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赤飯
http://blog.naver.com/marich77/40199070692
で次の内容を紹介したんですが
『戊寅年12月尾張海評津嶋五十


郡評論争-대화개신

赤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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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다음의 내용을 소개했습니다만
『戊寅年12月尾張海評津嶋五十戸 韓人ァ田根春赤米斗加支各田ァ金』
irogu의 난동으로 이슈가 되지 못했지요.
오늘은 海評의 評에 조금 다가서보겠습니다.

赤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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で次の内容を紹介したんですが 『戊寅年12月尾張海評津嶋五十□ 韓人ァ田根春赤米斗加支各田ァ金』 iroguの乱入でイシューにな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でしょう.
今日は 海評の 評に少し近寄って見ます.

 

「評」에 대해서는 이전에 수차례에 걸쳐 소개한 바 있다.
「評」에 대해 생소하게 받아 들여지시는 분은 다음 글을 먼저 읽어 보세요.
「評」に対しては以前に何回にかけて紹介した事がある.
「評」に対して疎く受けて入れられる方は次の文を先に読んで見てください.

일본의 탄생- 당의 倭 점령(日本の誕生- 唐の 倭 占領)
http://blog.naver.com/marich77/40185123535

일본의 탄생 - 倭의 멸망(日本の誕生 - 倭の滅亡)
http://blog.naver.com/marich77/40185257973

大化改新の記事は『日本書紀』孝徳紀にあるのですが、地方行政単位の表現では「郡」を使用しています。しかし、八世紀を待つまで、「郡」は使用されておらず、この頃は『評』。(読み方は一緒のコホリ)
타이카 개신의 기사는 「일본 서기」효덕기에 있습니다만, 지방 행정 단위의 표현으로는 「군」을 사용하고 있습니다.그러나, 8 세기를 기다릴 때까지, 「군」은 사용되지 않고, 그 당시는 「평」.(읽는 법은 같은 코호리)

「評」というのは、都督府の下部組織であり、日本に多く見られた行政単位でした。都督府というのは、古代史では4~5世紀から存在しました。中国を原点として東アジアの小国がいただく最高の官職であるのは誰も疑いを挟む余地はないのです。それが、『日本書紀』天智六年十一月の記事に筑紫の都督府という形で出てきます。「評]は、7世紀の半ばから、末まで東西(日本)に登場します。そこの長官を『評督』 といいいますが、都の長官を都督、その下の単位の長官を『評督』日本で都督府が合ったのは、後にも先にも一ヵ所大宰府といわれる場所です。所謂、都府楼という遺跡があります。近畿地区にはありません。
「평」 이라고 하는 것은, 도독부의 하부조직이며, 일본에 많이 볼 수 있던 행정 단위였습니다.도독부라고 하는 것은, 고대사에서는 4~5 세기부터 존재했습니다.중국을 원점으로서 동아시아의 오구니를 받는 최고의 관직인 것은 아무도 의심을 품는 여지는 없습니다.그것이, 「일본 서기」천지6년 11월의 기사에 치쿠시의 도독부라고 하는 형태로 나옵니다.「평]은, 7 세기의 반으로부터, 끝까지 동서(일본)로 등장합니다.거기의 장관을 「평독」이라고 해 있습니다만, 도의 장관을 도독, 그 아래의 단위의 장관을 「평독」일본에서 도독부가 맞은 것은, 전에도 이후로도 1개소 외교에 관계한 관청이라고 하는 장소입니다.소위, 都府楼 이라고 하는 유적이 있습니다.킨키 지구에는 없습니다.

ということは、白村江敗戦前には都になったことがなかったのです。 都(みやこ)とは、都督府から来ているようです。
ここからも、日本書紀の創作振りが明らかです。大化改新記事の嘘[郡表記]、都であるという嘘です。
孝徳紀では、「評制」を隠すために書き換えられているということは、そもそも大化の改新がなかったことを意味します。
그 말은, 백촌강패전전에는 도가 되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도(도읍지)란, 도독부로부터 와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로부터도, 일본 서기의 창작 모습이 분명합니다.타이카 개신 기사의 허[군 표기], 도이다고 하는 거짓말입니다.
효덕기에서는, 「평제」를 숨기기 위해서 고쳐 쓸 수 있고 있는 것은, 원래 다이카 개신이 없었던 것을 의미합니다.

  日本語では郡[giuən] の第一音節の子音は清音となる。韻尾の[-n] はラ行になる例としては漢國(からくに)、雁 (かり)、昏(くれ)などをあげることができる。古代中国語の「郡」は日本語で郡 「こる」あるいは「こほり」になる可能性は十分ある。一方、朝鮮語では 「郡」、「邑」は「こう る(ko-eul)」である。日本語の「こほり」は朝鮮語との関連も 考えられる。さらにまた、日本語の  「こほり」、朝鮮語の「こうる」はともに、中国語の「郡」が語源である可能性もある。
일본어에서는 군[giuən]의 제일 음절의 자음은 청음이 된다.운미의[-n]는 라행이 되는 예로서는 漢國(카라쿠니), 雁(카리), 昏(쿠레)등을 예로 들 수 있다.고대 중국어의 「군」은 일본어로 군 「코루」혹은 「코호리」가 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한편, 조선어에서는 「군」, 「읍」은 「고을(ko-eul)」이다.일본어의 「코호리」는 조선어와의 관련도 생각할 수 있다.한층 더 또, 일본어의 「코호리」, 조선어의 「고을」은 함께, 중국어의「군」이 어원일 가능성도 있다.

評 こほりは古代朝鮮語の大村カフルの事で、古代朝鮮では、日本の後の郡に相当するものに、この漢字・評を使っていたそうである。郡に評をコオリ・コホリと読むのは当時の先進地・朝鮮から入ってきたものあるそうである。
평 코호리는 고대 조선어의 큰마을 카후루의 일로, 고대 조선에서는, 일본의 뒤의 군에 상당하는 것에, 이 한자・평을 사용하고 있었다고 한다.군에 평을 코오리・코호리라고 읽는 것은 당시의 선진지・조선에서 들어 온 것 있다고 한다. 


 

郡을 코오리 라고 일본에서 발음하는 이유에 대해 일본 여러 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코오리의 어원에 대해서 한국 또는 중국에서 유래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분 명한 것은 일본에서는 郡 보다 評이 먼저 도입되었다. 郡을 코호리 라고 발음하는 것에 앞서 評을 코호리 라고 발음하는 이유를 먼저 밝혀야 하는 것이다. 郡이 먼저 도입 되었다면 후에 도입된 評을 코호리 라고 발음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지만 먼저 도입된 評을 코호리 라고 발음하는 것은 郡,評 모두 한국에서 도입되었기 때문에 고대 한국어의 고을을 코호리 라고 발음하게 되었다. 라고 주장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역사 왜곡에 혈안이 된 일본 학자들은 이런 사실을 받아 들이기 힘든 것이다.

郡をコホリと日本で発音する理由に対して日本多くの学界で意見がまちまちだ. コホリの語源に対して韓国または中国で来由になったはずだと主張している.
明らかなことは日本では 郡 より 評が先に導入した. 郡をコホリと発音することに先立って 評をコホリと発音する理由を先に明らかに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だ. 郡が先に導入したら後に導入した 評をコホリと発音することは変ではないが先に導入した 評をコホリと発音することは 郡,評 皆韓国で導入したから古代韓国語の村をコホリと発音するようになった. と主張するのが当たる. しかし歴史歪曲に血眼になった日本学者たちはこんな事実を受け入れにくいのだ. 

 

大化の改新(たいかのかいしん)は、飛鳥時代の孝徳天皇2年(大化2年)春正月甲子朔(西暦646年)に発布された改新の詔に基づく政治的改革。中大兄皇子(後の天智天皇)らが蘇我入鹿を暗殺し蘇我氏本宗家を滅ぼした乙巳の変の後に行われたとされる(この暗殺事件もまとめて大化の改新と呼ぶこともある)。天皇の宮(首都)を飛鳥から難波宮(現在の大阪市中央区)に移し、蘇我氏など飛鳥の豪族を中心とした政治から天皇中心の政治へと移り変わったとされる。

다이카 개신은, 아스카 시대의 효덕천황 2년(타이카 2년) 춘정월갑자삭(서기 646년)에 발포된 개신의 조에 근거하는 정치적 개혁.中大兄皇子( 후의 텐지천황) 등이 蘇我入鹿를 암살해 소가씨 본종가를 멸한 을미의 변의 뒤에 행해졌다고 여겨진다(이 암살 사건도 정리하고 다이카 개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천황의 궁(수도)을 아스카로부터 나니와궁(현재의 오사카시 츄오구)으로 옮겨, 소가씨 등 아스카의 호족을 중심으로 한 정치로부터 천황 중심의 정치로 변천했다고 여겨진다.
また大化は日本最初の元号である。
또 타이카는 일본 최초의 원호이다.  

 

太和「t‘ai hua 」タ と ツの混じった発音
大化(タイ・クヮ、あるいは、 ダイ・フア)dai hua
上記のローマ字発音は、「書紀」が編纂された時代の音(中古音『隋・唐』)で示した。
この二つの年号(元号)は、奇妙な一致点がおおい。
発音、そして出来事も。
태화 「t‘ai hua」타와 트가 섞인 발음 大化(타이・쿠와, 혹은, 다이・후아) dai hua 상기의 로마자 발음은, 「서기」가 편찬 되었던 시대의 소리(중고음 「수・당」)로 나타내 보였다.
이 두 개의 연호(원호)는, 기묘한 일치점이 많다.
발음, 그리고 사건도.

太和(たいわ、태화)は新羅が用いた独自の年号のうちで最後となったもの。第28代の真徳女王の元年(647年)から4年(650年)まで用いられた。
태화는 신라가 이용한 독자적인 연호중에서 최후가 된 것.제28대의 진덕여왕의 원년(647년)부터 4년(650년)까지 이용되었다.

森博達氏の研究成果(日本書紀の謎を解く)を以下に簡単に要約したが、
日本語のカ行に使われている万葉仮名は26種、のうち21種は、K系統。
例えば、「歌」は中国音で「か」、ところが、摩訶不思議の「訶」
これは、古代日本語では、「は」=「ぱ(Pa)」という発音だった。
ハ行は、今と異り、P系統。
従って、中国音の「は(ha)を聞いても、日本人は、「は」で写すことができす、「か(ka)」で写してしまったのである。・・・。谷口雅一 「大化の改新」隠された真相 p94
ということから、
모리 히로미치씨의 연구 성과(일본 서기의 수수께끼를 푼다)를 이하에 간단하게 요약했지만, 일본어의 카행에 사용되고 있는 만요가명은 26종, 중 21종은, K계통.
예를 들면, 「歌」는 중국음으로 「카」, 그런데 , 매우 이상한 「訶」이것은, 고대 일본어에서는, 「は」= 「ぱ(Pa)」라고 하는 발음이었다.
하행은, 지금과 달리, P계통.
따라서, 중국음의 「は(ha)를 들어도, 일본인은, 「は」로  듣는 것이 아니라, 「か(ka)」로 들었던 것이다.・・・.
谷口雅一「다이카 개신」숨겨진 진상 p94라고 하는 것부터,

大化「dai」または「t"ai hua」は、 太 和「t"ai hua」の  「t"a」音を日本人は、d(推測)または、tと聞き「hua」を「kua」と聞いたのではないだろうか。
大化(タイクヮ)
太和(ツァイ・クワ、あるいは、ツァイ・フア)t"ai hua
大化(タイ・クヮ、あるいは、 ダイ・フア)dai hua,「h」は、「K」になる当時の日本語話者の実態から、
720年当時、孝徳紀の大化部分の改ざん者達は、「hua」を「K」でしか表現できなかったために、新羅のオリジナル年号「太 和」を「大化」と書き換えたのだ。
大化「dai」또는 「t"ai hua」는, 태화 「t"ai hua」의 「t"a」음을 일본인은, d(추측) 또는, t라고 들어 「hua」를 「kua」라고 들은 것은 아닐까.
大化(타이쿠와)
太和(츠아이・쿠와, 혹은, 츠아이・후아) t"ai hua 大化(타이・쿠, 혹은, 다이・후아) dai hua, 「h」는, 「K」가 되는 당시의 일본어 말하는 사람의 실태로부터, 720년 당시 , 孝徳紀의 大化 부분의 개찬자들은, 「hua」를 「K」로 밖에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신라의 오리지날 연호 「태화」를 「大化」라고 고쳐 썼던 것이다.

 

다음 표를 재미있게 살펴 보자. 

次の表を面白くよく見よう.

 

http://wasso.net/html/130107newyear.html
晴天の下、ワッソの掛け声が響きました。
皆様方のお蔭で、昨秋のワッソは大成功をおさめ、難波の秋に欠かせない行事になってきました。
ところで、古代日本の行政改革として有名な大化改新の宣言は、1367年前の大化2年正月元旦、難波豊崎宮で発布されました。
これには異論も有りますが、日本の歴史で大きな出来事でした。ワッソの会場である難波宮跡は歴史的行政改革の原点だったのです。
翌年、新羅から真徳女王の使節として美青年の王子が孔雀とオウムを持って来日します。ワッソでお馴染みの金春秋王子です。
日本の記録には「容色美しく快活に談笑う」と評しています。金春秋は臣下のと蹴鞠をした縁で、の妹を妃にしました。
当時、改新政権の皇太子は中大兄皇子でした。大化改新の発端は蹴鞠で脱げた皇子の靴を鎌足が拾うことから始まります。
金春秋は日本に滞在中、皇太子と蹴鞠をしたと思います。後に、皇太子と王子は天智天皇と武烈王になります。 日韓サッカーの始まりは、キングサッカーだったのです。後年、白村江の戦で両者が敵対する立場に置かれたのも歴史の非情です。
ワッソは平和な蹴鞠時代の姿です。そんな歴史もあったワッソをご覧ください。11月4日です。
맑은 하늘아래, 왓소의 구령이 영향을 주었습니다.
여러분의 덕분에, 작년 가을의 왓소는 대성공을 거두어 難波의 가을에 빠뜨릴 수 없는 행사가 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고대 일본의 행정개혁으로서 유명한 大化改新의 선언은, 1367년전의 大化 2년 정월 설날, 難波豊崎宮으로 발포되었습니다.
이것에는 이론도 있습니다만, 일본의 역사로 큰 사건이었습니다.왓소의 회장인 難波宮跡는 역사적 행정개혁의 원점이었습니다.
다음 해, 신라로부터 진덕여왕의 사절로서 美青年의 왕자가 孔雀과 앵무를 가지고 일본을 방문합니다.왓소로 친숙한 金春秋 왕자입니다.
일본의 기록에는 「용색 아름답고 쾌활하게 담소」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金春秋는 신하와 축국을 한 인연으로, 신하의 여동생을 왕비로 했습니다.
당시 , 改新政権의 황태자는 中大兄皇子이었습니다.大化 개신의 발단은 축국으로 벗겨진 황태자의 구두를 겸족이 줍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金春秋는 일본에 체제중, 황태자와 축국을 했다고 생각합니다.후에, 황태자와 왕자는 텐지천황과 武烈王이 됩니다. 일한 축구의 시작은, 킹 축구였습니다.후년, 백촌강의 싸움에서 양자가 적대하는 입장에 놓여졌던 것도 역사의 비정합니다.
왓소는 평화로운 축국 시대의 모습입니다.그런 역사도 있던 왓소를 봐 주세요.11월 4일입니다.  

 

『日本書紀』の大化3年の項に、以下のような記述がある(宇治谷孟現代語訳)。
「일본 서기」의 大化 3년의 항에, 이하와 같은 기술이 있다(宇治谷孟現代語訳).

    新羅が上臣大阿飡金春秋(のちの武列王)らを遣わして、博士小徳高向黒麻呂、小山中中臣連押熊を送り、孔雀一羽・鸚鵡一羽を献上した。春秋は人質として留まった。春秋は容色美しく快活に談笑した。
신라가 上臣大阿飡 김춘추(후의 무렬왕) 등을 보내고, 博士小徳高向黒麻呂、小山中中臣連押熊를 보내, 공작 한 마리・앵무 한 마리를 헌상 했다.춘추는 인질로서 머물었다.춘추는 용색 아름답고 쾌활하게 담소했다.

Note: 小山中(天智:664年冠位26階) 『日本書紀』의 大化3年 項에 小山中이라는 관직이 등장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小山中(天智:664年冠位26階) 『日本書紀』の大化3年の項に 小山中という官職が登場することはありえない事

林青梧氏は、『「日本書紀」の暗号』講談社(9009)において、「孔雀一羽、鸚鵡一羽の手土産を持ち、容色美しく快活に談笑する『人質』とは、いかなる意味か?」と問う。
そして、文定昌『日本上古史』(1970)の以下のような解説を紹介する。
임청오씨는, 「 「일본 서기」의 암호」講談社(9009)에 대하여, 「공작 한 마리, 앵무한 마리의 간단한 선물을 가져, 용색 아름답고 쾌활하게 담소하는 「인질」이란, 어떠한 의미인가?」라고 묻는다.
그리고, 문정창 「일본 상고사」(1970)에서 이하와 같은 해설을 소개한다.

金春秋は、倭における大化政変の結果の検分に来たのだった。新羅からみると、在倭新羅系の孝徳王の親新羅政策は生ぬるく、金春秋は、難波京にのりこむと、孝徳王に倭国の国号の変更を求めた。当時、真徳王の新羅は、年号を「大和」といった。それをそのまま使わせてヤマトと読むことを命じたのだ。
翌年、金春秋は、自由意志で倭を去って本国に戻り、さらに唐に入る。そういう人物を「人質」と書か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事情が倭国にあったと考えるべきだろう。
応神紀の「御友別」が侵入軍の意味であったことからすれば、「人質」についても同様のことが言えるのではないか?
김 춘추는, 倭에 있어서의 大化政変의 결과에 대한 조사차 왔던 것이었다.신라에서 보면, 在倭 신라계의 효덕왕의 친신라정책은 미온적이고, 김춘추는, 難波京에 쳐들어가, 효덕왕에게 倭国의 국호의 변경을 요구했다.당시 , 진덕왕 신라는, 연호를 「大和」」라고 했다.그것을 그대로 사용하게 하고 야마토라고 읽는 것을 명했던 것이다.
다음 해, 금 춘추는, 자유 의지로 야마토를 떠나고 본국으로 돌아와, 한층 더 당에 들어간다.그러한 인물을 「인질」이라고 쓰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사정이 倭国에 있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응신기의 「우별」이 침입군의 의미인 것으로부터 하면, 「인질」에 대해서도 같은 일을 말할 수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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