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一応書き始めに簡単に整理をして重要な部分を証明するようにします.

長文になるから縮小して言えば..

 

Terauchi総督は仏国寺近く吐含山一帯に石窟庵の価値を判断して

京城に移送するための与件を検討します.

 

石窟庵を移送するために見積りを出しなさいと言いますが.

学者や業者たちは 『大部分狂った仕業だ』と反駁をします.

 

結局には不可能な事と判断して解体補修を指示するようになりますが

以後.,下の史料をゆっくり読んで各各静かに暝想する時間を持ちましょう.

 

 

 

 

▲ <毎日新報> 1912年 10月 30日付け

 

 

競走高補の流説(慶州古宝)の流説(流説)

 

競走(慶州)に灰(在)一新羅高も(新羅古都)の多宝塔(多宝塔) 級(及) 石窟庵(石窟庵)の仏跡(仏蹟) などを総督府(総督府)から京城(京城)に以前保管(移転保管)するという流説(流説)を私は(伝)した結果(結果)で競走地方(慶州地方)の選民(鮮民) などは台(大)ヒ所要(騷搖)寒士(事)が油(有)一つ右(右)は下等(何等)の誤報(誤報)なのか電研無根(全然無根)だ総督府(総督府)では絶対的(絶対的) 京城(京城)に以前(移転)する意志(意志)歌舞(無)と団(但) 期(其) 保存(保存) 級(及) 修理(修理)に管(関)ハヨは現象(現状)と女(如)ヒ放棄(放棄)背不能(不能)一つ年間(然)や期(其) 修理費(修理費)も巨額(巨額)を敷布団(要)して支出(支出)の方法(方法)で総督府(総督府)から保管(保管)する必要(必要)塗油(有)とこぶ(或)は差等(此等) 修理保存(修理保存)の方法(方法)に管(関)一女史(如斯)一虚報(虚報)を私は(伝)ハムであるようだそうだ.

 

 

 Terauchi総陶器競走へ来ることが単純に 遺物を見物しに来るのではなく多宝塔と石窟庵の持ちに来るのか疑心ができるには十分だったのではないかと思う. とにかくこのような事態の中にTerauchiは 1912年 11月 8日遂に吐含山に登って石窟庵を見物したし, 彼がいらっしゃった後久しくなくて石窟庵は全面解体修理される境遇になってしまった.

 

 

▲ <毎日新報> 1912年 11月 14日付け 

 

Terauchi総督(寺内総督) 慶州行き(慶州行) (三)

 

グァンゼファン(光済丸)からTakeda生(武田生)

 

Terauchi総督(寺内総督)の仲間は 8日仏国寺の観覧を料(了)した後直ちに石窟庵に部(赴)したが石窟庵は仏国寺の仏像と病気(病気)ヒ新羅王朝の文化をうん(語)して競走の美術を代表する石仏上を章(蔵)韓紙(地)だと. 仏国寺から石窟庵まで 20錠(丁)に過ぎないが海抜 2, 3チォンチォック(尺)もなる山間に灰(在)してホムゾ(険阻)一級版(急坂)を反騰(攀登)寸なくなかろう. 車馬(車馬)は元々筒(通)寸できなくて油(唯) 地(枝)に竹杖(竹杖)を義(依)するだけだから.

 

 

Terauchi総督はAkashi(明石), 他千葉や(立花) 嬢所長(少将), ウサミ(宇佐美) 長官, この道場官(李 道長官) その他の修行者と功(共)ヒ準版(峻坂)をギガ性(気呵成)でなど(登)して期元気は長子(壮者)を御陵(凌)して である(人)が犬(皆) 期健脚を頃(驚)したし石窟庵に度(到)すると眼界(眼界)がドングァン(頓広)して四方の群山(群山)を減下(瞰下)して円(遠)ヒ日本海(日本海)のミョミョ(渺渺)することを望見(望見)して神さま(身)恩典(全)ヒ引換(人為替)を離(離)して仙境(仙境)に灰(在)することと女(如)一所

 

 

石窟庵と言うことはグングリュング(穹リュング)の巌窟(岩窟)で 中央に釈迦上を安置したが車(此)はいち(一個)の花崗岩として各(刻)一大仏上だから高(高)は 1枚(丈)1尺(尺)だ起工(技工)の畝(妙)は仏国寺の仏像と拮抗(拮抗)してイン(人)にとって千年前の上古(上古)に車(此)と女(如)一新作(神作)理由(有)したことを義(疑)するようにしていたよ.

 

車大仏上の周りには 36球(躯)の石像(石像)理由(有)して犬(皆) 滄拾万苦(蒼茫万古)意義(意)をうん(語)することと死(似)して門(聞)すると石窟庵も仏国寺と同時代にジナスング(支那僧)の犬(開)一ところなのに, 車(此)を完成するに糸(実) 29年の星霜(星霜)を雨(費)したと言っていたよ.

 

 

Terauchi総督は姿勢(仔細)ヒ石像を管(観)と 50ウォン(円)を出(出)して癌(庵)に寄付して期保存にツィ(就)して心(深)ヒ史乗(寺僧)に気を付けたところが油(有)したが総督は仲間と功(共)ヒ山をハ(下)して再び仏国寺で為替(還)してしばらく休憩後此処(此処)で車を年間(連)と耳(帰)したから要旨(要之)コンデ団(単)ヒ仏国寺石窟庵だけではなく競走は今回総督の巡視によって新(新)ヒ光彩を部屋(放)する機会に束(接)した上(謂)するべきだ. 太古(太古)と無二(無異)ある人民(人民)も一種の科(誇)する者(者)だと言って愉快さをハム(咸)ハヨッウルジだな. (9日競走で).

 

木村静雄, <朝鮮に 老朽して> (帝国地方行政学会朝鮮本部, 1924)

...... (48ページ以下)

 

耳を疑うに値する命令(命令)が観さつ使(観察使)からのぼって, 言うのを ¥”仏国寺(仏国寺)の鋳造ドル(鋳造仏)と石窟庵(石窟庵)の全部を京城(京城)に輸送すること¥”と言った厳命(厳命)があったし, そしてまっすぐにこれを運送する 勘定書(計算書)を送りなさいと言う仕事だったが 軍需(郡守)は仕事の(一議)もなしに服従の態度を見せたが私はそのようにはできない, 実に爆鳴(暴命)でこれより加えたことはないと言って反感(反感)を止め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し, 大抵これら遺跡, 遺物だと言うことはその土地(土地)に定着(定着)していることこそ歴史の証拠(証憑)でもなって敬仰(敬仰)の心も湧き出ることなのに至る違うままに移したら無謀(無謀)することもひどくて, 役人(役人)にとって私利(事理)を理解させるにも位があることだからこれは盲従(盲従)することができないとこんなに思ったので回答(回答)を送らないで黙殺しようと決心..

 

........私の赴任前後にあって 泥棒の所作でお金と変えられたしないし(内地)に搬出されている石穴仏像(石窟仏像) 2食あたり(食あたり)と多宝塔(多宝塔) 獅子 1対(対)とその他の燈篭(燈篭) などグィグムムル(貴金物)の返還を成して保存上の完全を得ることは私の終生(終生)の風だ.

 

 

 

世界の驚異(驚異) (1) 朝鮮の石窟庵

<東亜日報> 1923年 6月 3日付け

...中略...

釈尊の左台と連帯の間(間)には所持鋳造閣の手法は仏国寺の多宝塔と等しい議長(意匠)に崇高尊厳した行くことをヤギハムよりむしろ現代的に人間の肉体美を発揮したのだ男性(男性)ではないです女性(女性)にオンユザビした性格を表現して油揚(乳部)の肥満と手足の油絵することは女性が確かでもし男性と言えばなが葱(頗)ヒ男前(美男子)だ. バンラチェ(半裸体)である如来(如来)の石像に私たちの人間の数(手)を燭(触)しても石像の秘府(肥膚)が圧縮になるようだ. 先年に総督府で 2万の巨額を雨(費)して重水(重修)するとドリヒョと書く五(汚)一事実は内外国人の観覧者にとって痛嘆するようにする.

 

どうせ threadに応じる日本人よりはコメントに応じて 発狂する

やつらが多い所だからこの位するかと思います.  楽しい週末を‾‾


한국의 美 경주 불국사의 이야기.

일단 서두에 간단하게 정리를 하고 중요한 부분을 증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장문이 되기 때문에 축소하여 말하면..

 

테라우치 총독은 불국사 근처 토함산 일대에 석굴암의 가치를 판단하고

경성으로 이송하기 위한 여건을 검토합니다.

 

석굴암을 이송하기 위해 견적을 내라고 합니다만.

학자나 업자들은 『대부분 미친 짓이다』라고 반박을 합니다.

 

결국엔 불가능한 일이라 판단하고 해체 보수를 지시하게 됩니다만

이후.,아래의 사료를 천천히 읽고 각자 조용히 명상하는 시간을 가집시다.

 

 

 

 

▲ <매일신보> 1912년 10월 30일자

 

경주고보의 유설(慶州古寶)의 유설(流說)

 

경주(慶州)에 재(在)한 신라고도(新羅古都)의 다보탑(多寶塔) 급(及) 석굴암(石窟庵)의 불적(佛蹟) 등을 총독부(總督府)에서 경성(京城)으로 이전보관(移轉保管)한다는 유설(流說)을 전(傳)한 결과(結果)로 경주지방(慶州地方)의 선민(鮮民) 등은 대(大)히 소요(騷搖)한 사(事)가 유(有)하나 우(右)는 하등(何等)의 오보(誤報)인지 전연무근(全然無根)이오 총독부(總督府)에서는 절대적(絶對的) 경성(京城)으로 이전(移轉)할 의지(意志)가 무(無)하고 단(但) 기(其) 보존(保存) 급(及) 수리(修理)에 관(關)하여는 현상(現狀)과 여(如)히 방기(放棄)키 불능(不能)하나 연(然)이나 기(其) 수리비(修理費)도 거액(巨額)을 요(要)하여 지출(支出)의 방법(方法)으로 총독부(總督府)에서 보관(保管)할 필요(必要)도 유(有)하고 혹(或)은 차등(此等) 수리보존(修理保存)의 방법(方法)에 관(關)한 여사(如斯)한 허보(虛報)를 전(傳)함인 듯하다더라.

 

 테라우치 총도기 경주에 오는 것이 단순히 유물을 구경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다보탑과 석굴암의 가지러 오는지 의심을 박기에는 충분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이러한 사태 속에 테라우치는 1912년 11월 8일 마침내 토함산에 올라 석굴암을 구경하였고, 그가 다녀간 뒤 오래지 않아 석굴암은 전면해체수리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 <매일신보> 1912년 11월 14일자 

 

테라우치 총독(寺內總督) 경주행(慶州行) (三)

광제환(光濟丸)으로부터 타케다생(武田生)

 

테라우치 총독(寺內總督)의 일행은 8일 불국사의 관람을 료(了)한 후 즉시 석굴암에 부(赴)하였는데 석굴암은 불국사의 불상과 병(병)히 신라왕조의 문화를 어(語)하여 경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석불상을 장(藏)한 지(地)라. 불국사로부터 석굴암까지 20정(丁)에 불과하되 해발 2, 3천척(尺)이나 되는 산간에 재(在)하여 험조(險阻)한 급판(急坂)을 반등(攀登)치 아니치 못할지라. 차마(車馬)는 원래 통(通)치 못하고 유(唯) 지(枝)에 죽장(竹杖)을 의(依)할 뿐이라.

 

테라우치 총독은 아카시(明石), 타치바나(立花) 양 소장(少將), 우사미(宇佐美) 장관, 이 도장관(李 道長官) 기타의 수행자와 공(共)히 준판(峻坂)을 기가성(氣呵成)으로 등(登)하여 기 원기는 장자(壯者)를 능(凌)하여 인(人)이 개(皆) 기 건각을 경(驚)하였으며 석굴암에 도(到)한즉 안계(眼界)가 돈광(頓廣)하여 사방의 군산(群山)을 감하(瞰下)하여 원(遠)히 일본해(日本海)의 묘묘(渺渺)함을 망견(望見)하겠고 신(身)은 전(全)히 인환(人환)을 이(離)하여 선경(仙境)에 재(在)함과 여(如)한데

 

석굴암이라 함은 궁륭(穹륭)의 암굴(岩窟)로 중앙에 석가상을 안치하였는데 차(此)는 일개(一個)의 화강석으로써 각(刻)한 대불상이니 고(高)는 1장(丈)1척(尺)이오 기공(技工)의 묘(妙)는 불국사의 불상과 길항(拮抗)하여 인(人)으로 하여금 천년전의 상고(上古)에 차(此)와 여(如)한 신작(神作)이 유(有)하였음을 의(疑)케 하더라.

 

차 대불상의 주위에는 36구(軀)의 석상(石像)이 유(有)하여 개(皆) 창망만고(蒼茫万古)의 의(意)를 어(語)함과 사(似)하며 문(聞)한즉 석굴암도 불국사와 동시대에 지나승(支那僧)의 개(開)한 바인데, 차(此)를 완성함에 실(實) 29년의 성상(星霜)을 비(費)하였다 하더라.

 

테라우치 총독은 자세(仔細)히 석상을 관(觀)하고 50원(圓)을 출(出)하여 암(庵)에 기부하고 기 보존에 취(就)하여 심(深)히 사승(寺僧)에게 주의한 바가 유(有)하였는데 총독은 일행과 공(共)히 산을 하(下)하여 재차 불국사로 환(還)하여 잠시 휴게 후 차처(此處)에서 차를 연(聯)하고 귀(歸)하였으니 요지(要之)컨데 단(單)히 불국사 석굴암뿐 아니라 경주는 금회 총독의 순시에 의하여 신(新)히 광채를 방(放)하는 기회에 접(接)하였다 위(謂)할지라. 태고(太古)와 무이(無異)한 인민(人民)도 일종의 과(誇)할 자(者)라 하여 유쾌함을 함(咸)하였을지로다. (9일 경주에서).

 

木村靜雄, <朝鮮に 老朽して> (帝國地方行政學會朝鮮本部, 1924)

...... (48쪽 이하)

귀를 의심할 만한 명령(命令)이 관찰사(觀察使)로부터 이르러, 말하기를 "불국사(佛國寺)의 주조불(鑄造佛)과 석굴암(石窟庵)의 전부를 경성(京城)에 수송할 것"이라고 한 엄명(嚴命)이 있었으며, 그리고 곧장 이를 운송할 계산서(計算書)를 보내라고 하는 일이었는데 군수(郡守)는 일의(一議)도 없이 복종의 태도를 보였으나 나는 그렇게는 할 수 없다, 실로 폭명(暴命)으로 이보다 더 한 것은 없다고 하며 반감(反感)을 그칠 수가 없었고, 대저 이들 유적, 유물이라고 하는 것은 그 토지(土地)에 정착(定着)해 있는 것이야말로 역사의 증빙(證憑)으로도 되고 경앙(敬仰)의 마음도 솟아나는 것인데 이를 다른 데로 옮긴다면 무모(無謀)함도 심하고, 역인(役人)으로 하여금 사리(事理)를 이해시키는데도 정도가 있는 것이라 이것은 맹종(盲從)할 수가 없다고 이렇게 생각하였던지라 회답(回答)을 보내지 않고 묵살하려고 결심..

........나의 부임 전후에 있어 도둑의 소행으로 돈과 바꿔졌고 내지(內地)에 반출되어 있는 석굴불상(石窟佛像) 2체(체)와 다보탑(多寶塔) 사자 1대(對)와 기타의 등롱(燈籠) 등 귀금물(貴金物)의 반환을 이뤄 보존상의 완전을 얻는 것은 나의 종생(終生)의 바람이다.

 

 

 

세계의 경이(驚異) (1) 조선의 석굴암

<동아일보> 1923년 6월 3일자

...중략...

석존의 좌대와 연대의 간(間)에는 소지주조각의 수법은 불국사의 다보탑과 동일한 의장(意匠)으로 숭고존엄한 감을 야기함보다 오히려 현대적으로 인간의 육체미를 발휘하였나니 남성(男性)이 아니오 여성(女性)으로 온유자비한 성격을 표현하여 유부(乳部)의 비만과 수족의 유화함은 여성이 확실하고 만약 남성이라 하면 파(頗)히 미남자(美男子)이다. 반라체(半裸體)인 여래(如來)의 석상에 우리 인간의 수(手)를 촉(觸)하여도 석상의 비부(肥膚)가 압축이 되는 듯하다. 연전에 총독부에서 2만의 거액을 비(費)하여 중수(重修)한다고 도리혀 고적을 오(汚)한 사실은 내외국인의 관람자로 하여금 통탄케 한다.

 

어차피 thread에 반응하는 일본인 보다는 코멘트에 반응하여 發狂하는

녀석들이 많은 곳이라 이 정도 할까 합니다.  즐거운 주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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