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ゴリョウィトックジング
我が国の歴史ではよく高麗時代を中世社会と言います.
中世社会と言う(のは), 3ブンボブ(古代-中世-近代)と知られた時代仕分け法で古代社会以後から近代社会に先行する中間の時代を区分したが, 歴史研究が深くなりながら古代と近代の中間時期の社会姿が著しい特徴を持っていることを分かるようになったし, そして中世という時代を別に設定しながら 3ブンボブの時代仕分け法ができました.
このような 3ブンボブに対しては論難が多いか..中世という時代を設定する場合, 一般的に封建的社会構成を抱いています.
封建的社会構成と言う(のは), 社会が封建制によって営為されたという意味です. 封建制は二つの概念を持っているのに, 一つは法制史蹟概念で, 他の一つは経済史蹟概念です.
法制史蹟概念での封建制は主君と封臣の間に封土を媒介にして契約による双務的主従関係が結ばれることを言って地方分権が成り立つのです.
煮こもうとする建国過程で地方豪族たちの助けを借りたので地方彼らの権限を保障してくれました. 豪族勢力の跋扈を阻むために中央に呼び入れて官職を与えて懐柔したが彼らは本館(どの地域出身)を重視しました. チュ・ヒョンには地方官を派遣したが続絃は郷里たちが全権を所有していたし貴族たちが淫書によって彼らの権利を認められました. このようなことを封建的な分権の脈絡で理解することができます.
経済史蹟概念での封建制は土地持ち主である領主と土地を持つことができなかった農奴の間に支配と隷属の関係で結ばれた主席合格制を特徴にしています. 古代社会では支配階級が被支配階級を奴隷にして直接的な支配をしましたが, 中世社会では土地を媒介にする間接的支配方式に変わりました. それはヨーロッパでは領主と農奴の関係で現われたし, 高麗では地主と前号の関係で現われます.
煮こもうとする基本的に王土思想を持っていたが門閥貴族-権門洗足につながる支配層たちがサンチォンウィピョするほどにおびただしい土地を所有しながら兵まで育てる社会でした.
そしてゴングウムゾンという世襲土地を認めたんです.
こんな面で煮こもうとする封建的特徴を持った社会なので古代と近代の中間である中世だと言えます.
が外にも西洋の中世のように仏教が国家の義解強要されて盛んでした. 宗教家王権と結託されて政治,経済,文化に莫大な影響を及ぼしました.

 

高麗の政策
1. 北進政策
王健が昔の地を取り戻すために年間政策.

2. アピーズメントポリシー
渤海の流民たちを高麗に引き入れる政策

3. 崇仏政策
仏教を国に受け入れる政策..

<高麗時代の国際貿易港, 碧瀾渡>

開京で 30里落ちた黄海の中に位した

碧瀾渡は元々誉声港と呼んだがその所にあったビョックランゾングの名をつけて碧瀾渡だと呼んだ. 高麗前期の対外貿易はソングを含めます・金・日本など周辺国と行われていたし遠くアラビアの 大食国とも交易する位交易の対象が手広かった. 各国の海上船団が開京の門戸である 礼成江 河口の碧瀾渡を中心に群がって来ることで, 碧瀾渡は国際貿易港で栄えた. 特にソングとの貿易は非常に重要だったがこの時航路は南北航路が主な幹線だった. ブックソンハングロは山東ドングズ方面で東北直線路によって 大同 語句を経って壅津港または礼成江に至る航路だったし, 南では航路は明紬で東北に 黒山島に至ってまた東北行して西海岸図書を経って礼成江に至る航路だったが, 文宗台までは主にブックソンハングロが, 以後には主にナムソンハングロが発達した. 商行為 のみならず中国の使臣が今年時にもウビョックランゾングに調書を安置して, ズァビョックランゾングで使臣をもてなしたし, こちらから開京までは東西で道路を作っておくなど外交においてもとても重要な所だった.

 

ソングの滅亡の後海でソングとの貿易が消えて, 朝鮮大に立ち入る世宗時異質文化禁止令のためアラビアとの
交易も消えたから碧瀾渡自由貿易港が歴史で消えたのではないか思います.
<高麗の自主性>

 

朝鮮は中国の力に寄り掛かって初期には実利を取って国家を強くして, しかし後期‾末期には萎縮したことに比べて, 煮こもうとする相対的にずっと自主性を重要視した国家でした. ¥”高麗¥”という国名自体が ¥”後高句麗¥”, ¥”高句麗¥”を受け継いで高句麗の昔の領土である北部領土を回復する¥”と言う意味が込められていたし, 政策的でも北進政策を実施しました. 煮こもうとする中国と戦争して敗れたことはたくさんあるが, 自尊心を失わないで最後まで争いました. ¥”姜宛賛¥”の撒水大勝もキタイの 10万台君の侵入があった時, 退かないで最後まで争って勝った事件中の一つであります. また, ソ・ヒは ¥”煮こもうとする高句麗を受け継いだ国家だ.¥”というのを立てて, キタイとの談判で勝って, 江東6株を回復しました.
妙清の西経遷都運動では ¥”高麗を皇帝国だと称して, 独自の年号を使おう¥”という大規模の運動が起きたりしました. このような高麗の自主性が当たった最大の危機は元国との戦争で敗れて占領された時です. この時, 煮こもうとする自主性をしばらく忘れてしまったが,戦争でも最後まで争ったし,元国の力が弱くなった時に,元国の軍事を追い出して,元国の風習をまた禁止したし, 社会改革を追い求めてまた領土を回復して, 自主性を取り戻すようになります. ただ, 高麗末期, 中国を攻撃して満洲を取り戻しなさいという王の命令を ¥”中国と高麗の国境線の間にある講義島¥”で回軍することで反乱を起こした李成桂(朝鮮の招待王)によって滅亡するようになります.


고려..

고려의특징
우리 나라 역사에서는 흔히 고려 시대를 중세 사회라고 합니다.
중세 사회란, 3분법(고대-중세-근대)으로 알려진 시대 구분법에서 고대 사회 이후로부터 근대 사회에 선행하는 중간의 시대를 구분하였는데, 역사 연구가 심화되면서 고대와 근대의 중간 시기의 사회 모습이 두드러진 특징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리하여 중세라는 시대를 별도로 설정하면서 3분법의 시대 구분법이 생겨났습니다.
이러한 3분법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으나..중세라는 시대를 설정할 경우, 일반적으로 봉건적 사회 구성을 안고 있습니다.
봉건적 사회 구성이란, 사회가 봉건제에 의하여 영위되었다는 뜻입니다. 봉건제는 두 가지 개념을 지니고 있는데, 하나는 법제사적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사적 개념입니다.
법제사적 개념에서의 봉건제는 주군과 봉신 사이에 봉토를 매개로 하여 계약에 의한 쌍무적 주종관계가 맺어지는 것을 말하며 지방분권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고려는 건국과정에서 지방 호족들의 도움을 받았으므로 지방 그들의 권한을 보장해주었습니다. 호족세력의 발호를 막기 위해 중앙에 불러들여 관직을 주고 회유했으나 그들은 본관(어느 지역 출신)을 중시했습니다. 주현에는 지방관을 파견했지만 속현은 향리들이 전권을 소유하고 있었고 귀족들이 음서에 의해 그들의 권리를 인정받았습니다. 이러한 것을 봉건적인 분권의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경제사적 개념에서의 봉건제는 토지 소유자인 영주와 토지를 가지지 못한 농노 사이에 지배와 예속의 관계로 맺어진 장원제를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지배 계급이 피지배 계급을 노예로 삼아 직접적인 지배를 하였지만, 중세 사회에서는 토지를 매개로 하는 간접적 지배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그것은 유럽에서는 영주와 농노의 관계로 나타났고, 고려에서는 지주와 전호의 관계로 나타납니다.
고려는 기본적으로 왕토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문벌귀족-권문세족으로 이어지는 지배층들이 산천위표할 정도로 엄청난 토지를 소유하면서 사병까지 기르는 사회였습니다.
그리고 공음전이라는 세습토지를 인정하였고요.
이런 면에서 고려는 봉건적 특징을 지닌 사회이므로 고대와 근대의 중간인 중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서양의 중세처럼 불교가 국가의 의해 강요되어 번성하였습니다. 종교가 왕권과 결탁되어서 정치,경제,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려의 정책
1. 북진정책
왕건이 옛 땅을 되찾기 위하여 연 정책.

2. 융화정책
발해의 유민들을 고려로 끌어들이는 정책

3. 숭불정책
불교를 나라에 받아들이는 정책..

<고려시대의 국제무역항, 벽란도>

개경에서 30리 떨어진 황해안에 위치한

벽란도는 원래 예성항으로 불렀으나 그 곳에 있던 벽란정의 이름을 따서 벽란도라고 이름하였다. 고려 전기의 대외무역은 송을 비롯하여 요·금·일본 등 주변 나라와 행해지고 있었으며 멀리 아라비아의 대식국과도 교역할 만큼 교역의 대상이 광범위했다. 각국의 해상선단이 개경의 문호인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를 중심으로 몰려옴으로써, 벽란도는 국제무역항으로 번창했다. 특히 송과의 무역은 매우 중요했는데 이때 항로는 남북항로가 주된 간선이었다. 북선항로는 산동 등주 방면에서 동북 직선로에 의해 대동 어구를 거쳐 옹진항 또는 예성강에 이르는 항로였고, 남선 항로는 명주에서 동북으로 흑산도에 이르고 다시 동북행하여 서해안 도서를 거쳐 예성강에 이르는 항로였는데, 문종대 까지는 주로 북선항로가, 이후에는 주로 남선항로가 발달하였다. 상행위 뿐 아니라 중국의 사신이 올때에도 우벽란정에 조서를 안치하고, 좌벽란정에서 사신을 대접하였으며, 이곳에서 개경까지는 동서로 도로를 만들어 놓는 등 외교에 있어서도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

 

송의 멸망후 바다로 송과의 무역이 사라지고, 조선대에 들어서는 세종때 이질문화 금지령때문에 아라비아와의
교역도 사라졌기 때문에 벽란도 자유무역항이 역사에서 사라진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고려의 자주성>
조선은 중국의 힘에 의존해 초기에는 실속을 차려 국가를 강하게 하고, 하지만 후기~말기에는 위축되었던 것에 비해, 고려는 상대적으로 훨씬 자주성을 중요시하던 국가였습니다. "고려"라는 국명 자체가 "후고구려", "고구려"를 이어받아 고구려의 옛 영토인 북부영토를 회복하겠다"라고 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었으며, 정책적으로도 북진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고려는 중국과 전쟁하여 패한 적은 많이 있지만, 자존심을 잃지 않고 끝까지 싸웠습니다. "강감찬"의 살수대첩도 거란의 10만대군의 침입이 있었을 때,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싸워 이긴 사건들 중의 하나입니다. 또한, 서희는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이다."라는 것을 내세워, 거란과의 담판에서 이겨서, 강동6주를 회복하였습니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에서는 "고려를 황제국이라고 칭하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자"라는 대규모의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고려의 자주성이 맞은 가장 큰 위기는 원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점령당했을 때입니다. 이 때, 고려는 자주성을 잠시 잃어버렸지만,전쟁에서도 끝까지 싸웠으며,원나라의 힘이 약해졌을 때에,원나라의 군사를 몰아내고,원나라의 풍습을 다시 금지하였으며, 사회개혁을 추구하여 다시 영토를 회복하고, 자주성을 되찾게 됩니다. 다만, 고려 말기, 중국을 공격하여 만주를 되찾으라는 왕의 명령을 "중국과 고려의 국경선의 사이에 있는 강의 섬"에서 회군함으로써 반란을 일으킨 이성계(조선의 초대왕)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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