ミリタリー

北から連行された女性たちが韓国兵の「性奴隷」になった過去

http://www.news-postseven.com/archives/20150511_321285.html
ポストセブン 2015.5.11


金貴玉 漢城大学教授

 韓国政府が旧日本軍の慰安婦関連史料を永久保存し、ユネスコの世界遺産登録を目指しているという。だが、そこに自国による「韓国軍慰安婦」の史料は含まれない。ならば、歴史の闇に埋もれる前にここで公開しよう。

 韓国軍が女性をどのように扱ってきたかという歴史的記録の数々を、在韓ジャーナリストの藤原修平氏が明らかにする。



* * *

 朝日新聞が「吉田証言」(文筆家・吉田清治氏の「日本軍が朝鮮人女性を連行し慰安婦にした」という証言)の誤報を認めた昨年8月以降、強制連行のカードを失った韓国政府は、慰安婦の“人権蹂躙”を訴える戦術に舵を切った。日本政府から謝罪と賠償をもぎ取るための材料だった「強制性」の根拠が揺らいでいるからだ。

 人権蹂躙は、韓国が慰安婦問題で日本を非難するうえでの基盤となっている。これをクローズアップし国際社会からの同調を得て、自国に有利な国際世論を形成しようという算段だ。その一方で、「正しい歴史認識」が口癖の韓国政府は、自国が主導したもう一つの慰安婦の存在をひた隠しにしてきた。

 韓国軍慰安婦の存在が初めて韓国メディアで報じられたのは2002年2月。慶南大学の金貴玉・客員教授(現・漢城大学教授)が「朝鮮戦争中に韓国軍慰安婦がいた」という調査報告を、立命館大学の国際会議席上で発表したのである。このことは『朝鮮日報』をはじめとする韓国の主要メディアで大きく報じられ、韓国社会に衝撃を与えた。

 金教授が根拠の一つとして挙げたのが、1956年に韓国陸軍本部が編纂した公式資料『後方戦史・人事編』にある記述だ。

 現在、この資料を民間人が閲覧することは困難であるが、筆者はわずかな手掛かりから資料の入手に成功した。そこには朝鮮戦争(1950〜1953年)時の「特殊慰安隊」設置の経緯が次のように記されていた。

「士気昂揚はもちろん、長期間の戦闘で異性に対する憧憬から惹起される生理作用がもたらしうる性格の変化、憂鬱症やその他の支障を未然に防止するために、特殊慰安隊を設置することになった」

 資料では、慰安隊として活動する女性を「慰安婦」と称し、「週2回、軍医官が厳格な検診を行い、性病に対する徹底的な対策を講じた」ことも明記されていた。性病検診を定期的に行うのは、慰安婦が不特定多数の兵士と性的な関係を持つことを前提としていたためで、韓国陸軍はそうした組織を公式部隊として運営していたことが判る。

 慰安隊はソウル市中区忠武路周辺と、日本海に面した江原道江陵地区にそれぞれ3部隊、そのほか江原道の主要都市である原州、春川、束草にそれぞれ1部隊が配置され、計9か所に89名の慰安婦が動員された。

 慰安隊の運営開始時期については定かではない。ただ、設置目的が朝鮮戦争で戦う韓国軍のためであること、前述の『後方戦史』に1952年の特殊慰安隊実績統計表が掲載されていることから、1951年までには運営が開始されたと推定される。なお、慰安隊の廃止は1954年3月と明記されていた。

 統計表には、4部隊における1952年の利用実績が月ごとにまとめられている。利用者が多くなるのは春から夏にかけてで、最も多いのは8月の約2万2000名。1年間の利用者は延べ約20万5000名に上った。慰安婦は単純計算で1日平均6名以上の兵士の相手をしていた計算になる。

 金教授は、「上記9か所の固定式慰安所のほかに、移動式慰安所があった」ことも明らかにしている。後者は軍部からの要請があると、指示された部隊まで出張して特定期間テントを張り、そこで運営する形態をとっていた。

 移動式慰安所については、朝鮮戦争に参加した元韓国軍幹部の回顧録にも書かれている。例えば、全斗煥政権下で陸軍第二司令部司令官などを歴任した車圭憲氏は、回顧録『戦闘』(1985年)の中で、「24人用の野戦テントの内部をベニヤ板と防水布で仕切った野戦寝室に慰安婦は収容されていた」と、当時の移動式慰安所の光景を綴っている。

 また、同じ頃に首都師団の小隊長であった金喜午氏の回顧録『人間の香り』(2000年)によれば、移動式慰安所には「小隊ごとに2名(中隊全体で合計6名)の慰安婦が日中の8時間に限って宛がわれていた」という。

 さらに金氏は、慰安隊が「第五種補給品」と呼ばれていたことを同書に記していた。

 韓国軍の実際の軍補給品は食料や被服類、燃料など一〜四種までで、慰安婦をそれに並列させるこの俗称は、慰安隊の女性たちが“物品”として扱われていたことを示している。これが「人権国家」を標榜する韓国の実態だった。

※SAPIO2015年6月号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67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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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에서 연행되어 한국병의 「성 노예」에

북쪽에서 연행된 여성들이 한국병의「성 노예」가 된 과거

http://www.news-postseven.com/archives/20150511_321285.html
포스트세븐 2015.5.11


금귀옥한성대 마나부 교수

 한국 정부가 구일본군의 위안부 관련 사료를 영구 보존 해, 유네스코의 세계 유산 등록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한다.하지만, 거기에 자국에 의한「한국군 위안부」의 사료는 포함되지 않는다.(이)라면, 역사의 어둠에 파묻히기 전에 여기서 공개하자.

 한국군이 여성을 어떻게 취급해 왔는가 하는 역사적 기록의 여러 가지를, 주한 져널리스트 후지와라 슈헤이씨가 분명히 한다.



* * *

 아사히 신문이「요시다 증언」(문필가・요시다 세이지씨의「일본군이 한국인 여성을 연행해 위안부로 한」라고 하는 증언)의 오보를 인정한 작년 8월 이후, 강제 연행의 카드를 잃은 한국 정부는, 위안부의“인권 유린”를 호소하는 전술에 키를 잘랐다.일본 정부로부터 사죄와 배상을 빼앗기 위한 재료였다「강제성」의 근거가 요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권 유린은, 한국이 위안부 문제로 일본을 비난 하는데의 기반이 되고 있다.이것을 클로즈 업 해 국제사회로부터의 동조를 얻고, 자국에 유리한 국제 여론을 형성하려는 변통이다.그 한편,「올바른 역사 인식」가 말버릇의 한국 정부는, 자국이 주도한 또 하나의 위안부의 존재숨기러로 해 왔다.

 한국군 위안부의 존재가 처음으로 한국 미디어로 보도된 것은 2002년 2월.경남 대학의 금귀옥・객원 교수(현・한성대 마나부 교수)가「한국 전쟁중에 한국군 위안부가 있던」라고 하는 조사보고를, 리츠메이칸 대학의 국제 회의 석상에서 발표했던 것이다.이것은『조선일보』를 시작으로 하는 한국의 주요 미디어로 크게 보도되어 한국 사회에 충격을 준 .

 김 교수가 근거의 하나로서 든 것이, 1956년에 한국 육군 본부가 편찬 한 공식 자료『후방 전사・인사편』에 있는 기술이다.

 현재, 이 자료를 민간인이 열람하는 것은 곤란하지만, 필자는 몇 안 되는 실마리로부터 자료의 입수에 성공했다.거기에는 한국 전쟁(1950〜1953년) 시의「특수 위안대」설치의 경위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었다.

「사기 고양은 물론, 장기간의 전투로 이성에 대한 동경으로부터 야기 되는 생리 작용이 가져올 수 있는 성격의 변화, 우울증이나 그 외의 지장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특수 위안대를 설치하게 된 」

 자료에서는, 위안대로서 활동하는 여성을「위안부」로 칭해, 「주 2회, 군의관관이 엄격한 검진을 실시해, 성병에 대한 철저한 대책을 강구한」일도 명기되어 있었다.성병 검진을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것은, 위안부가 불특정 다수의 병사와 성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로, 한국 육군은 그러한 조직을 공식 부대로서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 안다.

 위안대는 서울시 중구 충무로 주변과 일본해에 접한 강원도 강릉 지구에 각각 3 부대, 그 외 강원도의 주요도시인 원주, 춘천, 속초에 각각 1 부대가 배치되어 합계 9나 곳에 89명의 위안부가 동원되었다.

 위안대의 운영 개시시기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단지, 설치 목적이 한국 전쟁으로 싸우는 한국군을 위해인 것, 전술의『후방 전사』에 1952년의 특수 위안대 실적 통계표가 게재되고 있는 것부터, 1951년까지는 운영이 개시되었다고 추정된다.덧붙여 위안대의 폐지는 1954년 3월로 명기되어 있었다.

 통계표에는, 4 부대에 있어서의 1952년의 이용 실적이 달 마다 정리하고 있다.이용자가 대부분지는 것은 봄부터 여름에 걸쳐로, 가장 많은 것은 8월의 약 2만 2000명.1년간의 이용자는 펴 약 20만 5000명에 달했다.위안부는 단순 계산으로 1일평균 6명 이상의 병사의 상대를 하고 있던 계산이 된다.

 김 교수는, 「상기 9나 곳의 고정식 위안소 외에, 이동식 위안소가 있던」일도 분명히 하고 있다.후자는 군부로부터의 요청이 있으면, 지시받은 부대까지 출장해 특정 기간 텐트를 쳐, 거기서 운영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이동식 위안소에 대해서는, 한국 전쟁에 참가한 전 한국군 간부의 회고록에도 쓰여져 있다.예를 들면, 전두환 정권하에서 육군 제2 사령부 사령관등을 역임한 차규헌씨는, 회고록『전투』(1985년) 중(안)에서, 「24명용의 야전 텐트의 내부를 베니어판과 방수포로 나눈 야전 침실에 위안부는 수용되고 있던」와 당시의 이동식 위안소의 광경을 쓰고 있다.

 또, 같은 무렵에 수도 사단의 소대장인 금희오씨의 회고록『인간의 향기』(2000년)에 의하면, 이동식 위안소에는「소대 마다 2명(중대 전체로 합계 6명)의 위안부가 일중의 8시간에 한해서 앞이 깨지고 있던」라고 한다.

 한층 더 김씨는, 위안대가「제5종 보급품」로 불리고 있던 것을 동서에 적고 있었다.

 한국군의 실제의 군보급품은 식료나 피복류, 연료 등 1〜4종까지로, 위안부를 거기에 병렬시키는 이 속칭은, 위안대의 여성들이“물품”로서 다루어지고 있던 것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이것이「인권 국가」를 표방하는 한국의 실태였다.

※SAPIO2015 연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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