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신발은 발목까지 덮는 덮개 있는 북방형(北方型) 화(靴)가 있고 덮개 없는 남방(南方型) 이(履)가 있다.


우리 나라는 겨울에 시베리아의 냉기단이 와서 지배하고 여름에 남태평양의 열기단이 와서 지배하는 남북 완충지대이기에 신발도 남북 완충형으로 발달해왔으나 북방 문화의 영향이 컸던 고대 조선과 삼국시대의 지배계층 신발은 발목까지 덮는 반장화인 화(靴)가 주류였다.

화(靴)는 본래 북방 기마민족인 오랑캐의 신발로 조(趙)나라 무령왕(武靈王)이 오랑캐와 싸워 이기려면 기마(騎馬)에 편리한 오랑캐 복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하여 홀태바지와 더불어 중국에서 도입한 신발이다.


「삼국사기」에 보면 ‘자피화(紫皮靴)’ ‘오피화(烏皮靴)’ ‘적피화(赤皮靴)’ 그리고 버선목이 달린 ‘말화(襪靴)’ 등이 나오는데 신분이나 계급에 따라 자색, 검은색, 붉은색으로 차별해 신었던 것 같다. 또한 화대(靴帶)라 하여 신발 장식으로도 신분이나 계급을 세분해 나타냈는데 육두품(六頭品) 이상의 벼슬아치는 놋쇠로 신발띠를 두르고 오두품(五頭品)은 구리로 사두품과 평민은 쇠로 신발띠를 두르게 했다.


삼국시대 평민들이 신었던 남방형 이(履)의 명칭은 다양하여 이(履)말고도 답(踏), 혜(鞋), 비(扉)란 말이 나오는데 아마도 약간씩 구조가 달라진데서 붙여진 이름인 것 같다. 신발을 뜻하는 신이란 말이 선(洗)에서 비롯됐음은 알려진 사실이다. 삼국시대의 이 신발도 노란 가죽으로 만든 황혁리(黃革履), 검은 가죽으로 만든 오혁리(烏革履)가 있고 또 발가락 꿰는 끈이 노란 가죽이냐 검은 가죽이냐로 신분의 귀천을 갈랐던 것이다.


 
신발로 신분을 대변시킨 데는 조선조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조복에 화(靴)가 정장이듯이 짐승 가죽을 눌러 만든 반장화가 벼슬아치의 신발이요, 가죽신은 양반, 베신은 중인, 짚신은 상민이라는 것이 상식이었으나 그 테두리가 지켜지지 않았다.

 

돈 많은 상민들은 남산 밑 갖바치에게 웃돈 주어 가죽신을 구하거나 육의전의 혜전(鞋廛)과 내통 양반들 신는 가죽신을 은밀히 구해 신었으며 양반들은 이에 반발, 그러하지 못하도록 갖바치와 혜전에 온갖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履き物は足首まで覆う覆いある北方型(北方型) 靴があって覆いない南方(南方型) 履がある.
我が国は冬にシベリアの冷気団が来て支配して夏に南太平洋の熱気団が来て支配する南北緩衝地帯だから履き物も南北緩衝型で発達して来たが北方文化の影響が大きかった古代朝鮮と三国時代の支配階層履き物は足首まで覆う半長靴である火(靴)が主類だった.
火(靴)は本来北方騎馬民族である蛮夷の履き物で組(趙)国武寧王(武霊王)が蛮夷と争って勝とうとすれば騎馬(騎馬)に便利な蛮夷服を着なければ中ドエンダしてホルテバジといっしょに中国で取り入れた履き物だ.
「三国史記」に見れば ‘ザフィ化(紫皮靴)’ ‘呉避禍(烏皮靴)’ ‘ゾックピファ(赤皮靴)’ そして足袋目が走った ‘マルファ(襪靴)’ などが出るのに身分や階級によって紫, 黒い色, 赤色で差別してはいたようだ. また花代(靴帯)だと言って履き物飾りでも身分や階級を細分して現わしたがユックドプム(六頭品) 以上の宮人は真鍮で履き物帯をかけて烏頭品(五頭品)はあかがねで射頭品と平民は衰老履き物帯をかけるようにした.
三国時代平民たちがはいた南方型これ(履)の名称は多様でこれ(履)を除いても答(踏), ヒェ(鞋), 雨(扉)と言うものが出るのにたぶん少しずつ構造が変わったことから付けられた早さであるものようだ. 履き物を意味する履き物が 洗から始まったのは知られた事実だ. 三国時代のこの履き物も黄色い皮で作ったファングヒョックリ(黄革履), 黒い皮で作ったオヒョックリ(烏革履)があってまた足指通す紐が黄色い皮なのか黒いがズックイニャで身分の貴賎を割ったのだ.
履き物で身分を代弁させたことは朝鮮朝でも違わなかった.
朝服に火(靴)がスーツのようにけだもの皮を押して作った半長靴が宮人の履き物であり, 皮履は両班, ベシンは衆人, 草履は常民というのが常識だったがそのわくが守られなかった.
お金多い常民たちは南山下ガッバチに追加金 支拂 皮履を求めるとか六矣廛の恵展(鞋廛)と内通 両班たちはく皮履を隠密に手に入れてはいたし両班たちはここに反発, そうではないようにガッバチと恵展にあらゆる圧力をかけたりした.

 

짚신

 

 

미투리(麻鞋)

짚신보다 고급품이나 피혁제 ·포백제(布帛製) 신이 출현함에 따라 일반적으로는 서민층 남녀가 사용하였고, 섬세한 제품만을 사대부 계층에서 편복에 사용하였다.

草履よりも高級品やピヒョクジェ·ポベクジェ(布帛制)神の出現に伴い、一般的には庶民層の男女が使用し、繊細な製品のみを士大夫層でピョンボクエを使用している。

 

갖신

갖신은 신발의 재료에 따라 붙여진 이름으로 가죽으로 만든 신의 통칭이다. 신분에 따라 쓰이는 재료로 귀천을 구분하였다. 천한 사람은 소가죽신을 신고 귀한 사람은 사슴가죽신을 신었다고 한다. 또한 조선시대에 갖신이 이전(履廛), 화전(靴廛), 종루(鐘樓)나 소가죽의 창을 파는 이저전(履低廛)을 통하여 일반에 널리 유통되면서 가죽이 품귀현상을 빚자 일반인의 갖신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착용되었던 갖신에는 기름을 들이지 않고 마른 땅에서 신는 ‘마른신’과 가죽에 기름을 먹여 만든 ‘진신’이 있다. 진신은 주로 비가 올 때 사용되었으며 유혜(油鞋)라고도 하고 바닥에 징이 박혀 있어 징신이라고도 한다. 마른 신은 태사혜, 당혜, 운혜, 온혜 등이 있는데 그 무늬에 따라 이름이 지어졌다. 물론 이러한 신발은 겉을 가죽이 아닌 헝겊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가죽신의 주된 재료는 쇠가죽, 말가죽, 사슴가죽, 당나귀가죽 등의 가죽과 부속으로 삼베, 헝겊, 밀을 먹인 면사와 명주실, 징 등을 사용한다.
  가죽제의 단화형태인 혜(鞋)와 함께 발목이 높은 신발인 화(靴)가 있다. 화(靴)는 주로 의례적인 차림에 사용되었으며 후대에 오면 화(靴)보다 혜(鞋)를 일반적으로 신게 되었다. 혜(鞋)는 앞코가 둥글고 대부분 가선이 되어있으며 오늘날의 고무신과 유사한 형태이다. 이 갖신은 바닥을 고무로 대고 뒤축에 낮은 굽을 덧대었다.

ガッシン
ガッシンは履き物の材料によって付けられた名前で皮で作った履き物の通り名だ. 身分によって使われる材料で貴賎を区分した. 賎人は小皮履をはいて貴人は鹿皮履をはいたと言う. また朝鮮時代にガッシンが以前(履廛), 火田(靴廛), 鐘突き堂(鐘樓)や蘇我おかゆの窓を売るイゾゾン(履低廛)を通じて一般に広く流通しながら皮が品切現象をもたらすと一般人のガッシングムジリョングが下ろされたりした.
  朝鮮時代着用されたガッシンには油を入れないで乾いた地ではく ‘マルンシン’と皮に油を食べさせて作った ‘ジンシン’がある. ジンシンは主に雨が降る時使われたしユヒェ(油鞋)とも言って底にどらがめりこんでいてジングシンとも言う. マルンシンは太史汪, 唐汪, 雲彗, オンヒェなどがあるのにその柄によって名前が建てられた. もちろんこのような履き物は表を皮ではない布切れで作ったりした. 皮履の主な材料は牛皮, マルがズック, 鹿皮, ろ馬皮などの皮と部属で麻布, 布切れ, 小麦を食べさせた綿糸と絹糸, どらなどを使う.
  皮制の短靴形態であるヒェ(鞋)とともに足首が高い履き物である火(靴)がある. 火(靴)は主に儀礼的な調えるに使われたし後代に来ると火(靴)よりヒェ(鞋)を一般的にはくようになった. ヒェ(鞋)はアブコが丸くて大部分架線になっているし今日のゴムのはき物と類似の形態だ. このガッシンは底をゴムで大鼓かかとに低い曲がっている重ねて当てた.

 

진신

 진 땅에 신는 가죽신. 진신은 기름에 생가죽을 절여서 만든 신으로 유혜(油鞋), 이혜(泥鞋)라 하기도 했고 징을 박았다 하여 “징신”이라 하기도 했다.
  진신은 삼국시대 이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우중(雨中)에 신는 신발로 일반화되었는데, 1920년경부터는 값싸고 경제적인 고무신의 등장으로 진신이 자취를 감추게 된다.

ジンシン

ぬれる地にはく皮履. ジンシンは油に生皮を漬けて作った神さまでユヒェ(油鞋), イヒェ(泥鞋)だと言ったりしたし裏金が打ちこんだと言って “ジングシン”といったりした.
  ジンシンは三国時代であると言う長年の歴史を持っている. 朝鮮時代には雨中(雨中)にはく履き物に一般化されたが, 1920年頃からは安っぽくて経済的なゴムのはき物の登場でジンシンが影をひそめるようになる.

 

 

수혜(繡鞋)

 수를 놓은 신. 수혜(繡鞋)는 신 전체에 아름다운 무늬로 수놓은 신목이 짧은 신의 하나로 꽃신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 三國史記》 신라 색복조(色服條)에 흥덕왕복식금제(興德王服飾禁制)를 보면, 계수·금라(錦羅)·세라로 만든 신을 금한다는 기록이 있어 수를 놓은 신발이 신라시대에 이미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수혜는 고려시대를 걸쳐 조선시대까지 애용되었으며 사대부가의 젊은 부녀자들이 주로 신었다. 개화기 이후에도 일반 부녀자들이 혼인할 때 시댁에서 반드시 장만해 주었다고 한다. 꽃신은 신행을 가거나, 외출할 때 잠깐씩 신는 신발로 아껴두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여인들의 신발에는 궁혜(宮鞋), 당혜(唐鞋), 운혜(雲鞋, 溫鞋), 징신, 미투리, 짚신, 나막신 등이 있었으며 그 재료로는 가죽, 비단, 저마, 짚, 나무를 사용하여 만들었다. 수혜는 베를 여러 겹 붙인 위에 청홍색의 무늬 있는 비단을 두르고 다시 바탕색과 반대되는 색실로 국화·송죽(松竹)·당초(唐草) 등의 무늬를 주로 수놓았다. 화문(花紋)에는 여러 가지 있었는데 수혜를 만드는 장(匠)에게 부탁하여 자기 취향에 맞는 꽃무늬를 선택할 수 있었다고 한다. 운혜(雲鞋)는 온혜(溫鞋)라고도 하는데 비단과 융가죽을 주재료로 하여 만들었고 바닥은 가죽을 댄 단창이 있으며 그 겉에 융같은 것을 대어 곱게 기워 아름답게 꾸미고 신바닥에 징까지 박았다. 당혜(唐鞋)는 당초문을 수놓은 것이나 무늬있는 비단을 신둘레에 바른 것도 당혜라 불렀다.

 受恵(繍鞋)

 刺繍した神さま. 受恵(繍鞋)は神さま全体に美しい柄で刺繍した神木が短い信義一つでコッシンとも言う.
 《三国史記 三国史記》 新羅色服組(色服條)に興徳王複式禁制(興徳王服飾禁制)を見れば, 係数・グムラ(錦羅)・セーラで作ったはく禁ずるという記録があって刺繍した履き物が新羅時代にもう流行ったことを分かる. 受恵は高麗時代をかけて朝鮮時代まで愛用されたし事大付加の若い婦女子たちが主にはいた. 開花期以後にも一般婦女子たちが婚姻する時婚家で必ず新調してくれたと言う. コッシンは新行を行くとか, 外出する時少少ずつはく履き物で惜しんでおいたのだ.
  朝鮮時代女人たちの履き物にはグングヒェ(宮鞋), 唐汪(唐鞋), 雲彗(雲鞋, 温鞋), ジングシン, 縄靴, 草履, 下駄などがあったしその材料では皮, 絹, 苧麻, わら, 木を使って作った. 受恵は麻布を多くの重付けた上に青紅色の柄ある絹をかけてまた地色と反対される色糸で菊・松竹(松竹)・最初(唐草) などの柄を主に刺繍した. 火門(花紋)にはいろいろあったが受恵を作る章(匠)にお願い自分の趣向に迎える花模様を選択することができたと言う. 雲彗(雲鞋)はオンヒェ(温鞋)とも言うのに絹とユングがズックを主材料にして作ったし底は皮をつけた単窓がありその表にユングガッはのをつけてきれいに繕って美しく構えて新底にどらまで打ちこんだ. 唐汪(唐鞋)は唐草紋を刺繍したことや柄ある絹を新まわりに塗ったことも唐汪だと呼んだ.

 태사혜는 운두(雲頭: 굽)가 낮은 마른신(마른 땅에 신는 신발)의 한 가지로 조선시대 사대부나 양반 계층의 남자들이 편복(便服: 평상복)에 신었으며, 조선 말기에는 왕도 평상복에 신었다.
이 태사혜는 겉을 녹색 화문단(花紋緞: 꽃문양이 있는 비단류)으로 하고, 신코와 뒤축에 자주색 단(緞)으로 태사문(太史紋: 흰 줄무늬)을 장식했다. 신울의 안은 흰 가죽(白皮)이고 신바닥은 가죽·코르크·가죽 순서의 3중으로 했으며, 신의 하단부분은 밀랍을 칠한 흰 실로 꿰매어 견고함과 미적 효과를 겸하고 있다. 신테 둘레에는 흰 가죽을 대고, 그 바로 밑에 자주색 단을 둘러 튼튼하면서도 아름답게 꾸몄다.


흑혜(黑鞋)

 

운혜(雲鞋)

목화 木靴
이 유물은 겉을 흑단(黑緞), 안을 백색 전(氈: 모직)으로 만들었으며 목 부분에는 폭 1㎝의 남색 견(絹)으로 선(線)을 둘렀다. 신코와 신등에는 검은 가죽으로 세 줄의 선을 댔으며, 바닥에 나무를 대고 가죽으로 밑창을 대어 굵은 실로 신바닥 둘레를 꿰맸다. 밑창의 앞부분에 23개, 뒤꿈치 쪽에 14개, 총 37개의 십자문(十字紋)을 정연하게 떠서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했다.

木化 木靴
この遺物は表を黒檀(黒緞), 抱く白色の前(氈: 毛織)で作ったし首部分には幅 1㎝の藍色犬(絹)で線(線)をかけた. 神さまして来て臣等には黒い皮で三竝びの線をつけたし, 底に木をつけて皮で靴のそこをつけて太い実に新底まわりを縫った. 靴のそこの前部に 23個, きびすの方に 14個, 総 37個のシブザムン(十字紋)を整然と浮かんで滑ることを防止した.

청석 靑舃


조선시대 신발

신발은 발목까지 덮는 덮개 있는 북방형(北方型) 화(靴)가 있고 덮개 없는 남방(南方型) 이(履)가 있다.


우리 나라는 겨울에 시베리아의 냉기단이 와서 지배하고 여름에 남태평양의 열기단이 와서 지배하는 남북 완충지대이기에 신발도 남북 완충형으로 발달해왔으나 북방 문화의 영향이 컸던 고대 조선과 삼국시대의 지배계층 신발은 발목까지 덮는 반장화인 화(靴)가 주류였다.

화(靴)는 본래 북방 기마민족인 오랑캐의 신발로 조(趙)나라 무령왕(武靈王)이 오랑캐와 싸워 이기려면 기마(騎馬)에 편리한 오랑캐 복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하여 홀태바지와 더불어 중국에서 도입한 신발이다.


「삼국사기」에 보면 ‘자피화(紫皮靴)’ ‘오피화(烏皮靴)’ ‘적피화(赤皮靴)’ 그리고 버선목이 달린 ‘말화(襪靴)’ 등이 나오는데 신분이나 계급에 따라 자색, 검은색, 붉은색으로 차별해 신었던 것 같다. 또한 화대(靴帶)라 하여 신발 장식으로도 신분이나 계급을 세분해 나타냈는데 육두품(六頭品) 이상의 벼슬아치는 놋쇠로 신발띠를 두르고 오두품(五頭品)은 구리로 사두품과 평민은 쇠로 신발띠를 두르게 했다.


삼국시대 평민들이 신었던 남방형 이(履)의 명칭은 다양하여 이(履)말고도 답(踏), 혜(鞋), 비(扉)란 말이 나오는데 아마도 약간씩 구조가 달라진데서 붙여진 이름인 것 같다. 신발을 뜻하는 신이란 말이 선(洗)에서 비롯됐음은 알려진 사실이다. 삼국시대의 이 신발도 노란 가죽으로 만든 황혁리(黃革履), 검은 가죽으로 만든 오혁리(烏革履)가 있고 또 발가락 꿰는 끈이 노란 가죽이냐 검은 가죽이냐로 신분의 귀천을 갈랐던 것이다.


 
신발로 신분을 대변시킨 데는 조선조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조복에 화(靴)가 정장이듯이 짐승 가죽을 눌러 만든 반장화가 벼슬아치의 신발이요, 가죽신은 양반, 베신은 중인, 짚신은 상민이라는 것이 상식이었으나 그 테두리가 지켜지지 않았다.

 

돈 많은 상민들은 남산 밑 갖바치에게 웃돈 주어 가죽신을 구하거나 육의전의 혜전(鞋廛)과 내통 양반들 신는 가죽신을 은밀히 구해 신었으며 양반들은 이에 반발, 그러하지 못하도록 갖바치와 혜전에 온갖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履き物は足首まで覆う覆いある北方型(北方型) 靴があって覆いない南方(南方型) 履がある.
我が国は冬にシベリアの冷気団が来て支配して夏に南太平洋の熱気団が来て支配する南北緩衝地帯だから履き物も南北緩衝型で発達して来たが北方文化の影響が大きかった古代朝鮮と三国時代の支配階層履き物は足首まで覆う半長靴である火(靴)が主類だった.
火(靴)は本来北方騎馬民族である蛮夷の履き物で組(趙)国武寧王(武霊王)が蛮夷と争って勝とうとすれば騎馬(騎馬)に便利な蛮夷服を着なければ中ドエンダしてホルテバジといっしょに中国で取り入れた履き物だ.
「三国史記」に見れば ‘ザフィ化(紫皮靴)’ ‘呉避禍(烏皮靴)’ ‘ゾックピファ(赤皮靴)’ そして足袋目が走った ‘マルファ(襪靴)’ などが出るのに身分や階級によって紫, 黒い色, 赤色で差別してはいたようだ. また花代(靴帯)だと言って履き物飾りでも身分や階級を細分して現わしたがユックドプム(六頭品) 以上の宮人は真鍮で履き物帯をかけて烏頭品(五頭品)はあかがねで射頭品と平民は衰老履き物帯をかけるようにした.
三国時代平民たちがはいた南方型これ(履)の名称は多様でこれ(履)を除いても答(踏), ヒェ(鞋), 雨(扉)と言うものが出るのにたぶん少しずつ構造が変わったことから付けられた早さであるものようだ. 履き物を意味する履き物が 洗から始まったのは知られた事実だ. 三国時代のこの履き物も黄色い皮で作ったファングヒョックリ(黄革履), 黒い皮で作ったオヒョックリ(烏革履)があってまた足指通す紐が黄色い皮なのか黒いがズックイニャで身分の貴賎を割ったのだ.
履き物で身分を代弁させたことは朝鮮朝でも違わなかった.
朝服に火(靴)がスーツのようにけだもの皮を押して作った半長靴が宮人の履き物であり, 皮履は両班, ベシンは衆人, 草履は常民というのが常識だったがそのわくが守られなかった.
お金多い常民たちは南山下ガッバチに追加金 支拂 皮履を求めるとか六矣廛の恵展(鞋廛)と内通 両班たちはく皮履を隠密に手に入れてはいたし両班たちはここに反発, そうではないようにガッバチと恵展にあらゆる圧力をかけたりした.

 

짚신

 

 

미투리(麻鞋)

짚신보다 고급품이나 피혁제 ·포백제(布帛製) 신이 출현함에 따라 일반적으로는 서민층 남녀가 사용하였고, 섬세한 제품만을 사대부 계층에서 편복에 사용하였다.

草履よりも高級品やピヒョクジェ·ポベクジェ(布帛制)神の出現に伴い、一般的には庶民層の男女が使用し、繊細な製品のみを士大夫層でピョンボクエを使用している。

 

갖신

갖신은 신발의 재료에 따라 붙여진 이름으로 가죽으로 만든 신의 통칭이다. 신분에 따라 쓰이는 재료로 귀천을 구분하였다. 천한 사람은 소가죽신을 신고 귀한 사람은 사슴가죽신을 신었다고 한다. 또한 조선시대에 갖신이 이전(履廛), 화전(靴廛), 종루(鐘樓)나 소가죽의 창을 파는 이저전(履低廛)을 통하여 일반에 널리 유통되면서 가죽이 품귀현상을 빚자 일반인의 갖신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착용되었던 갖신에는 기름을 들이지 않고 마른 땅에서 신는 ‘마른신’과 가죽에 기름을 먹여 만든 ‘진신’이 있다. 진신은 주로 비가 올 때 사용되었으며 유혜(油鞋)라고도 하고 바닥에 징이 박혀 있어 징신이라고도 한다. 마른 신은 태사혜, 당혜, 운혜, 온혜 등이 있는데 그 무늬에 따라 이름이 지어졌다. 물론 이러한 신발은 겉을 가죽이 아닌 헝겊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가죽신의 주된 재료는 쇠가죽, 말가죽, 사슴가죽, 당나귀가죽 등의 가죽과 부속으로 삼베, 헝겊, 밀을 먹인 면사와 명주실, 징 등을 사용한다.
  가죽제의 단화형태인 혜(鞋)와 함께 발목이 높은 신발인 화(靴)가 있다. 화(靴)는 주로 의례적인 차림에 사용되었으며 후대에 오면 화(靴)보다 혜(鞋)를 일반적으로 신게 되었다. 혜(鞋)는 앞코가 둥글고 대부분 가선이 되어있으며 오늘날의 고무신과 유사한 형태이다. 이 갖신은 바닥을 고무로 대고 뒤축에 낮은 굽을 덧대었다.

ガッシン
ガッシンは履き物の材料によって付けられた名前で皮で作った履き物の通り名だ. 身分によって使われる材料で貴賎を区分した. 賎人は小皮履をはいて貴人は鹿皮履をはいたと言う. また朝鮮時代にガッシンが以前(履廛), 火田(靴廛), 鐘突き堂(鐘樓)や蘇我おかゆの窓を売るイゾゾン(履低廛)を通じて一般に広く流通しながら皮が品切現象をもたらすと一般人のガッシングムジリョングが下ろされたりした.
  朝鮮時代着用されたガッシンには油を入れないで乾いた地ではく ‘マルンシン’と皮に油を食べさせて作った ‘ジンシン’がある. ジンシンは主に雨が降る時使われたしユヒェ(油鞋)とも言って底にどらがめりこんでいてジングシンとも言う. マルンシンは太史汪, 唐汪, 雲彗, オンヒェなどがあるのにその柄によって名前が建てられた. もちろんこのような履き物は表を皮ではない布切れで作ったりした. 皮履の主な材料は牛皮, マルがズック, 鹿皮, ろ馬皮などの皮と部属で麻布, 布切れ, 小麦を食べさせた綿糸と絹糸, どらなどを使う.
  皮制の短靴形態であるヒェ(鞋)とともに足首が高い履き物である火(靴)がある. 火(靴)は主に儀礼的な調えるに使われたし後代に来ると火(靴)よりヒェ(鞋)を一般的にはくようになった. ヒェ(鞋)はアブコが丸くて大部分架線になっているし今日のゴムのはき物と類似の形態だ. このガッシンは底をゴムで大鼓かかとに低い曲がっている重ねて当てた.

 

진신

 진 땅에 신는 가죽신. 진신은 기름에 생가죽을 절여서 만든 신으로 유혜(油鞋), 이혜(泥鞋)라 하기도 했고 징을 박았다 하여 "징신"이라 하기도 했다.
  진신은 삼국시대 이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우중(雨中)에 신는 신발로 일반화되었는데, 1920년경부터는 값싸고 경제적인 고무신의 등장으로 진신이 자취를 감추게 된다.

ジンシン

ぬれる地にはく皮履. ジンシンは油に生皮を漬けて作った神さまでユヒェ(油鞋), イヒェ(泥鞋)だと言ったりしたし裏金が打ちこんだと言って "ジングシン"といったりした.
  ジンシンは三国時代であると言う長年の歴史を持っている. 朝鮮時代には雨中(雨中)にはく履き物に一般化されたが, 1920年頃からは安っぽくて経済的なゴムのはき物の登場でジンシンが影をひそめるようになる.

 

 

수혜(繡鞋)

 수를 놓은 신. 수혜(繡鞋)는 신 전체에 아름다운 무늬로 수놓은 신목이 짧은 신의 하나로 꽃신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 三國史記》 신라 색복조(色服條)에 흥덕왕복식금제(興德王服飾禁制)를 보면, 계수·금라(錦羅)·세라로 만든 신을 금한다는 기록이 있어 수를 놓은 신발이 신라시대에 이미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수혜는 고려시대를 걸쳐 조선시대까지 애용되었으며 사대부가의 젊은 부녀자들이 주로 신었다. 개화기 이후에도 일반 부녀자들이 혼인할 때 시댁에서 반드시 장만해 주었다고 한다. 꽃신은 신행을 가거나, 외출할 때 잠깐씩 신는 신발로 아껴두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여인들의 신발에는 궁혜(宮鞋), 당혜(唐鞋), 운혜(雲鞋, 溫鞋), 징신, 미투리, 짚신, 나막신 등이 있었으며 그 재료로는 가죽, 비단, 저마, 짚, 나무를 사용하여 만들었다. 수혜는 베를 여러 겹 붙인 위에 청홍색의 무늬 있는 비단을 두르고 다시 바탕색과 반대되는 색실로 국화·송죽(松竹)·당초(唐草) 등의 무늬를 주로 수놓았다. 화문(花紋)에는 여러 가지 있었는데 수혜를 만드는 장(匠)에게 부탁하여 자기 취향에 맞는 꽃무늬를 선택할 수 있었다고 한다. 운혜(雲鞋)는 온혜(溫鞋)라고도 하는데 비단과 융가죽을 주재료로 하여 만들었고 바닥은 가죽을 댄 단창이 있으며 그 겉에 융같은 것을 대어 곱게 기워 아름답게 꾸미고 신바닥에 징까지 박았다. 당혜(唐鞋)는 당초문을 수놓은 것이나 무늬있는 비단을 신둘레에 바른 것도 당혜라 불렀다.

 受恵(繍鞋)

 刺繍した神さま. 受恵(繍鞋)は神さま全体に美しい柄で刺繍した神木が短い信義一つでコッシンとも言う.
 《三国史記 三国史記》 新羅色服組(色服條)に興徳王複式禁制(興徳王服飾禁制)を見れば, 係数・グムラ(錦羅)・セーラで作ったはく禁ずるという記録があって刺繍した履き物が新羅時代にもう流行ったことを分かる. 受恵は高麗時代をかけて朝鮮時代まで愛用されたし事大付加の若い婦女子たちが主にはいた. 開花期以後にも一般婦女子たちが婚姻する時婚家で必ず新調してくれたと言う. コッシンは新行を行くとか, 外出する時少少ずつはく履き物で惜しんでおいたのだ.
  朝鮮時代女人たちの履き物にはグングヒェ(宮鞋), 唐汪(唐鞋), 雲彗(雲鞋, 温鞋), ジングシン, 縄靴, 草履, 下駄などがあったしその材料では皮, 絹, 苧麻, わら, 木を使って作った. 受恵は麻布を多くの重付けた上に青紅色の柄ある絹をかけてまた地色と反対される色糸で菊・松竹(松竹)・最初(唐草) などの柄を主に刺繍した. 火門(花紋)にはいろいろあったが受恵を作る章(匠)にお願い自分の趣向に迎える花模様を選択することができたと言う. 雲彗(雲鞋)はオンヒェ(温鞋)とも言うのに絹とユングがズックを主材料にして作ったし底は皮をつけた単窓がありその表にユングガッはのをつけてきれいに繕って美しく構えて新底にどらまで打ちこんだ. 唐汪(唐鞋)は唐草紋を刺繍したことや柄ある絹を新まわりに塗ったことも唐汪だと呼んだ.

 태사혜는 운두(雲頭: 굽)가 낮은 마른신(마른 땅에 신는 신발)의 한 가지로 조선시대 사대부나 양반 계층의 남자들이 편복(便服: 평상복)에 신었으며, 조선 말기에는 왕도 평상복에 신었다.
이 태사혜는 겉을 녹색 화문단(花紋緞: 꽃문양이 있는 비단류)으로 하고, 신코와 뒤축에 자주색 단(緞)으로 태사문(太史紋: 흰 줄무늬)을 장식했다. 신울의 안은 흰 가죽(白皮)이고 신바닥은 가죽·코르크·가죽 순서의 3중으로 했으며, 신의 하단부분은 밀랍을 칠한 흰 실로 꿰매어 견고함과 미적 효과를 겸하고 있다. 신테 둘레에는 흰 가죽을 대고, 그 바로 밑에 자주색 단을 둘러 튼튼하면서도 아름답게 꾸몄다.


흑혜(黑鞋)

 

운혜(雲鞋)

목화 木靴
이 유물은 겉을 흑단(黑緞), 안을 백색 전(氈: 모직)으로 만들었으며 목 부분에는 폭 1㎝의 남색 견(絹)으로 선(線)을 둘렀다. 신코와 신등에는 검은 가죽으로 세 줄의 선을 댔으며, 바닥에 나무를 대고 가죽으로 밑창을 대어 굵은 실로 신바닥 둘레를 꿰맸다. 밑창의 앞부분에 23개, 뒤꿈치 쪽에 14개, 총 37개의 십자문(十字紋)을 정연하게 떠서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했다.

木化 木靴
この遺物は表を黒檀(黒緞), 抱く白色の前(氈: 毛織)で作ったし首部分には幅 1㎝の藍色犬(絹)で線(線)をかけた. 神さまして来て臣等には黒い皮で三竝びの線をつけたし, 底に木をつけて皮で靴のそこをつけて太い実に新底まわりを縫った. 靴のそこの前部に 23個, きびすの方に 14個, 総 37個のシブザムン(十字紋)を整然と浮かんで滑ることを防止した.

청석 靑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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