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岩戸神楽ノ起顕(三代豊国)

 

第二次大戦後の日本の貿易収支 なお、岩戸景気は 1958年6月~1961年12月 の42ヶ月間

ということで、下のやり取りのどちらが正しいかは、貿易統計の推移を見れば歴然。

特に岩戸景気前は、船舶と鉄鋼が輸出の主力であろうがなかろうが、貿易収支は慢性的な赤字。

 

depok 09-22 14:54:28

岩戸景気の際の日本経済は完全に内需型の好景気で、貿易は赤字だが外国技術の導入を積極的に行い、その後の輸出型経済の基盤とした事をどう説明するのか見ものだな。

 

tairan 09-22 14:59:27

1958年~1961年 岩戸景気:これより数年前から船舶と鉄鋼が日本の主力輸出品になっていた。内需に鉄が使われ輸出に回らない一時期だけ赤字になっただけ。

 

年度 貿易黒字
  単位:100万ドル
1945 -18
1946 -236
1947 -266
1948 -232
1949 -192
1950 38
1951 -287
1952 -408
1953 -790
1954 -427
1955 -54
1956 -131
1957 -402
1958 369
1959 361
1960 185
1961 -550
1962 422
1963 -357
1964 872
1965 2,084
1966 2,057
1967 1,126
1968 2,971
1969 3,718
1970 4,439
1971 8,420
1972 8,333
1973 789
1974 3,940
1975 5,843
1976 11,148
1977 20,335
1978 20,531
1979 2,433
1980 6,766
1981 20,358
1982 20,141
1983 34,546
1984 45,601
1985 61,601
1986 101,648
1987 94,034
1988 95,302

 

元スレは、朝鮮王朝末期から大韓帝国にかけて、近代化の実現や独立を維持する事を可能となす、国家運営や経済政策を議論しようと主旨であった。

税制改革や内需拡大による国家財政の改善をはかり、近代化に必要な欧米の技術を導入する事が可能性としてあったのでは?というのがnisiokatuyosi氏やdepokの意見。

それに対して、輸出産品を持たない国が内需の拡大では近代化に必要な外貨を得られないから近代化は無理だったと断定したのが某氏。

それに対して、貿易収支は赤字が続いていても内需拡大で景気をよくして近代化が可能だった例として岩戸景気(1958年6月~1961年12月)を経験した日本の例を提示した。

下に、戦後の日本の貿易収支と累計、および内需を示すGNPの移り変わりを表記しました。
なお、1970年までは360円/UDSの固定レートですが、1971年から変動レートとなったため、1970年までの統計を利用しています。

下の表からは

1)戦後の日本の貿易収支は、終戦後の1945年以降、岩戸景気の数年後まで、赤字の年の方が長く、累積赤字も岩戸景気の前後をピークとして増加傾向にあり、貿易収支の黒字で輸入のための外貨が蓄えられたという状況にはない。

2)一方、GNPの推移から、経済規模が拡大し、国家財政が改善されれば、政府系金融機関からの融資などで民間企業も先進国から産業機械などを購入する輸入資金の調達が可能となり、生産規模の拡大や、品質の向上による産業の近代化(その後の輸出競争力の強化にもつながるけれどね)を果たす事ができた。

 

そのように、表を読むのが自然だとおもうけれどね。

ゆえに、この表からは、岩戸景気およびその後の経済成長は、輸出産業の構造改革を含めた内需の拡大だったと見るべきかと。

 

 

 

 

 

 

貿易収支

戦後累積

GNP

 

 

100万ドル

100万ドル

億円

 

1945

-18

-18

 

 

1946

-236

-254

4,740

 

1947

-266

-520

13,090

 

1948

-232

-752

26,660

 

1949

-192

-944

33,750

 

1950

38

-906

39,470

 

1951

-287

-1193

44,350

 

1952

-408

-1601

52,160

 

1953

-790

-2391

60,020

 

1954

-427

-2818

65,920

 

1955

-54

-2872

86,280

 

1956

-131

-3003

96,710

 

1957


자료로 보는 경제···올바른 것은 어느 쪽?

 민속 음악노기현(삼대 토요쿠니)

 

제2차 대전 후의 일본의 무역수지 덧붙여 이와토 경기는 1958년 6월~1961연 12월의 42개월간

그렇다고 하는 것으로, 아래의 교환의 어느 쪽이 올바른가는, 무역통계의 추이를 보면 분명함.

특히 이와토 경기전은, 선박과 철강이 수출의 주력일 방법이 없든지, 무역수지는 만성적인 적자.

 

depok 09-22 14:54:28

이와토 경기때의 일본 경제는 완전하게 내수형의 호경기로, 무역은 적자이지만 외국 기술의 도입을 적극적으로 실시해,그 후의 수출형 경제의 기반으로 한 일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볼 만하다.

 

tairan 09-22 14:59:27

1958년~1961년 이와토 경기:이것보다 몇년전부터 선박과 철강이 일본의 주력 수출품이 되어 있었다.내수에 철이 사용되어 수출로 돌지 않는 한시기만 적자가 되었을 뿐.

 

연도 무역흑자
  단위:100만 달러
1945 -18
1946 -236
1947 -266
1948 -232
1949 -192
1950 38
1951 -287
1952 -408
1953 -790
1954 -427
1955 -54
1956 -131
1957 -402
1958 369
1959 361
1960 185
1961 -550
1962 422
1963 -357
1964 872
1965 2,084
1966 2,057
1967 1,126
1968 2,971
1969 3,718
1970 4,439
1971 8,420
1972 8,333
1973 789
1974 3,940
1975 5,843
1976 11,148
1977 20,335
1978 20,531
1979 2,433
1980 6,766
1981 20,358
1982 20,141
1983 34,546
1984 45,601
1985 61,601
1986 101,648
1987 94,034
1988 95,302

 

원스레는, 조선 왕조 말기부터 대한제국에 들이고, 근대화의 실현이나 독립을 유지하는 일을 가능이 이루는, 국가 운영이나 경제정책을 논의하려고 주지였다.

세제개혁이나 내수 확대에 의한 국가재정의 개선을 도모해, 근대화에 필요한 구미의 기술을 도입하는 것이 가능성으로서 있던 것은?그렇다고 하는 것이 nisiokatuyosi씨나 depok의 의견.

그에 대하고, 수출 산품을 가지지 않는 나라가 내수의 확대에서는 근대화에 필요한 외화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근대화는 무리였다고 단정했던 것이 모씨.

그에 대하고, 무역수지는 적자가 계속 되고 있어도 내수 확대로 경기를 잘 해 근대화가 가능했던 예로서 이와토 경기(1958년 6월~1961연 12월)를 경험한 일본의 예를 제시했다.

아래에, 전후의 일본의 무역수지와 누계, 및 내수를 나타내는 GNP의 변천을 표기했습니다.
덧붙여 1970년까지는 360엔/UDS의 고정 레이트입니다만, 1971년부터 변동 레이트가 되었기 때문에, 1970년까지의 통계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아래의 겉(표)에서는

1) 전후의 일본의 무역수지는, 종전 후의 1945년 이후, 이와토 경기의 수년후까지, 적자의 해가 길고, 누적적자도 이와토 경기의 전후를 피크로서 증가 경향에 있어, 무역수지의 흑자로 수입을 위한 외화를 저축할 수 있었다고 하는 상황에는 없다.

2) 한편, GNP의 추이로부터, 경제 규모가 확대해, 국가재정이 개선되면, 정부계 금융기관으로부터의 융자등에서 민간기업도 선진국으로부터 산업 기계등을 구입하는 수입 자금의 조달이 가능해져, 생산 규모의 확대나, 품질의 향상에 의한 산업의 근대화(그 후의 수출 경쟁력의 강화에도 연결되지만)를 완수할 수가 있었다.

 

그처럼, 겉(표)를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므로, 이 표에서는, 이와토 경기 및 그 후의 경제성장은, 수출 산업의 구조개혁을 포함한 내수의 확대였다고 봐야할 것인가와.

 

 

 

 

 

 

무역수지

전후 누적

GNP

 

 

100만 달러

100만 달러

억엔

 

1945

-18

-18

 

 

1946

-236

-254

4,740

 

1947

-266

-520

13,090

 

1948

-232

-752

26,660

 

1949

-192

-944

33,750

 

1950

38

-906

39,470

 

1951

-287

-1193

44,350

 

1952

-408

-1601

52,160

 

1953

-790

-2391

60,020

 

1954

-427

-2818

65,920

 

1955

-54

-2872

86,280

 

1956

-131

-3003

96,710

 

1957

-402

-3405

110,770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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