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木製の椀が主流であり、庶民はゴキと呼ばれる木地そのままの刳り椀であり、貴族では漆椀が使われていた。また、陶磁器の飯茶碗は江戸時代を待たなければ出現せず、その使用は大名などでは17世紀中葉、商家では江戸後期、そして地方の農家や庶民にまで普及するのは明治に入ってからとされる。 

 목제의 완이 주류이며, 서민은 고키로 불리는 나무결 그대로의 파임완이며, 귀족에서는 漆椀이 사용되고 있었다.또, 도자기의 밥밥공기는 에도시대를 기다리지 않으면 출현하지 않고, 그 사용은 오나등에서는 17 세기 중엽, 상가로는 에도 후기, 그리고 지방의 농가나 서민에게까지 보급하는 것은 明治에 들어오고 나서로 여겨진다. 


いつから庶民にいたるまで碗が用いられはじめたかは、実証するすべはないが、いったん普及すると、必需品になった。
むろん、庶民の日用品としての碗は木地のままのもので、うるし塗りとまではゆかなかったはずである。木地のままにせよ、塗りにせよ、この手の木製食器は、上代から江戸末期まで飯碗として用いられつづけ、いまも、吸物椀などに限定されつつもつかわれている。
中世、公家貴族や武家貴族の什器の主力は、漆器であった

明治になると箔椀は廃れますが、「御山御器」をはじめとする庶民の漆器は、大正・昭和にかけて需要が高まり、国内はもとより海外にも販路が広がりました。
언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완이 이용되기 시작했는가는, 실증할 방법은 없지만, 일단 보급하면, 필수품이 되었다.
물 론, 서민의 일용품으로서의 완은 나무결 인 채의 것으로, 옻칠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나무결대로하라, 칠이든, 이 손의 목제 식기는, 옛날부터 에도 말기까지 반완으로서 계속 이용되어 지금도, 국완 등에 한정되면서 가질까 깨지고 있다.
중세, 문신 귀족이나 무가 귀족의 집기의 주력은, 칠기였다.

메이지가 되면 박완은 쓸모없게 됩니다만, 「오야마 식기」를 시작으로 하는 서민의 칠기는, 타이쇼·쇼와에 걸치고 수요가 높아져, 국내는 원래 해외에도 판로가 퍼졌습니다.


回転力によって木を挽く轆轤そのものは、文献(『養老令』など)からみても惟喬親王よりずっと以前に日本につたわっている。朝鮮からのその職人(てひと)とともに伝わったことは、ほぼまちがいない。
회전력에 의해서 나무를 켜는 녹노그 자체는, 문헌( 「양로령」 등) 매운 맛이라고도 유교황태자에서 훨씬 이전에 일본에 전해지고 있다.조선으로부터의 그 직공(라고 사람)과 함께 전해진 것은, 거의 틀림없다.
오늘날의 얇은 목기는 도자기 성형과정의 물레에 의한 회전을 이용하여 비로소 가공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箱膳に向かうとき、背筋を伸ばし正座を求められる。箱膳の高さが低いため、いわゆる〝犬食い〟と言われる、片肘をついて食べる姿勢は不可能である。犬食い習慣のある子どもの矯正には、箱膳食事はうってつけである。

식기수납을 겸한 상은 히데요시나 토시야스의 시대보다 백년 정도 후에 등장합니다.

식탁이 해에 보급하기 시작하는 것은´메이지 시대의 후반´그 전에 사용되고 있던 식기수납을 겸한 상을 축 해´가정의 식탁의 주역이 되는 것은´타이쇼 시대의 마지막으로부터 쇼와의 처음´지금부터 겨우 7=80년전의 일입니다.

식기수납을 겸한 상으로 향할 때´등골을 펴 정좌가 구할 수 있다.식기수납을 겸한 상의 높이가 낮기 때문에´이른바 견식 실 말해지는´편을 붙어 먹는 자세는 불가능하다.개 먹어 습관이 있는 아이의 교정에는´식기수납을 겸한 상 식사는 안성맞춤이다.

 

조선시대의 식사량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하는 일본인이 많았다

가장 굶주렸다는 일제강점기의 자료를 일단 살펴 보자.

朝鮮時代の食事の量について、おさるの考えている日本人が多かった

最も貧困した日帝強制占領期間のデータを一度見てみよう。

 

食料消費量の変遷について、単位は石(全体からの%)、元データは朝鮮総督府農林局編「朝鮮米穀要覧」だそうです。

年平均  米      麦      粟     豆類    その他   合計
1915-18 0.70(35.6) 0.42(21.2) 0.28(14.4) 0.26(13.2) 0.31(15.7) 1.9766
1921-24 0.64(31.6) 0.42(20.6) 0.36(17.9) 0.26(12.9) 0.35(17.1) 2.0211
1926-29 0.51(28.1) 0.40(21.8) 0.37(20.2) 0.23(12.7) 0.31(17.2) 1.8163
1931-34 0.44(26.7) 0.42(25.2) 0.31(19.1) 0.21(12.5) 0.27(16.5) 1.6487

 

왼쪽으로 부터 현재 조선 고려 고구려 밥그릇(左から、現在の朝鮮,高麗,高句麗 食器)

요즘 흔히 쓰이는 밥공기에는 350g의 쌀이 들어갔다. 그런데 고구려시대 밥그릇을 채우는 데는 1300g이 필요했다. 네 배 가까운 분량이다.

고려시대 밥주발에는 1040g, 조선시대 밥사발에는 690g의 쌀이 들어갔다. 물론 실제로 밥을 지을 때 필요한 쌀은 이보다 적을 것이다.

시대별 밥그릇 크기의 비교는 토지박물관이 지난해 경기도 연천의 고구려 군사기지 유적인 호로고루(瓠蘆古壘)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6∼7세기 토기 밥그릇이 출토됨에 따라 이루어질 수 있었다.

고려시대 밥그릇은 개성에서 출토된 것을 사들인 12∼13세기 청동주발, 조선시대 것은 역시 토지박물관이 최근 남한산성의 행궁터를 발굴 조사하면서 완전한 형태로 찾아낸 19세기 백자 밥사발을 비교에 이용했다.

18세기 말에 편찬된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는 ‘남자는 한 끼에 7홉을 먹고 여자는 5홉, 아이는 3홉을 먹는다.’는 내용이 있다고 한다. 당시 남자 어른이 한 끼에 420㎣ 정도를 먹었음을 알 수 있다. 역시 지금보다 두 배 이상이 되는 분량이다. 이 때문에 조선 말기에 찾아온 서양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먹는 밥의 양을 보고 조선을 ‘대식국(大食國)’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었다고 한다.

最近よく使われる食器は 350gの米が入った。しかし、高句麗時代の食器を満たすには1300gを必要としている。 4倍近い量である。

高麗時代は1040g、朝鮮時代の食器は 690gの米が入った。もちろん、実際にご飯を建てる際に必要なコメはこれより少ないだろう。

 

 

 

일본인의 키는 역사가 흘러 갈수록 점점 왜소해 진다. 이유가 무엇인가?

日本人の身長は、歴史が流れ、ますます小さくなる。理由は何ですか?


에도시대의 식생활 4-식기와 밥상

木製の椀が主流であり、庶民はゴキと呼ばれる木地そのままの刳り椀であり、貴族では漆椀が使われていた。また、陶磁器の飯茶碗は江戸時代を待たなければ出現せず、その使用は大名などでは17世紀中葉、商家では江戸後期、そして地方の農家や庶民にまで普及するのは明治に入ってからとされる。 

 목제의 완이 주류이며, 서민은 고키로 불리는 나무결 그대로의 파임완이며, 귀족에서는 漆椀이 사용되고 있었다.또, 도자기의 밥밥공기는 에도시대를 기다리지 않으면 출현하지 않고, 그 사용은 오나등에서는 17 세기 중엽, 상가로는 에도 후기, 그리고 지방의 농가나 서민에게까지 보급하는 것은 明治에 들어오고 나서로 여겨진다. 


いつから庶民にいたるまで碗が用いられはじめたかは、実証するすべはないが、いったん普及すると、必需品になった。
むろん、庶民の日用品としての碗は木地のままのもので、うるし塗りとまではゆかなかったはずである。木地のままにせよ、塗りにせよ、この手の木製食器は、上代から江戸末期まで飯碗として用いられつづけ、いまも、吸物椀などに限定されつつもつかわれている。
中世、公家貴族や武家貴族の什器の主力は、漆器であった

明治になると箔椀は廃れますが、「御山御器」をはじめとする庶民の漆器は、大正・昭和にかけて需要が高まり、国内はもとより海外にも販路が広がりました。
언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완이 이용되기 시작했는가는, 실증할 방법은 없지만, 일단 보급하면, 필수품이 되었다.
물 론, 서민의 일용품으로서의 완은 나무결 인 채의 것으로, 옻칠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나무결대로하라, 칠이든, 이 손의 목제 식기는, 옛날부터 에도 말기까지 반완으로서 계속 이용되어 지금도, 국완 등에 한정되면서 가질까 깨지고 있다.
중세, 문신 귀족이나 무가 귀족의 집기의 주력은, 칠기였다.

메이지가 되면 박완은 쓸모없게 됩니다만, 「오야마 식기」를 시작으로 하는 서민의 칠기는, 타이쇼·쇼와에 걸치고 수요가 높아져, 국내는 원래 해외에도 판로가 퍼졌습니다.


回転力によって木を挽く轆轤そのものは、文献(『養老令』など)からみても惟喬親王よりずっと以前に日本につたわっている。朝鮮からのその職人(てひと)とともに伝わったことは、ほぼまちがいない。
회전력에 의해서 나무를 켜는 녹노그 자체는, 문헌( 「양로령」 등) 매운 맛이라고도 유교황태자에서 훨씬 이전에 일본에 전해지고 있다.조선으로부터의 그 직공(라고 사람)과 함께 전해진 것은, 거의 틀림없다.
오늘날의 얇은 목기는 도자기 성형과정의 물레에 의한 회전을 이용하여 비로소 가공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箱膳に向かうとき、背筋を伸ばし正座を求められる。箱膳の高さが低いため、いわゆる〝犬食い〟と言われる、片肘をついて食べる姿勢は不可能である。犬食い習慣のある子どもの矯正には、箱膳食事はうってつけである。

식기수납을 겸한 상은 히데요시나 토시야스의 시대보다 백년 정도 후에 등장합니다.

식탁이 해에 보급하기 시작하는 것은´메이지 시대의 후반´그 전에 사용되고 있던 식기수납을 겸한 상을 축 해´가정의 식탁의 주역이 되는 것은´타이쇼 시대의 마지막으로부터 쇼와의 처음´지금부터 겨우 7=80년전의 일입니다.

식기수납을 겸한 상으로 향할 때´등골을 펴 정좌가 구할 수 있다.식기수납을 겸한 상의 높이가 낮기 때문에´이른바 견식 실 말해지는´편을 붙어 먹는 자세는 불가능하다.개 먹어 습관이 있는 아이의 교정에는´식기수납을 겸한 상 식사는 안성맞춤이다.

 

조선시대의 식사량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하는 일본인이 많았다

가장 굶주렸다는 일제강점기의 자료를 일단 살펴 보자.

朝鮮時代の食事の量について、おさるの考えている日本人が多かった

最も貧困した日帝強制占領期間のデータを一度見てみよう。

 

食料消費量の変遷について、単位は石(全体からの%)、元データは朝鮮総督府農林局編「朝鮮米穀要覧」だそうです。

年平均  米      麦      粟     豆類    その他   合計
1915-18 0.70(35.6) 0.42(21.2) 0.28(14.4) 0.26(13.2) 0.31(15.7) 1.9766
1921-24 0.64(31.6) 0.42(20.6) 0.36(17.9) 0.26(12.9) 0.35(17.1) 2.0211
1926-29 0.51(28.1) 0.40(21.8) 0.37(20.2) 0.23(12.7) 0.31(17.2) 1.8163
1931-34 0.44(26.7) 0.42(25.2) 0.31(19.1) 0.21(12.5) 0.27(16.5) 1.6487

 

왼쪽으로 부터 현재 조선 고려 고구려 밥그릇(左から、現在の朝鮮,高麗,高句麗 食器)

요즘 흔히 쓰이는 밥공기에는 350g의 쌀이 들어갔다. 그런데 고구려시대 밥그릇을 채우는 데는 1300g이 필요했다. 네 배 가까운 분량이다.

고려시대 밥주발에는 1040g, 조선시대 밥사발에는 690g의 쌀이 들어갔다. 물론 실제로 밥을 지을 때 필요한 쌀은 이보다 적을 것이다.

시대별 밥그릇 크기의 비교는 토지박물관이 지난해 경기도 연천의 고구려 군사기지 유적인 호로고루(瓠蘆古壘)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6∼7세기 토기 밥그릇이 출토됨에 따라 이루어질 수 있었다.

고려시대 밥그릇은 개성에서 출토된 것을 사들인 12∼13세기 청동주발, 조선시대 것은 역시 토지박물관이 최근 남한산성의 행궁터를 발굴 조사하면서 완전한 형태로 찾아낸 19세기 백자 밥사발을 비교에 이용했다.

18세기 말에 편찬된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는 ‘남자는 한 끼에 7홉을 먹고 여자는 5홉, 아이는 3홉을 먹는다.’는 내용이 있다고 한다. 당시 남자 어른이 한 끼에 420㎣ 정도를 먹었음을 알 수 있다. 역시 지금보다 두 배 이상이 되는 분량이다. 이 때문에 조선 말기에 찾아온 서양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먹는 밥의 양을 보고 조선을 ‘대식국(大食國)’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었다고 한다.

最近よく使われる食器は 350gの米が入った。しかし、高句麗時代の食器を満たすには1300gを必要としている。 4倍近い量である。

高麗時代は1040g、朝鮮時代の食器は 690gの米が入った。もちろん、実際にご飯を建てる際に必要なコメはこれより少ないだろう。

 

 

 

일본인의 키는 역사가 흘러 갈수록 점점 왜소해 진다. 이유가 무엇인가?

日本人の身長は、歴史が流れ、ますます小さくなる。理由は何です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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