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朝鮮時代のソウルは東西南北で山があって 平地と山を通る 17kmの城郭に取り囲まれた都市だった. 当の時ソウルの行政区域は城郭の内に中部と東西南北を分けて 5部があってまた 46‾52坊で分けられたし城郭の外のソングゾシブリ(城底十里 約 4Km)を含んで今のソウル市役所と言える漢城府で管轄した.

 首都であるソウル外に全国は 8道で分けられたしその下には添え木郡県(府-牧-郡-県)の行政区域があって中央で管理を派遣して治めた. 古代中国で首都を取り囲んでいる 500里の地を 畿だと言ったが中央集権化が 微弱だった 古代に脂肪は脂肪勢力家に委任して治めるようにして 首都周辺の地は直接治めたが中央集権化が成り立った以後にもその名前は残ってソウル周辺の地を京畿道だと言う.

 

 8道 の中で京畿道はソウルを保護しているから重要な行政区域だったが当時京畿道庁と言える競技(景気)監営は敦義門(西大門) 外行政区域上ソウルに位していたし 1896年に水原に移した.

 

 

 絵はおおよそ 18世紀後半くらいに描かれた競技(景気)監営道病(京畿監営図屏)で 12幅の屏風になっている. 絵の指導, 山水画, 風俗画が結合した姿で当時京畿道庁である競技(景気)監営(京畿監営)を中心に西大門外の姿をよく描いている. 1番(回)は西大門があって 2,3番(回)は雇馬庁(雇馬庁)と多くの店, 住宅たちがあって 4‾7番(回)にわたって競技(景気)監営と部属施設, 競技(景気)感謝(京畿監使)のお出ましが 描かれている.

 

 

 そして中国に行く道とヤングウンムン, 中国使臣を迎える建物, 軍事施設などが描かれている. これが描かれる当時の城郭とソングゾシブリ(城底十里)を含んだソウルの人口はおおよそ 20万位にソングゾシブリ(城底十里)にはソウル人口のおおよそ 30‾40% 位が暮した.

 

 

 昔の地図を見ればソウルで敦義門を出てちょっと行けば河川が出て警告校(京庫橋)を経てばすぐ競技(景気)監営が出る. その外にも周辺には雇馬庁(雇馬庁)という言葉を管理する官庁があった. 指導あちこちに書かれている係(契)は部屋(坊) すぐ下の行政区域で  霊鳥(英祖 在位 1724‾1776) 焚く東部 6坊, 南部 11坊, 西部 9坊, 北部 12坊, 中部 8坊で 5部 46坊であり, その下に 328係(契)を置いた.

 

 

 今地図で作って見ればこんな姿だった. 競技(景気)監営の西の方, 北に伸びている永遠に中国と国境都市である義州と繋がれる義州路(義州路)だ. ソウルは四方に 9個の主要道路網が繋がれていたがその中義州では中国と交流するのに重要な交通路だった.

 

 

 

  8度には観さつ使(都観使)が派遣されたが 18等級だった朝鮮の官職で観さつ使は普通 4等級(従二品)だったしその大切さを考慮して京畿道は 3等級(正二品)を派遣する場合が多かった. 一 道医師法, ヒャングゾング, 軍事を統括したし任期は 1年, 補佐するための役人たちも一緒に派遣されたしその地域の主な業務はその地方出身の下級官吏が担当した.

 競技(景気)監営の構造は西の方に門戸でポゾングムン(布政門)があって 2個の門をもっとパスすれば功績な業務を処理する中心建物である宣化堂(宣化堂)があった. 観さつ使の 執務室であるグァンプングガック(観風閣), 補佐する役人たちが勤めるヤングイチォング(営吏庁), 宿所と同時に暮しを担当する出して(内衙), その外の祭祀施設及び休息空間があった. 競技(景気)監営は他の道義監営に比べて比較的簡単な配置構成を見せているのに これはソウルの中にあって他の 道とは差別性があって 役場への性格が弱かったからだ.  

 

 

 

 絵の 1番(回)と 2番(回)部分で 敦義門(西大門) 近くなのに門は 道路拡張を理由で 1915年に撤去された. 内側には門を管理する水門状請(守門将庁)があって城外では米屋と履き物店があった.

 

 

 2,3番(回)部分で絵の雇馬庁(雇馬庁)は駅站制(駅站制)の運営によって役馬(駅馬)を置いて交通, 通信, 郵便, 宿泊などを担当したし功績な業務に準する 私用も利用が可能だった.

 周辺には住宅が密集しているのにわらぶきの場合


조선시대 돈의문 밖의 모습-경기감영도

 

 조선시대의 서울은 동서남북으로 산이 있고 평지와 산을 지나는 17km의 성곽에 둘러싸인 도시였다. 당시 서울의 행정구역은 성곽 안에 중부와 동서남북을 나눠 5部가 있고 다시 46~52坊으로 나뉘었으며 성곽 밖의 성저십리(城底十里 약 4Km)를 포함하여 지금의 서울시청이라 할 수 있는 한성부에서 관할하였다.

 수도인 서울 외에 전국은 8道로 나뉘었고 그 밑에는 부목군현(府-牧-郡-縣)의 행정구역이 있어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다스렸다. 고대 중국에서 수도를 둘러싸고 있는 500리의 땅을 畿라고 했는데 중앙집권화가 미약했던 고대에 지방은 지방 세력가에게 위임하여 다스리게하고 수도 주변의 땅은 직접 다스렸는데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진 이후에도 그 이름은 남아 서울 주변의 땅을 경기도라고 한다.

 8道 중에서 경기도는 서울을 보호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한 행정구역이었는데 당시 경기도청이라 할 수 있는 경기감영은 돈의문(서대문) 밖 행정구역상 서울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1896년에 수원으로 옮겨갔다.

 

 

 그림은 대략 18세기 후반 쯤에 그려진 경기감영도병(京畿監營圖屛)으로 12폭의 병풍으로 되어있다. 그림지도, 산수화, 풍속화가 결합한 모습으로 당시 경기도청인 경기감영(京畿監營)을 중심으로 서대문 밖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다. 1번에는 서대문이 있고 2,3번에는 고마청(雇馬廳)과 여러 가게, 주택들이 있고 4~7번에 걸쳐 경기감영과 부속시설, 경기감사(京畿監使)의 행차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중국으로 가는 길과 영은문, 중국사신을 맞이하는 건물, 군사시설 등이 그려져 있다. 이것이 그려질 당시의 성곽과 성저십리(城底十里)를 포함한 서울의 인구는 대략 20만 정도로 성저십리(城底十里)에는 서울인구의 대략 30~40% 정도가 살았다.

 

 

 옛날 지도를 보면 서울에서 돈의문을 나가 좀 가면 하천이 나오고 경고교(京庫橋)를 지나면 바로 경기감영이 나온다. 그 외에도 주변에는 고마청(雇馬廳)이라는 말을 관리하는 관청이 있었다. 지도 곳곳에 적혀있는 계(契)는 방(坊) 바로 밑의 행정구역으로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때는 동부 6坊, 남부 11坊, 서부 9坊, 북부 12坊, 중부 8坊으로 5部 46坊이었으며, 그 밑에 328계(契)를 두었다.

 

 

 지금 지도로 만들어보면 이런 모습이었다. 경기감영의 서쪽, 북쪽으로 뻗어있는 길이 중국과 국경도시인 의주와 연결되는 의주로(義州路)이다. 서울은 사방에 9개의 주요 도로망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 중 의주로는 중국과 교류하는데 중요한 교통로였다.

 

 

  8도에는 관찰사(都觀使)가 파견되었는데 18등급이었던 조선의 관직에서 관찰사는 보통 4등급(從二品)이었고 그 중요성을 고려해 경기도는 3등급(正二品)을 파견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 道의 사법, 향정, 군사를 통괄하였고 임기는 1년, 보좌하기 위한 관리들도 함께 파견되었으며 그 지역의 주요업무는 그 지방출신의 하급관리가 담당하였다.

 경기감영의 구조는 서쪽에 출입문으로 포정문(布政門)이 있고 2개의 문을 더 통과하면 공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중심건물인 선화당(宣化堂)이 있었다. 관찰사의 집무실인 관풍각(觀風閣), 보좌하는 관리들이 근무하는 영이청(營吏廳), 숙소이자 살림을 담당하는 내아(內衙), 그외의 제사시설 및 휴식공간이 있었다. 경기감영은 다른 도의 감영에 비해 비교적 간단한 배치구성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서울 안에 있으며 다른 道와는 차별성이 있어 지방관청으로의 성격이 약했기 때문이다.  

 

 

 그림의 1번과 2번 부분으로 돈의문(서대문) 근처인데 문은 도로확장을 이유로 1915년에 철거되었다. 안쪽에는 문을 관리하는 수문장청(守門將廳)이 있고 성밖으로는 쌀가게와 신발가게가 있었다.

 

 

 2,3번 부분으로 그림의 고마청(雇馬廳)은 역참제(驛站制)의 운영에 따라 역마(驛馬)를 두어 교통, 통신, 우편, 숙박 등을 담당하였고 공적인 업무에 준하는 私用도 이용이 가능했다.

 주변에는 주택이 밀집하여 있는데 초가집의 경우 乚匚囗字의 평면형태를 보이고 있고 길에 접하고 있는 벽은 벽돌, 돌, 흙으로 만든 구조로 되어있다. 기와집 중에서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 등을 갖춘 집은 사대부 주택의 전형적인 구조를 보이고 있고 서민주택의 구조에 기와지붕을 얹거나 그 외 사대부 주택을 모방한 구조를 보이고 있으며 지붕에 차양이 있는 곳도 있어 주택규제도 상당히 완화되는 시대의 추세를 볼 수 있다.

 

 

 4, 5, 6번 부분의 경기감영 모습으로 오른쪽에는 경기빈관(京畿賓館)이 있다. 보통 지방 관청의 경우 중앙에서 일시적으로 파견되는 공무원 숙소로 객사(客舍)라는 것이 있었는데 가운데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셔놓고 1일과 15일에 이곳에서 의례를 올렸고 좌우에는 숙식을 위한 방이 있었다. 경기빈관은 서울에 있어 근처에 국가에서 운영하는 숙소도 있었기 때문에 지방보다 단순하고 규모가 작은 모습을 하고 있다.

 

 

 7번의 경기감영의 정문 앞으로 사거리가 형성되어 있고 상점들이 있다. 그 중 신설약국(新設藥局)과 만병회춘(萬病回春)이라는 가게 이름을 가진 약방 겸 한의원이 있는데 기와집의 건물에 붙여 假家에 遮陽까지 설치되어 판매행위까지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제법 큰 약방이었던 것 같다.

 경기감영의 정문 앞으로는 관찰사의 행차가 그려져 있는데 말을 타고 수행하는 공무원들과 엎드려있는 공무원들이 보이며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는 백성들은 구경을 하고 있다.

 

 

 앞의 관찰사 행렬과 이어지는 부분으로 행렬의 전체적인 모습은 백마를 탄 관찰사를 중심으로 깃발을 든 기수, 호위병, 악기를 연주하는 악대, 보좌하는 공무원과 일꾼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주변으로는 市井의 풍속을 볼 수 있다.

 역시 假家라는 임시 상업시설이 설치된 가게들이 보이고 여기에 물건을 진열하여 종이와 붓, 쌀, 신발, 야채 등을 팔고 주막도 보인다. 이런 가게시설들은 길 쪽으로는 상업시설이고 뒤쪽으로는 주거시설이 있는 형태이다. 구경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도 물건을 날라주고 돈을 받는 사람이라든지 물건을 들고 다니면서 파는 사람, 길을 지나가는 나그네, 양반과 서민 등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10, 11번 부분의 경기중영(京畿中營)의 모습으로 관찰사는 군사의 업무도 담당하므로 따로 中軍의 집무시설인 中營을 두었다. 그림에는 관찰사를 중심으로 보좌관, 호위병, 행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고 무사들은 활을 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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