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8月15日ぶりになればその日の悽惨だった悪夢が浮び上がって思うのも嫌いだが絶対に忘れなくて・ 日本政府謝りと賠償はどころか遺骸発掘さえしないか知れなくて・

1945年 8月15日解放を迎え日本に徴用で引かれて行ったウキシマホに乗って帰国した中に爆沈されてやっと生き残った永同の最後の生存者ジユンシック(85. 秋風嶺面ウングブックリ)さんは 65年前その日の悪夢をこんなに打ち明けた.

 
- ウキシマホ事件最後の生存者ジユンシックシ
20歳の時のジシは 1943年 5月令状が出て召集通報を受けてハンドングネ兄さんである新材院さんとの下町内金胎息さんなどは永同郡庁に集結して 50人余りと一緒に永同駅で軍用列車に乗って釜山に到着して翌日負傷港を出発日本に引かれて行った.

一人息子であるジシは心配するお母さん考えを後にしたまま日本に精神なしに到着したジシは永同から行った仲間たちと 5日位かかって間所は青森の飛行場だった.

海軍所属軍属であるジシは日本軍下でさせる仕事なら何でも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主に飛行機を偽装する事から海辺かきをほって弾薬庫作りなどベニヤ板で作った幕舍で食べて寝ながら一日中仕事ばかりしたし迎えたりたくさんした.

日本にあるうちに故郷を一時も忘れた事がなかったジシは急に解放になったと言う消息を聞いて故郷に帰るという考えにどれだけ嬉しかったのか言葉で表現ができないほどだった.

解放消息を聞いて何事後の 8月 18日日本海軍たちが朝鮮へ行く船を乗せてくれると言って青森県五味ナトー港で乗った船がウキシマという名前の軍艦だった.

乗ってみたらお腹には朝鮮人々がぎっしりしたし席も窮屈で不便で一緒に行った町内兄さんであるシンさんと甲板にあった.

船に乗って二日が経っただろうか今や低制や朝鮮に到着するか待ったが急にクァングする音がしたら大きいお腹が半分がぽかんとして割れながら中でから海の中に沈んだし船に乗った人々大分が手も使う事ができなくて海水に荒されて入って行く姿はアビグィしたそのものだった.

当時船上一番てっぺん甲板欄干にぶら下げられていた地さんは落ち葉のように海の中に数千名がスルリョがは人々と爆発しながらあちこちで破片が飛んで手足が離れるなど本当に無惨な姿を目撃したと回考した.

死力をつくしてクッがだぶら下げられていたジシは以後構造盃がわお腹を乗り換えて釜山港に無事に到着するようになったが今思えば地獄で九死一生に生き残ったことは空が助けたことだと言った.

私は住んで帰って来て幸いだが軍艦の沈む時おかゆは数千名の朝鮮人たちはどこで訴えなければならないか切ない考えに捕らわれて家に帰って来てもしばらく血なまぐさかった姿が夢に現われて眠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と言葉を引き継ぐことができなかった.

事故原因は確かに明かされていないが湾内に敷設した米軍の機雷と衝突して偶然に沈んだという日本側主張とともに弾日本海軍たちが釜山に到着すれば仕返しするかも知れないという恐ろしさにわざわざ爆破させたというなどまちまちだ.

以後ジシは常住が故郷である博愛姉氏と見合いで会って 2男2女を置いて多幸に生活しているのに徴用被害補償のために今は故人になったイゴンテ, 金冬天さんなど当時永同の生存者と遺族たちと一緒に賠償のために日本まで渡って日本政府を相手で訴訟をしたが現在までこれといった補償が成り立っていない.

もうそれさえも補償闘いをした生存者たちは皆世を去ってウキシマホ事件当時状況を証言する永同で唯一の生存者になった.

ジユンシックシは時代をザルモッマンナ日本軍徴用に朝鮮戦争参戦など苦労だけ資質がしたともう胸の傷はほとんど出たがしかしその日の仕事に対して日本も我が政府もまともに真実を明らかにしていなくて徴用申告をしなさいと言って届けたが今まで何らの消息がなくて息苦しいのに死ぬことの前真実を明らかにして当時死んだ朝鮮人たちの寃魂をなだめてくれなければならないと言った

朝鮮人ピジングヨングザ 3,725人と日本海軍乗務員 255人を乗せて京都近所のマイズで港湾に停泊中だった 4,730tの日本海軍輸送船ウキシママで(浮島丸)呼値 1945年 8月 24日ワンインモルは爆発事故で沈んだ.


ウキシママルホは二日前である 22日日本海軍基地五味ナトー港を出発, 釜山に向ける中マイズで港湾にしばらく寄港してからこのような惨事にあった.

 

 

 日本政府はこの事故でお腹に乗っていた朝鮮人 524人と日本海軍 25人等 549人が死亡したと公式発表したが, 当時事故現場目撃者たちと生存者たちは実際にお腹に乗った人々は徴用者外家族 7千5百人もなるので 5千名以上が首長されたはずだと主張した.


も日本海軍が朝鮮人ピジングヨングザの暴動を恐れたあげく五味ナトー海軍基地周辺にあった韓国人を強制でウキシママルホに積んで釜山で出港させたし, 出港の前日本海軍 250人余りが先に船から降りたという事実も生存者たちによって続々と明かされながら日本海軍の故意的な爆発にも関心が集められている.

 

 事故船舶が 4,730tもなる大きい軍艦で大規模爆撃ではなくては短い時間に沈みにくいという問題も申し立てられていて相変らず疑問はいらっしゃっていない


우키시마호 침몰 끝나지 않는 상처

8월15일만 되면 그날의 처참했던 악몽이 떠올라 생각하기도 싫지만 절대로 잊혀지지도 않아· 일본 정부 사과와 배상은 커녕 유해발굴조차 안하고 있는지 몰라·"

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아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갔다 우키시마호를 타고 귀국하던 중에 폭침돼 가까스로 살아남은 영동의 마지막 생존자 지윤식(85. 추풍령면 웅북리)씨는 65년 전 그날의 악몽을 이렇게 털어놨다.

 
- 우키시마호 사건 마지막 생존자 지윤식씨
20살 때인 지씨는 1943년 5월 영장이 나와 소집통보를 받고 한동네 형인 신재원씨와 아래동네 김태식씨 등은 영동군청에 집결해 50여명과 함께 영동역에서 군용열차를 타고 부산에 도착해 다음날 부상항을 출발 일본으로 끌려갔다.

외아들인 지씨는 걱정할 어머니 생각을 뒤로 한 채 일본에 정신없이 도착한 지씨는 영동에서 간 일행들과 5일정도 걸려 간 곳은 아오모리의 비행장이었다.

해군소속 군속인 지씨는 일본군 밑에서 시키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해야 했다.

주로 비행기를 위장하는 일에서부터 바닷가 굴을 파 탄약고 만들기 등 베니어판으로 만든 막사에서 먹고 자면서 하루 종일 일만했고 맞기도 많이 했다.

일본에 있는 동안 고향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던 지씨는 갑자기 해방이 됐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얼마나 기뻤는지 말로 표현을 못할 정도였다.

해방소식을 듣고 몇 일 뒤인 8월 18일 일본 해군들이 조선에 가는 배를 태워준다고 해 아오모리현 오미나토항에서 탄 배가 우키시마라는 이름의 군함이었다.

타고 보니 배에는 조선 사람들이 빼곡했고 자리도 비좁고 불편해 함께 갔던 동네 형인 신씨와 갑판에 있었다.

배를 타고 이틀이 지났을까 이제나 저제나 조선에 도착할까 기다렸는데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나더니 큰 배가 절반이 쩍 하고 갈라지면서 가운데서부터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으며 배에 탔던 사람들대분이 손도 못쓰고 바닷물에 휩쓸려 들어가는 모습은 아비귀한 그 자체였다.

당시 선상 제일 꼭대기 갑판난간에 매달려 있었던 지 씨는 낙엽처럼 바다 속으로 수 천명이 쓸려가는 사람들과 폭발하면서 여기저기로 파편이 튀어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는 등 정말 끔찍한 모습을 목격했다고 회고했다.

사력을 다해 끝가지 매달려 있었던 지씨는 이후 구조배가 와 배를 옮겨 타며 부산항에 무사히 도착하게 됐는데 지금 생각하면 지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은 것은 하늘이 도운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살아 돌아 와 다행이지만 군함이 가라앉을 때 죽은 수천명의 한국인들은 어디서 하소연해야 하는지 안타까운 생각에 사로잡혀 집에 돌아 와서도 한동안 참혹했던 모습이 꿈에 나타나 잠을 이루지 못했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사고원인은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만내에 부설한 미군의 기뢰와 충돌해 우연히 침몰했다는 일본 측 주장과 함께 탄 일본 해군들이 부산에 도착하면 보복할지도 모른 다는 두려움에 일부러 폭파시켰다는 등 분분하다.

이후 지씨는 상주가 고향인 박애자씨와 중매로 만나 2남2녀를 두고 다복하게 생활하고 있는데 징용피해보상을 위해 지금은 고인이 된 이건태, 김동천씨 등 당시 영동의 생존자와 유족들과 함께 배상을 위해 일본까지 건너가 일본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했지만 현재까지 이렇다할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제 그나마 보상투쟁을 벌였던 생존자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고 우키시마호 사건 당시 상황을 증언할 영동에서 유일한 생존자가 됐다.

지윤식씨는 "시대를 잘못만나 일본군 징용에 한국전쟁 참전 등 고생만 자질이 했다"며 "이제 가슴의 상처는 거의 다 났지만 그러나 그날의 일에 대해 일본도 우리정부도 제대로 진실을 밝히지 않고 있고 징용신고를 하라고 해 신고했는데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어 답답한데 죽기 전 진실을 밝혀 당시 죽은 한국인들의 원혼을 달래줘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인 피징용자 3,725명과 일본 해군 승무원 255명을 태우고 교토 부근의 마이즈루 항만에 정박중이던 4,730t의 일본 해군 수송선 우키시마마루(浮島丸)호가 1945년 8월 24일 원인모르는 폭발사고로 침몰했다.


우키시마마루호는 이틀전인 22일 일본 해군기지 오미나토항을 출발, 부산으로 향하던 중 마이즈루 항만에 잠시 기항했다가 이같은 참사를 당했다.

 

 일본 정부는 이 사고로 배에 탑승하고 있던 한국인 524명과 일본 해군 25명 등 549명이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했으나, 당시 사고현장 목격자들과 생존자들은 실제로 배에 탑승 한 사람들은 징용자 외 가족 7천5백명이나 되므로 5천명 이상이 수장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일본 해군이 한국인 피징용자의 폭동을 두려워 한 나머지 오미나토 해군기지 주변에 있던 한국인을 강제로 우키시마마루호에 싣고 부산으로 출항시켰고, 출항 전 일본 해군 250여명이 먼저 배에서 내렸다는 사실도 생존자들에 의해 속속 밝혀지면서 일본 해군의 고의적인 폭발에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사고선박이 4,730t이나 되는 큰 군함으로 대규모 폭격이 아니고서는 짧은 시간에 침몰하기 어렵다는 문제도 제기되고 있어 여전히 의문은 가시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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