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朝鮮時代のソウルは東西南北で山で取り囲まれて平地と山を通る 17kmの城郭に取り囲まれた都市だった. 当の時ソウル市役所である漢城府は 城郭内部と城郭外部約 4km 程度を管轄した.

 ソウルの北山である北岳山の下には朝鮮の象徴と言える景福宮を配置して左廟宇社(左廟右社)の原則によって左側には宗廟, 右側には辞職(社稷)を配置してそのこれからは行政官庁が密集している一番広い道路である六朝距離(通り)が南に伸びていた. 六朝距離(通り)は西大門と東大門を引き継ぐ東西に這うのが伸びた道と会うのにこちらがウンゾングが(雲従街)だ.

 

 

 

 ウンゾングが(雲従街)は言葉とおり人々が雲のようにモルロドンダで付いた名前なのにソウルで一番店鋪たちが密集した商業の中心地だった. 今こちらは鐘路という名前と呼ばれているのにこちらに鍾樓(鐘閣)があったからだ. この鍾樓はソウル都城中で中心になる位置にあるのに 1398年から鐘をかけて 認定(人定 夜 10時)と罷漏(罷漏 夜明け 4時)に 鐘をついてその音でソウルの 8個の城の門を開いて閉めた. 1413年に今の 近くでオルギで 1440年には 2階の樓閣を建ててその下に人を通行するようにしたが壬辰の乱の時消えてまた 1階で立てられてから朝鮮戦争の時消えたことを 2階で新祝いだった. 今は鐘は博物館に行って新たに作った鐘を歩いて新年 1月 1日にだけ 33番(回)を打つ他種式が生っている.

 

 

 

 普信閣が位置上ソウルの中心に人が一番多く過ぎ去る所だった. 朝鮮を国を建てて都市を計画しながら主要施設に名前をつけながら儒教の象徴性を付与したが儒教の徳目に重要視される仁義礼智信(仁義礼智信)を防衛によって東の興仁之門, 西の方の敦義門, 南側の崇礼門, 北には 智 代わりに 靖を入れて肅靖門と言って中心は普信閣と名付けた.

 

 

 

 写真は西の方を眺めながら取ったことで遠く仁王山の山なみが見えて直線につながった道に左側でちょっと折って丘を上がれば西大門である敦義門があった. 左側に屋根に白船で棟がある建物右側が普信閣だ.

 1412年から道路周辺に 2000ヨカンが過ぎる市廛行廊(市廛行廊)を 作って国家で管理した. 多くの種類の店鋪の中でも絹, 明紬, 麻, 紙, 魚物, 無名の 6種類の物品を(時代によって少しずつ違う) 売る商店が盛んだったがこれを六ゃ廛(六矣廛)という. 市廛上である(市廛商人)たちは国家で必要な物品と税金を提供する代わりに独占権と特権を受けたがその中一つが金乱戦圏(禁乱廛権)だ.

 朝鮮後期都市で人口が流入されながら零細な民間商人たちが底に品物を敷いて置いて売る乱戦(乱廛)を形成し始めたがこれを取り締まることができる権利が金乱戦圏(禁乱廛権)だ. 民間商人たちは既存商人に対抗しながら徐徐に乱戦(乱廛)が盛んになって以後物価が高くなることを阻んで物資の円滑な調逹のために商業を自由化させながら 1791年六ゃ廛(六矣廛)を除いて金乱戦圏(禁乱廛権)を廃止する.

  

 

 写真は左側には西の方山である仁王山, 右側尖ったような山は北山である北岳山で遠く対角線で光化門も見えるところ仁寺洞近くだと考えられる. ウンゾングがすぐ北に付いている所で朝鮮時代には中間階級である衆人たちがたくさん住んだと言う.

 

 

 ソウルを東西に割る長く伸びた道は枝のように多くの分岐点で広がる. 主要道路である六朝距離(通り)や南大門で通じる道にこの道で合された. 写真は南大門とつながる道なのにやっぱり道端に商店たちが形成されている. ソウルの 3大市場はウンゾングがとともに南大門外にチルペシザング, 東大門の中にある李燎示場だったが南大門の方は黄海と漢江で船が入って来る麻浦渡り場とつながる交通路だから魚物が一番多く取り引きされたし東大門の方では城郭の外の往十里から主に野菜をたくさん栽培したから野菜がたくさん取り引きされた.

 

 

 

 左側上端が景福宮の正門である光化門で見える北に付いた道は昌徳宮正門であるトンファ門につながる吉人ようだ. 普通商業地域の道端には家家(仮家)らが立てられた. たまに 何人の日本人によって 南大門 写真の不始末な家たちが貧民街だと歪曲されるのにそれらもやっぱり家家(仮家)らだ. 家家(仮家)と言う(のは)必要によって雨や日の光を避けるために臨時に建てた家を言うことなのに建物と付けて建てて補助的な商業施設に利用されるとか品物を陳列したりした. 徐徐に増えて永遠に蚕食されながら美観を害して通行を邪魔するので親日内閣が崩れて俄館播遷が進行の中だった 1896年秋から都市の整備が成り立つようになる. この整備事業後鐘路通りには電気と電車線路が作られる.

 

 

 同じ品物を扱う商人たちどうし組合を作って事務室を作って管理したが彼らによる選挙で代表者を選出して議決機構役目をした.

 

 

 どのミョンズゾン(綿紬廛: 明紬とミョンズを扱った) 文書によると所属商人は総 68発の小店鋪で営業した. ミョンズゾンの正規構成員は 80人だが 1/2の資格で加入した人もいて 1832年には 193人, 1870年で解散する 1913年までは 120人前後だった. こんなに同一商品を扱う商人が同じ店鋪建物に出展して番号を付けた小区画にそれぞれの店を出している姿は今日の市場と似ていた.

 

 写真左側は苧布玉器(苧布屋旗)なのに麻を売る店の旗で右側は紙店だ.

 

 

 近代開港以後押し寄せた外国資本に対立して商人たちは連合をして商圏を守ろうとしたが日帝時代以後大部分衰退して商業の中心は日本人たちがたくさん住んだ南山近くの忠武路や明洞を近くでオルギョがなのなる. 日帝時代にも鐘路は朝鮮人の商業区域だったし普信閣の向こう側には化身デパートが立てられて当時には大きな名物だった.

 写真の左側が普信閣なのに電車が直角で折ることができないから方向が変わったまま後に退いた姿だ. 右側の道が広橋(広橋)を経って南大門に行く道だった. 

 


서울 종로거리

 조선시대의 서울은 동서남북으로 산으로 둘러싸이고 평지와 산을 지나는 17km의 성곽에 둘러싸인 도시였다. 당시 서울시청인 한성부는 성곽 내부와 성곽 외부 약 4km 정도를 관할하였다.

 서울의 북쪽 산인 북악산 아래에는 조선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경복궁을 배치하고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에 따라 좌측에는 종묘, 우측에는 사직(社稷)을 배치하고 그 앞으로는 행정관청이 밀집해 있는 가장 넓은 도로인 육조거리가 남쪽으로 뻗어있었다. 육조거리는 서대문과 동대문을 잇는 동서로 길게 뻗은 길과 만나는데 이 곳이 운종가(雲從街)이다.

 

 

 운종가(雲從街)는 말그대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러든다고 붙은 이름인데 서울에서 가장 점포들이 밀집한 상업의 중심지였다. 지금 이 곳은 종로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데 이곳에 종각(鐘閣)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종각은 서울도성 안에서 중심이 되는 위치에 있는데 1398년부터 종을 걸고 인정(人定 밤 10시)과 파루(罷漏 새벽 4시)에 종을 쳐서 그 소리로 서울의 8개의 성문을 열고 닫았다. 1413년에 지금의 근처로 옳기고 1440년에는 2층의 누각을 짓고 그 밑으로 사람을 통행하게 했는데 임진왜란 때 없어지고 다시 1층으로 세워졌다가 한국전쟁 때 없어진 것을 2층으로 신축하였다. 지금은 종은 박물관으로 가고 새로 만든 종을 걸어 새해 1월 1일에만 33번을 치는 타종식이 열리고 있다.

 

 

 보신각이 위치상 서울의 중심으로 사람이 가장 많이 지나가는 곳이었다. 조선을 나라를 세우고 도시를 계획하면서 주요시설에 이름을 지으면서 유교의 상징성을 부여하였는데 유교의 덕목으로 중요시되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방위에 따라 동쪽의 흥인지문, 서쪽의 돈의문, 남쪽의 숭례문, 북쪽에는 智 대신 靖을 넣어 숙정문이라 하고 중심은 보신각이라 이름붙였다.

 

 

 사진은 서쪽을 바라보며 찍은 것으로 멀리 인왕산의 산줄기가 보이고 직선으로 이어진 길에 좌측으로 약간 꺾어 언덕을 올라가면 서대문인 돈의문이 있었다. 좌측에 지붕에 하얀선으로 용마루가 있는 건물 오른쪽이 보신각이다.

 1412년부터 도로변에 2000여칸이 넘는 시전행랑(市廛行廊)을 만들고 국가에서 관리하였다. 여러 종류의 점포 중에서도 비단, 명주, 모시, 종이, 어물, 무명의 6종류의 물품을(시대에 따라 약간씩 다르다) 파는 상점이 번성하였는데 이를 육의전(六矣廛)이라 한다. 시전상인(市廛商人)들은 국가에서 필요한 물품과 세금을 제공하는 대신 독점권과 특권을 부여받았는데 그 중 하나가 금난전권(禁亂廛權)이다.

 조선 후기 도시로 인구가 유입되면서 영세한 민간상인들이 바닥에 물건을 깔아놓고 파는 난전(亂廛)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을 단속할 수 있는 권리가 금난전권(禁亂廛權)이다. 민간상인들은 기존 상인에 대항하면서 점차 난전(亂廛)이 번성하게 되고 이후 물가가 높아지는 것을 막고 물자의 원활한 조달을 위해 상업을 자유화시키면서 1791년 육의전(六矣廛)을 제외하고 금난전권(禁亂廛權)을 폐지한다.

  

 

 사진은 좌측에는 서쪽산인 인왕산, 오른쪽 뾰족한 산은 북쪽산인 북악산으로 멀리 대각선으로 광화문도 보이는바 인사동 근처라고 생각된다. 운종가 바로 북쪽에 붙어있는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중간계급인 중인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서울을 동서로 가르는 길게 뻗은 길은 가지처럼 여러 갈래로 퍼진다. 주요 도로인 육조거리나 남대문으로 통하는 길로 이 길로 합쳐졌다. 사진은 남대문과 이어지는 길인데 역시 길가에 상점들이 형성되어 있다. 서울의 3대 시장은 운종가와 함께 남대문 밖에 칠패시장, 동대문 안에 있는 이현시장이었는데 남대문 쪽은 황해와 한강에서 배가 들어오는 마포나루와 이어지는 교통로였기 때문에 어물이 가장 많이 거래되었고 동대문 쪽에서는 성곽 밖의 왕십리에서 주로 채소를 많이 재배하였기 때문에 채소가 많이 거래되었다.

 

 

 

 좌측 상단이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이고 보이는 북쪽으로 난 길은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으로 이어지는 길인 듯 하다. 보통 상업지역의 길가에는 가가(假家)들이 세워졌다. 간혹 몇몇 일본인에 의해 남대문 사진의 허술한 집들이 빈민가라고 왜곡되는데 그것들도 역시 가가(假家)들이다. 가가(假家)란 필요에 따라 비나 햇빛을 피하기 위해 임시로 지은 집을 말하는 것인데 건물과 붙여 세워 보조적인 상업시설로 이용되거나 물건을 진열하기도 했다. 점차 늘어나 길이 잠식당하면서 미관을 해치고 통행을 방해하므로 친일내각이 무너지고 아관파천이 진행 중이던 1896년 가을부터 도시의 정비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 정비사업 후 종로 거리에는 전기와 전차 선로가 만들어진다.

 

 

 같은 물건을 취급하는 상인들끼리 조합을 만들고 사무실을 만들어 관리하였는데 그들에 의한 선거로 대표자를 선출하고 의결기구 역할을 하였다.

 

 

 어느 면주전(綿紬廛: 명주와 면주를 취급하였다) 문서에 의하면 소속상인은 총 68방의 소점포에서 영업하였다. 면주전의 정규구성원은 80명이지만 1/2의 자격으로 가입한 사람도 있어서 1832년에는 193명, 1870년에서 해산하는 1913년까지는 120명 전후였다. 이렇게 동일상품을 취급하는 상인이 같은 점포건물에 출점하여 번호를 매긴 소구획에 각각의 가게를 내고 있는 모습은 오늘날의 시장과 비슷했다.

 사진좌측은 저포옥기(苧布屋旗)인데 모시를 파는 가게의 깃발이고 오른쪽은 종이가게이다.

 

 

 근대 개항 이후 밀려든 외국자본에 맞서 상인들은 연합을 하여 상권을 지키고자 하였지만 일제시대 이후 대부분 쇠퇴하고 상업의 중심은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던 남산 근처의 충무로나 명동을 근처로 옳겨가게 된다. 일제시대에도 종로는 한국인의 상업구역이었고 보신각 건너편에는 화신백화점이 세워져 당시에는 커다란 명물이었다.

 사진의 좌측이 보신각인데 전차가 직각으로 꺾을 수 없기 때문에 방향이 달라진채 뒤로 물러난 모습이다. 오른쪽의 길이 광교(廣橋)를 지나 남대문으로 가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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