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香ばしい五月の花香りが胸深み懐かしくなれば雪降った光化門四つ角こちらにこんなにまた尋ねて来ます

 

 歌手イ・ムンセが 1988年 ¥”光化門恋歌¥”で歌ったように光化門四つ角は恋人たちが会って別れてまたその場所を歩いて思い出に耽る多くの人々に記憶に残る場所だったろう.  

  光化門四つ角の終り, その中心に位する 光化門はそんな恋人たちの記憶だけではなく韓国の 歴史でも記憶に残る重要な場所だった. 朝鮮建国後中心宮廷である景福宮正門で立てられた以後このお問い合わせ運命はそんなに順調ではなかった. そして 2010年 8月 15日に合わせて元々の姿で光化門四つ角の前に また立つ.

 

 

 光化門は 1395年初めて立てられた. 元々名前はサゾングムン(四正門)だったが 1425年景福宮を修理しながら西経(書経)に出る ‘光ピサ表火急万方(光被四表 化及万方・光が四方を覆って教化が万方に及ぶ)’という句節から取って光化門(光化門)で名前が変えた.

 

 

 景福宮の正門で 200年近く維持されている途中 1592年景福宮とともに火に燃えた後 270年間廃墟状態であった. 戦争以後財政が難しくて王権が弱化された状態だから中心宮廷である景福宮を再建することはたやすい事ではなかった.

 絵は 18世紀後半の景福宮なのに光化門は石になった門部分だけ残っていて慶会桜も石柱だけ残っているだけ大部分空所と森で成り立って戦争以前の派手な宮廷の姿は捜してみ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1863年政権を取った興宣大院君は落ちた王室の権威を立てるために 1865年景福宮工事を取り掛かるのにこの時光化門もまた立てられた. 光化門前には朝鮮で一番広いだけである六朝距離(通り)が南に伸びていて左右では行政官庁が密集している朝鮮の政治 1滲んだ. ソウルには宮廷が 5ヶ所があるのに景福宮の正門である光化門だけ成文のように石になった門の上に樓閣が上がった形態で朝鮮の建国以後長い間国家を象徴する中心だった.

 

 

 

 光化門は 3個の門があるのに中に門は王が出入りして東ではそれぞれ入れ墨と武臣が出入りする門だった. 光化門をパスすればフングリェムンがあってその後ではグンゾングムン, グンゾングムンを経てば朝鮮政治の核心と同時に景福宮の中心建物である勤政殿がこの 3個の文科中心軸に合わせられて置かれていたしその後では王の執務室, 王の寝室, 王妃の寝室, 後援そして垣根を越して北岳山とつながる, 六朝距離(通り)とともにソウル都城中の南北の中心軸と同時に朝鮮の象徴的な場所だった.

 

 

 1910年朝鮮が亡びてやや過ぎて景福宮はまた試練にあう. 1915年朝鮮統治を宣伝して産業を振興させて多くの政治的な目的などで朝鮮物産共進会という博覧会似ているイベントを開いたが景福宮はそのイベント場所で大部分の建物は撤去されて臨時に建てた展示場と多くの施設物, 野外には朝鮮各地から持って来た由緒のある石塔と石仏たちが置物で満たされた. この時には光化門はまだもとの場所にあった.

 

 

 当時総督府は南山にあったが建物が狭くて狭小だったから新たに建設計画に取り掛かるようになる. 建物を建てる敷地で今のソウル大学校病院と大学路近くなども候補に選定されたが反対があったにも権力によって朝鮮の象徴である景福宮の中グンゾングムンまん前に立てられるようになる.

 写真は謹呈文科令弟校なのにもう 1915年 以前に撤去された状態だった.  

 

 

 

 1926年総督府建物が立てられるとその前にある光化門も撤去される運命を当たったが朝鮮人だけではなく日本人の中でも反対世論があって光化門を景福宮洞方へ移転することで決める.  その中日本の美術評論家であるヤナギムネヨシは新聞の寄稿文を通じて

光化門よ! 光化門よ! お前の生命が朝夕(朝夕)に切迫した. あ! どうすれば良いか?して歎息して日本人たちにたとえば日本が衰弱して遂に朝鮮に合併されることで宮城が廃墟になってその席に私良風(洋風)の日本総督府建物が立てられて江戸城(江戸城)が取り払われる姿を想像してくださると書いて光化門撤去を強力に反対した.

 

 

 光化門でも撤去されないことは幸いだったが朝鮮の象徴だった光化門が移転されることも当時朝鮮知識人に悲しみだったか報道人だった雪意式は ¥”ホルリョジッヌン光化門¥”と言う(のは)文で

お互いに見ることもできないかがもう数年もなった景福宮昔の大闕には 長霖に出ることは悪い雨が降ったり止んだりする. 光化門屋根でトックタックするつち音は 長安を経って 北岳にぶつかる. 南山にもぶつかる. そして切ながる 白衣人の胸にブディッチンダと言いながら悲しんだ.

 

 

 光化門は洞方へ移されたし以後景福宮が以後にも何回もイベント場所で使われながら光化門は置物を付けたまま入場者たちを当たった.

 

 

 

 光化門の元々位置には総督府の垣根と鉄格子が立てられて総督府の正門は光化門の元々位置でちょっと東に立てられた. 権力の建築は権力の意図によってどの時代も強い象徴性が付与されるものと決まっているのに総督府の場合 日字の平面形態に景福宮の中心軸でちょっと行き違うように東を眺めるように建てられた. その方向には南山があったし南山には 朝鮮神宮があった.

 

 

 1945年 8月 15日に朝鮮は解放になったし以後大韓民国が建国された. やや過ぎて 1950年朝鮮戦争が起こって光化門は不幸にも爆撃を迎え木造樓閣部分が消失した.

 

 

光化門はまた 1968年当時大統領朴正煕の指示によって復元される. しかしこの時の復元は 2階樓閣部分が木造ではないコンクリートという致命的な問題点を持っていたし位地図総督府建物に中心軸が合わせられて元々位置よりちょっと東北の方に位するようになったし高さも元々より高く建てられた. 当の時文化界の人物たちがこの復元に対して反対が手強かったが当時貧しかった韓国の経済状況に新興独立国でよく 現われる民族主義に の一伝統文化に対する欲求の折衷店でこういう 悲愴鳥迹な伝統の模倣と合理主義, 権力の文化認識不足などの結果でこんなコンクリート韓屋様式を生んだのだ.

 

 

 

 こんな光化門だったが長い間過去の六朝距離(通り)だった世宗路の象徴的な建築物で多くの人々が総督府と重なった光化門を憶えるようになったしこちらには多くの現代の事件と多くの人々の思い出がつけている.

 1995年権力によって景福宮に立てられた総督府建物はやっぱり権力によって撤去されて 20年にわたった景福宮復元事業によって景福宮の中心軸にあるある部分は大部分復元されたし後の山と景福宮, 前の中心大道と繋がれる景観の軸は回復したが光化門も不完全な復元だったから 2007年完全 解体してまた修復するようになる.

 

 

 2010年 8月 15日懸板公開で光化門はまたもとの場所に立つ. これにより景福宮の中心軸はほとんど完成になったし今後とも景福宮の復元は進行されるでしょう. 光化門がもとの場所を捜すまでは長年の期間がかかった. 朝鮮建国以後長い間光化門の前は朝鮮と韓国の政治, 社会, 文化など歴史的事件の中心舞台だったし 100年以前から 韓国のすべての道路は光化門の前で始まるように韓国の中心で象徴だ. 多くの試練を経験したが再び 立てられる光化門は以前にそうだったように長い間また多い人々の記憶に積もるでしょう.

 


광화문연가

 "향긋한 오월의 꽃 향기가 가슴깊이 그리워지면 눈 내린 광화문 네거리 이곳에 이렇게 다시 찾아와요"

 

 가수 이문세가 1988년 "광화문연가"에서 노래하였듯이 광화문 네거리는 연인들이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그 장소를 걸으며 추억에 잠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에 남는 장소였을 것이다.  

  광화문 네거리의 끝, 그 중심에 위치하는 광화문은 그런 연인들의 기억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에서도 기억에 남는 중요한 장소였다. 조선 건국 후 중심궁궐인 경복궁 정문으로 세워진 이후 이 문의 운명은 그렇게 순탄하지 못 했다. 그리고 2010년 8월 15일에 맞춰 원래의 모습으로 광화문 네거리 앞에 다시 선다.

 

 

 광화문은 1395년 처음 세워졌다. 원래 이름은 사정문(四正門)이었는데 1425년 경복궁을 중수하면서 서경(書經)에 나오는 ‘광피사표 화급만방(光被四表 化及萬方·빛이 사방을 덮고 교화가 만방에 미친다)’이라는 구절에서 따와 광화문(光化門)으로 이름이 바꿨다.

 

 

 경복궁의 정문으로 200년 가까이 유지되다가 1592년 경복궁과 함께 불에 탄후 270년간 폐허 상태로 있었다. 전쟁 이후 재정이 어렵고 왕권이 약화된 상태였기 때문에 중심궁궐인 경복궁을 재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림은 18세기 후반의 경복궁인데 광화문은 돌로 된 문 부분만 남아있고 경회루도 돌기둥만 남아있을 뿐 대부분 공터와 숲으로 이루어져 전쟁 이전의 화려한 궁궐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1863년 정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떨어진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1865년 경복궁 공사를 착수하는데 이때 광화문도 다시 세워졌다. 광화문 앞으로는 조선에서 가장 넓은 대로인 육조거리가 남쪽으로 뻗어있고 좌우로는 행정관청이 밀집하여 있는 조선의 정치 1번지였다. 서울에는 궁궐이 5곳이 있는데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만 성문처럼 돌로 된 문 위에 누각이 올라간 형태로 조선의 건국 이후 오랫동안 국가를 상징하는 중심이었다.

 

 

 광화문은 3개의 문이 있는데 가운데 문은 왕이 출입하고 동서는 각각 문신과 무신이 드나드는 문이었다. 광화문을 통과하면 흥례문이 있고 그 뒤로는 근정문, 근정문을 지나면 조선정치의 핵심이자 경복궁의 중심건물인 근정전이 이 3개의 문과 중심축에 맞춰져 놓여있었고 그 뒤로는 왕의 집무실, 왕의 침실, 왕비의 침실, 후원 그리고 담장을 넘어 북악산과 이어지는, 육조거리와 함께 서울도성 안의 남북의 중심축이자 조선의 상징적인 장소였다.

 

 

 1910년 조선이 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복궁은 다시 시련을 맞는다. 1915년 조선 통치를 선전하고 산업을 진흥시키고 여러 정치적인 목적 등으로 조선물산공진회라는 박람회 비슷한 이벤트를 열었는데 경복궁은 그 이벤트 장소로 대부분의 건물은 철거되고 임시로 지은 전시장과 여러 시설물, 야외에는 조선 각지에서 가져온 유서깊은 석탑과 석불들이 장식물로 채워졌다. 이때에는 광화문은 아직 제자리에 있었다.

 

 

 당시 총독부는 남산에 있었는데 건물이 좁고 협소하였기 때문에 새로 건설계획에 착수하게 된다. 건물을 지을 부지로 지금의 서울대학교 병원과 대학로 근처 등도 후보로 선정되었는데 반대가 있었음에도 권력에 의해 조선의 상징인 경복궁 안 근정문 바로 앞에 세워지게 된다.

 사진은 근정문과 영제교인데 이미 1915년 이전에 철거된 상태였다.  

 

 

 1926년 총독부 건물이 세워지자 그 앞에 있는 광화문도 철거될 운명을 맞았는데 한국인뿐만 아니라 일본인 중에서도 반대 여론이 있어서 광화문을 경복궁 동쪽으로 이전하는 것으로 결정한다.  그 중 일본의 미술평론가인 야나기 무네요시는 신문의 기고문을 통해

"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 너의 생명이 조석(朝夕)에 절박하였다. 아! 어찌하면 좋을까?"하고 탄식하고 일본인들에게 "가령 일본이 쇠약하여 마침내 조선에 합병됨으로써 궁성이 폐허가 되고 그 자리에 저 양풍(洋風)의 일본총독부 건물이 세워지고 에도성(江戶城)이 헐리는 모습을 상상해 주기 바란다"라고 쓰며 광화문 철거를 강력히 반대하였다.

 

 광화문이나마 철거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지만 조선의 상징이었던 광화문이 이전되는 것도 당시 조선 지식인에게 슬픔이었는지 언론인이었던 설의식은 "헐려짓는 광화문"이란 글에서

"서로 보지도 못한지가 벌써 수년이나 된 경복궁 옛 대궐에는 長霖에 남은 궂은 비가 오락가락한다. 광화문 지붕에서 뚝딱하는 망치소리는 長安을 거쳐 北岳에 부딪친다. 남산에도 부딪친다. 그리고 애달파하는 白衣人의 가슴에 부딪친다"라며 슬퍼하였다.

 

 

 광화문은 동쪽으로 옮겨졌고 이후 경복궁이 이후에도 여러차례 이벤트 장소로 사용되면서 광화문은 장식물을 붙인채로 입장객들을 맞았다.

 

 

 광화문의 원래 위치에는 총독부의 담장과 쇠창살이 세워지고 총독부의 정문은 광화문의 원래 위치에서 약간 동쪽에 세워졌다. 권력의 건축은 권력의 의도에 따라 어느 시대나 강한 상징성이 부여되기 마련인데 총독부의 경우 日字의 평면형태에 경복궁의 중심축에서 약간 어긋나게 동쪽을 바라보도록 지어졌다. 그 방향에는 남산이 있었고 남산에는 朝鮮神宮이 있었다.

 

 

 1945년 8월 15일에 조선은 해방이 되었고 이후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광화문은 불행하게도 폭격을 맞아 목조누각 부분이 소실되었다.

 

 

광화문은 다시 1968년 당시 대통령 박정희의 지시에 의해 복원된다. 하지만 이때의 복원은 2층 누각 부분이 목조가 아닌 콘크리트라는 치명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고 위치도 총독부 건물에 중심축이 맞춰져 원래 위치보다 약간 동북쪽에 위치하게 되었으며 높이도 원래보다 높게 지어졌다. 당시 문화계의 인물들이 이 복원에 대해 반대가 만만치 않았는데 당시 가난했던 한국의 경제상황에 신흥독립국에서 흔히 나타나는 민족주의에 의한 전통문화에 대한 욕구의 절충점에서 이런 비창조적인 전통의 모방과 합리주의, 권력의 문화인식 부족 등의 결과로 이런 콘크리트 한옥양식을 낳은 것이다.

 

 

 이런 광화문이었지만 오랜기간 과거의 육조거리였던 세종로의 상징적인 건축물로 많은 사람들이 총독부와 겹쳐진 광화문을 기억하게 되었고 이곳에는 많은 현대의 사건들과 여러 사람들의 추억들이 묻혀있다.

 1995년 권력에 의해 경복궁에 세워졌던 총독부 건물은 역시 권력에 의해 철거되고 20년에 걸친 경복궁 복원사업으로 인해 경복궁의 중심축에 있는 있는 부분은 대부분 복원되었고 뒤의 산과 경복궁, 앞의 중심대로와 연결되는 경관의 축은 회복되었지만 광화문 역시 불완전한 복원이었기 때문에 2007년 완전 해체하고 다시 복원하게 된다.

 

 

 2010년 8월 15일 현판공개로 광화문은 다시 제자리에 선다. 이로인해 경복궁의 중심축은 거의 완성이 되었고 앞으로도 경복궁의 복원은 진행될 것이다. 광화문이 제자리를 찾기까지는 오랜 기간이 걸렸다. 조선건국 이후 오랫동안 광화문 앞은 조선과 한국의 정치, 사회, 문화 등 역사적 사건의 중심무대였으며 100년 이전부터 한국의 모든 도로는 광화문 앞에서 시작되듯이 한국의 중심이며 상징이다. 많은 시련을 겪었지만 다시 세워지는 광화문은 이전에 그랬듯이 오랫동안 다시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쌓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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