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情報操作というものは、大きな嘘を主張をすることではありません。

小さな目立たない嘘をいくつも並べ、気付かないうちに洗脳していく事でしょう。

 

【噴水台】プロトコル

 

  色褪せた1枚の写真が大河小説より豊かな事情と強烈なメッセージを与える場合がたまにある。1949年9月27日午前、東京の駐日米国大使官邸で、米軍上司が撮影したこの写真も同じだ。第2次世界大戦が終わった直後、日本の新しい統治者として進駐してきたダグラス・マッカーサーと、「神さま」から「人間」に降等した天皇裕仁の初の出会いを記録した写真だ。

  不動の姿勢を取った写真の中の天皇は緊張した姿がありありと見られる。天皇を戦犯として起訴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世論が連合国内に湧きあがっていたころ、生殺与奪権を握ったマッカーサーと初めて会ったわけで、全く彼が神でない以上、緊張しないわけがない。天皇より頭一つは大きいマッカーサーは、体格だけでも天皇を十分圧倒した。ノータイに普段着でポケットに手をつっこんだまま、片方の足を少し出したような姿勢で立っているマッカーサーの姿勢はまたどうなのか。勝者の堂々とした態度と敗者の屈辱の様子がそっくりそのまま見えるではないか。おそらく天皇はその時まで写真を撮った経験もそれほど多くなかったはずだ。同じ姿勢で3カットを撮ったが、最初のカットでは天皇が目をつぶっているし、2枚目のカットでは天皇が口を開けていた。

 

http://japanese.joins.com/article/article.php?aid=122908&servcode=100§code=120

 

 

 

9月20日午後、吉田は、昭和天皇の意向を伝えにマッカーサーを訪れた。吉田は、マッカーサーにこう聞いた。「閣下は、陛下がお訪ねになることを、期待されていますか」。マッカーサーは答えた「天皇にお目にかかることは、私としても、もっとも喜ばしいことと考えている。しかし、私は、天皇の自尊心を傷つけたり、困らせるようなことになっては、良くないと考えている」。このあと、マッカーサーは、場所は、GHQよりもアメリカ大使公邸のほうが良いと告げた。天皇の対面を慮り、プライベートな訪問の形にしたかったからだといわれている。

 

 9月27日午前9時50分、昭和天皇を乗せた車が、アメリカ大使館公邸に向かって、皇居を出発した。シルクハット、モーニングで正装した昭和天皇の表情は、同行した通訳は「非常に厳しいお顔だった」と回想している。

 午前10時、車は、マッカーサーの待つアメリカ大使公邸の門をくぐった。大使公邸の玄関には、マッカーサーの姿はなく、出迎えたのは、2人の副官だけだった。マッカーサーは、この時、出迎えも見送りもしないと決めていたのである。昭和天皇は、同行したくない大臣などと次の間で別れ、通訳と二人だけで奥の部屋に向かった。

 10時5分過ぎ、レセプションルームで出迎えたマッカーサーは、昭和天皇を部屋の奥へと案内した。米国バージニア州のマッカーサー記念館に、会見時の写真が3枚残されている。
1枚目はマッカーサーが目を閉じているため不採用、2枚目は昭和天皇の口が開いているため不採用、3枚目は、ゆったりと腰に手を当てたノーネクタイのマッカーサー、モーニング姿で直立不動の昭和天皇が、映し出されている。採用されたのは、この写真だった。

 写真撮影のあと、2人の会見が始まった。その場で、どのような会話が交わされたのか、日米両国の政府は、未だに何も発表していない。しかし、マッカーサーは、回想記にこの日の模様を記している。
 「タバコに火をつけて差し上げたとき、私は、天皇の手が震えているのに気がついた。天皇の語った言葉は、次のようなものだった」。
 天皇は「私は、国民が戦争遂行するにあたって、政治、軍事両面で行ったすべての決定と行動に対する全責任を負うものとして、私自身を、あなたの代表する諸国の採決に委ねるため、お訪ねした」。
 「私は、この瞬間、私の前にいる天皇が、日本の最上の紳士であることを感じとったのである」。
 35分にわたった会見が終わった時、マッカーサーの昭和天皇に対する態度は変わっていた。マッカーサーは、予定を変えて、自ら昭和天皇を玄関まで送った。マッカーサーにとって、最大の好意の表れだった。

 

 

このような間違いを正常な記者がするはずがありません。

故意に歪曲したと考えられても仕方が無いでしょうね。

 

 

ちなみに、ポケットに手をつっこんだままだと、下の写真のように馬鹿げた写真になります。

マッカーサーを馬鹿にしすぎです。

 

 

 

 

 

 

 

 

 

 

 

 

 


막카서를 바보취급 하는 한국 매스컴

정보 조작이라는 것은, 큰 거짓말을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눈에 띄지 않는 거짓말을 얼마든지 늘어놓아 깨닫기 전에 세뇌해 나가는 일이지요.

 

【분수대】프로토콜

 

  퇴색한 1매의 사진이 대하소설보다 풍부한 사정과 강렬한 메세지를 주는 경우가 이따금 있다.1949년 9월 27일 오전, 도쿄의 주일 미국 대사 관저에서, 미군 상사가 촬영한 이 사진도 같다.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일본의 새로운 통치자로서 진주 해 온 더글라스·막카서와 「신」으로부터 「인간」에게 강등 한 천황유인의 첫 만남을 기록한 사진이다.

  부동의 자세를 취한 사진안의 천황은 긴장한 모습을 또렷이 볼 수 있다.천황을 전범으로서 기소해야 한다고 하는 여론이 연합국내에 솟아나고 있었을 무렵, 생살 여탈권을 잡은 막카서와 처음으로 만난 것으로, 완전히 그가 신이 아닌 이상, 긴장하지 않는 것이 없다.천황에서 머리 하나는 큰 막카서는, 체격만으로도 천황을 충분히 압도했다.노우 타이에 평상복으로 포켓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다른 한쪽의 다리를 조금 낸 것 같은 자세로 서있는 막카서의 자세는 또 어떤가.승자가 당당한 태도와 패자의 굴욕의 모습이 전부 그대로 보이지 아니겠는가.아마 천황은 그 때까지 사진을 찍은 경험도 그만큼 많지 않았을 것이다.같은 자세로 3 컷을 찍었지만, 최초의 컷에서는 천황이 눈감아 주고 있고, 2매째의 컷에서는 천황이 입을 열고 있었다.

 

http://japanese.joins.com/article/article.php?aid=122908&servcode=100§code=120

 

 

 

9월 20일 오후, 요시다는, 쇼와 천황의 의향을 전언에 막카서를 방문했다.요시다는, 막카서에 이렇게 (들)물었다.「각하는, 폐하가 방문이 되는 것을, 기대되고 있습니까」.막카서는 대답한 「천황에 뵙는 것은, 나로서도, 가장 기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그러나, 나는, 천황의 자존심을 손상시키거나 곤란하게 하는 되어서는, 좋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이후에, 막카서는, 장소는, GHQ보다 미국 대사 공저 쪽이 좋으면 고했다.천황의 대면을 깊이 생각해, 사적인 방문의 형태로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라고 하고 있다.

 

 9월 27일 오전 9시 50분 , 쇼와 천황을 태운 차가, 미국 대사관 공저로 향하고, 황궁을 출발했다.비단 모자, 모닝에 정장한 쇼와 천황의 표정은, 동행한 통역은 「매우 어려운 얼굴이었다」라고 회상하고 있다.

 오전 10시, 차는, 막카서가 기다리는 미국 대사 공저의 문을 빠져 나갔다.대사 공저의 현관에는, 막카서의 모습은 없고, 마중나간 것은, 2명의 부관 뿐이었다.막카서는, 이 때, 마중도 전송도 하지 않는다고 결정하고 있었던 것이다.쇼와 천황은, 동행하고 싶지 않은 대신등과 다음의 사이에 헤어져 통역과 두 명만으로 안쪽의 방으로 향했다.

 10시 5분 지나 리셉션 룸에서 마중나간 막카서는, 쇼와 천황을 방의 안쪽으로 안내했다.미국 버지니아주의 막카서 기념관에, 회견시의 사진이 3매 남아 있다.
1매째는 막카서가 눈감고 있기 때문에 불채용, 2매째는 쇼와 천황의 입이 열려 있기 위해 불채용, 3매째는, 느긋하게 허리에 손을 댄 노우 넥타이의 막카서, 모닝 모습으로 직립 부동의 쇼와 천황이, 비추어지고 있다.채용된 것은, 이 사진이었다.

 사진 촬영뒤, 2명의 회견이 시작되었다.그 자리에서, 어떠한 회화가 주고 받아졌는지, 일·미 양국의 정부는, 아직도 아무것도 발표하지 않았다.그러나, 막카서는, 회상기에 이 날의 모양을 적고 있다.
 「담배에 불붙여 드렸을 때, 나는, 천황의 손이 떨고 있는데 깨달았다.천황이 말한 말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천황은 「 나는, 국민이 전쟁 수행하기에 즈음하고, 정치, 군사 양면에서 실시한 모든 결정과 행동에 대한 전책임을 지는 것으로서 나 자신을, 당신의 대표하는 제국의 채결에 맡기기 위해, 방문 했다」.
 「 나는, 이 순간, 나의 앞에 있는 천황이, 일본의 최상의 신사인 것을 느껴 취했던 것이다」.
 35분에 걸친 회견이 끝났을 때, 막카서의 쇼와 천황에 대한 태도는 변했다.막카서는, 예정을 바꾸고, 스스로 쇼와 천황을 현관까지 보냈다.막카서에 있어서, 최대의 호의의 표현이었다.

 

 

이러한 실수를 정상적인 기자가 할 리가 없습니다.

고의로 왜곡했다고 생각되어도 어쩔 수 없겠지요.

 

 

덧붙여서,포켓에 손을 찔러 넣은 채로라고, 아래의 사진과 같이 바보스러운 사진이 됩니다.

막카서를 너무 바보취급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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