].
일본판 Wiki보다
http://ja.wikipedia.org/wiki/%E6%97%A5%E6%9C%AC%E3%81%AE%E7%8D%A3%E8%82%89%E9%A3%9F%E3%81%AE%E6%AD%B4%E5%8F%B2#.E6.AD.A6.E5.A3.AB.E3.81.AE.E6.99.82.E4.BB.A3
스님도 육식 하고 있었다고!(치)
PS
초선토인이 시끄럽기 때문에 사진 추가
오오미(히코네) 소의 된장 절임
오리의 스키야키
맛있는 것 같다!(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