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耕織図の来由


●. .風七月図


耕織図は農業とザムジック (蠶織)の風景を描いた絵だ畑ガルイをするという意味の 耕 ,織物を組むという意味の 織 この二つの字を合わせて

耕織図と言う

市警(詩経)の 風 編は中国 周国のメッカ国の歌を集めて作ったことだ


耕織図は 元々市警(詩経)と, 市警を基盤で作ったビンプングチルワルも(風七月図)と無一刀(無逸)を基盤で作られた


風図市警(詩経)の 風 編の前編 ,すなわち七月(七月) チヒョ() 動産(東山) 派部(破斧) 着が(伐柯) 区域 (九 ) ナングバル( 狼跋) など

七編を皆グリーンので

が中に特に民たちの生業農業や蚕業と係わる風俗を月令 (月令)形式で詠じた 七月 編の内容を描いた絵が多くて

風七月図 と言った


●無逸図


無一刀(無逸図)は 書経の朱書(周書) 無逸 編の内容を振り返るためにガムギェゾック目的に描いた絵だ

無逸というのは民を責任負う国家治者は自分の楽しみや楽さを追い求めてはいけないという意味で


無逸 便は 周国の住公(周公)がソブゾングウをやめて甥を 成王で登極させたが幼くて経験が不足な 成王エゲ

国家治者として民たちを治める姿勢と民たちの生業に対する難しさが分かるようにするために書いた文だ


中国で 風七月図に対する記録は唐時代の美術史学が 張彦遠が編んだ 歴代名画記に初めて現われる

が本で 晉明帝の作品リストの中にビンシチルワルも(詩七月図)に確認されるが絵は伝えない


<風七月図> と <無逸図>は民たちの生業の基本になる農業とザムジックなど大変な労動を見せてくれて国家治者として正しい政治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

民本主義思想に土台を置いたガムギェゾック性格の絵だ


● ヌスックギョングジックも

ヌスックギョングジックも (樓〓耕織図)は 南宋の 樓〓 (1090年‾1162年)が 浙江省 於県の県令に在任する当時 風七月図を近刊で

耕作図 21場面 蠶織図 24場面を製作して高宗皇帝に捧げたのが始めに知られている 樓〓が描いたことを 樓〓耕織図と言う


一幅に一場面を描いて上端には 詩を使って下端には 詩に当たる場面を絵で描いた

樓〓耕織図は後に 清代のペムンゼギョングジックも ( 佩文斎耕織図)につながった

● ペムンゼギョングジックも

樓〓耕織図を 清代にまた描いたのがペムンゼギョングジックも (佩文斎耕織図)だ

農業作りとかいこ稚気する姿を描いたし絵上端に 御題 詩を使って付けたりした

清代の画家チォビョングゾング(焦秉貞)が洋画の透視遠近法など新しい技法を使って

ペムンゼギョングジックも (佩文斎耕織図)を描いて 御題を付けて木版画で製作して広く普及した


18世紀ヌスックギョングジックも(樓〓耕織図) かいこ稚気 .朝鮮時代画家 金弘道 作品と伝わっている


朝鮮時代 耕織図

1, ヌスックギョングジックも (樓〓耕織図)


朝鮮時代 樓〓耕織図は一幅に一場面を描いて上には 詩を使って下にはその 詩に当たる場面を絵で描いた

朝鮮時代の作品 樓〓耕織図は画家 金弘道 作品と知られている耕作も 12点ザムジックも 18点で 30枚だ

朝鮮時代耕織図(耕織図)は大きく <樓〓耕織図>と <佩文斎耕織図>で分類する


朝鮮時代 耕織図という名称が初めて登場したことは 成俔 (1439年‾1504年)が使ったホ白糖集 (虚白堂集)に収録されている 奉教耕織図後序だ


が文には 1489年 (燕山君 4年)に 正朝使として明に使臣で訪問した 権景優が 明国から 樓〓耕織図を持って来て

燕山君に捧げたと言うだから 樓〓耕織図は 1498年に朝鮮に流入されたことで見られる


2.無逸図


無一刀(無逸図)に対する記録は高麗時代フンヨシブゾ(訓要十條 ) 第10条に出るのに内容は次のようだ


国家を持った 者はいつも無事な時を警戒するはずで広く 経史をソブリョブして過去の例を鏡にして現実を警戒しなさい

周公は同じ対象も 無逸 (安逸 , 油断しないでね)1編を作って 成王に捧げたからこれを使って付けて出入りする度に見て察しなさい .


フンヨシブゾ(訓要十條 )は 942年高麗太祖が子孫を訓戒するために至恩 10種の遺訓だ


3, 風七月図


韓国で 風七月図に対する最初記録は <太宗実録 1402年 4月>に登場する礼曹判書前で (礼曹典書) 金瞻が 太宗に 風図を捧げたし

ここに太宗は 金瞻にネグマ(内廐馬)を下賜したという記録がある


世宗6年 (1424年)には芸文館大提学 卞季良に民たちの貧しい生活を盛った絵を月令形式で製作しなさいと指示を下したという記録があって

世宗15年(1433年)には朝鮮の風速を土台にする 風七月図を製作しなさいと集賢殿に指示を下したという

記録はあるが当時絵は伝わらないのに


李〓運 (1761年‾ 1815年以後)の描いた 風七月図は伝わっている


李〓運 (1761年‾ 1815年以後)の 風七月図


4. ペムンゼギョングジックも 佩文斎書画譜


以後 清国の画家 焦秉貞が <樓〓耕織図>を基盤で新たに製作した 耕織図が 1696年にペムンゼソファボ(佩文斎書画譜)に登載されながら

<佩文斎耕織図 >様式が登場するようになった

1697年に 清国に 奏請使 すなわち使節団でに行った催石井(崔錫鼎)が北京で朝鮮に帰って来る時 清代の画家 焦秉貞の 佩文斎耕織図を

持って来たと言う 肅宗の命令で画家 秦再奚が 耕作図と 蠶織図を分けて描いた


佩文斎書画譜 (肅宗御題蠶織図)

が絵は 1697年朝鮮時代 肅宗の命令で描いた絵だ図画署画家 秦再奚の作品と知られている


上に書いた 御題 詩は

春の日はのろく行くが天気は暖かくなって奥さんはたけ篭をはめて桑を取るためにバプダだね

燈の下で手まめに仕事をしたらのんびりすることが少なくて窓の前で機北を冷やかして布を組もうとしてバプダだね

北地で真冬に身を覆うことができることは 西陵氏が永遠になるように残した 恩沢 おかげさまだね

寒さに震える人いないように天下に命じたから宮廷で降りる恩徳も厚いねと書いている



肅宗御題蠶織図の一部


5 民画


17世紀 佩文斎耕織図の収容で

19世紀には民間でも耕織図が製作されたがその以前時代ではなかった民たちの多様で現実的な姿が描写されている

民画でも描かれたしキム・ホンド (金弘道) など朝鮮後期風俗画発達に影響を及ぼした


耕織図は朝鮮後期に来て農家の歳時風俗と結合して農家斜眼 ( 農家四時図) (農家月令も) など朝鮮化 になって屏風形式に製作された



19世紀作品 ,田ガルイする姿


田植に先立って田ガルイをするために田に水をつけている


田ガルイは旧暦 2月から始まる 2月初ソナーを(丑日)に初ノンガルイをするのにこの日になればソプルの間に木で作った刀を縛って

赤い紙で作った花をつけてくれて田に連れて行く


このようにすれば 1年間疾病が牛(牛)を侵犯することができないという俗説がある


田ガルが方法には田に水を閉じこめてする田ガルと ., 水なしにする乾いた田ガルイがある

田ガルが回数は普通 3回から 5回位するのに 3番目田ガルイをする時は田に水を閉じこめて田ガルイを一田や ,水なしに田ガルイをした

田でも皆水を閉じこめて田ガルイをする


田ガルがと言うことは地をほって覆すことなのにこの時使う農機具はからすきだ , からすきとともに牛(牛)を利用して田ガルイをする

牛耕農業は記録で 502年新羅ジズングワングの時に始まった


牛(牛)がいくら力が良くても牛(牛) 力だけで田ガルイをしにくいから農機具からすきを結合して使う


韓国は北地方が山がもっと多くて地形が険しいからからすき一つに牛(牛)2匹を結合して田に耕して中部以南地方では

からすき一つに牛(牛)1匹を結合して田ガルイをすることが一般的だ


必ずそうなことはなくて地の土質や地形または農民の精神によって変わる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



19世紀田植する姿

動き手たちの食事を準備して橋を渡って来るおばさんと男と子供がいて下には北(鼓)を打つ人がいる

田植する人々の手数と疲れることを洗ってくれて労動のヌングリュルウルあげるために北(鼓)を打って興趣をそそっている



イハンチォル(李漢〓 1808年生まれ ) 朝鮮後期画家作品


いな刈りをしながら農楽遊びを楽しむ風景だ .左側から演奏している楽器は .どら . 鉦 .鼓 .胡カ(チャルメラ) .小太鼓だ

農繁期が始まれば村の農民の中に楽器演奏に下地がある人を選んで農楽隊を組織する農楽遊びをする理由は

大変な労動の能率をあげて労動の手数を洗ってくれるためのことだ


また農楽遊びをしながら村人々の団結と和合をはかって村の平安と豊年を祈る意味もある

現在はあの農楽遊びに使われた楽器と演奏を舞台にあげて公演をするのにこれを 四物遊びと言う



19世紀バッガルが 耕織図 屏風の中で一部 , 民間で製作された 耕織図


農業の発達で農機具も改良するようになった

草取り鎌で畑を耕している姿だ草取り鎌で畑イラングを高くして枷に種子を振り撤くのにこのようにすれば

寒い冬や日照りがひんぱんな春に

伸びる穀食が寒さと日照りによく耐えるようになって寒い北脂肪でも作物を栽培することができる


また稲収獲が終わった田に麦を植えることができて 1年に 2模作が可能だから農産物も増加する


朝鮮後期画家 劉運弘の作品 ,はたおり


床には女人が布を組んでいるし

庭先には組んだ布に何やら塗っています


シアは木化綿でさんをとり除く器具ですアムカラックとスッカラックがかみ合って帰るのに

お互いに反対方向に回転して綿はこれからすり抜けて来てさんは後に落ちます



高麗後期モンゴルの侵略で国土があばらになって政治社会的に心細くて高級織物特に絹物の生産が沈んだ


こんな状況で力強い中央集権的国家を構築した朝鮮王朝は民たちに綿業蚕業 (綿業 蠶業)を奨励する政策を広げた

綿業奨励政策で韓半島全域に木化を栽培するようになった


太祖1年 (1401年)に民たち 上下皆無名(木化綿で作った服)を着たという記録がある

世宗(在位 1418年‾1450年) 時には 下三南 (慶尚道全羅道忠清道)で栽培された木化が 北三道 (黄海道平安道咸境道)まで

北上して韓半島全域で木化が栽培された


これによって 1423年(世宗5年)には 2,640匹の綿布(綿布)を日本に輸出したと言う

当時日本では朝鮮の綿布は奢侈品だったと言う


木化が韓半島全域に栽培されて民たちの衣服生活はその以前時代よりもっと多様になって豊かになった

高麗末文益漸(文益漸)が 元国に使臣に行ってから木化さんを持って来て栽培するようになったことは広く知られているのに


実は 木綿の歴史は古かった

三国時代百済の綿織物が忠南付与ヌングサンリ寺の跡で出土された

百済の綿織物


中国文献 魏志 東夷伝によれば

馬韓はその民族が土着して農業をしたし潜商(蠶桑)が分かって綿布を作った

弁韓は土地が肥えて五穀と意気ごむ植えるのに良くて潜商が分かったし 絹布を作ったなど記録がある


1504年(燕山君10年)にトングジック(通織)を設置して布生産に実名制を取り入れて高級絹物を生産するのに努力した

その結果高級絹物と綿織物の生産技術が皆発展した


1517年(中宗12年 13年)には農民を啓蒙して養蚕を奨励する 蠶業政策を施行した

が時期は布生産が官長制(官匠制) 手工業から民間手工業で拡散する時期だ


ところで 17世紀以後には壬辰の乱を経験して極甚な経済的難しいことで高級絹物の生産が萎縮して

相対的に値段が安い綿織物の生産がもっと拡散した


朝鮮時代 17世紀長期チョン氏畝出土牡丹ノングクル柄布


朝鮮時代墓で出土された布の中に布全体に派手な蓮華や牡丹柄が詩文されている絹物は大部分 16世紀以前遺物で

17世紀以後出土された布は派手な柄の絹物より素朴な柄の綿織物が多い


壬辰の乱丙子胡乱で国家経済の貧しいことで高級絹物の生産が減少した




19世紀作品かいこ育てる姿 ,キム・ホンド作品だと伝わっています


朝鮮時代 1399年朝鮮開国後最初 先蠶祭を執り行なって養蚕を奨励した

先蠶礼は高麗時代からあって来たし王室の儀礼の中に一つで

養蚕の 神 ソルングシ(西陵氏)の面倒を見てかいこ稚気の豊饒と一年の間安定を祈る行事だ


1415年( 太宗15年)には忠北猿川郡に養蚕所(養蠶所)養蚕所を設置して絹糸を生産した


また絹物生産のために蚕業(蠶業)を奨励する意識 親蠶礼は朝鮮後期まで挙行された

親蠶礼は王妃が 内外名婦の女性たちを従えて 蠶室にお出ましして直接累に打ってポングイブを取って養蚕の大切さを民たちに

教える意識だ


蚕業(蠶業)の歴史は三韓時代記録があって中国後漢書圏85 東夷列伝第75によれば

馬韓 人々は 布で作った 袍を着る 馬韓 人々は耕作して累に打って綿布を作ることができてなど記録がある




19世紀 耕織図 織物を組む姿

民間で製作した屏風絵の中に一つだ



19世紀民間で製作した 耕織図 8ぐっすり屏風の中に一部 ,絹に彩色 .

機を織って染色する姿




조선시대 경직도 (耕織圖)

 耕織圖의 유래 


●. .豳風七月圖


耕織圖는 농사와  잠직 (蠶織)의  풍경을 그린 그림이다  밭 갈이를 한다는 의미의 耕 ,직물을  짠다는  의미의 織  이 두 글자를 합하여 

耕織圖라고 한다  

시경(詩經)의 豳風 編은  중국 周나라의 발상지 豳나라의 노래를  모아  만든  것이다 


耕織圖는   원래 시경(詩經)과  , 시경을 기반으로 만든 빈풍칠월도 (豳風七月圖)와 무일도(無逸)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豳風圖는  시경(詩經)의  豳風 編의  전편 ,즉 칠월(七月)  치효(鴟鴞)  동산(東山)  파부(破斧)  벌가(伐柯) 구역 (九罭 ) 낭발( 狼跋) 등

 일곱 편을 모두 그린 것이고 

이 중에 특히 백성들의 생업 농업이나 잠업과 관련된 풍속을  월령 (月令)형식으로  읊은  七月 編의 내용을 그린 그림이  많아 

豳風七月圖 라고 하였다 


 ● 無逸圖

 

무일도(無逸圖)는 書經의  주서(周書) 無逸 編의 내용을 되새기기 위해 감계적 목적으로 그린 그림이다 

無逸이라는  것은  백성을  책임지는  국가 통치자는  자신의  즐거움이나  편안함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며 


無逸 편은 周나라의 주공(周公)이  섭정을  그만 두고 조카를  成王으로  등극시켰는데  어리고  경험이  부족한   成王애개

국가 통치자로서   백성들을 다스리는  자세와  백성들의 생업에 대한  어려움을  알게 하기 위해  쓴  글이다 


중국에서 豳風七月圖에 대한 기록은  당나라 시대의 미술 사학가  張彦遠이 엮은   歷代名畵記에 처음 나타난다 

이 책에서  晉明帝의  작품 목록 중에  빈시칠월도(豳詩七月圖)에 확인되지만 그림은 전하지 않는다  


<豳風七月圖> 와 <無逸圖>는 백성들의 생업의 기본이 되는 농사와 잠직 등 힘든 노동을 보여 주며  국가 통치자로서 올바른 정치를 해야 한다는 

민본주의 사상에 바탕을 둔 감계적  성격의   그림이다 


● 누숙경직도 

누숙경직도 (樓璹耕織圖)는  南宋의  樓璹 (1090년~1162년)이  浙江省  於濳縣의 현령으로 재임할 당시  豳風七月圖를 근간으로 

 耕作圖 21장면  蠶織圖 24장면을  제작하여 고종 황제에게 바친 것이 시초로 알려져 있다  樓璹이 그린 것을 樓璹耕織圖라고 한다


한 폭에  한 장면을 그려서  상단에는  詩를 쓰고 하단에는  詩에 맞는 장면을 그림으로 묘사하였다 

樓璹耕織圖는 후에  淸代의  패문재경직도 ( 佩文齋耕織圖)로 이어졌다 

  

● 패문재경직도 

樓璹耕織圖를  淸代에  다시  그린  것이  패문재경직도 (佩文齋耕織圖)이다 

농사 짓기와   누에치기  하는  모습을   그렸고  그림  상단에  御題  詩를 써 붙이기도 하였다 

 

淸代의  화가 초병정 (焦秉貞)이 서양화의 투시 원근법 등 새로운  기법을 사용해 

패문재경직도 (佩文齋耕織圖)를 그려  御題를 붙이고 목판화로 제작하여 널리 보급하였다


18세기 누숙경직도(樓璹耕織圖) 누에치기 .조선시대 화가 金弘道 작품으로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 耕織圖

 

1,  누숙경직도  (樓璹耕織圖)


조선시대 樓璹耕織圖는 한 폭에  한 장면을  그려 위에는  詩를 쓰고  아래에는 그 詩에 맞는  장면을 그림으로 묘사하였다  

조선시대의 작품 樓璹耕織圖는  화가  金弘道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는 경작도 12점 잠직도 18점으로 30매이다 

조선시대 경직도(耕織圖)는 크게 <樓璹耕織圖>와  <佩文齋耕織圖>로 분류한다 


조선시대 耕織圖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한 것은 成俔 (1439년~1504년)이  쓴  허백당집 (虛白堂集)에 수록되어 있는 奉敎耕織圖後序이다


이 글에는  1489년 (燕山君 4년)에  正朝使로서 명나라에  사신으로 방문했던  權景優가  明나라로 부터   樓璹耕織圖를  가져와 

燕山君에게 바쳤다 라고 한다  그러므로 樓璹 耕織圖는 1498년에 조선에 유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2. 無逸圖


무일도(無逸圖)에 대한 기록은 고려시대  훈요십조(訓要十條 ) 제10조에  나오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가를 가진 者는 항상  무사한 때를 경계할 것이며 널리 經史를 섭렵하여  과거의 예를 거울로 삼아 현실을 경계하라 

周公은 같은 대상도 無逸 (安逸 , 방심하지 말아라)1편을 지어 成王에게 바쳤으니 이것을 써서 붙이고 출입할 때마다 보고 살피라 .


훈요십조( 訓要十條 )는  942년  고려 태조가  자손을  훈계하기  위해  지은  10가지의  유훈이다 


3, 豳風七月圖 


한국에서  豳風七月圖에 대한 최초 기록은  <태종실록  1402년 4월>에 등장한다  예조전서 (禮曹典書) 金瞻이  太宗에게  豳風圖를   바쳤고 

이에 태종은 金瞻에게 내구마(內廐馬)를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6년 (1424년)에는 예문관 대제학 卞季良에게 백성들의 어려운 생활을 담은 그림을 월령 형식으로 제작하라고  지시를 내렸다는 기록이 있고 

세종15년(1433년)에는 조선의 풍속을 바탕으로  하는 豳風七月圖를 제작하라고  집현전에 지시를 내렸다는

기록은 있으나  당시 그림은 전해지지 않은데


李昉運 (1761년~ 1815년 이후)이  그린 豳風七月圖는 전해지고 있다 


李昉運 (1761년~ 1815년 이후)의  豳風七月圖


4.  패문재경직도 佩文齋書畵譜


이후 淸나라의 화가 焦秉貞이 <樓璹耕織圖>를 기반으로 새로 제작한 耕織圖가 1696년에  패문재서화보(佩文齋書畵譜)에 등재되면서

<佩文齋耕織圖 >양식이  등장하게 되었다 

1697년에  淸나라에  奏請使  즉  사절단으로 로  갔던   최석정(崔錫鼎)이  북경에서  조선으로 돌아올 때  淸代의 화가 焦秉貞의 佩文齋耕織圖를

가져 왔다고 한다  肅宗의 명령으로 화가 秦再奚가  耕作圖와 蠶織圖를 나누어 그렸다 


佩文齋書畵譜 (肅宗御題蠶織圖)

이 그림은  1697년  조선시대  肅宗의 명령으로 그린  그림이다  도화서 화가  秦再奚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위에 쓴 御題 詩는 

봄 날은 더디게 가지만 날씨는 따뜻해져  아낙은 광주리를 끼고 뽕을 따느라 바쁘다네 

등불 아래서 부지런히  일을 하니 한가로움이 적고 창 앞에서 베틀 북을 놀리며 옷감을 짜느라고 바쁘다네 

북쪽  땅에서 한 겨울에 몸을 가릴 수 있는 것은   西陵氏가 영원토록 남긴 恩澤 덕분이라네 

추위에 떠는 사람 없도록 천하에 명하셨으니 궁정에서 내리는 은덕 또한 두텁구나  라고 써있다



肅宗御題蠶織圖의 일부 


5  민화


17세기 佩文齋耕織圖의 수용으로 

19세기에는 민간에서도 경직도가 제작되었는데 그 이전 시대에서는 없었던 백성들의 다양하고 현실적인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민화로도 그려졌고 김홍도 (金弘道) 등  조선 후기 풍속화 발달에 영향을 미쳤다


耕織圖는 조선 후기에 와서 농가의 세시풍속과 결합하여  농가사시 ( 農家四時圖)  (농가 월령도) 등 조선化 되어 병풍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19세기  작품 ,논  갈이하는 모습


모내기에 앞서  논  갈이를 하기 위해  논에 물을 대고 있다


논  갈이는  음력 2월 부터 시작된다   2월 첫 소날(丑日)에  첫 논갈이를 하는데 이 날이 되면 소뿔  사이에  나무로 만든 칼을  묶고

붉은 종이로 만든 꽃을 달아주고 논으로 데리고  간다 


이렇게 하면 1년동안 질병이 소(牛)를 침범하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다  


논 갈이 방법에는 논에  물을 가두어  하는 논 갈이와 ., 물 없이  하는 마른 논 갈이가 있다 

논 갈이  횟수는  보통  3회에서  5회  정도 하는데  3번째 논 갈이를  할 때는  논에  물을  가두어  논  갈이를 한 논이나 ,물 없이 논 갈이를 했던 

논에서도  모두  물을 가두어 논 갈이를 한다 


 논  갈이 라고 하는 것은  땅을 파고   뒤엎는 것인데 이때 사용하는  농기구는  쟁기다 , 쟁기와 함께   소(牛)를 이용하여  논 갈이를 하는 

牛耕농업은  기록으로  502년 신라  지증왕 때에 시작되었다 


소(牛)가 아무리 힘이 좋아도  소(牛) 힘만으로  논 갈이를 하기 어렵기 때문에 농기구  쟁기를  결합하여 사용한다 


한국은 북쪽 지방이 산이 더 많고 지형이 험하기 때문에 쟁기 하나에 소(牛)2마리를 결합하여  논을 갈고 중부 이남 지방에서는 

쟁기 하나에 소(牛)1마리를 결합하여 논 갈이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고   땅의 토질이나 지형 또는  농민의 정신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모내기하는 모습 

 

일꾼들의 식사를 준비하여  다리를 건너 오는 아주머니와   남자와  아이가  있고  아래에는 북(鼓)을  치는 사람이 있다 

 모내기 하는 사람들의 수고와  피곤함을 씻어 주고  노동의 능률울 올리기  위해 북(鼓)을 치며  흥을 돋구고 있다 



 

이한철(李漢喆 1808년생 ) 조선후기 화가  작품 


 벼베기를 하면서   농악 놀이를 즐기는 풍경이다 .왼쪽 부터  연주하고 있는 악기는 .징 . 꽹과리  .장구 .태평소  .소고이다 

 

농번기가  시작되면  마을의  농민  중에  악기 연주에  소질이  있는 사람을  뽑아  농악대를 조직한다   농악  놀이를 하는 이유는 

힘든 노동의  능률을 올리며  노동의 수고를 씻어 주기 위한 것이다 


또  농악 놀이를 하면서 마을 사람들의  단결과  화합을  도모하고   마을의 평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도 있다 

현재는  저 농악 놀이에 사용된   악기와  연주를  무대에  올려 공연을 하는데 이것을  四物놀이 라고 한다  


 


19세기  밭갈이 耕織圖 병풍 중 일부 , 민간에서 제작된 耕織圖


농업의 발달로 농기구도 개량하게  되었다 

호미로  밭을 갈고 있는  모습이다  호미로 밭 이랑을 높게  만들어 고랑에  씨앗을 뿌리는데  이렇게  하면 

추운 겨울이나  가뭄이  잦은  봄에

자라는  곡식이  추위와  가뭄에  잘 견디게  되어   추운  북쪽 지방에서도 작물을 재배할 수 있다 


또 벼 수확이 끝난 논에  보리를 심을 수 있어 1년에 2모작이 가능하기 때문에  농산물도 증가한다 


조선후기 화가 劉運弘의 작품 ,길쌈 


마루에는 여인이 옷감을 짜고 있고

마당에는 짠 옷감에 무엇인가 바르고 있습니다


씨아는 목화 솜에서 씨를 제거하는 기구입니다  암카락과 숫카락이  맞물려 돌아가는데

서로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며 솜은 앞으로 빠져 나오고 씨는 뒤로 떨어집니다



고려후기 몽고의 침략으로 국토가 황폐해지고 정치 사회적으로 불안하여 고급 직물 특히 견직물의 생산이 침체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를 구축한 조선왕조는 백성들에게 면업 잠업 (綿業 蠶業)을 장려하는 정책을 펼쳤다 

면업 장려 정책으로  한반도 전역에 목화를 재배하게 되었다 


太祖1년 (1401년)에 백성들 上下모두 무명(목화 솜으로 만든 옷)을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世宗(재위 1418년~1450년) 때에는  下三南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에서 재배되었던 목화가 北三道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까지 

북상하여 한반도 전역에서 목화가 재배되었다 


이에 따라 1423년(세종5년)에는 2,640필의  면포(綿布)를 일본에 수출하였다고 한다 

당시 일본에서는 조선의 면포는 사치품이었다고 한다 


목화가  한반도 전역에 재배되어 백성들의 의복 생활은 그 이전 시대보다 더 다양해지고 풍부해졌다 

고려말 문익점(文益漸)이  元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목화씨를 가져와 재배하게 된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데 


사실 木綿의 역사는 오래 되었다 

삼국시대 백제의 면직물이 충남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되었다 

백제의 면직물 


중국 문헌 魏志 東夷傳에 의하면 

馬韓은 그 민족이 토착하여 농사를 지었고 잠상(蠶桑)을 알고 면포를 지었다 

弁韓은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과 벼를 심기에 좋고 잠상을 알았으며 絹布를 지었다 등 기록이 있다 


1504년(燕山君10년)에 통직(通織)을 설치하여 옷감 생산에 실명제를 도입하여 고급 견직물을 생산하는데 노력하였다 

그 결과 고급 견직물과 면직물의 생산 기술이 모두 발전하였다 


1517년(中宗12년 13년)에는 농민을 계몽하고 양잠을 장려하는 蠶業정책을 시행하였다 

이 시기는 옷감 생산이 관장제(官匠制) 수공업에서 민간 수공업으로 확산되는 시기이다 


그런데 17세기 이후에는  임진왜란을 겪어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으로 고급 견직물의 생산이 위축되고

상대적으로 값이 싼 면직물의 생산이 더  확산되었다


 조선시대 17세기 장기정씨 묘 출토 모란 넝쿨 무늬 옷감 


조선시대 무덤에서 출토된 옷감 중에 옷감 전체에 화려한 연꽃이나 모란 무늬가 시문되어 있는 견직물은 대부분 16세기 이전 유물이고 

17세기 이후 출토된 옷감은  화려한 무늬의 견직물보다 소박한 무늬의 면직물이 많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국가 경제의 어려움으로 고급 견직물의 생산이 감소했다 




19세기  작품 누에 기르기   모습  ,김홍도 작품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1399년 조선 개국 후  최초 先蠶祭를 지내며  양잠을 장려했다 

先蠶禮는 고려시대 부터 있어 왔고 왕실의 의례  중에  하나로

양잠의  神 서릉씨(西陵氏)를  모시고 누에치기의  풍요와  한해 동안 안정을 기원하는  행사다 


1415년( 太宗15년)에는 충북 진천군에 양잠소(養蠶所)양잠소를 설치하여 명주실을 생산하였다 


또 견직물 생산을 위해  잠업(蠶業)을  장려하는  의식  親蠶禮는  조선 후기 까지  거행되었다 

親蠶禮는  왕비가  內外名婦의  여성들을  거느리고  蠶室에  행차하여 직접 누에를  치고  뽕잎을   따며  양잠의  중요성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의식이다 


잠업(蠶業)의 역사는  삼한시대 기록이 있다  중국 後漢書권85 東夷列傳제75에 의하면 

馬韓 사람들은 布로 만든 袍를 입는다 馬韓 사람들은 농사짓고 누에를 치고 면포를 만들 수 있다 등 기록이 있다 




19세기 耕織圖  직물을  짜는 모습  

민간에서 제작한  병풍 그림 중에 하나다 



19세기 민간에서 제작한 耕織圖  8폭 병풍 중에 일부 ,비단에 채색 .

베짜고 염색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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