うちの町内

併合時の朝鮮半島はもう本当になにもなかった。道路らしい道路もなく、病院も、学校も、工場も、灌漑農業も整備されていない。両班(ヤンバン)と呼ばれる官僚がのさばる政治は機能しておらず、裁判制度やまっとうな警察もない。山に木はなく、禿山だらけ。これは焼畑農業と朱子学に基づく墓場の建て方によるものだ。よって水害が多く、飢餓が蔓延。ソウルは上下水道なく、糞尿の匂いに鼻が曲がったと当時訪れた外国人が手記を残している。

それを韓国・北朝鮮では、日本人がやってきて我が国の山々を禿げ山にし、ハングルを奪い、文化財を奪い、朝鮮名を奪い、女を誘拐し売春婦にしたと国民に教える。子はやがて親となり、同じように子に伝える。さらに尾ひれをつけて。異を唱える者は口を封じられた。戦後の日本も同じ。「韓国にはいいこともした」と発言しただけで法務大臣が更迭された。まるでおとぎの国のようである。

植民地当時(1910~1945年)に撮影された写真がある。論より証拠。百聞は一見に如かず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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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年12月に「朝鮮問題同志連合社」という団体を通じて日本側に届けられた電報。清に勝ち、ロシアにも勝った日本と合邦することで生き残ろうとする当時の朝鮮半島の意志の集合。各階級、一般人民公平に集めたと記録にある。【『日本之朝鮮』有楽社1911年発行】


■ 朝鮮総督府の建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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台湾では台湾総督府があったように、朝鮮半島の日本統治は総督府を通じて行われた。戦後しばらく国立博物館として使用されていたが、1993年に「悪しき歴史産物」として取り壊された。日本の国会議事堂より豪華な印象である。【『朝鮮事情』1940年発行】

■ 京城(ソウル)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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竣工は東京駅と同じ1925年、1894年から1945年にかけて日本は朝鮮半島全土に5000kmもの鉄道を網の目のように敷いた。ちなみにソウルと北京は鉄道で結ばれ、特急が往来していた。その意味では、今より平和な時代だったのだ。【『日本地理風俗大系・朝鮮地方』新光社1930年発行】

■ 特急『ひかり』と『のぞ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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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幹線が登場するはるか昔に、ひかりとのぞみは豪華特急として、なんと朝鮮を走っていたのだ。満州鉄道のあじあ号と同様、内地の日本人も憧れる列車であった。乗客の80%は韓国・朝鮮人だったと記録にある。【『半島の近影』朝鮮総督府鉄道局1937年発行】


■ ハングルを教える小学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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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人はハングルを禁じた」などと言われるが、実際には李王朝朝鮮時代にハングルは「下級文字」として軽蔑され、一部の婦女子しか使われていなかったのを、日本人が「文化復興」としてハングルを再び普及させた。けれどもハングルだけでは語彙が足らないので漢字を併記した。【『生活状態調査』朝鮮総督府1921年調査】


■ 生徒の作品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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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どもたちは、好きな文字を使って習字をしていたようだ。少なくてもこれだけで「ハングル禁止」がでっち上げであることがわかる。【『漢洞公立普通学校創立30周年記念集』より】


■ 京城帝国大学(現:医学博物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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ただ奪うだけの植民地なら欧米諸国がそうしたように愚民化政策をとる。ところが日本は学校を何千も建て、大学まで創立していた。大阪帝国大学、名古屋帝国大学よりも十数年早く、京城帝国大学は開校された。それにしても瀟洒な建物である。【『京城帝国大学一覧』1936年発行】


■ 漢江大鉄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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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年、京城と仁川に架けられた大鉄橋。当時東洋一の規模を誇ったといわれる。橋桁を中心に橋架部分が回転し、大きな船が通れるようになっていた。当時の人々は度肝を抜かれたが、いま見てもすごい。【『日本地理風俗大系・朝鮮地方』新光社1930年発行】


■ 植林のよう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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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千余萬円を投じ十五年がかりで鮮内の禿山を退治」という見出しで当時の新聞があるが、日本統治前は朝鮮半島の山々はほとんど木が生えていなかった。これは「火田民」という焼畑農家や朝鮮式の墓の伝統などの悪影響もある。それを総督府は全土に渡り「緑化運動」として、せっせと植林を遂行していった。そんな日本人の性質は、今なお瑞々しい日本列島を見れば納得である。【『平壌府』1932年朝鮮総督府発行】


■ 「創氏改名」手続きに殺到する民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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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望者には日本名を与えられるとし、受付をはじめたところ(期間:1940年2月11日~8月10日)人々が殺到し、およそ80%の朝鮮人が日本名に変えた。当時の朝鮮人の4割は賤民と呼ばれる「苗字」のない人々。まずこの人達が苗字ほしさに日本名に変えた。加えて朝鮮名だと中国人から侮蔑されるため、日本人名を名乗リたがる人々もいた。ちなみに台湾でも同じ創氏改名を募集したところ、たった1.6%しか改名しなかったという。【『朝鮮事情』1941年朝鮮総督府より】


■ 近代農法の教育と実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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万年餓死者をだしていた朝鮮半島。日本は近代農法を教え耕地面積を増やした。おかげで1910年から30年かけて約2倍も増やし、一坪当たりの生産量も増えた。焼畑農家の「火田民」に燃やされてはと、彼らには農地を払い下げもした。おかげで総人口も同時期、1331万人から2470万人に増えたと記録にある。同じころ、朝鮮半島に住む内地人(日本人)は約3%の71万人。


■ 裁判ビフォー・アフタ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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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の写真が李王朝朝鮮時代の裁判(1910年)、被告は地面に座らされまるで日本の江戸時代以前の光景である。下は同じく1910年のものだが、日本からの裁判制度に則った裁判のようす。被告はちゃんとイスに座っている。近代国家に近代的な制度は欠かせない。日本はどれも手を抜かなかった。【『日本之朝鮮』1911年有楽社発行】


■ 豊かな生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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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ホテルのサンテラスのようす。人々もモダンで同時期の銀座かそれ以上だ。朝鮮で初めてアイスクリームが食べれる場所としても名を馳せた。ウエスティンホテルとして、いまも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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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代国家にレクリエーション施設は欠かせない。海水浴場にキャンプ場、登山設備、そして写真の三防スキー場。統治時代にはさまざまな施設が作られ、人々はそこで休日を楽しんだ。【『半島の近影』朝鮮総督府1937年発行】


■ 電力インフラ、三宝ダ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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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統治時代は重化学工業が発展したが、そのためには電力が必要だ。写真は三宝ダム。70万キロワットを発電する当時、東洋一のダムだった。日本の黒部ダムはその半分の33万キロワット。発電機は戦後のどさくさにソ連が持ち帰ってしまったが、残りの発電機を使って、いまも北朝鮮の重要な電力インフラである。



日本政府がこれらを朝鮮半島に投じた予算はのべ14兆円。
ほとんどが当時の日本人の血税でまかなった。戦後、これらの施設、設備、インフラはすべて摂取された。半島から引き上げてきた日本人は、建てた家も個人資産もすべて取り上げられた。そのうえ石持て追われ、女子は陵辱を受け、殴り殺された男たちもいる。日本は韓国・北朝鮮と交戦していたわけではない。むしろ共に戦った。韓国人の日本軍将兵は佐官クラスもいたのだ。置き土産としてはとんでもなく豪華である。だが日本人は我慢した。戦争で負けたのがいけなかったのだと。韓国はこれらの借款を返還するどころか、さらに賠償金を1900億円(当時のレートで)要求し、やはり日本はこれを払う。ちなみにこの金額は当時の韓国の国家予算の実に2.3倍。いくらなんでも取り過ぎである。「これ以上賠償金を払わずとも良い」とゴリ押しされた日韓基本条約に則ったのだ。

いまでも韓国人たちは、世界中のメディアを使って、日本からは謝罪も賠償もないと抗議する。なにが真実でなにが虚構か、ぼくたちはいまいちど、リテラシーを持ってあたりたい。日本のマスコミや教科書もあてにならないからだ。爪に火をともすような生活を強いられながら、朝鮮半島の、満州の、台湾の近代化のために血と汗と税金を払ってきた先人たちの労苦を仇にしてはならないと、つくづく思う。「すべては戦争が悪い」と片付けるには、あまりに殺生である。


以上一切合切某ブログよりコピペ


木を植えて、ダムを作って......etc
木を植えて、ダムを作って......etc

木を植えて、ダムを作って......etc








불필요한 일을 해 준 것이다

병합시의 한반도는 더이상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도로인것 같은 도로도 없고, 병원도, 학교도, 공장도, 관개 농업도 정비되어 있지 않다.양반(얀 밴)으로 불리는 관료가 제멋대로 설치는 정치는 기능하고 있지 않고, 재판 제도나 정직한 경찰도 없다.산에 나무는 없고, 하게야마 투성이.이것은 화전 농업과 주자학에 근거하는 묘지의 결정 방법에 의하는 것이다.따라서 수해가 많아, 기아가 만연.서울은 상하수도 없고, 분뇨의 냄새에 코가 구부러졌다고 당시 방문한 외국인이 수기를 남기고 있다.

그것을 한국・북한에서는, 일본인이 와 우리 나라의 산들을 벗겨져 산으로 해, 한글을 빼앗아, 문화재를 빼앗아, 조선명을 빼앗아, 여자를 유괴해 매춘부로 했다고 국민에게 가르친다.아이는 이윽고 부모가 되어, 똑같이 아이에게 전한다.한층 더 꼬리와 지느러미를 붙여.반대 의견을 내세우는 사람은 입을 봉쇄되었다.전후의 일본도 같다.「한국에는 좋은 일도 한」라고 발언한 것만으로 법무부 장관이 경질되었다.마치 동화 나라같다.

식민지 당시 (1910~1945년)에 촬영된 사진이 있다.확실한 증거.백문이 불여 일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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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2월에「조선 문제 동지 연합사」라고 하는 단체를 통해서 일본 측에 도착된 전보.청에 이겨, 러시아에도 이긴 일본과 합방 하는 것으로 살아 남으려고 하는 당시의 한반도의 의지의 집합.각층급, 일반인민 공평하게 모았다고 기록에 있다.【『일본지조선』유라쿠사 1911년 발행 】


■ 조선 총독부의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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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에서는 대만 총독부가 있던 것처럼, 한반도의 일본 통치는 총독부를 통해서 행해졌다.전후 당분간 국립 박물관으로서 사용되고 있었지만, 1993년에「나쁜 역사 산물」로서 해체되었다.일본의 국회 의사당보다 호화로운 인상이다.【『조선 사정』1940년 발행 】

■ 경성(서울)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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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공은 도쿄역과 같은 1925년, 1894년부터 1945년에 걸쳐 일본은 한반도 전 국토에 5000 km의 철도를 그물코와 같이 깔았다.덧붙여서 서울과 북경은 철도로 연결되어 특급이 왕래하고 있었다.그 의미에서는, 지금보다 평화로운 시대였던 것이다.【『일본 지리 풍속 대계・조선 지방』요시미츠사 1930년 발행 】

■ 특급『빛』와『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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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선이 등장아득한 옛날에, 빛과 희망은 호화 특급으로서 무려 조선을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만주 철도의 맛아호와 같이, 내지의 일본인도 동경하는 열차였다.승객의 80%은 한국・한국인이었다고 기록에 있다.【『반도의 근영』조선 총독부 철도국 1937년 발행 】


■ 한글을 가르치는 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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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은 한글을 금지한」 등이라고 말해지지만, 실제로는 이 왕조 조선시대에 한글은「하급 문자」로서 경멸되어 일부의 부녀자 밖에 사용되지 않았던 것을, 일본인이「문화 부흥」로서 한글을 다시 보급시켰다.그러나 한글만으로는 어휘가 부족하기 때문에 한자를 병기 했다.【『생활상태 조사』조선 총독부 1921년 조사 】


■ 학생의 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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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좋아하는 문자를 사용하고 습자를 하고 있던 것 같다.적어도 이만큼으로「한글 금지」가 꾸며내인 것을 알 수 있다.【『한동공립 보통 학교 창립 30주년 기념집』보다 】


■ 경성 제국대학(현:의학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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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빼앗을 만한 식민지라면 구미제국이 그러한 같게 우민화 정책을 취한다.그런데 일본은 학교를 몇천도 세워 대학까지 창립하고 있었다.오사카 제국대학, 나고야 제국대학보다 수십년 빨리, 경성 제국대학은 개교되었다.그렇다 치더라도 소쇄인 건물이다.【『경성 제국대학 일람』1936년 발행 】


■ 한강대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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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경성과 인천에 걸쳐 놓을 수 있었던 대철교.당시 동양1의 규모를 자랑했다고 말해진다.하시케타를 중심으로 교가 부분이 회전해, 큰 배를 통과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당시의 사람들은 깜짝 놀랐지만, 지금 봐도 대단해.【『일본 지리 풍속 대계・조선 지방』요시미츠사 1930년 발행 】


■ 식림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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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천여만엔을 투자해 15년 걸려 선내의 하게야마를 퇴치」라고 하는 표제로 당시의 신문이 있지만, 일본 통치전은 한반도의 산들은 거의 나무가 나지 않았었다.이것은「화전민」라고 하는 화전 농가나 조선식의 무덤의 전통등의 악영향도 있다.그것을 총독부는 전 국토에 건너「녹화 운동」로서 빨리 식림을 수행하며 갔다.그런 일본인의 성질은, 지금 더 서들주위 일본 열도를 보면 납득이다.【『평양부』1932년 조선 총독부 발행 】


■ 「창신개명」수속에 쇄도하는 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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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자에게는 일본명이 주어진다고 해, 접수를 시작했는데(기간:1940년 2월 11일~8월 10일) 사람들이 쇄도해, 대략 80%의 한국인이 일본명으로 바꾸었다.당시의 한국인의 4할은 천민으로 불리는「성씨」가 없는 사람들.우선 이 사람들이 성씨 가지고 싶음에 일본명으로 바꾸었다.더해 조선명이라면 중국인으로부터 모멸되기 위해, 일본인명을 명승리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덧붙여서 대만에서도 같은 창신개명을 모집했는데, 끊은 1.6% 밖에 개명하지 않았다고 한다.【『조선 사정』1941년 조선 총독부보다 】


■ 근대 농법의 교육과 실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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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 아사자를이고라고 있던 한반도.일본은 근대 농법을 가르침 경지 면적을 늘렸다.덕분에 1910년부터 30년 걸려 약 2배나 늘려, 한평당의 생산량도 증가했다.화전 농가의「화전민」에 태워져와 그들에게는 농지를 불하도 했다.덕분에 총인구도 동시기, 1331만명에서 2470만명에 증가했다고 기록에 있다.같은 무렵, 한반도에 사는 내지인(일본인)은 약 3%의 71만명.


■ 재판 비포・애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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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이 이 왕조 조선시대의 재판(1910년), 피고는 지면에 앉혀져 마치 일본의 에도시대 이전의 광경이다.아래는 같이 1910년의 것이지만, 일본으로부터의 재판 제도에 준거한 재판의 모습.피고는 분명하게 의자에 앉아 있다.근대국가에 근대적인 제도는 빠뜨릴 수 없다.일본은 어느 것도 대충 하지 않았다.【『일본지조선』1911년 유라쿠사 발행 】


■ 풍족한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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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호텔의 산테라스의 모습.사람들도 모던하고 동시기의 긴자인가 그 이상이다.조선에서 처음으로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는 장소라고 해도 이름을 달렸다.웨스틴호텔로서 지금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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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국가에 레크리에이션 시설은 빠뜨릴 수 없다.해수욕장에 캠프장, 등산 설비, 그리고 사진의 3방스키장.통치 시대에는 다양한 시설이 만들어져 사람들은 거기서 휴일을 즐겼다.【『반도의 근영』조선 총독부 1937년 발행 】


■ 전력 인프라, 산보 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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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치 시대는 중화학공업이 발전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전력이 필요하다.사진은 산보 댐.70만 킬로와트를 발전하는 당시 , 동양1의 댐이었다.일본의 쿠로베댐은 그 반의 33만 킬로와트.발전기는 전후의 혼잡에 소련이 가지고 돌아가 버렸지만, 나머지의 발전기를 사용하고, 지금도 북한의 중요한 전력 인프라이다.



일본 정부가 이것들을 한반도에 투여한 예산은 말해 14조엔.
대부분이 당시의 일본인의 혈세로 조달했다.전후, 이러한 시설, 설비, 인프라는 모두 섭취되었다.반도로부터 끌어올려 온 일본인은, 세운 집도 개인 자산도 모두 다루어졌다.게다가 조기라고 쫓겨 여자는 능욕을 받아 때려 살해당한 남자들도 있다.일본은 한국・북한과 교전하고 있던 것은 아니다.오히려 모두 싸웠다.한국인의 일본군장병은 영관 클래스도 있었던 것이다.선물로서는 터무니 없고 호화롭다.하지만 일본인은 참았다.전쟁으로 졌던 것이 안 되었던 것이다와.한국은 이러한 차관을 반환하기는 커녕, 한층 더 배상금을 1900억엔(당시의 레이트로) 요구해, 역시 일본은 이것을 지불한다.덧붙여서 이 금액은 당시의 한국의 국가 예산의 실로 2.3배.너무 아무리 뭐라해도 취하다.「더 이상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고와도 좋은」와 고리 눌러 된 한일 기본 조약에 준거했던 것이다.

지금도 한국인들은, 온 세상의 미디어를 사용하고, 일본에서는 사죄도 배상도 없다고 항의한다.뭐가 진실하고 뭐가 허구인가, 우리들은 지금 한 번, 리터러시를 가지고 맞고 싶다.일본의 매스컴이나 교과서도 도움이 안되기 때문에다.손톱에 불을과도 같은 생활을 강요당하면서, 한반도의, 만주의, 대만의 근대화를 위해서 피와 땀과 세금을 지불해 온 선인들의 노고를 원수으로서는이라면 없으면 절실히 생각한다.「모든 것은 전쟁이 나쁜」와 정리하려면 , 너무나 잔인하다.


이상 전부 모브로그보다 코피페


나무를 심고, 댐을 만들어......e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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