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1. 百済トンソン王—->  日本書紀に 安康天皇, 武列天皇の事件で記録

 

[三国史記] 百済本記 東城王

東城王は 諱が 牟大だから 文周王の弟昆支の息子だった.

[日本書紀]雄略天皇 23年

(天皇は )昆支王の 5人の息子中, 第 2 末多王(=東城王)が......

[日本書紀]安康天皇

穴穂天皇(=安康天皇)は 允恭天皇の 第 2子だ.

 

[日本書紀]武列天皇 4年

理解  百済の 末多王(=東城王) 無道して民に

暴虐な仕業をした.

[日本書紀]無熱天皇 8年

(武列天皇が) 女を裸にして板の上に座らして, 言葉を

ひいて前に行って交接をさせた.

 

[三国史記]百済本記 東城王

 

初めて王(=東城王)が 白加として 加林城に 鎭戍するようにしたバー 加は行こうと

しないで 病を理由で辞退したが王が承諾しなかった.

このために 加は王を恨む中これにのぼって王を 刀で

突いたのだ.

[日本書紀]雄略天皇 3年

安康天皇は皇后の膝を枕にして昼寝をした. それで 眉輪王は

その深み眠ったことを報告 (天皇を) 刀で突いて殺した.

[日本書紀]武列天皇 4年

国人が (東城王)を 除去と, 島王を立てた.

 

[日本書紀] 武列天皇 4年

百済新撰に言った. 武寧王が立った. 諱は 斯麻王だ. おこる 昆支王子の息子

(実は 昆支の 兄 蓋鹵王の息子)だ.

[三国史記]武寧王(=斯麻王)

¥”白加が降伏したら, 王(=斯麻王)が彼をベア 白江に投げた.¥”

 

[解説]斯麻王はすなわち 東城王の弟(妹)だ.

[日本書紀]雄略天皇 3年

(雄略)天皇は聞かないで, 火をつけて家を焼いた. あの時 大臣と 黒彦皇子と

眉輪王このように他死んだ.

[解説]雄略天皇はすなわち 安康天皇の弟(妹)だ.

 

 

2.倭王興はすなわち 百済 東城王

 

[日本書紀] 雄略天皇 5年 秋7月

(461年) 秋7月, 軍君(=昆支)が 京に入って来た. もう 5人の 子があった.

 

[ソングで]列伝 夷蛮 東夷 倭国

¥”(世祖大明六年)済死′世子興遣使貢献。¥”
¥“462年に 倭王 済が死んだ. 世子 興が 使臣を送って 貢物を捧げた. ¥”

 

すなわち 461年に百済 蓋鹵王の 弟(妹) 息子 5人を連れて 倭国の 京に入って来たが,
462年に 世子 興が 宋国に 使臣を送って 貢物を捧げているのだ.

雄略天皇 5年は日本書紀 紀年で 461年や, 武寧王 誌石によればこの時が

462年だ. 当時 倭が 即位年を 元年にしないで, 即位 翌年を 元年で

した可能性が高いので 雄略 5年を 462年で見ても構わないだろう.

それならこの 世子 興は 昆支の息子 5人 の一人ではないか?

昆支が彼の息子の一人を 倭国の 王世子で 冊封したのではないか?

もしそれならその息子は紅の二番目息子すぐ 牟大, すなわち 後日の百済 東城王になるでしょう.

 

[ソングで]列伝 夷蛮 東夷 倭国

¥”順帝昇明二年 興死′弟武立。¥”
478年が死んだ. 弟 武が (王で) 即位した.

確かに 倭王興が 478年に死んだ. ところで 倭王武は 478年に 宋国に 上表文を
あげながら 倭王興の死に対しては一切言及がなくて, 団地 3年前に死んだお父さんと
兄さん(型)の死に対してだけ言及
とある. そしてこの記録は 3ニョンサングをほとんどマチョがで
ある時点に記録されたようだ.

 

[ソングで]列伝 夷蛮 東夷 倭国

奄喪父兄′使垂成之功′不獲一一。
居在諒闇′不動兵甲′是以偃息未捷′至今欲練甲治兵′申父兄之志

¥”急にお父さんと 兄を失って仕事を成そうとする 功が一遍に崩れてしまいました.
今後 臣は 3年喪 にあって 軍士を動かすことができなかったから 
彼らと争って勝つことができなかったです.  今に至ってからこそ 兵器を研いて
軍事を訓練して 父兄の意味を広げようとします.¥”

倭王興の死を一切の言及しない 倭王武, 一体謎に違いない.
それなら 倭王興が死んだ時点(478年)にどんなことが起こったことだろう?

[三国史記] 年表 中

¥”未己 三斤王薨 東城王 牟大 即位元年¥”  
479年 三斤王 死亡, 東城王 牟大 即位 元年

478年に 倭王興が死んだ. ところが その 年に 宋国 天子に 上表文をあげる
倭王武は 倭王興の死に対して一切の言及がない
. ところで驚くべきことにそれから
1年後すなわち
479年に 倭 列島にあると私たちが分かっている 昆支の息子 牟大が
百済王で 登極とある
. (三国史記によれば 478年 11月に 三斤王が 15才の

年に死んだと記録されている.  王が 15歳の年に死んだらこれは 病弱真書

死んだ 可能性が高い. ところで 宋書にはまさに今日に 倭王興が 死んだと

記録されている.  それなら 倭王興 すなわち 後日の 東城王が 三斤王が 死境を

ヘメであるという  うわさを接して 478年頃 百済に渡って 兵権を掌握して

その後 479年に 王が になった可能性が 高い.  だから日本書紀は 479年 4月に

東城王が 即位したと 記録しているし, 三国史記は 479年を 東城王の即位 元年で

記録しているのだ. それでは 今度は  日本書紀の 雄略天皇が死亡した 年を

注目して見よう. 雄略天皇が 死亡した 年は日本書紀によれば 479年だ. ところでこれ 479年が

すぐ 東城王が 百済王で  公式的に即位した時期だ. しかし 東城王が 倭で

百済に渡った時期は 正確に言わば 478年になる. それなら結局 倭王興が

死んだ時期と  東城王が 倭を去って 百済に行った時期, 倭王武 すなわち 斯麻王が 倭王興

 すなわち 東城王の後を引き継いで 王位に 即位一時期が重なるようになるのだ. )

 

 

一体 倭王武 すなわち 後日の 斯麻王は誰から 王位を受け継いだことだろう?
どうして 倭王武 即 後日の 斯麻王は 宋国 天子に送る 上表文に 倭王 興の
死に対してどんな言及をしないことだろう?
倭王興は 宋書に死んだと記録されているが, 事実は死なないのではないか?
倭王興 すなわち 牟大が 倭王武 すなわち 斯麻王に王位を譲って, 百済に渡って
百済王で 登極欠点, 後を引き継いで即位した 斯麻王がその事実を 摘示して報告
することを憚って 倭国 使臣を通じて 倭王興が死んだと 宋国 天子に報告した

のではないか? すぐこれは 兄弟 相続が多い百済の 侯国 倭国の現実を考慮しながら,
中国天子の百済の 侯国 倭国に対する干渉を 最少化するための方策のためである
のではないか?

 

3.日本書紀に 安康天皇の在位期間が 3年に記録されている理由

 

よく日本の歴史学者たちは 安康天皇を 宋書の 倭王興に非情する.

ところで問題になることは 安康天皇が在位期間が 3年の一方に 倭王

 

興の在位期間はおおよそ 15年もなるというのだ.  こんなに 在位期間を

おいてみれば このふたつは全然同じな人物だと思うことができない. 

 

ところで先立って私は日本書紀に出る 雄略天皇が 架空の天皇に

過ぎなくて 倭王武 すなわち後日の百済 斯麻王の歴史的事実を投映して 

日本書紀に 雄略天皇 代の  歴史を記録したということを論証した事がある. 

すなわち 日本書紀の 雄略天皇の 死亡年がすなわち 倭王武が王位に 即位一 年,

すなわち 478年の次 年であり, 雄略天皇の 即位年は 479年から過去で 23年

溯及して 蓋鹵王の 即位年に合わせられているというの, そして 倭王武が  

宋の国 天子に送った 上表文によれば 475年に 倭王武のお父さんと

兄さん(型)が死んだが, 475年に死んだ王と王子は 倭国には全然存在しないで,

 

百済に存在するのにその人々はすぐ 百済の 蓋鹵王と彼の息子たちという

のを論証した. そしてここでもう一つ言及しておくのは 23年過去で

溯及された 雄略天皇の 在位期間をまた 倭王武の 即位 後 1年を基準にして

後どおり 23年 在位期間が流れたことをすればその 23年になる 年は 武列天皇 4年

(西紀502年)になる. が 年がすぐ 日本書紀によれば百済 武寧王 即位

元年だ.  

 

こんなに見れば日本書紀の 雄略天皇は 倭王武 すなわち 後日の 斯麻王を投映して

記録したことだが, その後の 清寧天皇, 顯宗天皇, 仁賢天皇は 架空の 天皇という

のになる. 武列天皇も 架空の 天皇では同じや先立って言及したとおり

民に暴虐な仕業をしたという点では百済 東城王の歴史を日程部分

投映したと考えられる.  すなわち百済 東城王の死亡で 倭王だった 斯麻王が

百済王に上がると, 斯麻王の子孫ではない他の系列の王すなわち 男弟王が

倭王で上がるようになる歴史的事実が 武列天皇が子孫がいなく死んで,

系列の他の 継体天皇が即位するという日本書紀の記録で映ったのだ.

 

それなら 雄略天皇の 兄に記録された 安康天皇 も百済王や百済王子衣

歴史が映ったと思うしかない. ところで 安康天皇は在位期間が

3年だ.  この在位期間は 宋書, 三国史記をひっくるめて見ても同じ在位期間を

持った王がない.  それならこの記録は歴史的事実の映った記録ではない

完全な虚偽の記録だと言わなければならないか? そうではないということが私の考えだ.

 

ここで私たちは歴史的に存在した 倭王で明かされた 倭王武はすなわち百済 斯麻王であり

雄略天皇 も 倭王武 すなわち百済 斯麻王の歴史を投映して記録した 架空の天皇なのを

忘れてはいけないでしょう. それを前提にして 安康天皇の謎在位期間 3年を

解いて見よう. 私たちは 倭王武 すなわち百済 斯麻王が 親父, 親兄を持っているし, も

養父, 養兄を持っていることを 宋書と日本書紀を通じて先に進んでよく見た事がある.

そして 宋書を通じて 倭王武が 親父と 親兄の 3年喪を受けて 宋国 天子に

上表文をあげているということが分かった. すぐこれだ. 安康天皇の在位期間

3年はすぐ 倭王武が 3ニョンサングを受けた期間だ. 言い替えれば 倭王武はすなわち 後日の

斯麻王であり, 雄略天皇は 倭王武の歴史が映った 架空の天皇なのに, 雄略天皇

以前に 安康天皇 3年は 倭王武 すなわち 後日の百済 斯麻王が自分の 親父, 親兄を

ために 3年喪を受けた期間のことだ.  正しく これは 倭王武が  親父 蓋鹵王と

親兄 すなわち 蓋鹵王の王子たちの後を引き継いで 倭王位を受け継いでいるというの, 再び

言って 倭王武 すなわち 後日の百済 斯麻王が百済にある 東城王よりもっと 百済 

 

王位を受け継ぐのにあって伝統性を持っているということを  日本書紀の著者が

安康天皇の在位期間を通じて暗示しているのだ.

 

ところで 倭王武 すなわち 斯麻王はまた 養父と 養兄のあるのに人々が 昆支と 牟大,

すなわち後日の 東城王だ. ところが 東城王は百済王で上がる前に 倭王興で

で在位をしていた. 言い替えれば 倭王武の 兄王がすぐ 倭王興, すなわち 後日の

東城王であるのだ. まさにそう書 倭王武 すなわち後日の 斯麻王の歴史が 雄略天皇の

記録に映ったら 倭王興 すなわち後日の 東城王の歴史が 安康天皇の記録に

映るしかないのだ. ところで先立って言及したとおり 安康天皇の在位期間は

倭王武が 親父と 親兄の 3年喪を受けた期間にした一方 安康天皇の在位期間

間起こった事件は 東城王の在位期間の歴史的事実を投映して記録したことだ.

 

 

日本書紀の 安康天皇に対する記録が 宋書の 倭王興と全然他に記録されたことは

まさにこの 安康天皇に対する記録が 倭王武 すなわち 後日の百済 斯麻王の 親父と 親兄,

そして 養父と 養兄に対する歴史的事実を投映して複合的に記録された

だからであることだ.  こんなに見れば日本書紀は 倭国の史家 すなわち百済 侯国の歴史なのに,

が記録たちをすぐ記録することができずに日本書紀 内に別に 百済新撰,百済本記,

百済記にある一部記録を保存して, その歴史と係わる事実, すなわち百済王子と

百済王たちに係わる百済 侯国 倭国の  歴史を 天皇ウィギロックで歪曲しながら 

隠密に暗示してしまったのではないか思われる.

 


사서로 보는 일본의 진실

1. 백제 동성왕 --->  일본서기에 安康天皇, 武列天皇의 사건으로 기록

 

[삼국사기] 백제本記 東城王

東城王은 諱가 牟大니 文周王의 아우昆支의 아들이었다.

[일본서기]雄略天皇 23년

(天皇은 )昆支王의 5人의 아들 중, 第 2 末多王(=東城王)이......

[일본서기]安康天皇

穴穗천황(=安康天皇)은 允恭天皇의 第 2子다.

 

[일본서기]武列天皇 4年

이 해  백제의 末多王(=東城王) 無道하여 백성에게

포학한 짓을 하였다.

[일본서기]무열천황 8년

(武列天皇이) 여자를 발가벗겨 판자 위에 앉히고, 말을

끌고 앞으로 가서 교접을 시켰다.

 

[삼국사기]백제本記 東城王

처음 왕(=東城王)이 白加로써 加林城에 鎭戍하게 하였던 바 加는 가려고

하지 않고 病을 이유로 사퇴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이 때문에 加는 왕을 원망하던 중 이에 이르러 왕을 칼로

찔렀던 것이다.

[일본서기]雄略天皇 3년

안강천황은 황후의 무릎을 베고 낮잠을 잤다. 그래서 眉輪王은

그 깊이 잠든 것을 보고 (천황을) 칼로 찔러 죽였다.

[일본서기]武列天皇 4년

國人이 (東城王)을 제거하고, 島王을 세웠다.

 

[일본서기] 武列天皇 4년

百濟新撰에 말하였다. 武寧王이 섰다. 諱는 斯麻王이다. 이는 昆支王子의 아들

(실은 昆支의 兄 蓋鹵王의 아들)이다.

[삼국사기]武寧王(=斯麻王)

"白加가 항복하니, 왕(=斯麻王)이 그를 베어 白江에 던지었다."

[해설]斯麻王은 곧 東城王의 동생이다.

[일본서기]雄略天皇 3년

(雄略)天皇은 듣지 않고, 불을 질러 집을 태웠다. 그때 大臣과 黑彦皇子와

眉輪王이 같이 타 죽었다.

[해설]雄略天皇은 곧 安康天皇의 동생이다.

 

 

2.倭王興은 곧 百濟 東城王

 

[일본서기] 웅략천황 5년 秋7월

(461년) 秋7月, 軍君(=昆支)이 京에 들어왔다. 이미 5人의 子가 있었다.

 

[송서]列傳 夷蠻 東夷 倭國

"(世祖大明六年)濟死、世子興遣使貢獻。"
"462년에 倭王 濟가 죽었다. 世子 興이 使臣을 보내 貢物을 바쳤다. "

즉 461년에 백제 蓋鹵王의 동생 곤지아들 5人을 데리고 倭國의 京에 들어왔는데,
462년에 世子 興이 宋나라에 使臣을 보내 貢物을 바치고 있는 것이다.

雄略天皇 5년은 일본서기 紀年으로 461년이나, 武寧王 誌石에 따르면 이 때가

462년이다. 당시 倭가 卽位年을 元年으로 하지 않고, 卽位 이듬해를 元年으로

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雄略 5년을 462년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世子 興은 昆支의 아들 5人 중 한 사람이 아닐까?

昆支가 그의 아들 중 한 사람을 倭國의 王世子로 冊封했던 것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그 아들은 곤지의 둘째 아들 바로 牟大, 즉 後日의 백제 東城王이 될 것이다.

 

[송서]列傳 夷蠻 東夷 倭國

"順帝昇明二年 興死、弟武立。"
478년이 죽었다. 아우 武가 (王으로) 卽位했다.

분명히 倭王興이 478년에 죽었다. 그런데 倭王武는 478년에 宋나라에 上表文을
올리면서 倭王興의 죽음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이 없고, 단지 3年前에 죽은 아버지와
형의 죽음에 대해서만 언급
하고 있다. 그리고 이 기록은 3년상을 거의 마쳐가고
있는 시점에 기록된 것 같다.

 

[송서]列傳 夷蠻 東夷 倭國

奄喪父兄、使垂成之功、不獲一一。
居在諒闇、不動兵甲、是以偃息未捷、至今欲練甲治兵、申父兄之志

"갑자기 아버지와 兄을 잃어 일을 이루려는 功이 일시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로부터 臣은 3年喪 을 당하여 軍士를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싸워 이기지 못했습니다.  지금에 이르러서야 병기를 연마하고
군사를 훈련하여 父兄의 뜻을 펴고자 합니다."

倭王興의 죽음을 일체 언급하지 않는 倭王武, 도대체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倭王興이 죽은 시점(478년)에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三國史記] 年表 中

"未己 三斤王薨 東城王 牟大 卽位元年"  
479년 三斤王 사망, 東城王 牟大 卽位 元年

478년에 倭王興이 죽었다. 그런데 그 年에 宋나라 天子에게 上表文을 올리는
倭王武는 倭王興의 죽음에 대해 일체 언급이 없다
. 그런데 놀랍게도 그로부터
1년 후 즉
479년에 倭 列島에 있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 昆支의 아들 牟大가
百濟王으로 登極하고 있다
. (삼국사기에 의하면 478년 11월에 三斤王이 15세의

나이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왕이 15세의 나이에 죽었다면 이는 病弱해서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宋書에는 바로 이 해에 倭王興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倭王興 곧 後日의 東城王이 三斤王이 死境을

헤메고 있다는  소문을 접하고 478년경 백제로 건너가서 兵權을 장악하고

그 후 479년에 왕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일본서기는 479년 4월에

東城王이 즉위했다고 기록하고 있고, 삼국사기는 479년을 東城王의 즉위 元年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번에는  일본서기의 雄略天皇이 사망한 年을

주목해보자. 雄略天皇이 사망한 年은 일본서기에 의하면 479년이다. 그런데 이 479년이

바로 東城王이 百濟王으로  公式的으로 즉위한 시기이다. 하지만 東城王이 倭에서

백제로 건너간 시기는 정확히 말하자면 478년이 된다. 그렇다면 결국 倭王興이

죽은 시기와  東城王이 倭를 떠나 백제로 간 시기, 倭王武 곧 斯麻王이 倭王興

 곧 東城王의 뒤를 이어 王位에 卽位한 시기가 겹치게 되는 것이다. )

 

도대체 倭王武 즉 後日의 斯麻王은 누구로부터 王位를 물려받은 것일까?
왜 倭王武 卽 後日의 斯麻王은 宋나라 天子에게 보내는 上表文에 倭王 興의
죽음에 대하여 아무 언급을 하지 않은 것일까?
倭王興은 宋書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은 죽지 않은 것이 아닐까?
倭王興 곧 牟大가 倭王武 곧 斯麻王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백제로 건너가서
백제왕으로 登極하자, 뒤를 이어 즉위한 斯麻王이 그 사실을 摘示하여 보고
하는 것을 꺼려 倭國 使臣을 통해 倭王興이 죽었다고 宋나라 天子에게 보고한

것은 아닐까? 바로 이것은 兄弟 상속이 많은 백제의 侯國 倭國의 현실을 고려하면서,
中國天子의 백제의 侯國 倭國에 대한 간섭을 最少化하기 위한 방책 때문인
것은 아닐까?

 

3.일본서기에 安康天皇의 재위기간이 3년으로 기록되어 있는 이유

 

흔히들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安康天皇을 宋書의 倭王興에 비정한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安康天皇이 재위기간이 3년인 반면에 倭王

興의 재위기간은 무려 15년이나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재위기간을

놓고 보면 이 둘은 전혀 같은 인물이라고 볼 수가 없다. 

 

그런데 앞서 나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雄略天皇이 架空의 천황에

불과하며 倭王武 곧 후일의 백제 斯麻王의 역사적 사실을 투영하여 

일본서기에 雄略天皇 代의  역사를 기록하였다는 것을 논증한 바 있다. 

일본서기의 雄略天皇의 死亡年이 곧 倭王武가 왕위에 卽位한 年,

곧 478년의 다음 年이며, 雄略天皇의 卽位年은 479년부터 과거로 23년

소급하여 蓋鹵王의 卽位年에 맞추어져 있다는 것, 그리고 倭王武가  

송나라 天子에게 보낸 上表文에 의하면 475년에 倭王武의 아버지와

형이 죽었는데, 475년에 죽은 왕과 왕자는 일본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고,

백제에 존재하는데 그 사람들은 바로 백제의 蓋鹵王과 그의 아들들이라는

것을 논증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또 하나 언급하여 둘 것은 23년 과거로

소급된 雄略天皇의 在位期間을 다시 倭王武의 卽位 후 1年을 기준으로 하여

후대로 23년 在位期間이 흐른 것을 하면 그 23년이 되는 年은 武列天皇 4년

(서기502년)이 된다. 이 年이 바로 일본서기에 의하면 백제 武寧王 卽位

元年이다.  

 

이렇게 보면 일본서기의 雄略天皇은 倭王武 곧 後日의 斯麻王을 투영하여

기록한 것이지만, 그 후의 淸寧天皇, 顯宗天皇, 仁賢天皇은 架空의 天皇이라는

것이 된다. 武列天皇도 架空의 天皇이기는 마찬가지이나 앞서 언급한 대로

백성에게 포학한 짓을 하였다는 점에서는 백제 東城王의 역사를 일정 부분

투영하였다고 생각된다.  즉 백제 東城王의 사망으로 倭王이었던 斯麻王이

백제왕으로 등극하자, 斯麻王의 후손이 아닌 다른 계열의 왕 곧 男弟王이

倭王으로 등극하게 되는 역사적 사실이 武列天皇이 후손이 없이 죽고,

계열이 다른 繼體天皇이 즉위한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으로 투영된 것이다.

 

그렇다면 雄略天皇의 兄으로 기록된 安康天皇 또한 백제왕이나 백제 왕자의

역사가 투영되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安康天皇은 재위기간이

3년이다.  이 재위기간은 宋書, 삼국사기를 통틀어보아도 같은 재위기간을

가진 왕이 없다.  그렇다면 이 기록은 역사적 사실이 투영된 기록이 아닌

완전한 허위의 기록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적으로 존재한 倭王으로 밝혀진 倭王武는 곧 백제 斯麻王이며

雄略天皇 또한 倭王武 곧 백제 斯麻王의 역사를 투영하여 기록한 架空의 천황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을 전제로 하여 安康天皇의 수수께끼 재위기간 3년을

풀어보자. 우리는 倭王武 곧 백제 斯麻王이 親父, 親兄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養父, 養兄을 가지고 있음을 宋書와 일본서기를 통해 앞서 살펴본 바 있다.

그리고 宋書를 통해 倭王武가 親父와 親兄의 3년喪을 치루고 宋나라 天子에게

上表文을 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바로 이것이다. 安康天皇의 재위기간

3년은 바로 倭王武가 3년상을 치룬 기간이다. 다시 말해서 倭王武는 곧 後日의

斯麻王이며, 雄略天皇은 倭王武의 역사가 투영된 架空의 천황인데, 雄略天皇

이전에 安康天皇 3년은 倭王武 곧 後日의 백제 斯麻王이 자신의 親父, 親兄을

위해 3년喪을 치룬 기간인 것이다.  바로 이것은 倭王武가  親父 蓋鹵王과

親兄 곧 蓋鹵王의 왕자들의 뒤를 이어서 倭王位를 계승하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해서 倭王武 곧 後日의 백제 斯麻王이 백제에 있는 東城王보다 더 백제 

왕위를 계승하는데 있어서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일본서기의 저자가

安康天皇의 재위기간을 통해서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倭王武 곧 斯麻王은 또한 養父와 養兄이 있는데 이들이 昆支와 牟大,

곧 후일의 東城王이다. 그런데 東城王은 백제왕으로 등극하기 전에 倭王興으로

서 재위를 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倭王武의 兄王이 바로 倭王興, 곧 後日의

東城王인 것이다. 바로 그래서 倭王武 곧 후일의 斯麻王의 역사가 雄略天皇의

기록에 투영되었다면 倭王興 곧 후일의 東城王의 역사가 安康天皇의 기록에

투영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대로 安康天皇의 재위기간은

倭王武가 親父와 親兄의 3년喪을 치룬 기간으로 한 반면 安康天皇의 재위기간

동안 일어난 사건은 東城王의 재위기간의 역사적 사실을 투영하여 기록한 것이다.

 

일본서기의 安康天皇에 대한 기록이 宋書의 倭王興과 전혀 달리 기록된 것은

바로 이 安康天皇에 대한 기록이 倭王武 곧 後日의 백제 斯麻王의 親父와 親兄,

그리고 養父와 養兄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투영하여 복합적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일본서기는 倭國의 역사가 곧 백제 侯國의 역사인데,

이 기록들을 바로 기록하지 못하고 일본서기 內에 따로 百濟新撰,百濟本記,

百濟記에 있는 일부기록을 보존하고, 그 역사와 관련된 사실, 곧 백제 왕자와

백제왕들에 관련된 백제 侯國 일본의  역사를 天皇의기록으로 왜곡하면서 

은밀히 암시하고 말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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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爆笑】 韓国人が日本で見つけ....... あほな 2009-06-23 691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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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茶道をpakuriする劣等民族 tetetetete 2009-06-23 5777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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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と韓半島 japanu 2009-06-23 1085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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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書に見る日本の真実 japanu 2009-06-23 610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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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世紀 大韓国民 tetetetete 2009-06-23 5829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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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済と日本の関係 japanu 2009-06-23 5625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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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韓の馬鹿でも分かる歴史 志村と加藤 2009-06-23 561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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真実暴露! 野蛮で狡い 倭人! Wildboy 2009-06-23 8494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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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常な討論が不可能な japanu 2009-06-23 556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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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れが本当の朝鮮通信使と 朝貢w....... 志村と加藤 2009-06-23 7899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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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はこんな写真を好むようだ. japanu 2009-06-23 5416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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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を見て劣等感持った朝鮮通信使 tetetetete 2009-06-22 5743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