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일본의 차 역사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글에서 소상히 소개되고 있습니다.
日本の茶の歴史については、次のような記事でソサンヒ紹介されています。
/kr/exchange/photo/read.php?uid=1756&fid=1756&thread=1000000&idx=1&page=3&tname=exc_board_14&number=1287

조금 다른 관점에서 茶에 대하여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少し別の視点から茶のことを見ていきましょう

 

慶長19, 1614, 現在の静岡県の井川金鉱の金山衆が「ちゃえん」を作り茶を飲んだという記録がある.
慶長19, 1614 현재 시즈오카현 井川金鉱の金山衆이 찻사발을 만들고 차를 마셨다는 기록이있다.

金山衆의 정체에 대해서는 다음에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金山衆の正体については、次の連載で紹介させていただきます。

 

産地は古くからの産地と新興産地が県下各地に広がり、煎茶、蒸し製玉緑茶、釜炒り製玉緑茶の三茶種が生産されている。特に釜炒り茶の歴史は古く、築城400年を迎えた熊本城を築いた加藤清正公が朝鮮半島から製法を持ち帰り、奨励したことに始まったと言われており、元禄年間には「青柳茶」と命名され、現在に至っている。
산지는 오래 전부터 산지와 신흥 산지가 현내 각지에 퍼져, 엽차, 찐玉緑茶, 솥으로 볶은 만든 玉緑茶의 세 차 종류가 생산되고있다. 특히 솥으로 볶은 차의 역사는 오래되고 축성 400 년을 맞아 쿠마모토성을 쌓은 가토 기요 마사 공이 한반도에서 제조법을 찾아오고 격려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元禄年間에 “青柳茶” 로 명명되어 현재에 이르고있다.

 

現在の九州は、全国の生産量の三割を占める、茶の一大産地である。
全国の玉露生産の実に46%を占めるまでの産地になっている。“宇治茶”として知られる玉露の高級茶の多くが実はここ八女産であるのは有名な話である。
 一方、佐賀県の嬉野は珍しい「釜炒り茶」の製法を伝える産地である。こちらは1440年に平戸に上陸した中国人陶工たちが、この地の皿屋谷(さらやたに)に移住した際に、持ってきた種子を自家用に播いたのが始まりとされている。その後、やはり明から南京釜がもたらされ、現在なおこの地に伝わる中国式釜炒り茶の製法が確立されたという。
  日本で今、釜炒り茶として知られるものに、もう一つ「青柳茶(あおやぎちゃ)」があるが、こちらは主として熊本県、宮崎県の山間地で作られており、さらに四国や中部の山間地にも広がっている。一説には、熊本城の築城の際に朝鮮半島から渡来し住み着いた技術者が伝えた技術であるとされる、実際に、現在でも韓国南部には青柳茶と同様の製法が伝わっていることもわかっている。
현재 큐슈는 전국 생산량의 30%를 차지하는, 차의 최대 생산지이다.
전국玉露생산의 무려 46 %를 차지하는 산지로되어있다. “宇治茶”로 알려진玉露고급 차의 많은 것이 사실 여기 八女産에있는 유명한 일화이다.
한편, 사가현의 우레시노는 특별한 “솥으로 볶은 차”제조법을 전하는 산지이다. 이곳은 1440 년에 히라도에 상륙한 중국 도공들이 이곳 皿屋谷에 이주한 때 가져온 씨앗을 민간에 씨를 뿌린 것이 그 시초로하고있다. 그 역시 명나라로부터 남경 가마가 도입되고 현재도이 지역에 전해지는 중국식 솥 볶은 녹차의 제법이 확립되었다고한다.
  일본에서 지금, 솥으로 볶은 차로 알려진 것으로, 또 青柳茶가있다, 이곳은 주로 구마 모토현, 미야자키현의 산간 지역에서 만들어지고 있으며, 또한 시코쿠와 중부 산간 지역에도 확산되고있다. 일설에는 구마 모토 성의 축성 때 한반도에서 도래한 정착 기술자가 전했다 기술이 있다는 사실, 지금도 한국 남부에서는 青柳茶와 같은 제조법이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있다.
   
江戸時代의 茶産地

元禄5   1691
江戸の町で販売する煎茶弐は駿州(静岡)信州(長野)甲州(山梨)総州(千葉)野州(栃木)奥州産があったと記されている。
また、茶の名産地として抹茶は宇治、煎茶も宇治を第一とし、
さらに江州(滋賀)の政所、紀州(和歌山)の熊野、駿州の安倍、予州(愛媛)の不動坊をあげている。
에도의 마을에서 판매하는 엽차는 駿州(静岡)信州(長野)甲州(山梨)総州(千葉)野州(栃木)奥州産이 있었다고 기록되어있다.
또한 차의 명산지로 抹茶는 宇治, 煎茶도 宇治를 제일로하고
또한 江州(滋賀)의政所、紀州(和歌山)의熊野、駿州의安倍、予州(愛媛)의不動坊이 있다.


貞言榮茶 銘文 茶椀
新羅時代7世紀; 慶州市 雁鴨池 出土, 慶州博物館 所藏

196cm.石窟庵 石窟(국보 24호)의 主室인 圓窟에 들어서면 왼쪽으로 두번째에 있는 文殊菩薩立像

 

靑木正兒の 靑木金集
靑木正兒全集 262page 15行
나는 고구려의 옛 고분(古墳)에서 출토되었다는 모양이 둥글고 얇은 작은 병다(餠茶) 한 조각을 표본으로 간직하고 있는데, 직경이 4cm정도의 엽전(葉錢) 모양에 두께는 닷푼(5分) 가량이 된다.
私は、高句麗の昔の古坟から出土した形が丸くて薄い小さな餠茶一つを標本に持っていますが、直径4cm程度の葉錢形態の厚さは5分ほどになる。

 

世宗地理志( 1432)에 나와 있는 茶생산지를 살펴 보자.

世宗地理志(1432)に記載されている茶の生産地を見てみよう。


慶尙道 密陽都護府,蔚山郡,咸陽郡,固城縣,河東縣,山陰縣,鎭海縣
全羅道 全州府/ 고부군(古阜郡),옥구현(沃溝縣),부안현(扶安縣),정읍현(井邑縣)
羅州牧/ 해진군(海珍郡),영암군(靈巖郡),영광군(靈光郡),강진현(康津縣),무장현(茂長縣),함평현(咸平縣),남평현(南平縣),무안현(務安縣),고창현(高敞縣),흥덕현(興德縣),장성현(長城縣)
南原都護府/ 순창군(淳昌郡),구례현(求禮縣),광양현(光陽縣)
長興都護府/ 담양도호부(潭陽都護府)
순천도호부(順天都護府),무진군(茂珍郡),보성군(寶城郡),악안군(樂安郡),고흥현(高興縣),동복현(同福縣),진원현(珍原縣)

 

正祖 50卷, 22年(1798)
烟茶之糜穀, 其害孔甚。 臣謂元帳之田, 勿許種茶。
담배와 茶의 재배로 곡식의 생산이 줄어드는 피해가 몹시 심합니다. 臣은, 元帳에 등재되어 있는 토지에는 茶를 심는 것을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タバコや茶の栽培で穀物の生産が減少する被害がひどく悪化して。臣は、元帳に記載されている土地には茶を植えることを許可しないようにと考えています。

 

일본인들은 조선시대에 서민들이 茶를 마시지 못했다 라고 주장하지만
世宗地理志에 나와 있듯이 조선시대 초기에 남부 지방 전역에서 차가 재배되고 있었고
正祖 22年(1798)에 곡식의 생산이 염려되는 수준으로 차생산량이 증가했습니다.
日本人は、朝鮮時代の庶民が茶を飲んでいないと主張するが、
世宗地理志に記載されているように、朝鮮時代初期に南部地方の全域で茶が栽培されていて
正祖22年(1798)の穀物の生産が懸念されるレベルに 茶生産高が増加しました。


에도시대의 식생활 22 - 茶

일본의 차 역사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글에서 소상히 소개되고 있습니다.
日本の茶の歴史については、次のような記事でソサンヒ紹介され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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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다른 관점에서 茶에 대하여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少し別の視点から茶のことを見ていきましょう

 

慶長19, 1614, 現在の静岡県の井川金鉱の金山衆が「ちゃえん」を作り茶を飲んだという記録がある.
慶長19, 1614 현재 시즈오카현 井川金鉱の金山衆이 찻사발을 만들고 차를 마셨다는 기록이있다.

金山衆의 정체에 대해서는 다음에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金山衆の正体については、次の連載で紹介させていただきます。

 

産地は古くからの産地と新興産地が県下各地に広がり、煎茶、蒸し製玉緑茶、釜炒り製玉緑茶の三茶種が生産されている。特に釜炒り茶の歴史は古く、築城400年を迎えた熊本城を築いた加藤清正公が朝鮮半島から製法を持ち帰り、奨励したことに始まったと言われており、元禄年間には「青柳茶」と命名され、現在に至っている。
산지는 오래 전부터 산지와 신흥 산지가 현내 각지에 퍼져, 엽차, 찐玉緑茶, 솥으로 볶은 만든 玉緑茶의 세 차 종류가 생산되고있다. 특히 솥으로 볶은 차의 역사는 오래되고 축성 400 년을 맞아 쿠마모토성을 쌓은 가토 기요 마사 공이 한반도에서 제조법을 찾아오고 격려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元禄年間에 "青柳茶" 로 명명되어 현재에 이르고있다.

 

現在の九州は、全国の生産量の三割を占める、茶の一大産地である。
全国の玉露生産の実に46%を占めるまでの産地になっている。“宇治茶”として知られる玉露の高級茶の多くが実はここ八女産であるのは有名な話である。
 一方、佐賀県の嬉野は珍しい「釜炒り茶」の製法を伝える産地である。こちらは1440年に平戸に上陸した中国人陶工たちが、この地の皿屋谷(さらやたに)に移住した際に、持ってきた種子を自家用に播いたのが始まりとされている。その後、やはり明から南京釜がもたらされ、現在なおこの地に伝わる中国式釜炒り茶の製法が確立されたという。
  日本で今、釜炒り茶として知られるものに、もう一つ「青柳茶(あおやぎちゃ)」があるが、こちらは主として熊本県、宮崎県の山間地で作られており、さらに四国や中部の山間地にも広がっている。一説には、熊本城の築城の際に朝鮮半島から渡来し住み着いた技術者が伝えた技術であるとされる、実際に、現在でも韓国南部には青柳茶と同様の製法が伝わっていることもわかっている。
현재 큐슈는 전국 생산량의 30%를 차지하는, 차의 최대 생산지이다.
전국玉露생산의 무려 46 %를 차지하는 산지로되어있다. "宇治茶"로 알려진玉露고급 차의 많은 것이 사실 여기 八女産에있는 유명한 일화이다.
한편, 사가현의 우레시노는 특별한 "솥으로 볶은 차"제조법을 전하는 산지이다. 이곳은 1440 년에 히라도에 상륙한 중국 도공들이 이곳 皿屋谷에 이주한 때 가져온 씨앗을 민간에 씨를 뿌린 것이 그 시초로하고있다. 그 역시 명나라로부터 남경 가마가 도입되고 현재도이 지역에 전해지는 중국식 솥 볶은 녹차의 제법이 확립되었다고한다.
  일본에서 지금, 솥으로 볶은 차로 알려진 것으로, 또 青柳茶가있다, 이곳은 주로 구마 모토현, 미야자키현의 산간 지역에서 만들어지고 있으며, 또한 시코쿠와 중부 산간 지역에도 확산되고있다. 일설에는 구마 모토 성의 축성 때 한반도에서 도래한 정착 기술자가 전했다 기술이 있다는 사실, 지금도 한국 남부에서는 青柳茶와 같은 제조법이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있다.
   
江戸時代의 茶産地

元禄5   1691
江戸の町で販売する煎茶弐は駿州(静岡)信州(長野)甲州(山梨)総州(千葉)野州(栃木)奥州産があったと記されている。
また、茶の名産地として抹茶は宇治、煎茶も宇治を第一とし、
さらに江州(滋賀)の政所、紀州(和歌山)の熊野、駿州の安倍、予州(愛媛)の不動坊をあげている。
에도의 마을에서 판매하는 엽차는 駿州(静岡)信州(長野)甲州(山梨)総州(千葉)野州(栃木)奥州産이 있었다고 기록되어있다.
또한 차의 명산지로 抹茶는 宇治, 煎茶도 宇治를 제일로하고
또한 江州(滋賀)의政所、紀州(和歌山)의熊野、駿州의安倍、予州(愛媛)의不動坊이 있다.


貞言榮茶 銘文 茶椀
新羅時代7世紀; 慶州市 雁鴨池 出土, 慶州博物館 所藏

196cm.石窟庵 石窟(국보 24호)의 主室인 圓窟에 들어서면 왼쪽으로 두번째에 있는 文殊菩薩立像

 

靑木正兒の 靑木金集
靑木正兒全集 262page 15行
나는 고구려의 옛 고분(古墳)에서 출토되었다는 모양이 둥글고 얇은 작은 병다(餠茶) 한 조각을 표본으로 간직하고 있는데, 직경이 4cm정도의 엽전(葉錢) 모양에 두께는 닷푼(5分) 가량이 된다.
私は、高句麗の昔の古坟から出土した形が丸くて薄い小さな餠茶一つを標本に持っていますが、直径4cm程度の葉錢形態の厚さは5分ほどになる。

 

世宗地理志( 1432)에 나와 있는 茶생산지를 살펴 보자.

世宗地理志(1432)に記載されている茶の生産地を見てみよう。


慶尙道 密陽都護府,蔚山郡,咸陽郡,固城縣,河東縣,山陰縣,鎭海縣
全羅道 全州府/ 고부군(古阜郡),옥구현(沃溝縣),부안현(扶安縣),정읍현(井邑縣)
羅州牧/ 해진군(海珍郡),영암군(靈巖郡),영광군(靈光郡),강진현(康津縣),무장현(茂長縣),함평현(咸平縣),남평현(南平縣),무안현(務安縣),고창현(高敞縣),흥덕현(興德縣),장성현(長城縣)
南原都護府/ 순창군(淳昌郡),구례현(求禮縣),광양현(光陽縣)
長興都護府/ 담양도호부(潭陽都護府)
순천도호부(順天都護府),무진군(茂珍郡),보성군(寶城郡),악안군(樂安郡),고흥현(高興縣),동복현(同福縣),진원현(珍原縣)

 

正祖 50卷, 22年(1798)
烟茶之糜穀, 其害孔甚。 臣謂元帳之田, 勿許種茶。
담배와 茶의 재배로 곡식의 생산이 줄어드는 피해가 몹시 심합니다. 臣은, 元帳에 등재되어 있는 토지에는 茶를 심는 것을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タバコや茶の栽培で穀物の生産が減少する被害がひどく悪化して。臣は、元帳に記載されている土地には茶を植えることを許可しないようにと考えています。

 

일본인들은 조선시대에 서민들이 茶를 마시지 못했다 라고 주장하지만
世宗地理志에 나와 있듯이 조선시대 초기에 남부 지방 전역에서 차가 재배되고 있었고
正祖 22年(1798)에 곡식의 생산이 염려되는 수준으로 차생산량이 증가했습니다.
日本人は、朝鮮時代の庶民が茶を飲んでいないと主張するが、
世宗地理志に記載されているように、朝鮮時代初期に南部地方の全域で茶が栽培されていて
正祖22年(1798)の穀物の生産が懸念されるレベルに 茶生産高が増加し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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