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조선통신사 윤지완 등이 본 일본

 

숙종 013 08/11/07 (경술) 004/
"통신사 윤지완 등이 倭國에서 돌아와 견문과 약조를 밝힌 일들을 치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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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通信使) 윤지완(尹趾完) 등이 일본(倭國)에서 돌아와 동래(東萊)에 도착하여, 먼저 연로(沿路)의 견문(見聞)과 약조(約條)를 거듭 밝힌 일들을 치계(馳啓)하기를,

“치제(致祭)하지 못하게 한 한 가지 일은, 관백(關白)이 말하기를, ‘인국(隣國)의 사신이 우리의 능침에 치제하는 것은 사리에 부당하니, 치제하지 말라는 뜻을 조선에 통보하도록 하라.’고 하니, 집정(執政)의 무리들이 간(諫)하기를, ‘인국에서 치제하여 주는 것은 우리에게 영광된 일이고, 여러 대에 걸쳐서 지켜 온 예(例)이니, 없앨 수 없습니다.’ 하자, 관백이, ‘이미 통보하고서 바로 다시 바꾸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고서, 허락하지 않은 것이라 합니다.


관백이 위(位)를 이어받게 된 곡절에 대하여 물었더니, 답하기를, ‘전번의 관백이 후사(後嗣)를 정하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집정(執政)들이 이를 숨기고 관백의 죽음을 발표하지 않고, 처음에는 관백의 조카를 세우려고 하였으나, 관백의 여러 숙부(叔父)와 아우들이 일을 꾸미지나 아니할까 두려워하여, 다시 황제의 세째 아들로 세우려고 하였습니다. 관백에게는 딸 하나가 있는데, 권세가 매우 당당하고 또 그의 무리들도 많습니다. 그 딸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나는 딸자식이기 때문에 위(位)를 이을 수는 없겠지만, 마땅히 내스스로 가려서 세울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지금의 관백을 끌여들여 세우고, 자기의 자식을 약군(若君)으로 삼았습니다. 관백이 이미 양자를 세우고, 집정들의 죄를 논하여 파면시켜 백성으로 삼으니, 그 사람들은 스스로 목을 찔러 죽거나, 대부분 스스로 죽음을 택하였으므로, 그들의 아들에게 승습하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새로 받은 인(印)과 책봉문(冊封文)을 달라고 하여 보았더니, 지금의 왜제(倭帝)는 원씨(源氏)의 족계(族系)이고, 이른바 왜제의 세째 아들이라고 한 사람은 바로 가광(家光)의 외손자이며, 지금의 약군(若君)은 또한 관백의 외손자였습니다. 그러나 외손으로 가통(家統)을 잇는 것을 그 나라 풍속에서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또 의심스러운 것이 있는 것은, 여러 원씨의 아래에 그들의 아들과 딸들이 죽 적혀 있었고, 딸들에게는 남편의 이름이 함께 적혀 있었는데, 유독 관백의 딸에게는 남편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자기의 자식으로 약군을 삼았기 때문에 남편의 이름을 숨기고 쓰지 않은 것이거나, 그 나라 풍속이 동성(同姓)의 아주 가까운 친족 사이에도 자기들끼리 서로 혼인하므로, 혹시 새로 된 관백이 본시 조카딸과 정을 통하고 지낸 사이로, 그의 아들이란 사람은 관백에게서 태어난 것인지, 그 사이의 일들이란 참으로 억측해 내기 어렵습니다.


신 등이 강호(江戶)에 머물고 있을 때, 주방(?房)에서 심부름하는 미천한 왜인(倭人)이 있어서, 통사(通事)를 시켜 은밀히 ‘관백이 새로 들어선 데에 대한 여망(輿望)이 어떤가?’ 묻게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관백은 본시 주색(酒色)에 빠져 있던 사람으로 오랫동안 창가(娼家)에 있었는데, 관백이 되고서도 옛날의 행실을 고치지 못하여, 금년 3월에 사냥하러 나갔을 때 사녀(士女)들이 구경을 하였었는데, 어떤 한 사족(士族)의 부인이 금빛으로 장식한 병풍을 둘러치고 붉은 장막을 드리우고서, 침향(沈香)을 피우고 앉아 있었소. 관백이 그의 자색(姿色)이 아름다움을 보고서는, 사치를 금한다는 핑계를 대어 그의 남편을 귀양보내고, 그 부인을 궁중에 들여 앉히니, 백성들이 복종하지 않고 있소.’ 하였습니다.


지난해 이전에는 흉년이 거의 10년에 걸쳐 들어, 금년 봄과 여름에는 굶어죽은 시체가 길바닥에 널려 있었는데, 이런 판국에 수신사(修信使)를 청하여 오게 했으므로, 백성들이 모두 나라에 원망을 품고 있고, 또 듣자니, 돌림병이 전국을 휩쓸어 죽은 자가 60여만 명에 이르렀다는데, 일기도(一?島)와 대마도(對馬島) 두 곳만이 면하였다고 합니다.

 

지난날에 맺은 조약에 대해서는, 신들이 의진(義眞)을 만났더니, 그 사람됨이 자기의 주장(主張)을 내세우지 못하고, 봉행(奉行)4058) 평성창(平成昌)이 권세를 부리고 있었는데, 그사람 또한 어질고 착하지 못하여, 구설(口舌)로 서로 다투다가는 마침내 성과가 없을 것 같아서, 마침 박재흥(朴再興)이 친하게 지내는 倭 人 등성시(藤成時)라는 자가 있어 평성창과 친절하게 지내는 사이였으므로, 박재흥을 시켜 꾀를 부려 등성시에게 거짓으로 말하게 하기를, ‘왜관(倭館)에서 법금(法禁)을 범하고 소란을 피운 것을 전후(前後)로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마는, 지난번의 두 가지 사건만은 대단히 놀라왔던 일이므로, 사신이 강호(江戶)에 이르게 되면 이 일을 말하려 한다.’ 하였는데, 이것은 지난날 이정옥(李廷沃)에게 칼부림을 하고, 평성태(平成太)가 동래(東萊)에 1년 동안 머물렀던 일을 가리켜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랬더니 등성시는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그렇게 되면 도주(島主)는 아마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힘을 다하여 잘 도모해 주기 바란다.’고 하더니, 그 뒤부터 여러 倭 人들이 애걸(哀乞)하기를 마지않았습니다. 강호(江戶)에 이를 즈음에 신들이 비로소 박재흥을 시켜 참작해서 중지할 뜻을 말하게 하고, 또 이후부터 엄중하게 제례(制禮)를 세운다는 등의 일을 말하였더니, 순종하는 뜻이 역력히 드러났습니다.


신들이 마도(馬島)에 돌아와서 봉행(奉行)의 여러 倭人들을 불러서 말하기를, ‘별차(別差)4060) 를 내보내는 것은 본래 약조(約條)가 아니었는데, 이미 나온 다음에야 접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서로 도탑게 지내는 도리가 아니므로, 접대하도록 허락하였던 것인데, 그것이 그만 그릇된 규정[謬規]으로 되어버려서, 이 뒤로는 별차를 내보내지 말도록 하라. 그리고 부산관(釜山館)의 倭 人들이 제한한 지역을 마구 나와 소란을 피우는 것이 놀랄 만한 사건이 있는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제례(制禮)를 엄히 세워 만일 금법(禁法)을 범하는 자가 있게 되면, 동래부에서 직접 도주(島主)에게 통보하여 엄한 형벌에 처하도록 하여, 이 폐단을 막아야 하겠다.’고 하고서, 이 두 가지 일들을 한 장의 문서로 만들어 당상(堂上)과 역관(譯官)의 이름을 나열해 써서 봉행(奉行)의 무리에게 주고, 그들의 답서(答書)를 얻어 증빙할 수 있는 문서로 삼으려 하였고, 도주(島主)와도 서로 만나서 그 대강의 뜻을 말하여, 봉행의 무리와 타당한 방도를 상의하게 하였는데, 그 뒤 보내 준 답서란 것이 말이 몹시 간교하므로 그것을 탓하여 받지 않았더니, 평성창이 말하기를, ‘이것은 답서를 쓴 사람이 잘못 쓴 것이고, 우리들의 본의가 아니다.’고 하면서, 초를 잡아 보여 줄 것을 청하므로 대강만을 적어서 주었더니, 그 답서란 것이 우리가 써준 그 글을 그대로 다듬어서 보낸 것이었습니다. 청컨대 묘당(廟堂)에서 동래부에 분부하여 이에 근거를 두어 거행하도록 하소서. 세건의 일 중에서, 겸대(兼帶)4061) 의 한 조항은, 본시 긴요할 일도 아니고, 눈치를 살펴가며 감(減)하여 주기를 말하기가 구차스러운 듯하여서, 꺼내지도 않았습니다.” 하였다.


이때 좌상(左相) 민정중(閔鼎重)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약조(約條)가 이미 명백하게 거듭 다져졌으니, 조목들을 열거해 새긴 빗돌을 왜관(倭館) 안에 세워, 오가는 倭 人들이 금제(禁制)를 알고 두려워 위축(萎縮)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에 동래 부사 남익훈(南益熏)이 의논하여 정한 약조 네 가지를 계문(啓聞)하였는데,


“첫째, 금표(禁標)를 세워 경계(境界)를 정해 놓은 것 외에,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함부로 나와 월경(越境)하는 자는 일죄(一罪) 로 논한다.

둘째, 노부세(路浮稅)로 발각되어 붙잡힌 뒤에는, 준 자와 받은 자에게 똑같이 일죄(一罪)를 시행한다.

세째, 개시(開市) 때 각방(各房)에 잠입(潛入)하여 은밀히 사고 파는 자에게는 피차에 각기 일죄(一罪)를 시행한다.

네째, 닷새마다 잡물(雜物)을 들여보내 줄 때에, 색리(色吏)·고자(庫子)·소통사(小通事) 등을, 倭人은 절대로 끌고 다니며 구타하지 말 것이다.”

등이었다.

 

왜사(倭使)가 왜관(倭館)에 머무르고 있을 때 그것을 새긴 빗돌을 세우려고 하였는데, 왜사 평진행(平眞幸)이 일죄는 너무 중하여 그가 마음대로 단안을 내릴 수 없다며, 돌아가 도주(島主)에게 품하여 제례(制禮)를 써 보내겠다고 말하므로, 여러 차례 책망하며 타일렀으나 듣지 아니하고, 마침내 약속을 어기고 돌아가 버렸다. 倭人들의 교활하고 간사하며 변화가 종잡을 수 없음이 이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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