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고구려사(高句麗史)를 바라보는 중국 측의 시각



1. 고구려(高句麗)는 오늘날의 중국 영토에서 건국되었고 중국 영토에서 활동하다가 중국 영토에서 멸망했다.




2. 고구려는 중원제국 황제의 책봉을 받았다.




3. 왕씨(王氏) 고려(高麗)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가 아니다.




4. 한반도 북부 지역도 중국의 역사 활동 무대였다.




한국 측의 반론




1. 영토 패권주의에 불과하다.




고구려가 현재 중국 영토에서 활동했던 고대 왕국이라는 이유로 고구려를 중국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고구려가 존재했을 당시 중국인들이 활동했던 무대는 섬서성(陝西省), 산서성(山西省), 산동성(山東省), 하남성(河南省), 강소성(江蘇省) 일대였지 고구려가 위치했던 하북성(河北省), 동북3성(東北三省)이 아니었다. 당시 중국인들의 입장에서 그들 지역은 변방이었을 뿐이다.



중국은 명나라가 들어서기 전까지 만주 지역을 차지한 적이 없었다. 그나마 만주지역을 차지한 명대(明代) 조차 만주지방에는 한족(漢族)계통이 아닌 동이족(東夷族) 계통인 여진족(女眞族) 등이 많이 살고 있었다.




동북3성에 한족(漢族) 인구가 급증한 것은 청나라 말기로 채 몇 백년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단군조선(檀君朝鮮)시대부터 정안국(定安國; 발해 멸망 후 발해의 유민들이 세운 국가)이 멸망할 때까지 3천년이상 만주의 주인은 우리 민족이었다. 역사적으로 따져보아도 고구려사는 중국 측보다는 우리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이는 마치 김씨(金氏)가 이씨(李氏)의 고택(故宅)을 차지했으니 이씨의 족보는 바로 김씨의 것이라는 주장과도 같다. 이와 같은 논리로 고구려사가 중국 역사라는 중국 측의 주장은 논리적 비약이 심하다고 할 수 있다.




2. 조공(朝貢), 책봉(冊封)은 동아시아의 외교적 관례일 뿐




고구려가 중국의 역대 왕조에 책봉을 받고 조공을 바쳤다고 해서 고구려가 중국 왕조의 속국 또는 지방정권이라는 중국 측의 주장은 결코 상식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 당시 동아시아 정세를 살펴보면 조공과 책봉은 동아시아 외교 관례의 하나일 뿐이었다. 고구려가 중국 왕조로부터 “낙랑군공(樂浪郡公)”, “요동개국공(遼東開國公)”이라는 책봉을 받았다고 해서 고구려를 중국 왕조의 지방정권으로 보면 안된다. 만약 고구려가 지방정권이라면, 당시 중원제국보다 군사력이 강했던 돌궐(突厥), 토번(吐蕃)도 중국 왕조의 지방정권이라는 말도 안되는 얘기가 나온다.




참고로 중국 역사는 소위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는 사관으로 그 특징은 위한중국휘치(爲漢中國諱恥:한족과 중국의 수치스러운 기사는 숨긴다), 긍초이누이적(矜초而陋夷狄:중국은 높이고 주변국은 깎아내린다), 상내약외(詳內略外:한족에 관한 국내 역사는 과대하게 부각시키고, 국외 역사는 줄여 낮춘다)로, 중국의 사가(史家)들은 한족(漢族) 입장에서 수치스러운 역사를 숨겨 기록하지 않았다. 일례로 고구려 신대왕(新大王) 때 고구려와 한(漢)의 전쟁인 좌원전투(坐原戰鬪)를 들 수 있는데 좌원전투는 서기 172년에 명림답부(明臨答夫)가 이끄는 고구려군이 현도군(玄菟郡)의 한나라 군사들을 완전히 섬멸한 승전(勝戰)으로, 중국 역사서에는 이 사건이 기록되지 않았지만 우리 측 사료인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위 사건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당대의 중국인들이 고의로 역사적 사건을 은폐하고 날조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왕조 중 한나라는 초원의 패자(覇者)인 흉노(匈奴)에 수없이 조공을 바쳤는데 그들 역사서에는 오히려 흉노가 중국에 조공을 바쳤다는 식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혹 고구려가 중국 왕조에 조공을 바쳤다는 기사도 거꾸로 중국 왕조가 고구려에 조공을 바쳤다는 사실로 바꾸어 추측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3.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국




중국 학계는 ‘왕건(王建)은 신라의 무장이었고 신라를 멸한 다음 후고려(後高麗)를 건립했다. 왕건은 신라(新羅) 김씨(金氏) 계통으로 고구려 고씨(高氏)의 왕위를 계승한게 아니었다. 왕씨(王氏) 고려(高麗)는 대동강 이남만 차지했고, 수도 개성은 신라의 옛 땅이지 고구려의 옛 땅이 아니다’는 식으로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중국 측의 역사 왜곡이다. 분명히 사서(史書)에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나와 있다. 왕건이 고려(高麗)라고 국호를 정한 것도 고구려를 계승하는 의미에서였고, 발해의 태자 대광현(大光顯)이 고려에 귀순하자, 그에게 동족의 예를 베푼 것을 보면 고려는 고구려 계승의식이 뚜렷했다고 볼 수 있다.




서기 993년 요(遼)의 제1차 고려 침입 때 서희(徐熙)는 요장(遼將) 소손녕(蕭遜寧)에게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했기 때문에 국호를 고려라 정했고, 원래 고구려의 경계를 따지자면 도리어 요(遼)가 고려의 땅을 침식한 것”이라고 말한 사실 등으로 보면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고려가 고구려를 이어받았다는 것은 중국 측 문헌인 『송사(宋史)』에 기록되어 있다. 『송사(宋史)』 고려열전(高麗列傳)을 보면 “고려는 본래 고구려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중국 학자들의 주장은 자신들의 정사(正史)를 부인하는 행위이다.


북방사(北方史) 연구의 권위자인 서병국(徐秉局) 대진대학 교수는 자신의 저서 『고구려제국사(高句麗帝國史)』에 왕건의 성(姓)이 고구려 고씨(高氏)였다는 놀라운 내용을 실었다. 『신오대사(新五代史)』에 의하면 당나라 말기에 일어난 큰 혼란을 틈타 고구려 유민이 자립하여 나라를 세웠고 그 나라의 국왕의 성(姓)이 고씨라고 기록되어 있다. 후당(後唐) 장종(莊宗) 동광(同光) 원년(923), 국호와 제왕의 성명이 상실된 이 나라가 정사인 광평시랑(廣平侍郞) 한신일(韓申一)과 부사인 춘부소경(春部少卿) 박암(朴巖)을 후당에 파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병국 교수는 사신을 파견한 나라가 고려이며, 제왕은 태조(太祖) 왕건(王建)이었다고 주장한다.


박암은 923년(천수 6) 6월 계사일에 오월국문사(吳越國文士)로서 고려에 내투하였다.(고려사 권1세가 태조) 그러므로 박암을 후당에 부사로 파견한 시기는 같은 해 6월 이후가 분명하나 ‘고려사(高麗史)’에는 박암 등이 후당에 파견된 기사가 없다. 내투한 박암을 후당에 사신으로 파견한 것은 그가 내투인(內投人)이므로 중국의 실정에 밝은데다 언어와 문장 면에서 우수한 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신오대사(新五代史)’ 고려전(高麗傳)은 박암 등이 후당에 파견된 것이 923년이었다고 하면서 파견한 국왕의 성명은 역사에서 상실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가당치 않다. 동광(同光) 원년은 고려(高麗) 태조(太祖) 6년 이므로 박암 등을 파견한 국왕은 분명 고려 태조이다.




또한 『고려사(高麗史)』에 후당(後唐) 명종(明宗)이 왕건을 책봉한 세 조서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아아 권지고려국왕사(權支高麗國王師) 건(建)은 주몽(朱蒙)이 건국한 전통을 계승하여 그 곳의 임금이 되었으며・・・”, “당신은 동방의 대족이요 해외의 강국으로서・・・”,라고 하여 주몽과 왕건이 혈족관계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즉 왕건의 성은 고씨이고, 그의 조상이 성을 고씨에서 왕씨로 바꾸었다는 것이 서병국 교수 주장의 요지이다. 만약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고려는 명백한 고구려 계승국으로, 중국이 주장하는 ‘왕씨 고려가 고구려 계승국이 아니다’라는 주장은 빛을 잃게 될 것이다.





4. 고구려 왕국은 결코 중국의 역사가 될 수 없다.



중국 측은 “한반도가 오늘날 한민족의 거주지가 된 것은 15세기 이후의 일이다. 따라서 5세기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것을 놓고 조선이라는 국가가 생겼다고 봐서는 안된다. 15세기 이후의 이씨(李氏)조선과 기씨(箕氏)조선(기원전 11세기), 위씨(衛氏)조선(기원전 2세기) 등은 모두 조선이라고 불렀으나 민족구성과 국가 귀속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로 보아서는 안된다. 이씨조선은 오늘날 한예족(韓濊族)이 세운 조선으로 한국의 역사에 속하고, 기씨조선과 위씨조선은 한족(漢族)을 선조로 한 옛 조선으로 중국 역사에 속한다.” 하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반도와 만주 대륙을 하나의 구획으로 했던 한예족(韓濊族)의 역사 무대가 한반도로 좁혀진 것은 고려 이후이며, 한반도 유사 이래 변함없이 한예족의 터전이었다. 북한 지역이 중국 역사에 귀속된다는 중국 측의 주장은 정도를 넘어서는 억지이다. 엄밀히 말하면 역사・신라지리적인 의미에서 중국의 범위는 만리장성 이남일 뿐이다. 현재의 중국 국경선 자체가 여진족의 정복 국가인 청(淸)이 개척한 것으로, 여진족(만주족)의 역사 또한 한족(漢族) 중심의 중국 역사에 편입될 수 없다.



참고로 중국인 한족이 만주에 모여살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봉금정책이 해제된 후였다. 그 전에 이 곳에는 고구려 유민, 발해 유민, 거란족, 여진족이 살던 터전이었다. 게다가 이 지역은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문명이 꽃 피운 지역이었다.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면 이 곳에 중국 문명의 흔적이 발견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중국 문명의 흔적 대신 중국과 다른 독자적 고구려 문명의 흔적이 발견된다.



필자가 보는 고구려사(高句麗史)





고구려는 중국의 역대 왕조와 다른 독자적 천하관을 가지고 있었고, 스스로를 천손(天孫)이라 인식했으며 독자 연호를 사용했다. 연호의 사용은 고구려가 중국 왕조의 종속국이 아니라 중국과 대등한 황제국(皇帝國)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게다가 중국의 역대 왕조는 중화사상(中華思想)이라고 중국, 즉 한족(漢族) 중심의 천하관을 견지해왔다. 그런데 고구려는 이러한 중국의 천하관에 편입되는 대신 독자적인 천하관을 수립하였다. 이는 세계가 고구려를 중심으로 돈다는 의미이고, 중국의 천하관에 도전하는 것이다.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면 이와 같은 철학을 갖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참고로 수나라가 남조의 진(陳)을 병합할 때 동원한 병력이 50만이었다. 그런데 고구려 침공에는 그 2배인 113만 대군을 동원했다. 세상에 어떤 나라가 지방정권을 공략하는데 100만의 병력을 동원했는가? 이는 고구려가 중국 왕조의 지방정권이 아니라 중국을 위협할 정도의 강대국이었음을 의미한다.


중국 측의 동북공정(東北工程) 이론을 논리적으로 반박한다!

 

고구려사(高句麗史)를 바라보는 중국 측의 시각



1. 고구려(高句麗)는 오늘날의 중국 영토에서 건국되었고 중국 영토에서 활동하다가 중국 영토에서 멸망했다.




2. 고구려는 중원제국 황제의 책봉을 받았다.




3. 왕씨(王氏) 고려(高麗)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가 아니다.




4. 한반도 북부 지역도 중국의 역사 활동 무대였다.




한국 측의 반론




1. 영토 패권주의에 불과하다.




고구려가 현재 중국 영토에서 활동했던 고대 왕국이라는 이유로 고구려를 중국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고구려가 존재했을 당시 중국인들이 활동했던 무대는 섬서성(陝西省), 산서성(山西省), 산동성(山東省), 하남성(河南省), 강소성(江蘇省) 일대였지 고구려가 위치했던 하북성(河北省), 동북3성(東北三省)이 아니었다. 당시 중국인들의 입장에서 그들 지역은 변방이었을 뿐이다.



중국은 명나라가 들어서기 전까지 만주 지역을 차지한 적이 없었다. 그나마 만주지역을 차지한 명대(明代) 조차 만주지방에는 한족(漢族)계통이 아닌 동이족(東夷族) 계통인 여진족(女眞族) 등이 많이 살고 있었다.




동북3성에 한족(漢族) 인구가 급증한 것은 청나라 말기로 채 몇 백년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단군조선(檀君朝鮮)시대부터 정안국(定安國; 발해 멸망 후 발해의 유민들이 세운 국가)이 멸망할 때까지 3천년이상 만주의 주인은 우리 민족이었다. 역사적으로 따져보아도 고구려사는 중국 측보다는 우리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이는 마치 김씨(金氏)가 이씨(李氏)의 고택(故宅)을 차지했으니 이씨의 족보는 바로 김씨의 것이라는 주장과도 같다. 이와 같은 논리로 고구려사가 중국 역사라는 중국 측의 주장은 논리적 비약이 심하다고 할 수 있다.




2. 조공(朝貢), 책봉(冊封)은 동아시아의 외교적 관례일 뿐




고구려가 중국의 역대 왕조에 책봉을 받고 조공을 바쳤다고 해서 고구려가 중국 왕조의 속국 또는 지방정권이라는 중국 측의 주장은 결코 상식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 당시 동아시아 정세를 살펴보면 조공과 책봉은 동아시아 외교 관례의 하나일 뿐이었다. 고구려가 중국 왕조로부터 “낙랑군공(樂浪郡公)”, “요동개국공(遼東開國公)”이라는 책봉을 받았다고 해서 고구려를 중국 왕조의 지방정권으로 보면 안된다. 만약 고구려가 지방정권이라면, 당시 중원제국보다 군사력이 강했던 돌궐(突厥), 토번(吐蕃)도 중국 왕조의 지방정권이라는 말도 안되는 얘기가 나온다.




참고로 중국 역사는 소위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는 사관으로 그 특징은 위한중국휘치(爲漢中國諱恥:한족과 중국의 수치스러운 기사는 숨긴다), 긍초이누이적(矜초而陋夷狄:중국은 높이고 주변국은 깎아내린다), 상내약외(詳內略外:한족에 관한 국내 역사는 과대하게 부각시키고, 국외 역사는 줄여 낮춘다)로, 중국의 사가(史家)들은 한족(漢族) 입장에서 수치스러운 역사를 숨겨 기록하지 않았다. 일례로 고구려 신대왕(新大王) 때 고구려와 한(漢)의 전쟁인 좌원전투(坐原戰鬪)를 들 수 있는데 좌원전투는 서기 172년에 명림답부(明臨答夫)가 이끄는 고구려군이 현도군(玄菟郡)의 한나라 군사들을 완전히 섬멸한 승전(勝戰)으로, 중국 역사서에는 이 사건이 기록되지 않았지만 우리 측 사료인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위 사건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당대의 중국인들이 고의로 역사적 사건을 은폐하고 날조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왕조 중 한나라는 초원의 패자(覇者)인 흉노(匈奴)에 수없이 조공을 바쳤는데 그들 역사서에는 오히려 흉노가 중국에 조공을 바쳤다는 식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혹 고구려가 중국 왕조에 조공을 바쳤다는 기사도 거꾸로 중국 왕조가 고구려에 조공을 바쳤다는 사실로 바꾸어 추측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3.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국




중국 학계는 ‘왕건(王建)은 신라의 무장이었고 신라를 멸한 다음 후고려(後高麗)를 건립했다. 왕건은 신라(新羅) 김씨(金氏) 계통으로 고구려 고씨(高氏)의 왕위를 계승한게 아니었다. 왕씨(王氏) 고려(高麗)는 대동강 이남만 차지했고, 수도 개성은 신라의 옛 땅이지 고구려의 옛 땅이 아니다’는 식으로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중국 측의 역사 왜곡이다. 분명히 사서(史書)에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나와 있다. 왕건이 고려(高麗)라고 국호를 정한 것도 고구려를 계승하는 의미에서였고, 발해의 태자 대광현(大光顯)이 고려에 귀순하자, 그에게 동족의 예를 베푼 것을 보면 고려는 고구려 계승의식이 뚜렷했다고 볼 수 있다.




서기 993년 요(遼)의 제1차 고려 침입 때 서희(徐熙)는 요장(遼將) 소손녕(蕭遜寧)에게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했기 때문에 국호를 고려라 정했고, 원래 고구려의 경계를 따지자면 도리어 요(遼)가 고려의 땅을 침식한 것”이라고 말한 사실 등으로 보면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고려가 고구려를 이어받았다는 것은 중국 측 문헌인 『송사(宋史)』에 기록되어 있다. 『송사(宋史)』 고려열전(高麗列傳)을 보면 “고려는 본래 고구려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중국 학자들의 주장은 자신들의 정사(正史)를 부인하는 행위이다.


북방사(北方史) 연구의 권위자인 서병국(徐秉局) 대진대학 교수는 자신의 저서 『고구려제국사(高句麗帝國史)』에 왕건의 성(姓)이 고구려 고씨(高氏)였다는 놀라운 내용을 실었다. 『신오대사(新五代史)』에 의하면 당나라 말기에 일어난 큰 혼란을 틈타 고구려 유민이 자립하여 나라를 세웠고 그 나라의 국왕의 성(姓)이 고씨라고 기록되어 있다. 후당(後唐) 장종(莊宗) 동광(同光) 원년(923), 국호와 제왕의 성명이 상실된 이 나라가 정사인 광평시랑(廣平侍郞) 한신일(韓申一)과 부사인 춘부소경(春部少卿) 박암(朴巖)을 후당에 파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병국 교수는 사신을 파견한 나라가 고려이며, 제왕은 태조(太祖) 왕건(王建)이었다고 주장한다.


박암은 923년(천수 6) 6월 계사일에 오월국문사(吳越國文士)로서 고려에 내투하였다.(고려사 권1세가 태조) 그러므로 박암을 후당에 부사로 파견한 시기는 같은 해 6월 이후가 분명하나 ‘고려사(高麗史)’에는 박암 등이 후당에 파견된 기사가 없다. 내투한 박암을 후당에 사신으로 파견한 것은 그가 내투인(內投人)이므로 중국의 실정에 밝은데다 언어와 문장 면에서 우수한 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신오대사(新五代史)’ 고려전(高麗傳)은 박암 등이 후당에 파견된 것이 923년이었다고 하면서 파견한 국왕의 성명은 역사에서 상실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가당치 않다. 동광(同光) 원년은 고려(高麗) 태조(太祖) 6년 이므로 박암 등을 파견한 국왕은 분명 고려 태조이다.




또한 『고려사(高麗史)』에 후당(後唐) 명종(明宗)이 왕건을 책봉한 세 조서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아아 권지고려국왕사(權支高麗國王師) 건(建)은 주몽(朱蒙)이 건국한 전통을 계승하여 그 곳의 임금이 되었으며・・・”, “당신은 동방의 대족이요 해외의 강국으로서・・・”,라고 하여 주몽과 왕건이 혈족관계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즉 왕건의 성은 고씨이고, 그의 조상이 성을 고씨에서 왕씨로 바꾸었다는 것이 서병국 교수 주장의 요지이다. 만약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고려는 명백한 고구려 계승국으로, 중국이 주장하는 ‘왕씨 고려가 고구려 계승국이 아니다’라는 주장은 빛을 잃게 될 것이다.





4. 고구려 왕국은 결코 중국의 역사가 될 수 없다.



중국 측은 "한반도가 오늘날 한민족의 거주지가 된 것은 15세기 이후의 일이다. 따라서 5세기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것을 놓고 조선이라는 국가가 생겼다고 봐서는 안된다. 15세기 이후의 이씨(李氏)조선과 기씨(箕氏)조선(기원전 11세기), 위씨(衛氏)조선(기원전 2세기) 등은 모두 조선이라고 불렀으나 민족구성과 국가 귀속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로 보아서는 안된다. 이씨조선은 오늘날 한예족(韓濊族)이 세운 조선으로 한국의 역사에 속하고, 기씨조선과 위씨조선은 한족(漢族)을 선조로 한 옛 조선으로 중국 역사에 속한다." 하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반도와 만주 대륙을 하나의 구획으로 했던 한예족(韓濊族)의 역사 무대가 한반도로 좁혀진 것은 고려 이후이며, 한반도 유사 이래 변함없이 한예족의 터전이었다. 북한 지역이 중국 역사에 귀속된다는 중국 측의 주장은 정도를 넘어서는 억지이다. 엄밀히 말하면 역사・신라지리적인 의미에서 중국의 범위는 만리장성 이남일 뿐이다. 현재의 중국 국경선 자체가 여진족의 정복 국가인 청(淸)이 개척한 것으로, 여진족(만주족)의 역사 또한 한족(漢族) 중심의 중국 역사에 편입될 수 없다.



참고로 중국인 한족이 만주에 모여살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봉금정책이 해제된 후였다. 그 전에 이 곳에는 고구려 유민, 발해 유민, 거란족, 여진족이 살던 터전이었다. 게다가 이 지역은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문명이 꽃 피운 지역이었다.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면 이 곳에 중국 문명의 흔적이 발견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중국 문명의 흔적 대신 중국과 다른 독자적 고구려 문명의 흔적이 발견된다.



필자가 보는 고구려사(高句麗史)





고구려는 중국의 역대 왕조와 다른 독자적 천하관을 가지고 있었고, 스스로를 천손(天孫)이라 인식했으며 독자 연호를 사용했다. 연호의 사용은 고구려가 중국 왕조의 종속국이 아니라 중국과 대등한 황제국(皇帝國)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게다가 중국의 역대 왕조는 중화사상(中華思想)이라고 중국, 즉 한족(漢族) 중심의 천하관을 견지해왔다. 그런데 고구려는 이러한 중국의 천하관에 편입되는 대신 독자적인 천하관을 수립하였다. 이는 세계가 고구려를 중심으로 돈다는 의미이고, 중국의 천하관에 도전하는 것이다.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면 이와 같은 철학을 갖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참고로 수나라가 남조의 진(陳)을 병합할 때 동원한 병력이 50만이었다. 그런데 고구려 침공에는 그 2배인 113만 대군을 동원했다. 세상에 어떤 나라가 지방정권을 공략하는데 100만의 병력을 동원했는가? 이는 고구려가 중국 왕조의 지방정권이 아니라 중국을 위협할 정도의 강대국이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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