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壬辰の乱隠れた名将金忠善(金忠善)

 

 

 四声金海金さんの詩調金忠善(金忠善・1571‾1642)だ. 本館金する. 定木先知(善之). 号暮夏だ(慕夏堂). 本名サヤが(沙也可)は 1592年(先祖 25) 壬辰の乱の時加藤紀要マーサ[加藤清正]の左禅鳳凰模様タンスで軍卒烏川とともに東莱性で来侵こんにちはだった.

 

朝鮮王朝新緑を見ても初盤なぜの勢いは空を突いたし, 戦闘ごとに倭軍が余勢を駆って勝った. しかしサヤがは ‘名分ない戦争は不可’と言いながら慶尚道兵馬節度使迫真に投降こんにちはだった.

 

 

沙也可が 朝鮮軍に送った手紙内容中

 
サヤが(沙也可)はご遠慮斎戒沐浴して
頭下げて造船国節度使ハブハに文を書くのです.
今私が帰化しようと思うことは知恵が足りなくてもないです,

 

力が足りなくてもなくて勇気がなくもなくて
武器が鋭くなくもないです.
私の兵士と武器の丈夫さは
百万の軍事にあうことができるし
計画の緻密さはチォンギルの城郭を崩すに値します.

 

私は卑怯でもなくて, まずくもなかった. そして私の部隊は絶対弱くもない. しかし朝鮮の文化が日本より発達したし学問科道徳を崇尚する君子の国を踏み付けることはできません. 帰化したいです.

 

が国の礼儀文物と衣冠風俗を 美しく思って礼儀の国で 聖言の民になろうとするだけです. 

 

 

当時壬辰の乱 中  彼は実際で 朝鮮を侵略した当時, 朝鮮の民が自分の生命が危ないにもかかわらず老母(老母)を 背に負って 戦乱を避けて住まいを移す人々の姿に大きい感銘を受けたと言う. 私の命するが支えにくい状況でご両親の安全を先に思う姿は続く戦争の中から暮して来たサヤがには大きい衝撃に近付いたと言う.

 

以後, 朝鮮軍は苦心あげく彼の帰化を賛成した.

 

 

朝鮮で帰化したサヤがは先祖から姓はのりして金, 忠直で御真心という意味の 忠善という名前を下賜受けた.

 

 金忠善は慶尚道兵馬節度使迫真の旗下で私たち軍隊に火砲と弔銃作り方を教えてくれたし, 慶州.蔚山等地の倭軍を打ち破る専攻を立てて僉知の職することを受けた.

 
 朝鮮に帰化した以後では自主的に弔銃部隊を組織して戦闘に参加して功を立てたりした. 金忠善が知らせてくれた弔銃技術は当時壬辰の乱の前の勢いを覆すのに大きい役目を立てた. 
 
 金忠善は日本軍を相手で義兵, 官軍とともに 78回戦闘で勝戦した. 引き続き桃源数権慄, 御史韓準かたがたの奏請(奏請)で彼の大人砂(沙)から出る金(金金)と海渡って来た異邦人という事実を合して金海(金海) 金さん成果ツングソンという名前を下賜受けてザホンデブ(資憲大夫)に上がったし賃金が下賜した氏姓だとして四声金海金さんと呼ぶ. 暮夏当たりと言う(のは)号は性理学的な秩序を欽慕しながら作ったと言う.
 

金忠善は真珠牧師長春店の娘と結婚した. そして調整で降りた官職と田畑を “当然臣下としてする道理”と言いながら厭って算数良いダルソングタングに下って居所をウロックドング(友鹿洞)と称して鹿と友逹にして学問に夢中になって死んだ. 死後楡林で調整に沼をあげてその墓の下に鹿洞書院と祠堂を建てて彼を追慕した. 書院大門にはヒャングヤングムン(向陽門)という懸板がかかった. 裏手には死当たりノックドングサ(鹿洞祠)が立っている. 庭にはモハゴングギムゴングユゾックビ(慕夏公金公 遺蹟碑)がさつきつつじ, あじさい, 牡丹, 香木, ムクゲの間に立っている.

 

 たとえ敵国の長寿であったが, 尊敬するに値する思想家, 立派な長寿であった. 彼は平和のために争った. 当時のさむらいは文を読むことができなかった. 倭国の長寿は文が分からない人々が大部分だった. しかし, サヤがは文武を兼備した立派な長寿であったし, 学問を重要視した. 

 彼の清白吏精神は今日朝鮮に子孫たちに多くの亀鑑になっている.

 

sumatera //요청한 자료 올립니다.

임진왜란 숨은 명장 김충선(金忠善)

 

 

 사성 김해 김씨의 시조 김충선(金忠善·1571~1642)이다. 본관 김해. 자 선지(善之). 호 모하당(慕夏堂). 본명 사야가(沙也可)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좌선봉장으로 군졸 오천과 함께 동래성으로 내침하였다.

 

조선왕조신록을 보더라도 초반 왜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고, 전투마다 왜군이 승승장구하였다. 하지만 사야가는 ‘명분 없는 전쟁은 불가’라며 경상도병마절도사 박진에게 투항하였다.

 

沙也可가 조선군에게 보낸 편지 내용中

 
"사야가(沙也可)는 삼가 목욕재계하고
머리 숙여 조선국 절도사 합하에게 글을 올리나이다.
지금 제가 귀화하려 함은 지혜가 모자라서도 아니오,
힘이 모자라서도 아니며 용기가 없어서도 아니고
무기가 날카롭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저의 병사와 무기의 튼튼함은
백만의 군사를 당할 수 있고
계획의 치밀함은 천길의 성곽을 무너뜨릴 만합니다."

 

"나는 비겁하지도 않고, 못나지도 않았다. 그리고 나의 부대는 절대 약하지도 않다. 허나 조선의 문화가 일본보다 발달했고 학문과 도덕을 숭상하는 군자의 나라를 짓밟을 수는 없습니다. 귀화하고 싶습니다."

 

"이 나라의 예의문물과 의관 풍속을 아름답게 여겨 예의의 나라에서 성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따름입니다." 

 

당시 임진왜란 中  "그는 실제로 조선을 침략했을 당시, 조선의 백성이 자신의 생명이 위험함에도 불구하고 노모(老母)를 등에 업고 피난가는 사람들의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제 목숨하나 부지하기 힘든 상황에서 부모님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는 모습은 계속되는 전쟁속에서 살아온 사야가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 왔다고 한다."

 

이후, 조선군은 고심 끝에 그의 귀화를 찬성 하였다.

 

조선으로 귀화한 사야가는 선조로부터 성은 김해 김, 충직하고 어진 마음이라는 뜻의 忠善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다.

 

 김충선은 경상도병마절도사 박진의 휘하에서 우리 군대에 화포와 조총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경주.울산 등지의 왜군을 무찌르는 전공을 세워 첨지의 직함을 받았다.

 
 조선에 귀화한 이후로는 자체적으로 조총부대를 조직하여 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김충선이 알려준 조총기술은 당시 임진왜란의 전세를 뒤집는데 큰 역할을 세웠다. 
 
 김충선은 일본군을 상대로 의병, 관군과 함께 78회 전투에서 승전했다. 이어 도원수 권율, 어사 한준겸의 주청(奏請)으로 그의 성인 모래(沙)에서 나오는 금(金김)과 바다 건너 온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합쳐 김해(金海) 김씨 성과 충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으며 임금이 하사한 성씨라고 해서 사성 김해 김씨라고 부른다. 모하당이란 호는 성리학적인 질서를 흠모하며 지었다고 한다.
 

김충선은 진주목사 장춘점의 딸과 결혼했다. 그리고 조정에서 내린 벼슬과 논밭을 “당연히 신하로서 할 도리”라며 마다하고 산수 좋은 달성땅에 내려와 거처를 우록동(友鹿洞)이라 칭하고 사슴과 벗하며 학문에 열중하다 죽었다. 사후 유림에서 조정에 소를 올려 그 무덤 아래에 녹동서원과 사당을 짓고 그를 추모했다. 서원 대문에는 향양문(向陽門)이라는 현판이 걸렸다. 뒤편에는 사당 녹동사(鹿洞祠)가 서 있다. 뜰에는 모하공김공유적비(慕夏公金公 遺蹟碑)가 영산홍, 수국, 모란, 향나무, 무궁화 사이에 서 있다.

 

 비록 적국의 장수 였지만, 존경할 만한 사상가, 훌륭한 장수 였다. 그는 평화를 위해 싸웠다. 당시의 사무라이는 글을 읽지 못했다. 일본의 장수는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사야가는 문무를 겸비한 훌륭한 장수 였으며, 학문을 중요시 하였다. 

 그의 청백리 정신은 오늘날 조선에 후손들에게 많은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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