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よもや徳川禁令考や明治政府布告まで手を出すことになるとは思いもよらぬ。
かてて加えて一番不得意な「のたくり」を読む羽目になるとは。とほほ。読めてないといわないでくれ。

 

では孤盲猫を撫でる、第1 塀の話6 中世から近世への土塀

 

塀(へい)とは、家や敷地などにおいて、他との境界に設置する囲いのこと。

 

 中世、特に応仁の乱までの塀は権威の象徴でもある「築地」と、防火(防風等)・防衛の実利を追求する土塀には、隔絶したものがあったと思われる。居館や有力寺院、そして貴族の邸宅のみに築地が見られるからである。対して近世にはいると、築地型の土塀は地方の武家屋敷にも普通に見られるようになり、また土塀も華美なものが増えていく。江戸中期以降の豪商の邸宅の土塀は、形こそ築地ではないが(場合によってはわずかに台形の場合もある)、非常に堅牢かつ華美な塀である。
 応仁の乱で京町が灰燼に帰し、その復興の為に仮設置された土塀が一般化していき、結局表面上漆喰を塗った土塀になっていったり、権威を獲得するために形式だけ築地型の土塀が成立していくのはおそらくこの頃である。また、神仏習合により神社でも盛んにこうした塀が築かれていったのだろう。
 特に中世末から近世初期、戦国時代の中盤以降から綱吉位までは建築バブルともいうべき時代で、こうした職人達が活躍した時代でもあり、また城郭のように工期をできるだけ短く取りたいと言う要求もあっただろう。こうした時代背景は区画を分けるためだけで良い土塀にとっては、できるだけ簡単な工法が求められたのだと思う。
 建築学については浅学なので一概にこれが簡単と断定するのは素人判断だが、練塀、特にA型の瓦と粘土(漆喰)を重ねていく工法は工数をかなりはしょれるものと思われる。これに対し、伝統的な「築地」が最も時間もかかり、人数も必要だったと思う。 同様に石割などの手間がなければ、練塀B型の石を噛ませる方法は、より低コストで土塀を作ることができただろう。金額的には猫塀などの土塀A、職工の確保なら土壁などの工法のままで作れる土塀Bがおいしい。
 もし現代にこれらの塀を制作するとなると、人件費から見て築地が最も高価になり、練塀Bが比較的安価に作れると思われる。実際古民家などでは練塀Bの系統が多く見られ、武家屋敷や寺社に築地が、塀の総延長が長いなどの問題がある城郭では土塀Bがよく見られるようである。
 この辺は完全に私の推測でしかないし、古代は人件費など無いわけだからどうだろうというところはある。この辺は専門家にお尋ねしたいところである。

 

 大胆な仮説だがこれらの塀がどのような流れで現在につながっていくのか?と言うものを表にしてみた。

 

日本における塀の歴史仮説図(pipecloud 作成)

 

 正直、この図はあまりにもキバヤシレベルなので提示するかどうかずっと迷っていたものである。きちんと中国建築史や日本建築史を勉強しないまま作った、素人の想像図と思ってもらってよい。また年代についても結構いい加減である。少なくとも土塀Aは中世にはあったが、あえて近世の方においた。
 今のところ版築城壁から日本の築地に至る形態の変化(屋根をかける、磚を積まない)については皆目見当が付かない。唯一、中国の磚に表れた仏教建築に回廊のようなものがあり、台形版築+瓦屋根のように見えるので、ラインをつけてみた。中国にせよ日本にせよ、古代建築の実態については資料も多くなく、なかなか追い掛けられないのだが、それでももっと勉強せねばと自省しきりである。

 さて、皆さんお気づきとおもうが、この図にはさりげなく「半島経由」という表現が入っている。築地については高麗寺のように百済の建築技法の寺の周囲にいち早く築かれている事からも、半島系渡来人が持ち込んだ可能性があるからだ。対して土塀ABについてははっきりしない。四天王寺や法隆寺などいち早く中国式の尺や建築様式もこの時期に移入されており、どちらから渡来したか分からないからだ。土壁については半島でも一般的なものであり、中国ではあまり残っていない。※1しかし、そのことからこの工法が半島由来だとは考えにくい。
 文様から見た瓦の系譜は百済・高句麗・新羅など半島来由と思われるものが残っていくので、ある程度渡来人系の技術は残っていったと思われるが、この辺を突っ込み始めるとそれこそ収拾がつかなくなるので、ここでは触れないでおく。
 流入期の塀技術は、当初半島から来たのだろう。しかしかなり早い段階で中国などの技術も到来し、取捨選択されていったのだと思う。

 

※1 現存する中国建築の最古の木造建築は唐代。もちろん法隆寺より新しい。後述することになると思うが、中国では宋代に磚が発達し木造磚壁の建築が多くなっていく。既に唐代ですら、一部の壁を磚で構成している位で壁や塀を磚で築くのは中国では一般的なものであったのだと思う。そして、土壁については民家などが全く残っておらず、発掘では漆喰は見つかるものの木舞下地については見つけられなかった。しかしひとつひとつの要素を積み重ねたときに、木舞下地漆喰塗り、と言う工法が半島で発生したとは考えにくい。

 

 今回は最後に洛中洛外図をいくつか提示する。最古のものは歴博甲本と呼ばれているもので、1520年代。洛中洛外図そのものは1500年頃からの京町復興に関係して描かれていったもので、この後19Cに至るまで100枚以上描かれている。それぞれの時期の京町の状況を知る手がかりである。画像は歴博甲本によるもの。

 

将軍の屋敷?
板葺築地・漆喰瓦葺土塀(おそらくB1)が見える。外周は築地であることが注目される。

 

神社1
板葺築地・草系築地。何か不思議な絵である。

 

神社2
おそらく練塀の築地。しかし筋塀にしてあり、田んぼの中でも権威を主張している。

 

吉田 
現在の京都市吉田。洛外であり、窓の開いた油塀のようなものの中に数軒の家が軒を連ねている。

 

洛内
町屋の商家。塀は無く板葺。土壁かどうかは不明。

 

人形浄瑠璃を行っているところ
木の塀に筵をかけているようである。こういった場所も固定化し、座席にも屋根がかけられるようになっていったのであろう。

 


 さて、次回は遂に今回塀を追っかけて生じてしまった謎、瓦と磚と煉瓦の話。こちらも正直キバヤシである。今回の話にそっと仕込みもあるのだが、どうしよう。
 正直考古学的アプローチだと軒丸の編年とかばかりが出てくるし、文献的にはさっぱり。「煉瓦」と言うことにすると、軒並み幕末まで話がすっ飛ぶ。その道の権威(特に瓦)も多いが、中の人は瓦とか陶磁器の研究が嫌いだったため、実はほとんどわからんちん。


고맹묘를 어루만지는, 제1 담의 이야기 6 중세부터 근세에의 흙벽

설마 에도막부의 법령집이나 메이지 정부 포고까지 손을 대게 된다고는 생각치도 못한.
설상 가상으로 제일 잘 못한 「꿈틀거려」를 읽는 처지가 된다고는..읽을 수 있지 않다고 하지 말아줘.

 

그럼 고맹묘를 어루만지는, 제1 담의 이야기 6 중세부터 근세에의 흙벽

 

담(에 있어)이란, 집이나 부지 등에 있고, 외와의 경계에 설치하는 울타리.

 

 중세, 특히 오닌의 란까지의 담은 권위의 상징이기도 한 「츠키지」라고, 방화(방풍등 )·방위의 실리를 추구하는 흙벽에는, 격절 한 것이 있었다고 생각된다.저택이나 유력 사원, 그리고 귀족의 저택에만 츠키지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대해 근세에 들어가면, 츠키지형의 흙벽은 지방의 부케야시키에도 보통으로 볼 수 있게 되어, 또 흙벽도 화려한 것이 증가해 간다.에도 중기 이후의 호상의 저택의 흙벽은, 형태야말로 츠키지는 아니지만(경우에 따라서는 조금 사다리꼴의 경우도 있다), 매우 견뢰하고 화려한 담이다.
 오닌의 란으로 쿄우쵸가 잿더미에 돌아가, 그 부흥을 위해 가설치 된 흙벽이 일반화해 나가, 결국 표면상 회반죽을 바른 흙벽이 되어 가거나 권위를 획득하기 위해서 형식만 츠키지형의 흙벽이 성립해 나가는 것은 아마 요즘이다.또, 신불습합에 의해 신사에서도 활발히 이러한 담이 쌓아 올려져 갔을 것이다.
 특히 중세말부터 근세 초기, 전국시대의 중반 이후부터 강길위까지는 건축 버블이라고도 해야 할 시대로, 이러한 직공들이 활약했던 시대이기도 해, 또 성곽과 같이 공사기간을 가능한 한 짧게 취하고 싶다고 하는 요구도 있었을 것이다.이러한 시대 배경은 구획을 나누기 위해만으로 좋은 흙벽에 있어서는, 가능한 한 간단한 공 법이 요구되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건축학에 대해서는 천학이므로 통틀어 이것이 간단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아마추어 판단이지만, 련담, 특히 A형의 기와와 점토(회반죽)를 거듭해 가는 공법은 공정수를 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이것에 대해, 전통적인 「츠키지」가 가장 시간도 걸려, 인원수도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이시와리등의 수고가 없으면, 련담B형의 돌을 씹게 하는 방법은, 보다 저비용으로 흙벽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금액적으로는 고양이담등의 흙벽 A, 직공의 확보라면 토담등의 공법인 채로 만들 수 있는 흙벽 B가 맛있다.
 만약 현대에 이러한 담을 제작하게 되면, 인건비로부터 봐 츠키지가 가장 고가로 되어, 련담B가 비교적 염가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된다.실제 고민가등에서는 련담B의 계통을 많이 볼 수 있어 부케야시키나 지샤에 츠키지가, 담의 총연장이 긴등의 문제가 있는 성곽에서는 흙벽 B를 잘 볼 수 있는 것 같다.
 이 근처는 완전하게 나의 추측에 지나지 않고, 고대는 인건비 등 없는 것이니까 어떨까라고 하는 곳은 있다.이 근처는 전문가에게 질문하고 싶은 곳이다.

 

 대담한 가설이지만 이러한 담이 어떠한 흘러 나와 현재에 연결되어 가는 것인가?이렇게 말하는 것을 겉(표)로 해 보았다.

 

일본에 있어서의 담의 역사 가설도(pipecloud 작성)

 

 정직, 이 그림은 너무 어금니 야자 레벨이므로 제시할지 쭉 헤매고 있던 것이다.제대로 중국 건축사나 일본 건축사를 공부하지 않은 채 만든, 아마추어의 상상도라고 생각해 주어도 좋다.또 연대에 대해서도 상당히 적당이다.적어도 흙벽 A는 중세에는 있었지만, 굳이 근세(분)편에 늙었다.
 현재판 축성벽에서 일본의 츠키지에 이르는 형태의 변화(지붕을 걸치는, 전을 쌓지 않는다)에 대해서는 전혀 짐작이 붙지 않는다.유일, 중국의 전에 나타난 불교 건축에 회랑과 같은 것이 있어, 사다리꼴판축+기왓장과 같이 보이므로, 라인을 붙여 보았다.중국이든 일본이든, 고대 건축의 실태에 대해서는 자료도 많지 않고, 좀처럼 뒤쫓을 수 없지만, 그런데도 더 공부하지 않으면과 자성 구분이다.

 그런데, 여러분기분귀로 생각하지만, 이 그림에는 자연스럽게 「반도 경유」라고 하는 표현이 들어가 있다.츠키지에 대해서는 고려절과 같이 (쿠다라)백제의 건축 기법의 절의 주위에 재빨리 쌓아 올려지고 있는 일로부터도, 반도계 도래인이 반입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대해 흙벽 AB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다.시텐노우지나 호류사등 재빨리 중국식의 자나 건축 양식도 이 시기에 이입 되고 있어 어느 쪽에서 도래했는지 모르기 때문에다.토담에 대해서는 반도에서도 일반적인 것이며, 중국에서는 별로 남지 않았다.※1그러나, 그것으로부터 이 공법이 반도 유래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문양으로부터 본 기와의 계보는 (쿠다라)백제·고구려·신라 등 반도 와 사정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남아 가므로, 어느 정도 도래인계의 기술은 남아 갔다고 생각되지만, 이 근처를 돌진하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수습이 되지 않게 되므로, 여기에서는 접하지 않고 둔다.
 유입기의 담기술은, 당초 반도로부터 왔을 것이다.그러나 꽤 빠른 단계에서 중국등의 기술도 도래해, 취사 선택 되어 갔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1 현존 하는 중국 건축의 최고의 목조 건축은 당대.물론 호류사보다 새롭다.후술 하게 된다고 생각하지만, 중국에서는 송대에 전이 발달해 목조전벽의 건축이 많이 되어 간다.이미 당대로조차, 일부의 벽을 전으로 구성해 있는 정도로 벽이나 담을 전으로 쌓아 올리는 것은 중국에서는 일반적인 것이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그리고, 토담에 대해서는 민가등이 완전히 남지 않고, 발굴에서는 회반죽은 발견되는 것의 목무기초에 대해서는 찾아낼 수 없었다.그러나 하나 하나의 요소를 겹쳐 쌓았을 때에, 목무기초 회반죽 발라, 라고 하는 공법이 반도에서 발생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이번은 마지막에 낙중낙외도를 몇개인가 제시한다.최고의 것은 력박코모토로 불리고 있는 것으로, 1520년대.낙중낙외도 그 자체는 1500년경부터의 쿄우쵸 부흥에 관계해 그려져 간 것으로, 이 후 19 C에 이를 때까지 100매 이상 그려져 있다.각각의 시기의 쿄우쵸의 상황을 아는 단서이다.화상은 력박코모토에 의하는 것.

 

장군 저택?
판자 지붕 츠키지·회반죽 카와라부키 흙벽(아마 B1)이 보인다.외주는 츠키지인 것이 주목받는다.

 

신사 1
판자 지붕 츠키지·풀계 츠키지.무엇인가 이상한 그림이다.

 

신사 2
아마 련담의 츠키지.그러나 토담으로 해 있어, 논안에서도 권위를 주장하고 있다.

 

요시다
현재의 쿄토시 요시다.도성 밖이며, 창이 열린 기름담과 같은 것안에 몇 채의 집이 처마를 나란히 하고 있다.

 

도성 안
마치야의 상가.담은 없고 판자 지붕.토담인지 어떤지는 불명.

 

일본 고유의 인형극을 실시하고 있는 곳
나무의 담에 연을 걸고 있는 것 같다.이러한 장소도 고정화해, 좌석에도 지붕을 걸칠 수 있게 되어 간 것일 것이다.

 


 그런데, 다음 번은 결국 이번 담을 뒤쫓아 생겨 버린 수수께끼, 기와와 전과 벽돌의 이야기.이쪽도 정직 어금니 야자이다.이번 이야기에 살그머니 교육도 있지만, 어떻게 하지.
 정직 고고학적 어프로치라면 헌환의 편년이라든지만이 나오고, 문헌적으로는 전혀.「벽돌」이라고 하기로 하면, 일제히 에도막부 말기까지 이야기난다.그 길의 권위(특히 기와)도 많지만, 안의 사람은 기와라든지 도자기의 연구가 싫었던 모아 두어 실은 거의 원으로부터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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