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寛延通信使を調べてみました♪


     鰐浦における通信使船火災事件の後処理


鰐浦における火災は、副使一行の日常品はもちろんのこと、苦労して用意した土産品の人参七十二斤、白木綿二十疋、香三百十枚などが焼失し、死亡者は3名、重傷者10名に及ぶ不祥事でした。
この事件で焼失した船、日常品もさることながら、通信使たちにとって一番頭を悩ませたのは、灰になったお土産をどう取り繕うかということでした。あわてて八方手を尽くして人参をかき集めたものの、二十五斤しか集まらず残りの四十七斤はどうあっても見つかりませんでした。
3月1日には朝鮮の朝廷に事件のことが伝えられますが、朝廷も焼失した分の土産の調達に頭を痛めます。なぜなら、戸曹の在庫は十斤のみしかなかったからです。
朝廷では人参の収穫時期ではないので、秋まで待って送ろうという意見や、思わぬ事故なので、その代わりの品を送ろうという意見などが出ます。しかし、礼単人参は関白(将軍)への贈与の品なので、代用品を送ることはできません。朝廷は改めて人参を探し、揃えることになりました。
英祖はこの事態に内局の御用薬を送るようにと指示しましたが、大臣たちは恐れ多くも王様の薬をみだりに減らすことはできないと反対し、結局三月十日、市場価格のまま買い集めることが決議されます。ちなみに、その市場価格とは昨年一月の朝廷の買い取り価格で計算しても銀子一万五千枚にも相当する額でした。
一方、対馬では焼けた副使船の代わりに日本の船を調達し、また帰国を希望する二十六名と焼死した三名の屍を釜山へと戻し、失った人員を新たに雇った日本人の船頭で穴埋めします。
島の生活がかかっているためキビキビ動く対馬の人に対し、通信使付きの朝鮮人たちはあまり働かなかったようです。従事官の曹命采は「我が国の船夫たちはとにかく怠けるので、このように真面目に仕事をする日本人を見ると恥ずかしい」と書き残しています。(奉使日本見聞録 4月3日)



     通信使、各地でトラブルを起こす


さて三月十七日、対馬を発った朝鮮通信使ですが、彼らはその先でもトラブルを起こします。
まず四月二十六日、再び出火騒ぎを起こします。出火の原因は正使付下官の金福才という者が、塩蛸を扱った際の不注意。鰐浦の事件に続き、ここでも火事騒ぎを起こす所から見て、三使は部下の指導が徹底できていなかったと見えます。ちなみに、この火災ではさすがの対馬藩も怒り、家老の杉村大蔵が下手人の処罰を求めていますが、三使は出火原因を作った金福才も火傷を負っているためと理由をつけて処罰を見送ります。


五月三日の大津でもひと騒動ありました。先行していた通信使の料理人が、対馬藩主の宿泊所に下馬せずに入ろうとして役人に咎められます。ところがそのことを聞いた通信使は腹を立て、対馬藩に対してその咎めた役人を処罰するよう要求してきます。
他所の家に入る際、下馬をするのは当時の感覚からすれば、ある意味当然だと思うのですが、通信使にしてみれば「文句を言われたこと」が気に入らなかったのかもしれません。「奴を処罰しろ」と言われた対馬藩にしてみれば、「やれやれ」という感じでしょうか。
結局、事の収拾がつくまで通信使が動かなかったために、本来は宿泊地でない大津に宿泊するという異例の事態となりました。
このように各所でトラブルを起こしていた通信使たちですが、五月二十一日にようやく江戸に到着。本願寺に荷を下ろします。


     江戸における国書伝命式と通信使の帰還


江戸に着いた通信使たちは、国書伝命の式典が五月二十七日に行われると通達を受けます。しかし、通信使側はまだ礼単(贈り物)が本国から届いていないので、式典の日程を遅らせて欲しいと要望してきます。
二十五日になっても礼単が届かないので、幕府は国書伝命の式典を六月一日に変更。礼単は二十六日に到着しますが、その間、通信使の下官たちの間では「衣服を洗濯することは、他国に自国の貧しさをさらけ出すことである。もしこれを犯すものは重罪に処される」という噂が流れ、あわてて三使がそれを否定するというひと悶着もありました。
六月一日、形式的な式典が終わり、通信使は六月三日に帰途に着きます。実はここで若君(家治)の印綬が朝鮮国王と対等であるなどひと騒動あったのですが、まあ、面倒臭いのでその辺は省略しましょう。六月三日に江戸を出た通信使は、閏七月十二日に釜山に着。閏七月三十日に英祖に複命します。
複命した通信使たちは英祖に次のような報告をします。


1.日本の城は堅固であり、町は整然と整い、慇懃さは中国に過ぎること。

2.日本は法律が行き渡っており諸侯は自領を留守にしていても統治がされていること。

3.日本人は以前から通信使は朝貢だと思ってること。また以前の通信使はそれを知ってて黙っていたこと。



…と、ここまでが寛延元年(1748年度)の朝鮮通信使のおおまかな行程になります。




さて、


以前とある新聞で「朝鮮通信使の鶏泥棒は濡れ衣である!」という記事が出ていました。
じつは今回、私が調べたのも通信使が本当にそういうこと(つまり鶏泥棒)をしたかどうか確かめるためだったのですが、残念ながら通信使側の記録(奉使日本見聞録)には、そのような記述はありませんでした。
しかし、奉使日本見聞録を読んでいて、ふと気付いたことがありました。
それは奉使日本見聞録では日本に向かうため11月28日に漢城を出てから釜山の2月11日までが抜けているのです。じつは以前の通信使の日記(慶長、寛永の通信使などの日記)には漢城から釜山までの旅路の内容を書いています。なぜ、今回は書かれていないのでしょうか?




その答えのヒントが英祖実録に書かれていました。英祖実録24年閏7月30日には次のような記述があります。



英祖実録24年閏7月30日


(意訳)
通信使の一行は五百余人、同行した者たちは、皆名の知られた武官らを選び、技芸を持った百工を皆従わせていたが、啓禧(正使)は強く抑えられず、また万里を従行させるために取り締まらなかった。名武の輩は欲しいままに驕り放縦し、また主将が寛大にするのを恃みに至る所で横暴を顧みて忌むことが無かった。啓禧(正使)らが釜山に留まった四か月間、七十の州に変わる変わる支供させ、一道が疲弊し、村々が数年の間回復しない状態にまで陥った。対馬に至ると三使は上陸し、礼幣、盤纏は皆船の中にあった。副使の船の失火で(それらは)焼失し、死者も三人出した。


つまり…、
朝鮮通信使は通信使側が記録に残していない数か月間、自国で欲しいまま横暴な行動を取り、釜山にいる間、付近の村々を搾取しまくり、数年間は生活が回復しないまで疲弊させた…と。
そんな都合の悪い所を、彼らは自分たちの記録に残していなかったわけですね。
で、そんな彼らがそのまま日本にやって来た…と。




  やっぱり、鶏泥棒なんじゃないでしょうか?

   これ!


칸엔 통신사를 조사해 보았던♪그 2

칸엔 통신사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와니우라에 있어서의 통신사선 화재 사건의 후처리

와니우라에 있어서의 화재는, 부사 일행의 일상품은 물론이거니와, 고생해 준비한 선물품의 인삼 72근, 동나무면 20필, 향기3백10매등이 소실해, 사망자는 3명, 중상자 10명에 이르는 불상사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소실한 배, 일상품은 물론이고, 통신사들에게 있어서 제일 골머리를 썩은 것은, 재가 된 선물을 어떻게 손질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서둘러 팔방 온갖 방법을 다 쓰고 인삼을 모았지만, 25근 밖에 모이지 않고 나머지의 47근은 어떻게 있어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3월 1일에는 조선의 조정에 사건이 전해집니다만, 조정도 소실한 만큼의 선물의 조달에 골치를 썩입니다.왜냐하면, 호조의 재고는 10근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조정에서는 인삼의 수확 시기는 아니기 때문에, 가을까지 기다려 보내려는 의견이나, 생각하지 않는 사고이므로, 그 대신의 물건을 보내려는 의견등이 나옵니다.그러나, 례단인삼은 관백(장군)에게의 증여의 물건이므로, 대용품을 보낼 수 없습니다.조정은 재차 인삼을 찾아, 가지런히 하게 되었습니다.
영조는 이 사태에 내국의 용무약을 보내도록(듯이)라고 지시했습니다만, 대신들은 송구스럽지도 임금님의 약을 함부로 줄일 수 없다고 반대해, 결국 3월10일, 시장가격인 채 사모으는 것이 결의됩니다.덧붙여서, 그 시장가격과는 작년 1월의 조정의 매입 가격으로 계산해도 은자1만5천매에도 상당하는 액이었습니다.
한편, 대마도에서는 탄 부사선 대신에 일본의 배를 조달해, 또 귀국을 희망하는 26명으로 불에 타 숨진 3명의 시체를 부산으로 되돌려, 잃은 인원을 새롭게 고용한 일본인의 사공으로 보충합니다.
섬의 생활이 걸려 있기 위해 키비키비 움직이는 대마도의 사람에 대해, 통신사첨부의 한국인들은 별로 일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종사관의 조명채는 「우리 나라의 선 부들은 어쨌든 게으름 피우므로, 이와 같이 성실하게 일을 하는 일본인을 보면 부끄럽다」라고 못 쓰고 남기고 있습니다.(봉사일본 견문록 4월 3일)


     통신사, 각지에서 트러블을 일으킨다

그런데 3월 17일, 대마도를 출발한 조선 통신사입니다만, 그들은 그 앞에서도 트러블을 일으킵니다.
우선 4월 26일, 다시 출화 소란을 일으킵니다.출화의 원인은 정사부하관 금복세라고 하는 사람이, 염소를 취급했을 때의 부주의.와니우라의 사건에 이어, 여기에서도 화재 소란을 일으키는 곳으로부터 보고, 3사는 부하의 지도를 철저히 할 수 있지 없었다고 보입니다.덧붙여서, 이 화재에서는 과연 쓰시마번도 화내, 가로의 스기무라 오쿠라가 하수인의 처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만, 3사는 출화 원인을 만든 금복세도 화상을 입고 있기 위해와 이유를 붙이고 처벌을 보류합니다.

5월3일의 오츠에서도 사람 소동 있었습니다.선행하고 있던 통신사의 요리인이, 쓰시마번주의 숙박소에 시모우마 하지 않고 들어가려고 공무원에 검문당합니다.그런데 그것을 (들)물은 통신사는 화를 내 쓰시마번에 대해서 그 비난한 공무원을 처벌하도록 요구해 옵니다.
타처의 집에 들어갈 때, 시모우마를 하는 것은 당시의 감각으로부터 하면, 어느 의미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만, 통신사로 해 보면 「불평을 들은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릅니다.「놈을 처벌해라」라고 말해진 쓰시마번으로 해 보면, 「아휴」라고 하는 느끼셨습니까.
결국, 일이 수습이 될 때까지 통신사가 움직이지 않았기(위해)때문에, 본래는 숙박지가 아닌 오츠에 숙박한다고 하는 이례의 사태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각처에서 트러블을 일으키고 있던 통신사들입니다만, 5월 21일에 간신히 에도에 도착.혼간지에 짐을 내립니다.

     에도에 있어서의 국서전명식과 통신사의 귀환

에도에 도착한 통신사들은, 국서전명의 식전이 5월 27일에 행해진다고 통지를 받습니다.그러나, 통신사측은 아직 례단(선물)이 본국에서 도착해 있지 않기 때문에, 식전의 일정을 늦추었으면 좋겠다고 요망해 옵니다.
25일이 되어도 례단이 닿지 않기 때문에, 막부는 국서전명의 식전을 6월 1일로 변경.례단은 26일에 도착합니다만, 그 사이, 통신사하관들의 사이에서는 「의복을 세탁하는 것은, 타국에 자국의 궁핍함을 드러내는 것이다.만약 이것을 범하는 것은 중죄에 곳 된다」라고 하는 소문이 흘러 당황해서 3사가 그것을 부정한다고 하는 사람 말썽도 있었습니다.
6월 1일, 형식적인 식전이 끝나, 통신사는 6월3일에 귀도에 도착합니다.실은 여기서 젊은 군주(가 치)의 인수가 조선 국왕과 대등하다 등 사람 소동 있었습니다만, 뭐, 귀찮기 때문에 그 근처는 생략 합시다.6월3일에 에도를 나온 통신사는, 윤7월 12일에 부산에 벌.윤7월 30일에 영조에 복명 합니다.
복명 한 통신사들은 영조에 다음과 같은 보고를 합니다.

1.일본의 성은 견고하고, 마을은 정연하게 갖추어져, 은근함은 중국에 지나는 것.

2.일본은 법률이 널리 퍼져 있어 제후는 자령을 부재중으로 하고 있어도 통치가 되고 있는 것.

3.일본인은 이전부터 통신사는 조공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일.또 이전의 통신사는 그것을 알고 있어 입다물고 있던 것.


…과 여기까지가 칸엔 원년(1748년도)의 조선 통신사의 대범한 행정이 됩니다.



그런데,


이전과 있는 신문에서 「조선 통신사의 닭도둑은 누명이다!」라고 하는 기사가 나와 있었습니다.
실은 이번, 내가 조사했던 것도 통신사가 정말로 그런 것(즉 닭도둑)을 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였습니다만, 유감스럽지만 통신사측의 기록(봉사일본 견문록)에는, 그러한 기술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봉사일본 견문록을 읽고 있고, 문득 깨달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봉사일본 견문록에서는 일본으로 향하기 위해 11월 28일에 한성을 나오고 나서 부산의 2월 11일까지가 빠져 있습니다.실은 이전의 통신사의 일기(게이쵸, 에도초기의 연호의 통신사등의 일기)에는 한성으로부터 부산까지의 여로의 내용을 쓰고 있습니다.왜, 이번은 쓰여지지 않은 것일까요?



그 대답의 힌트가 영조실록에 쓰여져 있었습니다.영조실록 24년윤 7월 30일에는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습니다.


영조실록 24년윤 7월 30일


(의역)
통신사의 일행은 5백 다른 사람, 동행한 사람들은, 모두명이 알려진 무관등을 선택해, 기예를 가진 백공을 모두 따르게 해서 있었지만, 계희(정사)는 강하게 억제되지 않고, 또 만리를 종행 시키기 위해서 단속하지 않았다.명무의 배는 갖고 싶은 채로 교만 방종 해, 또 주장이 관대하게 하는 것을 시 봐에 이르는 곳에서 횡포를 돌아봐 꺼리는 것이 없었다.계희(정사) 등이 부산에 머문 4개월 사이, 70의 주로 바뀌는 바뀌는 지공시켜, 한 길이 피폐 해, 마을들이 수년동안 회복하지 않는 상태에까지 빠졌다.대마도에 이르면 3사는 상륙해, 례폐, 반전은 모두선안에 있었다.부사의 배의 실화로(그것들은) 소실해, 사망자도 세 명 냈다.

즉…,
조선 통신사는 통신사측이 기록에 남기지 않은 수개월 사이, 자국에서 갖고 싶은 채 난폭한 행동을 취해, 부산에 있는 동안, 부근의 마을들을 마구 착취해 , 몇 년간은 생활이 회복하지 않는까지 피폐 시켰다…와.
그렇게 사정이 좋지 않은 곳을, 그들은 스스로의 기록에 남기지 않았던 것이군요.
그리고, 그런 그들이 그대로 일본에 왔다…와.



  역시, 닭도둑이 아닐까요?

   이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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