魏志倭人伝(3世紀)には、日本には牛馬がいなかったことが明記されている[5]。ただし「近親者の死後10日ほどは肉を食べない」ともかかれており、肉食は行われていた[6]。
『日本書紀』の雄略2年10月 (旧暦)の条には「置宍人部 降問群臣 群臣黙然 理且難対 今貢未晩 我為初 膳臣長野 能作宍膾[7]」と宍人部(食肉に携わる職の家系)の起源伝承が述べられており、生肉が宍膾(ししなます)にして食べられた旨が書かれている。生肉を食べるのは神事であり、生肉の保存技術が無いために生贄はその場で屠殺して食べられた[8]。
古墳時代には薬猟の名で、鹿や猪の狩が年に数回行われ、その肉が薬用として食べられていた[1]。鹿肉と猪肉は共に宍肉(ししにく)と呼ばれた。また、牛と馬が輸入され、肉や内臓が食用あるいは薬用にも使われた[9]。豚あるいは猪の飼育も行われており、『日本書紀』安寧天皇11年(西暦不明)の条には猪使連という職が登場する。欽明天皇16年(555年)7月 (旧暦)には「使于吉備五郡 置白猪屯倉[10]」と吉備に白猪屯倉を置くよう命じられており、569年には功あった白猪田部に白猪史の姓が贈られている。
奈良時代になると、貴族食と庶民食が分離するようになった。また、仏教の影響で、動物の殺生や肉食がたびたび禁じられるようになった。『日本書紀』によると675年、天武天皇は仏教の立場から檻阱(落とし穴)や機槍(飛び出す槍)を使った狩猟を禁じた。また、農耕期間でもある4月から9月の間、牛、馬、犬、サル、鶏を食することが禁止された。ただし一般的な獣肉であった鹿と猪は禁じられていない[3]。その後も罠や狩猟方法に関する禁令がたびたび出された。正月の宮中行事である御薬を供ずる儀でも、獣肉の代わりに鶏肉が供されるようになった。また、このころから貴族の間で牛乳や乳製品の摂取が盛んになり、動物性タンパクが補われるようになった[1]。
ただし引き続き豚の飼育も行われており、穂積親王が708年に詠んだ歌には「降る雪はあはにな降りそ吉隠の猪養の岡の寒からまくに」とある(猪養は地名でもある)。また、718年(養老2年)に亡くなった道首名は筑後守時代に国人に鶏や豚の飼育を奨励しており、『続日本紀』には「下及鶏肫。皆有章程。曲盡事宜」(〈道首名の規則は〉鶏や豚の飼育にも及んでおり、ことごとく詳細で適切であった)と記されている。『続日本紀』732年(天平4年)7月6日には聖武天皇が「和買畿内百姓私畜猪四十頭。放於山野令遂性命(畿内の百姓から家畜の猪40頭を買って山に逃がした)」との記載もある。
奈良時代の肉食禁止令には、家畜を主に食していた渡来系の官吏や貴族を牽制するためとする説もあり、家畜はだめだが狩猟した肉はよいとする考えもこれに基づくものである可能性もある[11]。
庶民には仏教が浸透しておらず、禁令にもかかわらず肉食は続けられた。奈良時代には前時代から食されていた動物に加えてムササビも食されたが、臭気が強いためにこの他の時代ではあまり例がない。また、酢を使って鹿の内臓を膾にすることも始められた[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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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安時代にも貴族の間での食肉の禁忌は続いた。914年(延喜14年)に出された漢学者三善清行の『意見十二箇条』には、悪僧が腥膻(肉と肝)を食うのを評して「形は沙門に似て、心は屠児の如し」とかかれており、食肉の禁忌があったこと、および一部ではそれを僧でさえ破っていたこと、獣肉を処理する屠児という職業がありそれが差別される存在であったことなどを示している。935年(承平5年)に編纂された辞書『和名類聚抄』人倫部第六 漁猟類第二十一[12]では、屠児の和名を「えとり」とし、意味は「鷹雞用の餌を取る者」転じて「牛馬を屠って肉を売る者」という意味だと解説しており、獣肉を売る商売があったことが分かる[3]。
また『和名類聚抄』には猪、ウサギ、豚などが食されたことも記載されており、これらはハレの日の食膳に出された。平安時代には陰陽道が盛んになったこともあり、獣肉食の禁忌は強まり、代わって鳥や魚肉が食されるようになった。これが魚肉の値上がりの原因になり、延喜式に記載された米と鰹節との交換比率は、200年前の大宝令の時と比べて2 - 3倍に上がっている[1]。延喜式には獣肉の記載がほとんどないが、一方で鹿醢(しししおびしお)、兎醢など獣肉の醤油漬けや、宍醤(ししびしお)という獣肉の塩漬けを発酵させた調味料に関する記載もある[9]。乳製品もさらに多く摂られるようになっている。
平安末期になると孔子に食肉を供えるはずの行事釈奠でも代わりに餅や乾燥棗などが用いられるようになったり、正月の歯固の膳でも鹿の代わりに鴫、猪の代わりにキジが出されるようになった。また、穢れを信じるあまりに馬肉は有毒とまで考えられ、『小右記』の1016年(長和5年)の条には犯罪を犯した男に馬肉を食べさせた旨が記されている[3]。当時の医学書『医心方』にしし肉(獣肉)と魚肉の食い合わせが良くないと記されていたり、『今昔物語』には庶民がしし肉を買いに行く場面が出てきたりと、完全に食肉の習慣が無くなったわけではなかった[1]。平安時代の古語拾遺には古代のこととして「大地主神、田を営るの日、牛の宍を田人に食はせ」とあり、御歳神に対する神事として農民に牛肉を食わせたことが書かれている。ただし古語拾遺内の創作であるとする可能性も指摘されている[13]
日本版Wikiより
http://ja.wikipedia.org/wiki/%E6%97%A5%E6%9C%AC%E3%81%AE%E7%8D%A3%E8%82%89%E9%A3%9F%E3%81%AE%E6%AD%B4%E5%8F%B2#.E6.AD.A6.E5.A3.AB.E3.81.AE.E6.99.82.E4.BB.A3
위지왜인전(3 세기)에는, 일본에는 우마가 없었던 것이 명기되어 있는[5].다만「근친자의 사후 10일 정도는 고기를 먹지 않는」와도 쓰여되고 있어육식은 행해지고 있던[6].
『일본 서기』의웅략 2년10월 (음력)의 조에는「치시시우도부강문군신 군신묵연리차난대 지금 공미만아 때문 첫선신나가노능작육회[7]」와 시시우도부(식육에 종사하는 일자리의 가계)의 기원 전승을 진술되고 있어 날고기가 육회(사자 날것)로 해 먹을 수 있었던 취지가 쓰여져 있다.날고기를 먹는 것은 제사이며, 날고기의 보존 기술이 없기 위해(때문에) 생지는 그 자리에서 도살해 먹을 수 있었던[8].
고분 시대에는 약렵의 이름으로, 사슴이나 멧돼지의 수가 해에 몇차례 행해져 그 고기를 약용으로서 먹을 수 있고 있던[1].록육과 저육은 모두 육육(사자 고기)으로 불렸다.또, 소와 말이 수입되어 고기나 내장이 식용 혹은 약용에도 사용된[9].돼지 혹은 멧돼지의 사육도 행해지고 있어 『일본 서기』안네이 천황 11년(서기 불명)의 조에는 저사련이라고 하는 일자리가 등장한다.흠 아키라 천황 16년(555년)7월 (음력)에는「사우길비5군치백저미야케[10]」와길구체적으로 백저미야케를 두도록(듯이) 명할 수 있고 있어569년에는 공 있던 흰색 이다부에 백저사의성가 주어지고 있다.
나라시대가 되면, 귀족식과 서민식이 분리하게 되었다.또,불교의 영향으로, 동물의 살생이나 육식이 가끔 금지되게 되었다.『일본 서기』에 의하면675년,텐무천황은 불교의 입장으로부터 우리阱(함정)나 기창(뛰쳐나오는 창)을 사용한 수렵을 금지했다.또, 농경 기간이기도 한 4월부터 9월의 사이, 우, 마, 견, 원숭이, 닭을 음식 하는 것이 금지되었다.다만 일반적인 수육인 사슴과 멧돼지는 금지되지 않은[3].그 후도 함정이나 수렵 방법에 관한 금지령이 가끔 나왔다.정월의 궁중 행사인 약을 보조자 질질 끄는 의식으로도, 수육 대신에 닭고기가 제공되게 되었다.또, 요즘부터 귀족의 사이에 우유나 유제품의 섭취가 활발하게 되어, 동물성 단백이 보충해지게 되었다[1].
다만 계속해 돼지의 사육도 행해지고 있어호즈미 신노가708년에 읊은 노래에는「내리는 눈은 는에 강길은의 저양의 언덕의 한으로부터 뿌리는에」어떤(저양은 지명이기도 하다).또,718년(양로2년)에 죽은미치노오후토나는 치쿠고수시대에 국민에 닭이나 돼지의 사육을 장려하고 있어,『속일본기』에는「하급계 肫.모두유규정.곡진일의 형편」(〈미치노오후토나의 규칙은〉닭이나 돼지의 사육에도 미치고 있어 죄다 상세하고 적절했다 )라고 기록되고 있다.『속일본기 』732년(나라시대의 연호4년) 7월 6일에는 쇼무 덴노가「화매기나이 백성사축저 40 마리.방어야마노령수성명(기나이의 백성으로부터 가축의 멧돼지 40 마리를 사고 산에 놓친)」라는 기재도 있다.
나라시대의 육식 금지령에는, 가축을 주로 음식 하고 있던 도래계의 관리나 귀족을 견제하기 위해(때문에)로 하는 설도 있어, 가축은 안되지만 수렵 한 고기는 좋다고 할 생각도 이것에 근거하는 것일 가능성도 있는[11].
서민에게는 불교가 침투하고 있지 않고,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육식은 계속되었다.나라시대에는 전시대부터 음식 되고 있던 동물에 가세해날다람쥐도 음식 되었지만, 악취가 강하기 위해(때문에) 이 외의 시대로는 별로 예가 없다.또, 식초를 사용해 사슴의 내장을회로 하는 일도 시작할 수 있었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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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안 시대에도 귀족의 사이에서의 식육의 금기는 계속 되었다.914년(엥기14년)에 나온 한학자미요시 기요유키의『의견 12 조목』에는, 파계승이 성膻(고기와 간)를 먹는 것을 평가해「형태는 사문을 닮고, 마음은 도아의 여 해」와 쓰여되고 있어식육의 금기가 있던 것, 및 일부에서는 그것을 승려조차 찢고 있던 것, 수육을 처리하는 도아라고 하는 직업이 있어 그것이 차별되는 존재인 것 등을 나타내고 있다.935년(죠헤이5년)에 편찬 된 사전 『일본에서 부르는 이름 유취초』인륜부 제6 어업류 제2십일[12]에서는, 도아의 일본에서 부르는 이름을「네새」로 해, 의미는「매雞용무의 먹이를 배달시키는 사람」바꾸어「우마를 이기고 고기를 파는 사람」라고 하는 의미라면 해설하고 있어, 수육을 파는 장사가 있던 것을 아는[3].
또『일본에서 부르는 이름 유취초』에는 멧돼지, 토끼, 돼지등이 음식 된 것도 기재되어 있어 이것들은하레일의 밥상에 나왔다.평안시대에는음양도가 활발하게 된 적도 있어, 수육식의 금기는 강해져, 대신해 새나 어육이 음식 되게 되었다.이것이 어육의 가격 상승의 원인이 되어,엥기식에 기재된 미와 가다랑어로 만든 포와의 교환 비율은,200년전의 다이호령때와 비교해서 2 - 3배에 오르고 있는[1].엥기식에는 수육의 기재가 거의 없지만, 한편으로 록해(이바지해 띠어 소금), 토해 등 수육의 간장 담그어나, 육장(큰 다랑어 소금)이라고 하는 수육의 소금절이를 발효 시킨 조미료에 관한 기재도 있다[9].유제품도 한층 더 많이 섭취해지게 되어 있다.
평안 말기가 되면공자에게 식육을 올려야할 행사석전제에서도 대신에 떡이나 건조조등이 이용되게 되거나 정월의치고의 선에서도 사슴 대신에전, 멧돼지 대신에 꿩이 나오게 되었다.또, 더러워져를 믿은 나머지 말고기는 유독과까지 생각되어 『쇼유키』의1016년(나가와5년)의 조에는 범죄를 범한 남자에게 말고기를 먹인 취지가 기록되고 있는[3].당시의 의학서 『의심방』로 해 고기(수육)와 어육의 상극이 좋지 않으면 기록되어 있거나,『지금과 옛날 이야기』에는 서민이 이바지해 고기를 사러 가는 장면이 나오거나와 완전하게 식육의 습관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1].헤이안 시대의고고슈이에는 고대로 해「대지주코우, 타를 영 일, 소의 육을 전인에 음식은 키」와 있어, 세신에 대한 제사로서 농민에게 쇠고기를 먹일 수 있었던 것이 쓰여져 있다.다만 고고슈이내의 창작이다고 할 가능성도 지적되고 있는[13]
일본판 Wiki보다
http://ja.wikipedia.org/wiki/%E6%97%A5%E6%9C%AC%E3%81%AE%E7%8D%A3%E8%82%89%E9%A3%9F%E3%81%AE%E6%AD%B4%E5%8F%B2#.E6.AD.A6.E5.A3.AB.E3.81.AE.E6.99.82.E4.BB.A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