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善光寺の御本尊

信州善光寺は、一光三尊阿弥陀如来様を御本尊として、創建以来約千四百年の長きに亘り、阿弥陀如来様との結縁の場として、民衆の心の拠り所として深く広い信仰を得ております。

 『善光寺縁起』によれば、御本尊の一光三尊阿弥陀如来様は、インドから朝鮮半島百済国へとお渡りになり、欽明天皇十三年(552年)、仏教伝来の折りに百済から日本へ伝えられた日本最古の仏像といわれております。この仏像は、仏教の受容を巡っての崇仏・廃仏論争の最中、廃仏派の物部氏によって難波の堀江へと打ち捨てられました。後に、信濃国司の従者として都に上った本田善光が信濃の国へとお連れし、はじめは今の長野県飯田市でお祀りされ、後に皇極天皇元年(642年)現在の地に遷座いたしました。皇極天皇三年(644年)には勅願により伽藍が造営され、本田善光の名を取って「善光寺」と名付けられました。創建以来十数回の火災に遭いましたが、その度ごとに、民衆の如来様をお慕いする心によって復興され、護持されてまいりました。

 

 

▲善光寺縁起

善光寺の御本尊様は、一光三尊阿弥陀如来像です。中央に阿弥陀如来、向かって右側に観音菩薩、左側に勢至菩薩が一つの光背の中にお立ちになっています。しかし、御本尊様は絶対秘仏で、今日そのお姿を拝むことはできません。

 『善光寺縁起』によれば、善光寺如来様は、遠くお釈迦様在世の時にインドで出現なさったといわれております。その後、百済にお渡りになり、欽明天皇十三年(552年)、日本に仏教が伝来した時に、百済より贈られたと語られています。

 御本尊様は古来より「生身の如来様」といわれております。人肌のぬくもりを持ち、人と語らい、その眉間の白毫から智恵の光明を発しているというのです。奈良の法隆寺には「善光寺如来御書箱」という、聖徳太子と善光寺如来様が取り交わした文書を入れた文箱が現存しています。このように、人々と触れあう如来様として信仰を集めて参りました。

 善光寺の御本尊様の印相は特徴的であるといわれております。中央、阿弥陀仏の印相は、右手は手のひらを開き我々の方に向けた施無畏印、左手は下げて人差し指と中指を伸ばし他の指は曲げるという刀印です。これは法隆寺金堂の釈迦三尊像に代表される、飛鳥・白鳳時代頃の仏像に特徴的な印相です。左右の菩薩の印は梵篋印といい、胸の前で左の掌に右の掌を重ね合わせる珍しい印相をしています。その掌の中には真珠の薬箱があるといわれています。また、三尊像は蓮の花びらが散り終えて残った蕊が重なった臼型の蓮台に立っておられます。このような特徴を全て備えた一光三尊阿弥陀如来像を通称、善光寺式阿弥陀三尊像といっております。

 

▲一光三尊阿弥陀如来

『善光寺縁起』とは、善光寺御本尊の故事来歴をつづった霊験譚です。
 平安時代末期には全国的に広まっていたといわれ、多くの人々の信仰を集めました。

 

 

 


 

 お釈迦様が印度・毘舎離国の大林精舎におられる頃、この国の長者に月蓋という人がありました。長者の家はたいそう富み栄えておりました。しかし、長者は他人に施す心もなく貪欲飽くなき生活をしておりました。ある日、お釈迦様は長者を教え導こうと自らその門を叩かれました。
 さすがにお釈迦様のおいでと聞き、長者は黄金の鉢に御馳走を盛って門まで出ました。しかし、「今日供養すれば毎日のように来るであろう。むしろ供養せぬほうがよかろう」と急に欲心を起こして家に入ってしまいました。


 

 月蓋長者には、如是という名の一人の姫君がありました。両親の寵愛は限りなく、掌中の玉と愛育されておりました。
 ところがある年、国中に悪疫が流行し、長者の心配もむなしく如是姫はこの恐ろしい病魔にとりつかれてしまいました。
 長者は王舎城の名医・耆婆大臣を招くなどあれこれ手を尽くしました。しかし、何の効き目もありません。万金を投じ人智の限りを尽くしても及ばぬ上は、お釈迦様に教えを乞うほかはないと親族たちは申し合わせました。


 

 長者は初め不本意でした。ですが、我が娘の病苦を取り除きたい一念から遂に大林精舎に参り、お釈迦様の御前に進み、従前の罪障を懺悔し、如是姫の命をお救いくださるようにお願い致しました。
  お釈迦様は「それは我が力にても及ばぬことである。ただ、西方極楽世界におられる阿弥陀如来様におすがりして南無阿弥陀仏と称えれば、この如来様はたちまちこの場に出現され、姫はもちろんのこと国中の人民を病から救ってくださるであろう」と仰せられました。


 

 長者はお釈迦様の教化に従い、自邸に帰るとさっそく西方に向い香華灯明を供え、心からの念仏を続けました。この時、彼の阿弥陀如来様は西方十万億土の彼方からその身を一尺五寸に縮められ、一光の中に観世音菩薩・大勢至菩薩を伴う三尊の御姿を顕現され大光明を放たれました。
 すると国中に流行したさしもの悪疫もたちまちにして治まり、如是姫の病気もたちどころに平癒いたしました。長者はもとより一族の者は皆喜ぶことこの上なく、如来の光明を礼讃いたしました。


 

 長者はこの霊験あらたかなる三尊仏の御姿をお写ししてこの世界に止め置くことを発願し、再びお釈迦様におすがりいたしました。
 お釈迦様は長者の願いをおかなえになるため神通第一の目連尊者を竜宮城に遣わされ、閻浮檀金を竜王から貰い受けることとしました。
  竜王はお釈迦様の仰せに従い、この竜宮随一の宝物をうやうやしく献上いたしました。


 

 さてこの閻浮檀金を玉の鉢に盛ってお供えし、再び阿弥陀如来様の来臨を請いますと、彼の三尊仏は忽然として宮中に出現なさいました。そして、阿弥陀如来様の嚇嚇たる白毫の光明とお釈迦様の白毫の光明は共に閻浮檀金をお照らしになりました。
 すると不思議なことに、閻浮檀金は変じて、三尊仏そのままの御姿が顕現したのでした。長者はたいそう喜び、終生この新仏に奉仕致しました。この新仏こそ、後に日本国において善光寺如来として尊崇を集める仏様であったのです。そして、この三尊仏は印度で多くの人々を救い結縁なさいました。


 

 時は流れ、百済国では聖明王の治世を迎えておりました。この聖明王は月蓋長者の生まれ変わりでした。しかし、王はそれとは知らず悪行を重ねておりました。ところが、如来様が百済国へお渡りになり、過去の因縁をお話しになると、たちまち改心して善政を行なうようになりました。
  百済国での教化の後、如来様は次なる教化の地が日本国であることを自ら告げられました。百済国の人民は老若男女を問わず如来様との別れを悲しみ、如来様が船で渡る後を追う者さえありました。


 

 欽明天皇十三年(552年)、尊像は日本国にお渡りになりました。宮中では聖明王から献ぜられたこの尊像を信奉すべきか否かの評議が開かれました。
  大臣・蘇我稲目は生身の如来様であるこの尊像を信受することを奏上し、大連・物部尾輿、中臣鎌子は異国の蕃神として退けることを主張しました。
  天皇は蘇我稲目にこの尊像をお預けになりました。稲目は我が家に如来をお移しし、やがて向原の家を寺に改め、如来様を安置し、毎日奉仕いたしました。これが我が国仏教寺院の最初である向原寺といいます。


 

 さてこの頃、国内ではにわかに熱病が流行りました。物部尾輿はこれを口実として、天皇に「このような災いの起こるのは蘇我氏が外来の蕃神を信奉するために違いありません」と申し上げ、天皇の御許しを得て向原寺に火を放ちました。
  炎々たる猛火はたちまちにして向原寺を灰燼にしました。ところが、彼の如来様は不思議にも全く尊容を損うことがありません。そこで尾輿は再び如来様を炉に投じてふいごで吹きたてたり、鍛冶職に命じてうち潰させたりなどしました。しかし、尊像は少しも損傷されることはありませんでした。


 

 万策尽き、ついに彼等は尊像を難波の堀江に投げ捨てました。その後、蘇我稲目の子・馬子は父の志を継ぎ、篤く仏法を信仰しました。そして、これに反対する物部尾輿の子・守屋を攻め滅ぼし、聖徳太子と共に仏教を奨励しました。ここに初めて仏法は盛んになりました。
  聖徳太子は難波の堀江に臨まれ、先に沈められた尊像を宮中にお連れしようと、その御出現を祈念されました。すると如来様は一度水面に浮上され、「今しばらくはこの底にあって我を連れて行くべき者が来るのを待とう。その時こそ多くの衆生を救う機が熟す時なのだ。」と仰せられ、再び御姿を水底に隠されました。


 

 その頃、信濃の国に本田善光という人がありました。ある時、国司に伴って都に参った折、たまたまこの難波の堀江にさしかかりました。すると、「善光、善光」と、いとも妙なる御声がどこからともなく聞こえました。そして、驚きおののく善光の目の前に、水中より燦然と輝く尊像が出現しました。
  如来様は、善光が過去世に印度では月蓋長者として、百済では聖明王として如来様にお仕えしていたことをお話になりました。そして、この日本国でも多くの衆生を救うために、善光とともに東国へお下りになられることをお告げになりました。善光は歓喜して礼拝し、如来様を背負って信濃の我が家に帰りました。


 

 善光は初め如来様を西のひさしの臼の上に御安置し、やがて御堂を建てて如来様をお移しいたしました。ところが翌朝、善光が参堂いたしますと、尊像の姿はそこにはありません。慌てて家に帰ると、いつのまにか最初に御安置した臼の上にお戻りになっておられました。そして、善光に、「たとえ金銀宝石で飾り立てた御堂であろうとも、念仏の声のないところにしばしも住することはできない。念仏の声するところが我が住みかである」と仰せになりました。
  また、善光は貧困で灯明の油にも事欠く有様でした。そうしたところ、如来様は白毫より光明を放たれ、不思議なことに油の無い灯心に火を灯されました。これが現在まで灯り続ける御三燈の灯火の始まりといわれます。
  如来様の霊徳は次第に人々の知るところとなり、はるばる山河を越えてこの地を訪れるものは後を絶ちません。時の天皇である皇極帝は、善光寺如来様の御徳の高さに深く心を動かされ、善光と善佐を都に召されて、ついに伽藍造営の勅許を下されました。
  こうして、三国伝来の生身の阿弥陀如来様を御安置し、開山・善光の名をそのまま寺号として「善光寺」と称しました。以来千三百年以上の長きにわたり、日本第一の霊場として国内津々浦々の老若男女に信仰されるようになりました。

 

出典 善光寺 公式ウエブサイト  http://www.zenkoji.jp/index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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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코우지의 본존

  젠코우지의 본존

신슈 젠코우지는,잇코 삼존 아미타 여래님을 본존으로하고, 창건 이래약천4백년의 장 나무에 긍, 아미타 여래님과의 결연의 장소로서 민중의 마음의 의지로서 깊고 넓은 신앙을 얻고 있습니다.

 「젠코우지 재수」에 의하면, 본존의 잇코 삼존 아미타 여래님은, 인도에서 한반도 (쿠다라)백제국으로 건너셔, 흠 아키라 천황 13년(552년), 불교 전래의 때에 (쿠다라)백제로부터 일본에 전해진 일본 최고의 불상이라고 하고 있습니다.이 불상은, 불교의 수용을 둘러싼 숭불·폐불론쟁의 한중간, 폐불파의 모노노베씨에 의해서 나니와의 호리에로 방치할 수 있었습니다.후에, 시나노노쿠니사의 종자로서 도에 오른 혼다 요시미츠가 시나노의 나라로 따라 , 처음은 지금의 나가노현 이다시에서 모셔하셔 후에 황극천황 원년(642년) 현재의 땅에 천좌했습니다.황극천황 3년(644년)에는 임금의 기원에 의해 가람이 축조 되어 혼다 요시미츠의 이름을 취해 「젠코우지」라고 이름이 붙여졌습니다.창건 이래 수십회의 화재를 당했습니다만, 그 때마다, 민중의 여래모양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의해서 부흥되어 수호되어왔습니다.

 

 

▲젠코우지 재수

젠코우지의 본존모양은, 잇코 삼존 아미타 여래상입니다.중앙에 아미타 여래, 향해 우측으로 관음보살, 좌측으로 세지 보살이 하나의 후광안에 서시고 있습니다.그러나,본존모양은 절대 밀교로, 오늘 그 모습을 빌 수 없습니다.

 「젠코우지 재수」에 의하면, 젠코우지 여래모양은, 멀고 석가님 생전때에 인도에서 출현 하셨다고 말해지고 있습니다.그 후, (쿠다라)백제에 건너셔, 흠 아키라 천황 13년(552년), 일본에 불교가 전래했을 때에, (쿠다라)백제보다 주어졌다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본존모양은 고래보다 「살아있는 몸의 여래모양」이라고 말해지고 있습니다.피부의 온기를 가져, 사람과 이야기를 주고 받아, 그 미간의 백호로부터 지혜의 코우묘를 출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나라의 호류사에는 「젠코우지 여래서 상자」라고 하는, 쇼오토쿠 타이시와 젠코우지 여래모양이 주고 받은 문서를 넣은 문상이 현존 하고 있습니다.이와 같이, 사람들과 서로 접하는 여래모양으로서 신앙을 모아 왔습니다.

 젠코우지의 본존모양의 인상은 특징적이다라고 말해지고 있습니다.중앙, 아미타불의 인상은, 오른손은 손바닥을 열어 우리에게 보낸 시무외표, 왼손은 내려 집게 손가락과 중지를 늘려 다른 손가락은 굽힌다고 하는 도인입니다.이것은 호류사 금당의 석가 삼존상으로 대표되는, 아스카·백봉시대무렵의 불상에 특징적인 인상입니다.좌우의 보살의 표는 범협인 이라고 하여, 가슴의 전으로 왼쪽의 손바닥에 오른쪽의 손바닥을 거듭해 맞추는 드문 인상을 하고 있습니다.그 손바닥안에는 진주의 약상이 있다고 말해지고 있습니다.또, 삼존상은 연꽃의 꽃잎이 져 끝내 남은 꽃술이 겹친 구형의 렌다이로 떠나고 계십니다.이러한 특징을 모두 갖춘 잇코 삼존 아미타 여래상을 통칭, 젠코우지식 아미타불 삼존상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잇코 삼존 아미타 여래

「젠코우지 재수」란, 젠코우지본존의 고사내력을 엮은 영험담입니다.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전국적으로 퍼지고 있었다고 말해져 많은 사람들의 신앙을 모았습니다.

 

 

 


 

 석가님이 인도·비사리국의 오오바야시 사원에 계시는 무렵, 이 나라의 연장자에게월개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연장자의 집은 매우 풍부해 돋보이고 있었습니다.그러나, 연장자는 타인에게 베푸는 마음도 없고 탐욕 끝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어느 날, 석가님은 연장자를 가르쳐 이끌려고 스스로 그 문을 얻어맞았습니다.
 과연 석가님이 와라고 (들)물어, 연장자는 황금의 하치에 진수성찬(대접)을 번창하고 문까지 나왔습니다.그러나, 「오늘 공양하면 매일 같이 올 것이다.오히려 공양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라고 갑자기 욕심을 일으키고 집에 들어가 버렸습니다.


 

 월개연장자에게는, 여차라고 하는 이름의 한 명의 희네가 있었습니다.부모님의 총애는 한없고, 장중의 구슬과 애육 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있는 해, 국중에 악역이 유행해, 연장자의 걱정도 허무하고 여차공주는 이 무서운 병마에 사로 잡혀 버렸습니다.
 연장자는 왕사성의 명의·기파대신을 부르는 등 이것저것 온갖 방법을 다 썼습니다.그러나, 아무 효력도 없습니다.만금을 투자해 인 지의 한계를 다해도 미치지 않는 위는, 석가님에 가르침을 청할 수 밖에 없으면 친족들은 합의 했습니다.


 

 연장자는 처음 본의가 아니었습니다.그렇지만, 우리 딸(아가씨)의 병고를 없애고 싶은 일념으로부터 결국 오오바야시 사원에 가, 석가님의 어전으로 나아가, 종전의 죄장을 참회 해, 여차공주의 생명을 구해 주시도록에 부탁 했습니다.
  석가님은 「그것은 우리 힘에서도 미치지 않는 것이다.단지, 서방 극락 세계에 계시는 아미타 여래님에게 의지하고 나무아미타불이라고 기리면, 이 여래모양은 금새 이 장소에 출현되어 공주는 물론이거니와 국중의 인민을 병으로 구해 주실 것이다」라고 분부했다.


 

 연장자는 석가님의 교화에 따라, 자기집에 돌아가면 즉시 서방으로 향해 향화등명을 올려 진심으로의 염불을 계속했습니다.이 때, 그의 아미타 여래님은 서방 십만억토의 저 쪽에서 그 몸을 일척5치수로 줄일 수 있어 잇코안에 관세음 보살·여럿지보살을 수반하는 삼존의 모습이 현현되어 타이코우 아키라를 추방해졌습니다.
 그러자(면) 국중에 유행하고 싶음 하지도의 악역도 금새 해 다스려져, 여차공주의 병도 즉시 평유 했습니다.연장자는 원래 일족의 사람은 모두 기뻐하는 것 이 이상 없고, 여래의 광명을 례찬 했습니다.


 

 연장자는 이 영험 뚜렷한 삼존프랑스의 모습을 찍어 이 세계에 세워 두는 것을 발원 해, 다시 석가님에 수컷 꾸중 했습니다.
 석가님은 연장자의 소원을 두어 쇠약해지시기 위해 신통 제일의 모쿠렌존자를 용궁성에 보내져 염부단금을 류오로부터 받는 것으로 했습니다.
  류오는 석가님의 분부에 따라, 이 용궁 제일의 보물을 공손하게 헌상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염부단금을 구슬의 하치에 담아 공양해, 다시 아미타 여래님의 왕림을 청하면, 그의 삼존프랑스는 홀연히로서 궁중에 출현 하셨습니다.그리고, 아미타 여래님의 혁혁인 백호의 광명과 석가님의 백호의 광명은 모두 염부단금을 비추셨습니다.
 그러자(면) 이상한 일로, 염부단금은 바꾸고, 삼존프랑스 그대로의 모습이 현현했던 것입니다.연장자는 매우 기쁨, 평생 이 신프랑스에 봉사 했습니다.이 신프랑스야말로, 후에 일본에 있어 젠코우지 여래로서 존숭을 모으는 부처님이었습니다.그리고, 이 삼존프랑스는 인도로 많은 사람들을 구해 결연 하셨습니다.


 

 시간은 흘러 (쿠다라)백제국에서는 성명왕의 치세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이 성명왕은 월개연장자의 환생이었습니다.그러나, 왕은 그것이라고는 알지 못하고 악행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그런데 , 여래모양이 (쿠다라)백제국에 건너셔, 과거의 인연을 이야기 하시면, 금새 개심하고 선정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쿠다라)백제국으로의 교화의 뒤, 여래모양은 다음 되는 교화의 땅이 일본인 것을 스스로 전해들었습니다.(쿠다라)백제국의 인민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여래모양과의 이별을 슬퍼해, 여래모양이 배로 건너는 뒤를 쫓는 사람마저 있었습니다.


 

 흠 아키라 천황 13년(552년), 존상은 일본에 건너셨습니다.궁중에서는 성명왕으로부터 헌연의 존상을 신봉해야할 것인가 아닌가의 평의가 열렸습니다.
  대신·소가노 아나메는 살아있는 몸의 여래 같다 이 존상을 신수 하는 것을 주상 해, 대련·모노노베노 오코시, 나카진겸자는 이국의 번신으로서 치우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천황은 소가노 아나메에게 이 존상을 보류가 되었습니다.도목은 우리 집에 여래를 옮겨 , 이윽고 무카이하라의 집을 절로 고쳐 여래모양을 안치해, 매일 봉사했습니다.이것이 우리 나라 부츠쿄지원의 최초인 무카이하라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 국내에서는 갑자기 열병이 유행했습니다.모노노베노 오코시는 이것을 구실로서 천황에 「이러한 재앙이 일어나는 것은 소가씨가 외래의 번신을 신봉 하기 위해서 틀림없습니다」라고 말씀드려 천황의 앞 해를 얻어 무카이하라절에 불을 질렀습니다.
  불길들인 맹화는 금새 해 무카이하라절을 잿더미로 했습니다.그런데 , 그의 여래모양은 이상하게도 전혀 존용을 해치는 일이 없습니다.거기서 미여는 다시 여래모양을 노에 투여하고 풀무로 불어 세우거나 대장장이직에 명해 쳐 잡게 하거나 했습니다.그러나, 존상은 조금도 손상될 것은 없었습니다.


 

 계책 다해 마침내 그들은 존상을 나니와의 호리에에 내던졌습니다.그 후, 소가노 아나메의 아이·마부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 독실하게 불법을 신앙했습니다.그리고, 이것에 반대하는 모노노베노 오코시의 아이·모리야를 멸망시켜, 쇼오토쿠 타이시와 함께 불교를 장려했습니다.여기에 처음으로 불법은 활발하게 되었습니다.
  쇼오토쿠 타이시는 나니와의 호리에에 임해져 먼저 가라앉힐 수 있었던 존상을 궁중에 따르려고 , 그 출현이 기원되었습니다.그러자(면) 여래모양은 한 번 수면으로 부상되어 「지금 당분간은 이 바닥에 있고 나를 데리고 가야 할 사람이 오는 것을 기다리자.그 때야말로 많은 중생을 구하는 기가 익을 때다.」라고 분부, 다시 모습을 물밑에 숨겨졌습니다.


 

 그 무렵, 시나노의 나라에 혼다 요시미츠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어느 때, 쿠니시에 수반하고 도에 간 때, 우연히 이 나니와의 호리에에 접어들었습니다.그러자(면), 「요시미츠, 요시미츠」라고, 아주 절묘한 소리가 어디에서와도 없게 들렸습니다.그리고, 놀라 부들부들 떠는 요시미츠의 눈앞에, 수중에서(보다) 찬연히 빛나는 존상이 출현했습니다.
  여래모양은, 요시미츠가 과거세에 인도에서는 월개연장자로서 (쿠다라)백제에서는 성명왕으로서 여래님이시중들고 있던 것을 이야기가 되었습니다.그리고, 이 일본에서도 많은 중생을 구하기 위해서, 요시미츠와 함께 동국 거쳐 나오시는 것을 신탁이 되었습니다.요시미츠는 환희 해 예배해, 여래모양을 짊어져 시나노의 우리 집에 돌아갔습니다.


 

 요시미츠는 처음 여래모양을 서쪽의 히사주의 맷돌 위에 안치해, 이윽고 불당을 지어 여래모양을 옮겨 했습니다.그런데 이튿날 아침, 요시미츠가 참당하면, 존상의 모습은 거기에는 없습니다.당황해서 집에 돌아가면, 어느새 최초로 안치한 맷돌 위에 돌아와가 되어 있어졌습니다.그리고, 요시미츠에, 「비록 금은 보석으로 성장한 불당이든지, 염불의 소리가 없는 곳에 잠깐도 주 할 수 없다.염불의 소리 하는 곳(중)이 우리 거처이다」라고 분부가 되었습니다.
  또, 요시미츠는 빈곤하고 등 명의 기름에도 어려움을 느끼는 모양이었습니다.그러한 곳, 여래모양은 백호보다 광명을 발해져 이상한 일로 기름이 없는 등심에 불을 켜졌습니다.이것이 현재까지 계속 켜지는 3등불의 등화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여래모양의 영덕은 점차 사람들이 아는 곳(중)이 되어, 멀리 산하를 넘어 이 땅을 방문하는 것은 끊이지 않습니다.시간의 천황인 황극제는, 젠코우지 여래모양의 고토쿠의 높이에 깊게 마음을 움직여져 요시미츠와 선좌를 도에 드시고, 마침내 가람 축조의 칙허를 내려졌습니다.
 이렇게 하고, 삼국 전래의 살아있는 몸의 아미타 여래님을 안치해, 창시·요시미츠의 이름을 그대로 절의 이름으로서 「젠코우지」라고 칭했습니다.이래천3백년 이상의 긴 세월에 걸쳐, 일본 제일의 영지로서 국내 츠츠포들의 남녀노소에게 신앙되게 되었습니다.

 

출전 젠코우지 공식 웹 사이트  http://www.zenkoji.jp/index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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