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良民射殺と村燃やした残虐上現われて
(ソウル=連合ニュース) ギムユング記者 = 韓国土地工事土地博物館が 11日公開した日本軍の抗日義兵鎭圧記録である陣中だろうか(陣中日誌.14本)には 1907年 7月から 1909年 6月まで日本軍歩兵 14連帯の 2年間活動が分断慰労毎日几帳面に記録された.

日本軍は各地域の物資と交通, 土着民の情態を詳しく整理したしこれを鎭圧活動に積極的に活用した. 良民を虐殺して村と査察を燃やそうと思うなど彼らの残虐上もこの記録を通じて赤裸裸に見ら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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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気温から戦闘状況まで..分断慰労几帳面に記録
¥”陣中だろうか¥”は 14連帯が出国してから始めて韓半島の各地域に駐屯して義兵鎭圧に熱をあげる場面を目の前に見えるように細密に記録した.

1907年 7月23日午後9時 ¥”韓国派遣に関する準備事項¥”と言う(のは)名前で上級部隊である 12旅団長の指示事項総 16項目を並べながら記録は始まる.

将校及び相当官 66人, 下賜 79人, 准士官 12人, 下等病 136人, イルイドングビョング 974人, 計算病 3人, 衛生部下賜 3人, マゾング(馬丁) 5人, 看護数 12人, 小銃修理病 1人など皆 1千291人が派遣された.

これらを乗せた船舶は 7月25日日本拇指港(門司港)を出発して明くる日釜山港に上陸しながら 2年間の義兵鎭圧活動を始める.

上陸翌日連帯兵力をいくつか鎭圧どおり編成して全国各地で派遣しながら ¥”各守備隊は守備する地域に到着した後速く物資, 交通, 衛生, 土着民の情態を詳しく記録して上申¥”するように命令を下す. このような記録を総合して陣中日誌が作われたことを分かる.

各部隊はソウル, 仁川, 光州, 木浦, 公州, 釜山, 蔚山など韓半島中南部地域で派遣して義兵を押えるようにしたし連帯本部は大田に駐屯してから以後聞慶, 大邱等地で移し回りながら鎭圧作戦をずっと指揮した.

毎日の日付と曜日, 気温を始まりに各種軍需物資, 部隊移動, 給養(給養.兵士の食事), 武器, 弾薬, 衛生, 軍旗違反などに対する事項を含めて戦闘状況及び適正(賊情.義兵活動状況)を命令, 報告, 会報, 電報, 電話, 密報(密報), 通牒(通牒), 戦闘補で, 鎭圧補で, 相補(詳報) などの名前で連帯本部に分単位で報告している.

軍令違反時審判規定と内訓から戦闘及び鎭圧結果が優秀な小隊や重大を褒賞する内容, 日本軍の戦死者見てからも細密に記録した. 病死した軍人の声明(名前)と階級はもちろん大腿部貫通傷などどんな負傷のためサマングヘッヌンジまでも出る.

◇鎭圧記録に現われた戦闘
¥”午後 1時 (聞慶) 大勝社東 1千mにある 1030高地に至って義兵一無理が適性で侵入することを目撃して適性西の方に出て該当の市場近所で食事をした約 100人の義兵を攻撃したら少ない散らばったしこれによって東山すそ等地にいる敵に対する銃剣突撃をして該当の地域を占領する. 少ない谷間を経由して 681高地から道谷方向で, 一部は夕哭方向にオジロイ後退して私たち兵士らが彼らを夕哭で追撃する. この戦闘で時の死亡者の中で発見されたこれは 15人で負傷者は不確かで捕獲品は火繩銃 4錠, 旗 1個, 弾丸少しだ. 私たち側の損害は消費弾薬 382発. 時の首魁はイ・ガンニュンなのに, 死亡者の中には彼を尋ね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し適性は全部義兵が占領している¥”

このように 1907年 9月15日聞慶近所の戦闘報告には建国勳章大韓民国場を受けた義兵長イ・ガンニュン(李康〓.1858-1908)の名前が見える.

鎭圧記録は時の数と戦闘状況, 両側の死傷者, 消費した弾薬と捕獲物品などを詳しく少なかった.

¥”(何某大尉が導く重大の) 戦闘補で¥” あるいは ¥”(どの地域の) 討伐補で¥”という明らかな見出しに報告された記録だけも 200余件に至って, その外にも ¥”電報(電報)¥”, ¥”報告¥”という題目で各重大や小隊の状況を報告する文書にも義兵との戦闘及び鎭圧内容の含まれた場合が多くてこれよりもっと多い戦闘があったことに推定される.

◇良民銃殺して村燃やして
日帝は義兵だけではなく義兵に協調した良民たちも銃殺する残酷性を現わした.
¥”聞慶郡新東面 27歳ギムソングダル.
上の人は我軍の状況を偵察して暴徒に便益を与えて暴徒の手足として居留民に損害を被らせたし逮捕新聞の中に逃亡を企てて午前 11時に射殺する¥”

1907年 9月 17日の記録だ.
1907年 9月 15日聞慶戦闘では ¥”義兵が使った火薬弾丸を保存して今後戦闘後該当の里を焼却するように¥”する予定と言う(のは)報告があって村を丸ごと燃やす蛮行まで躊躇しなかったということが分かる.

聞慶の大勝社(大乗寺)という査察も灰燼に変わる所だったという記録が出る. 14連隊長は 1907年 9月 17日 ¥”赤道たちの巣窟なので適切に焼却しなければならないが韓国の有名な寺だと言ったら特別に尊属させてくれる¥”は記録を残した.

補給品管理においても ¥”給養品の中で副食物の 2/3は倉庫品で 1/3は各部隊がある地方で調逹¥”するという指令があって鎭圧台が各地域の良民たちを収奪したのが確認される.
 
 

일본의 적나라한 침략기 "의병진압기록"


양민사살과 마을 불태운 잔학상 드러나
(서울=연합뉴스) 김윤구 기자 =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이 11일 공개한 일본군의 항일의병 진압기록인 진중일지(陣中日誌.14책)에는 1907년 7월부터 1909년 6월까지 일본군 보병 14연대의 2년간 활동이 분단위로 매일 꼼꼼하게 기록됐다.

일본군은 각 지역의 물자와 교통, 토착민의 정태를 상세히 정리했으며 이를 진압활동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양민을 학살하고 마을과 사찰을 불태우려 하는 등 그들의 잔학상도 이 기록을 통해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기온부터 전투상황까지..분단위로 꼼꼼하게 기록
"진중일지"는 14연대가 출국하면서부터 시작해 한반도의 각 지역에 주둔해 의병 진압에 열을 올리는 장면을 눈앞에 보이듯 세밀하게 기록했다.

1907년 7월23일 오후9시 "한국 파견에 관한 준비사항"이란 이름으로 상급부대인 12여단장의 지시사항 총 16항목을 나열하면서 기록은 시작된다.

장교 및 상당관 66명, 하사 79명, 준사관 12명, 하등병 136명, 일이등병 974명, 계산병 3명, 위생부 하사 3명, 마정(馬丁) 5명, 간호수 12명, 소총수리병 1명 등 모두 1천291명이 파견됐다.

이들을 태운 선박은 7월25일 일본 모지항(門司港)을 출발해 이튿날 부산항에 상륙하면서 2년간의 의병진압 활동을 시작한다.

상륙 다음날 연대병력을 여러 개 진압대로 편성해 전국 각지로 파견하면서 "각 수비대는 수비하는 지역에 도착한 뒤 속히 물자, 교통, 위생, 토착민의 정태를 상세히 기록해 상신"토록 명령을 내린다. 이러한 기록을 종합해 진중일지가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각 부대는 서울, 인천, 광주, 목포, 공주, 부산, 울산 등 한반도 중남부 지역으로 파견해 의병을 진압토록 했고 연대본부는 대전에 주둔했다가 이후 문경, 대구 등지로 옮겨다니면서 진압작전을 계속 지휘했다.

매일의 날짜와 요일, 기온을 시작으로 각종 군수물자, 부대이동, 급양(給養.병사의 식사), 무기, 탄약, 위생, 군기위반 등에 대한 사항을 비롯해 전투상황 및 적정(賊情.의병활동 상황)을 명령, 보고, 회보, 전보, 전화, 밀보(密報), 통첩(通牒), 전투보고, 진압보고, 상보(詳報) 등의 이름으로 연대본부에 분 단위로 보고하고 있다.

군령위반 시 심판규정과 내훈에서부터 전투 및 진압결과가 우수한 소대나 중대를 포상하는 내용, 일본군의 전사자 보고도 세밀하게 기록했다. 병사한 군인의 성명과 계급은 물론 대퇴부 관통상 등 어떠한 부상 때문에 사망했는지까지도 나온다.

◇진압기록에 나타난 전투
"오후 1시 (문경) 대승사 동쪽 1천m에 있는 1030고지에 이르러 의병 한 무리가 적성으로 침입하는 것을 목격하고 적성 서쪽으로 나와 해당 시장 부근에서 식사를 하던 약 100명의 의병을 공격하니 적은 흩어졌고 이에 따라 동쪽 산기슭 등지에 있는 적에 대한 총검 돌격을 해 해당 지역을 점령함. 적은 골짜기를 경유해 681고지로부터 도곡 방향으로, 일부는 석곡 방향으로 어지러이 후퇴해 우리 병사들이 그들을 석곡으로 추격함. 이 전투에서 적의 사망자 중 발견된 이는 15명이고 부상자는 불명확하고 노획품은 화승총 4정, 깃발 1개, 탄환 약간임. 우리 측의 손해는 소비 탄약 382발. 적의 수괴는 이강년인데, 사망자 중에는 그를 찾지 못했고 적성은 전부 의병이 점령하고 있음"

이와 같이 1907년 9월15일 문경 부근의 전투보고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은 의병장 이강년(李康秊.1858-1908)의 이름이 보인다.

진압기록은 적의 수와 전투상황, 양측의 사상자, 소비한 탄약과 노획 물품 등을 자세하게 적었다.

"(아무개 대위가 이끄는 중대의) 전투보고" 혹은 "(어느 지역의) 토벌보고"라는 뚜렷한 표제로 보고된 기록만도 200여 건에 이르며, 그 외에도 "전보(電報)", "보고"라는 제목으로 각 중대나 소대의 상황을 보고하는 문서에도 의병과의 전투 및 진압내용이 포함된 경우가 많아 이보다 훨씬 많은 전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양민 총살하고 마을 불태워
일제는 의병뿐만 아니라 의병에 협조한 양민들도 총살하는 잔혹성을 드러냈다.
"문경군 신동면 27세 김성달.
위 사람은 아군의 상황을 정찰해 폭도에게 편익을 주고 폭도의 수족으로서 거류민에게 손해를 입혔고 체포 신문 중에 도망을 기도해 오전 11시에 사살함"

1907년 9월 17일의 기록이다.
1907년 9월 15일 문경 전투에서는 "의병이 사용한 화약 탄환을 저장해 차후 전투 후 해당 촌락을 소각토록"할 예정이란 보고가 있어 마을을 통째로 불태우는 만행까지 서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경의 대승사(大乘寺)라는 사찰도 잿더미로 변할 뻔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14연대장은 1907년 9월 17일 "적도들의 소굴이어서 마땅히 소각해야 하지만 한국의 명사찰이라고 하니 특별히 존속시켜 준다"는 기록을 남겼다.

보급품 관리에 있어서도 "급양품 중 부식물의 2/3는 창고품으로 1/3은 각 부대가 있는 지방에서 조달"한다는 지령이 있어 진압대가 각 지역의 양민들을 수탈한 것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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