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외적의 침범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우리 선조들은 뜨거운 구국(救國)의 의지와 비상한 투지로 국난(國難)을 극복해왔다. 국난을 당할 때마다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민족적 기상을 높이 떨친 구국의 영웅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이순신이야말로 그 숱한 영웅, 호걸, 충신, 열사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위인이라는 사실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순신(李舜臣)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는 미증유의 재앙을 당해 나라와 겨레의 멸망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 조선 수군을 총지휘하여 갖가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필승의 신념과 비상한 전략으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올린 불세출의 명장이었다. 그는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54년의 길지 않은 일생을 보내는 동안 온갖 고난 속에서도 오로지 충효(忠孝), 인의(仁義)와 애국애족정신(愛國愛族精神)으로 일관한 민족의 큰 스승이었다.

영국 해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냈던 빌라드(G.A.Billard) 소장(少將)은 “조선의 이순신이라는 해군 제독이 넬슨(Horatio Nelson)에 버금가는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영국인들은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이순신이 동양 최고의 해군 제독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이순신을 평가하였다. 중국계 미국인 역사학자로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교 교수인 레이 황(Ray Hwang) 박사는 동양사 3대 전쟁 영웅으로 조선의 이순신(李舜臣), 베트남 다이비에이 왕조의 첸 훈다오[千訓道], 중국 명나라의 원숭환(袁崇煥)을 들면서 그 중에서도 이순신이 가장 위대한 공훈을 남긴 영웅이라고 칭송하였다.

오늘날 나라 안팎의 정세, 특히 또다시 빠진 정치적, 경제적 위기에 비추어볼 때 이순신은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절세의 명장, 구국의 영웅이라는 면모에 더해 비상한 리더십을 갖춘 최고 경영자였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21세기라는 새로운 격변의 시대,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여 강대국들과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우리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의 그 어떤 위인보다도 위대했던 성웅(聖雄) 이순신의 리더십을 통해 국난극복의 지혜를 찾아야 할 것이다.

◆ 일본군의 간계와 조선 관군 수뇌부의 오판

일본군 선봉장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이미 그 지나해 겨울에 조선으로 건너와 거제도에 있었고, 이어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도 바다를 건너와 울산 서생포에 상륙했다.

이렇게 해서 일본은 정유재란(丁酉再亂)을 일으켰지만 조선에 염라대왕(閻羅大王)보바도 더 무서운 인물이 있어서 마음대로 대한해협을 건너올 수가 없었으니 그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조선의 바다를 지키고 있는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의 뛰어난 전략과 조선 수군의 무서운 화력을 그동안의 해상전투를 통해 뼈저리게 알고 있는 일본군인지라 섣불리 정면공격을 가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궁리를 거듭하던 일본군 지휘부는 마침내 이순신을 제거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특히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 같은 왜장들은 조선에서 오래 전쟁을 치르는 동안 조선 국왕 선조(宣祖)의 성격, 조정의 당쟁, 이순신과 원균 간의 불화 등에 관해 비교적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 틈새를 파고들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이순신을 실각시키든지, 그것이 안 되면 이순신을 함정 속으로 유인하여 제거하려는 간계를 꾸몄던 것이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그의 부하이면서 조선의 언어에 능통해 통역을 전담했던 요시라를 간첩으로 삼아 그에게 밀명을 내렸다. 요시라가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김응서(金應瑞)를 몰래 찾아가서 이렇게 일렀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사이가 나쁜 가토 기요마사를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기요마사가 머잖아 일본에서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올 것인데, 내가 그 시간을 알아가지고 기요마사가 탄 선박을 가르쳐줄 것이니 조선에서는 통제사를 시켜 수군을 이끌고 바다를 지키게 하시오. 그러면 백전백승(百戰百勝)하는 통제사로서는 그를 잡아 목을 벨 수 있을 것이니, 그렇게 하면 첫째로 조선의 원수를 갚는 것이요, 다음은 유키나가의 마음도 통쾌할 것입니다.”

이것은 이순신이 지키고 있는 한 바다를 건너 조선을 침공할 수 없다고 판단한 적군의 간계였으나 병법(兵法)의 병(兵)자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무능한 장수와 조정 대신들은 이 말을 그대로 믿었다.

나중에 유성룡(柳成龍)은 요시라란 자의 정체에 대해 징비록(懲毖錄)에 이렇게 썼다.

”요시라가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드나들며 우리나라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므로 김응서가 특별히 대해주고 또 도원수에게 보고하여 포상을 받게 했다. 그런 뒤로 우리 진영에 무상출입하면서 저희 나라에 가면 倭놈 복색을 하고 우리나라에 오면 우리 의관을 바꾸어 입고서 온갖 정보를 물어가는 것이었다.”

김응서는 그 말을 그대로 믿고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과 조정에 보고했고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수군을 이끌고 출정하여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를 요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1월 14일에는 도원수 권율이 몸소 한산도에 와서 명령을 하달했다. 이순신은 이는 왜적(倭敵)의 간계라는 사실을 간파하여 이렇게 말했다.

”지금 왜군이 있는 부산으로 진격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반드시 왜적(倭敵)의 복병이 있을 것입니다. 또 우리가 함대를 많이 끌고 나가면 적군이 모를 리 없고, 적게 끌고 나가면 오히려 포위를 당할 것입니다. 또 倭 人이 하는 말은 본래부터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미 이순신의 함대에게 여러차례 참패를 당했던 일본 수군은 오래 전부터 조선 수군과의 전면전(全面戰)을 피하고 해안가에서 조선 수군을 포격할 수 있는 지역에 성을 쌓은 뒤 조선 수군이 한산도에서 부산으로 오는 길목마다 복병을 배치시키고 있었다. 그때, 부산에 잔류하고 있는 일본군의 병력은 2만도 넘었다. 만일 조선 수군이 한산도에서 출정하면 일본 수군이 안골포와 가덕도에 전진배치될 것이고 이렇게 되면 부산에 당도하기도 전에 한바탕 치열한 접전을 펼치는 것이 불가피했다.

설사 조선 수군이 부산까지 진격한다고 해도 가토 기요마사의 상륙을 막자면 절영도와 대마도 사이에 진형을 펴야 하는데 외해(外海)의 급물살을 견뎌내면서 진을 친다는 것은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조선 수군의 함대 규모가 일본 수군 전체에 비해 너무나 열세라는 사실이었다. 당시 한산도 통제영의 군선 수효는 130여척이었다. 하지만 부산에 정박하고 있는 일본의 군선은 3백여척 안팎이었고, 조선에 대한 재침공을 위해 대마도에서 조선으로 올 일본 군선의 예상 수효만도 역시 4백여척에 이르렀다.

조선 수군이 만약 보유하고 있는 전 군선의 반을 잃을 경우를 각오하고 적군과 교전을 한다고 가정해 봐도 상황은 매우 불리했다. 만일 부산으로 오는 일본 군선 4백여척 중 반이 거제도의 내해(內海)를 돌아 수군 본영을 장악해 버리면 적군의 서진(西進)을 막을 길은 너무도 요원한 것이다. 아무리 제갈량(諸葛亮)을 능가하는 훌륭한 전략가라 할지라도 이런 상황에서 함대를 이끌고 한산도에서 부산까지 진격하는 것은 절대 이길 수 없는 전투였으며,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그때 이미 가토 기요마사는 1월 12일에 가덕도로 건너와서 13일에는 다대포를 거쳐 울산 서생포에 건너와 있었다. 일본군의 첩자인 요시라는 다시 김응서에게 가서 이간책을 썼다.

”이순신이 부산 앞바다를 막지 않는 사이에 기요마사가 조선에 상륙했소. 내가 하는 말대로 따르지 않아서 천재일우(千載一遇)의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소.”

1월 19일, 이순신을 좋은 눈으로 보고 있지 않던 김응서는 그 말을 또 그대로 조정에 보고했다.

1월 21일에는 가토 기요마사가 이미 조선 땅으로 건너왔다는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보고가 올라왔고, 그 이튿날 황신(黃愼)도 같은 보고를 올렸다. 21일에 비변사에서 선조에게 수군의 출동을 건의했고, 선조는 가토 기요마사가 이미 건너왔다는 보고를 받았음에도 조선 수군의 출동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이 한산도에 전해진 것은 1월 말이나 늦어도 2월 2일이었다.

이순신은 그래도 어명(御命)을 어길 수 없다는 생각에 2월 2일 곧바로 함대를 이끌고 출동, 2월 10일부터 12일까지 부산포를 공격하고 귀로에 가덕도에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이 와중에 판옥선과 협선 각 한 척이 썰물에 빠져 일본 수군에게 나포되는 손실을 입기도 했다. 이순신이 이렇게 조정의 어리석은 명령을 단 한번도 거역하지 않고 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선조는 이순신이 조정을 속였다느니 출전을 하지 않았다느니 적군을 치지 않았다느니 하는 생트집을 잡았던 것이다.

당시 이순신의 처지를 생각하면 필자는 치미는 분노와 함께 눈물을 금할 수 없다. 그의 적은 일본군만이 아니었다. 힘이 되어줘야 할 국왕과 대신, 장수들까지 이순신을 적대시하여 해칠 기회만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타는 불에 기름을 붓듯 원균까지 이순신을 헐뜯는 장계를 보냈는데, 그 뒷부분은 이렇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수백명의 수군으로 영등포 앞으로 나가 몰래 가덕도 뒤에 주둔하면서 날랜 배를 가려 뽑아 삼삼오오 짝을 지어 절영도 밖에서 무위(武威)를 떨치고 100여명이나 200여명씩 대해에서 위세를 떨치면 청정(淸正)은 평소 수전(水戰)이 불리한 것에 겁을 먹고 있었으니 군사를 거두어 돌아갈 것이라 생각합니다.

원컨대 조정에서 수군으로써 바다 빧에서 맞아 공격해 적으로 하여금 상륙하지 못하게 한다면 반드시 걱정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는 신이 쉽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에 적군과 싸운 적이 있어서 이런 일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제 잠자코 있을 수 없어 감히 우러러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원균은 이렇게 해서 자신이 통제사가 된 다음에는 상부에서 아무리 출동을 하라고 해도 소 죽은 귀신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먼저 육군 30만명을 동원하여 안골포와 가덕도의 적군을 쳐야 한다면서 딴전을 피웠던 것이다.

당시 조정은 전란으로 나라가 망하기 직전에 이르렀음에도 동서로 갈라진 당뱅은 피난 중에도 그칠 줄 몰랐고, 국왕 선조는 오늘은 동인의 손을 들어줬다가 내일은 서인의 손을 들어줬다 하면서 자신의 왕권안보에만 관심을 쏟았다. 그런데 이순신이 흉계에 빠질 무렵에는 원균의 비호세력인 김응남(金應南), 윤두수(尹斗壽)를 중심으로 한 서인의 발언권이 더욱 강했다. 어전회의 때마다 서인은 이순신을 모함하는 반면 원균을 천거하기에 갖은 안간힘을 썼다.

◆ 한심하고 개탄스러운 어전회의

김응서(金應瑞)의 보고를 받은 직후인 1월 23일에 열린 어전회의에서는 이런 말들이 오고 갔다.

이 발언록을 읽어 보면 참으로 기막히다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자들이 일국의 임금이요, 조정 대신일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선조(宣祖) “한산도의 장수는 편안히 드러누워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윤두수(尹斗壽) “이순신은 왜적(倭敵)을 겁내는 것이 아니로 실상은 나아가 싸우기를 꺼리는 것입니다.”

이산해(李山海) “이순신은 정운(鄭運)과 원균(元均)이 없기 때문에 머뭇거리게 된 것입니다.”

김응남(金應南) “정운은 이순신이 싸움에 나서지 않기 때문에 죽이려고 하자 이순신이 겁을 내어 어쩔 수 없이 싸웠는데 해전에서 연승(聯勝)한 것은 정운이 격려해서 된 것이라고 정언신(鄭彦信)이 늘 정운의 사람됨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조 “이제 이순신에게 가등(加藤)의 머리를 잘라올 수 있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다만 군선을 거느리고 위세를 부리면서 기슭으로만 돌아다니며 종시 성의를 보이지 않으니 참으로 개탄할 일이로다! 이순신이 가등(加藤)의 상륙을 방관(傍觀)하여 다시 전란(戰亂)이 일어나게 되었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겠는가!”

선조와 대신들의 이러한 대화 내용은 정말 개탄할 일이었다. 이순신이 요시라의 말에 따라 가토 기요마사를 잡지 못하고, 정운과 원균이 없어서 감히 출전을 못하고 있다는 터무니없는 헛소리를 경쟁하듯 늘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을 실각시키려고 온갖 못된 꾀를 짜내던 서인 가운데 특히 윤두수(尹斗壽), 윤근수(尹根壽) 형제는 원균과 족친 관계였다. 원균과 윤근수가 동서라고도 하고, 또는 처남매부 간이라고도 한다.

어쨌든 일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나흘이 지난 1월 27일 어전회의에서는 이처럼 완전히 쐐기를 박는 대화가 오고 갔다.

선조(宣祖) “전라도 등지는 전혀 방비가 없고, 또 수군으로 한 명도 오는 자가 없다니 어찌 된 일인고?”

유성룡(柳成龍) “그곳에는 호령이 잘 행해지지 않기 때문에 군사들이 곧 나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윤두수(尹斗壽) “이순신은 조정의 명령을 무시하고 싸움을 꺼려 물러나서 한산도만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번 큰 계획이 실시될 수 없었으므로 어느 누가 통탄치 않겠습니까?”

정탁(鄭琢) “이순신은 과연 죄가 있습니다.”

선조 “이제는 설사 가등(加藤)의 머리를 손에 들고 온다고 해도 결코 그 죄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야!”

유성룡 “이순신은 동리 사람이라 신이 젊어서부터 잘 알았는데 능히 자기 직책을 다할 사람으로 보았으며, 또 평소 희망이 반드시 대장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선조 “글은 아는가?”

유성룡 “강직해서 남에게 굴복할 위인이 아니기에 신이 천거는 했습니다만 임진년(壬辰年)의 전공(戰功)으로 정헌(正憲)까지 올린 것은 지나친 일이었습니다.”

선조 “이순신은 용서할 수 없어!”

김응남(金應南) “수군으로는 원균만한 자가 없으니 그대로 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유성룡 “원균은 나라를 위한 정성도 적지 않습니다.”

선조 “원균을 통제사로 삼아 수군의 선봉에 세워야겠어.”

김응남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정탁 “이순신이 참으로 죄가 있기는 합니다만 이런 위급한 때에 대장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선조 “이순신은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어! 무신(武臣)으로 조정의 명령을 업신여기는 버릇을 징계하여 다스리지 않으면 안돼! 해야 할 일은 속히 하는 것이 옳다. 원균을 즉시 통제사에 임명한다.”

그렇게 해서 그날 어전회의는 원균을 통제사로 기용하는 것으로 결론을 보았다.

◆ 이순신의 파면과 하옥

2월 4일에는 사헌부에서 이순신을 하옥하여 정죄해야 한다는 주청을 올렸고, 6일에 선조(宣祖)는 이런 명령을 내렸다.

”선전관에게 표신(標信)과 밀부(密符)를 주어 잡아오게 하라. 또 원균과 교대한 뒤에 잡아오고, 만일 전쟁 중이면 싸움이 끝나고 쉬는 틈을 보아 잡아오도록 하라.”

이순신은 이처럼 난리가 나면 도망이나 치고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공론이나 일삼는 임금과 대신들의 아우성에 따라 해임되고 “조정을 속이고 적을 치지 않았다”는 등의 죄목을 뒤집어쓴 채 선전관에게 잡혀 올라가게 되었다. 그는 후임자인 원균에게 군사, 무기, 군량 등은 정확히 인계하고 그 달 26일 돼지우리 같은 남거에 실려 수많은 백성과 군사들이 비통하게 울부짖는 가운데 서울로 끌려갔다.

이순신행록(李舜臣行錄)에 따르면 당시 이순신이 후임 통제사 원균에게 인계한 물품은 군량미 9천 914석, 화약 4천근, 총통 3백정 등이었다. 이 가운데 군량미는 영내에 있는 것이고, 총통도 전함에 장착된 것은 제외한 것이었으며, 이 밖에 휘하에 있는 병사와 전함 및 무기와 장비들도 일일이 수량을 밝혀 정확히 인계하였다.

선조실록(宣祖實錄)에 따르면 당시 조선 삼도수군(朝鮮三道水軍)은 전함 130여척에 격군 1만 3천여명으로 나와 있다.

이순신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선전관에게 붙잡혀 서울로 끌려간다는 소문이 퍼지자 수많은 백성들이 길가에 쏟아져 나와 앞길을 가로막고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통제사 영감! 저희를 두고 어디로 가십니까?”

”장군! 이제 앞으로 우리 백성들은 어찌 살라고 하십니까?”

이순신이 서울로 압송된 것은 3월 4일이었다. 그는 그날 저녁에 바로 의금부 감옥에 갇혔다.

당대의 명필(名筆)로 알려진 석봉(石峰) 한호(韓濩)가 감옥에 찾아와 이렇게 위로하며 걱정했다.

”주상(主上) 전하(殿下)께서 극도로 진노하시고, 또 조정의 여론도 엄중하여 사태가 어찌 될지 알 수 없으니 어쩌면 좋겠소?”


그러자 이순신이 이렇게 대답했다.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오. 죽게 되면 죽어야지 어쩌겠소?”

이순신의 죄명은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업신여긴 죄, 적을 놓아주어 나라를 저버린 죄, 남의 공로를 빼앗고, 제멋대로가 아닌게 없고 꺼리는게 없는 죄 등 네가지였다. 이순신은 투옥된 지 8일 뒤인 3월 12일에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기망했다는 죄목은 국왕 선조의 자의적인 해석에 따른 것이고, 적을 놓아주었다는 죄목도 이미 자세히 설명했듯이 전적으로 허구에 불과했다. 또 남의 공로를 빼앗았다는 말은 부산포의 왜군 진영에 불을 지른 것과 개전 초의 전공(戰功)이 모두 원균의 것인데, 이순신이 가로챘다는 것이니, 네가지 죄목 모두 근거도 없고 황당무계한 죄목이었다. 이는 나중에 모두 혐의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국왕 선조는 이처럼 객관적이며 실체적인 진실에 따라 신하를 처벌하려는 것이 아니라 죽이고 싶은 신하에게는 무슨 죄목이든 덮어씌워 죽여야만 속이 시원했던 것이다.

◆ 의병대장 김덕령의 억울한 죽음

이에 앞서 의병대장 김덕령(金德齡)의 억울하고 원통한 죽음도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왜냐하면 선조(宣祖)가 김덕령을 역적으로 몰아 죽인 사건이 이순신을 죽이려 했던 경우와 그 정황이 매우 비슷했기 때문이다.

김덕령은 1567년 11월 29일에 오늘의 광주직할시 북구 충효동인 석저촌에서 김붕섭(金鵬燮)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나주목사를 지낸 김윤제(金允梯)와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배웠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과거를 보지 않았다. 그는 집안이 가난했지만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한데다가 또한 효자로 이름났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을 때 그의 나이 26세였다. 그는 형 덕홍(德弘)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군사 6백명을 모았다. 부대를 이끌고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로 올라갔을 때 형이 김덕령에게 말했다.

”나는 이미 죽기를 작정한 몸이고 또 너보다는 오래 살았으니 내가 먼저 죽는 것이 옳겠구나. 내가 아무리 생가해봐도 또 다시 병석에 누워 계신 어머니를 두고 형제가 둘씩이나 죽을 곳을 찾아 나선 것은 잘못인 듯하다. 그러니까 너는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모시는 것이 좋겠다.”

김덕령이 듣고 형의 말이 옳다고 여겨 두 형제는 작별을 했다. 형은 고경명(高敬命)의 휘하에서 그 다음달에 벌어진 금산전투(錦山戰鬪)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이듬해에 형의 전사 소식을 들은 어머니의 병세가 악화되어 돌아가시고 말았다. 김덕령은 상복을 입은 채 다시 의병을 일으켜 5천여명의 군사를 모았다.

김덕령은 몸집이 작은 편이었지만 용력이 뛰어나고 무술도 능한 천부적인 장수감이었다. 그는 곽재우(郭再祐)와 더불어 권율 휘하에서 영남방어작전에 참가하기도 했고 , 또 이순신 장군을 도와 수륙합동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조정에서는 그의 전공(戰功)을 높이 평가해 선전관이니 형조좌랑이니 하는 벼슬과 더불어 익호장군(翼虎將軍)이라는 칭호를 주고, 그가 인솔하는 의병부대에게도 충용군(忠勇軍)이라는 부대명칭을 특별히 내려주었다.


그런데 강화교섭이 시작되자 전황은 지리멸렬 소강상태에 빠져버리고, 성격이 불같이 급한 김덕령은 그것이 너무나 못마땅했다. 그는 한때 홧병이 나서 병석에 눕기도 했다. 그러던 중 군율을 엄하게 시행하다 군졸 하나가 곤장을 맞고 죽는 사건이 벌어졌다. 또 탈주병을 잡으려고 그 아비를 잡아다 곤장을 치자 죽어버린 사건도 생겼다. 군사를 함부로 죽이는 인물이라 처형해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김덕령은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선조가 그의 전공(戰功)을 생각하여 석방했으므로 본진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다가 엉뚱하게도 1596년 7월에 충청도에서 일어난 이몽학(李夢鶴)의 반란에 연루되어 또 다시 잡혀 올라가게 되었다. 상관의 명령에 따라 토벌군을 이끌고 갔던 김덕령이 오히려 반란군과 내통했다는 터무니없는 죄를 뒤집어쓴 것이었다. 선조가 친히 국문하는데 이런 대화가 오고 갔다.

선조(宣祖) “너는 역적 한현, 이몽학의 무리와 결탁하여 나라가 위급한 틈을 타 반역을 꾀했다. 이제 숨김없이 사실대로 고하라.”

김덕령(金德齡) “시시비비는 분명해야 하거늘 어찌 조금도 감추겠습니까. 신은 나라를 위해 친척을 작별하고 선영을 버리고 온갖 고초를 겪었습니다. 나라에서는 오히려 상을 베푸셔야 할 것입니다. 신이 헛된 이름을 지녔기에 적도들이 신을 시기하고 모함한 듯합니다. 7월 14일에 도원수의 명령에 따라 적도들을 치기 위해 달려갔으나 이미 진압되어 본진으로 돌아간 것밖에는 아무 죄가 없습니다.”


그러나 선조는 김덕령이 역적과 내통했음이 분명하니 즉시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예나 이제나 재주란 오로지 저보다 뛰어난 사람을 시기하고 모함하는 것밖에는 모르는 소인배들이 높은 자리에 앉아 임금에게 맞장구를 쳤다.

유성룡이 나서서 김덕령의 죄란 역적들이 찍어다 붙인 것에 불과하니 시일을 두고 자세히 조사해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무슨 미운털이 박혔는지 선조는 김덕령 같은 자는 고문을 당하다가 죽어도 괜찮다는 극언을 했다. 선조는 이처럼 엽기적인 인물이었다.

나중에 저승에 가서 선조가 먼저 간 김덕령에게 사과를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여섯 차례의 무자비한 고문을 당한 끝에 일세의 영웅 김덕령은 마침내 천추의 한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그때 아까운 나이 29세였다.

참고서적; 황원갑(黃源甲) 저술 “부활하는 이순신” 에코비즈니스(EcoBusiness) 2004, 김종대(金宗代) 저술 “신(臣)에게는 아직도 열두척의 군선이 있습니다.” 북포스(BookFors) 2001, 최두석(崔頭錫) 저술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이순신(李舜臣)” 일각 1999, 김형광(金炯光) 저술 “인물로 보는 조선사(朝鮮史)” 시아출판사 2003.

{계속}


「불패의 명장 이순신(李舜臣)」10.백의종군(白衣從軍) (3)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외적의 침범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우리 선조들은 뜨거운 구국(救國)의 의지와 비상한 투지로 국난(國難)을 극복해왔다. 국난을 당할 때마다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민족적 기상을 높이 떨친 구국의 영웅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이순신이야말로 그 숱한 영웅, 호걸, 충신, 열사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위인이라는 사실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순신(李舜臣)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는 미증유의 재앙을 당해 나라와 겨레의 멸망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 조선 수군을 총지휘하여 갖가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필승의 신념과 비상한 전략으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올린 불세출의 명장이었다. 그는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54년의 길지 않은 일생을 보내는 동안 온갖 고난 속에서도 오로지 충효(忠孝), 인의(仁義)와 애국애족정신(愛國愛族精神)으로 일관한 민족의 큰 스승이었다.

영국 해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냈던 빌라드(G.A.Billard) 소장(少將)은 "조선의 이순신이라는 해군 제독이 넬슨(Horatio Nelson)에 버금가는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영국인들은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이순신이 동양 최고의 해군 제독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이순신을 평가하였다. 중국계 미국인 역사학자로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교 교수인 레이 황(Ray Hwang) 박사는 동양사 3대 전쟁 영웅으로 조선의 이순신(李舜臣), 베트남 다이비에이 왕조의 첸 훈다오[千訓道], 중국 명나라의 원숭환(袁崇煥)을 들면서 그 중에서도 이순신이 가장 위대한 공훈을 남긴 영웅이라고 칭송하였다.

오늘날 나라 안팎의 정세, 특히 또다시 빠진 정치적, 경제적 위기에 비추어볼 때 이순신은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절세의 명장, 구국의 영웅이라는 면모에 더해 비상한 리더십을 갖춘 최고 경영자였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21세기라는 새로운 격변의 시대,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여 강대국들과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우리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의 그 어떤 위인보다도 위대했던 성웅(聖雄) 이순신의 리더십을 통해 국난극복의 지혜를 찾아야 할 것이다.

◆ 일본군의 간계와 조선 관군 수뇌부의 오판

일본군 선봉장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이미 그 지나해 겨울에 조선으로 건너와 거제도에 있었고, 이어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도 바다를 건너와 울산 서생포에 상륙했다.

이렇게 해서 일본은 정유재란(丁酉再亂)을 일으켰지만 조선에 염라대왕(閻羅大王)보바도 더 무서운 인물이 있어서 마음대로 대한해협을 건너올 수가 없었으니 그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조선의 바다를 지키고 있는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의 뛰어난 전략과 조선 수군의 무서운 화력을 그동안의 해상전투를 통해 뼈저리게 알고 있는 일본군인지라 섣불리 정면공격을 가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궁리를 거듭하던 일본군 지휘부는 마침내 이순신을 제거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특히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 같은 왜장들은 조선에서 오래 전쟁을 치르는 동안 조선 국왕 선조(宣祖)의 성격, 조정의 당쟁, 이순신과 원균 간의 불화 등에 관해 비교적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 틈새를 파고들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이순신을 실각시키든지, 그것이 안 되면 이순신을 함정 속으로 유인하여 제거하려는 간계를 꾸몄던 것이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그의 부하이면서 조선의 언어에 능통해 통역을 전담했던 요시라를 간첩으로 삼아 그에게 밀명을 내렸다. 요시라가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김응서(金應瑞)를 몰래 찾아가서 이렇게 일렀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사이가 나쁜 가토 기요마사를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기요마사가 머잖아 일본에서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올 것인데, 내가 그 시간을 알아가지고 기요마사가 탄 선박을 가르쳐줄 것이니 조선에서는 통제사를 시켜 수군을 이끌고 바다를 지키게 하시오. 그러면 백전백승(百戰百勝)하는 통제사로서는 그를 잡아 목을 벨 수 있을 것이니, 그렇게 하면 첫째로 조선의 원수를 갚는 것이요, 다음은 유키나가의 마음도 통쾌할 것입니다."

이것은 이순신이 지키고 있는 한 바다를 건너 조선을 침공할 수 없다고 판단한 적군의 간계였으나 병법(兵法)의 병(兵)자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무능한 장수와 조정 대신들은 이 말을 그대로 믿었다.

나중에 유성룡(柳成龍)은 요시라란 자의 정체에 대해 징비록(懲毖錄)에 이렇게 썼다.

"요시라가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드나들며 우리나라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므로 김응서가 특별히 대해주고 또 도원수에게 보고하여 포상을 받게 했다. 그런 뒤로 우리 진영에 무상출입하면서 저희 나라에 가면 倭놈 복색을 하고 우리나라에 오면 우리 의관을 바꾸어 입고서 온갖 정보를 물어가는 것이었다."

김응서는 그 말을 그대로 믿고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과 조정에 보고했고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수군을 이끌고 출정하여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를 요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1월 14일에는 도원수 권율이 몸소 한산도에 와서 명령을 하달했다. 이순신은 이는 왜적(倭敵)의 간계라는 사실을 간파하여 이렇게 말했다.

"지금 왜군이 있는 부산으로 진격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반드시 왜적(倭敵)의 복병이 있을 것입니다. 또 우리가 함대를 많이 끌고 나가면 적군이 모를 리 없고, 적게 끌고 나가면 오히려 포위를 당할 것입니다. 또 倭 人이 하는 말은 본래부터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미 이순신의 함대에게 여러차례 참패를 당했던 일본 수군은 오래 전부터 조선 수군과의 전면전(全面戰)을 피하고 해안가에서 조선 수군을 포격할 수 있는 지역에 성을 쌓은 뒤 조선 수군이 한산도에서 부산으로 오는 길목마다 복병을 배치시키고 있었다. 그때, 부산에 잔류하고 있는 일본군의 병력은 2만도 넘었다. 만일 조선 수군이 한산도에서 출정하면 일본 수군이 안골포와 가덕도에 전진배치될 것이고 이렇게 되면 부산에 당도하기도 전에 한바탕 치열한 접전을 펼치는 것이 불가피했다.

설사 조선 수군이 부산까지 진격한다고 해도 가토 기요마사의 상륙을 막자면 절영도와 대마도 사이에 진형을 펴야 하는데 외해(外海)의 급물살을 견뎌내면서 진을 친다는 것은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조선 수군의 함대 규모가 일본 수군 전체에 비해 너무나 열세라는 사실이었다. 당시 한산도 통제영의 군선 수효는 130여척이었다. 하지만 부산에 정박하고 있는 일본의 군선은 3백여척 안팎이었고, 조선에 대한 재침공을 위해 대마도에서 조선으로 올 일본 군선의 예상 수효만도 역시 4백여척에 이르렀다.

조선 수군이 만약 보유하고 있는 전 군선의 반을 잃을 경우를 각오하고 적군과 교전을 한다고 가정해 봐도 상황은 매우 불리했다. 만일 부산으로 오는 일본 군선 4백여척 중 반이 거제도의 내해(內海)를 돌아 수군 본영을 장악해 버리면 적군의 서진(西進)을 막을 길은 너무도 요원한 것이다. 아무리 제갈량(諸葛亮)을 능가하는 훌륭한 전략가라 할지라도 이런 상황에서 함대를 이끌고 한산도에서 부산까지 진격하는 것은 절대 이길 수 없는 전투였으며,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그때 이미 가토 기요마사는 1월 12일에 가덕도로 건너와서 13일에는 다대포를 거쳐 울산 서생포에 건너와 있었다. 일본군의 첩자인 요시라는 다시 김응서에게 가서 이간책을 썼다.

"이순신이 부산 앞바다를 막지 않는 사이에 기요마사가 조선에 상륙했소. 내가 하는 말대로 따르지 않아서 천재일우(千載一遇)의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소."

1월 19일, 이순신을 좋은 눈으로 보고 있지 않던 김응서는 그 말을 또 그대로 조정에 보고했다.

1월 21일에는 가토 기요마사가 이미 조선 땅으로 건너왔다는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보고가 올라왔고, 그 이튿날 황신(黃愼)도 같은 보고를 올렸다. 21일에 비변사에서 선조에게 수군의 출동을 건의했고, 선조는 가토 기요마사가 이미 건너왔다는 보고를 받았음에도 조선 수군의 출동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이 한산도에 전해진 것은 1월 말이나 늦어도 2월 2일이었다.

이순신은 그래도 어명(御命)을 어길 수 없다는 생각에 2월 2일 곧바로 함대를 이끌고 출동, 2월 10일부터 12일까지 부산포를 공격하고 귀로에 가덕도에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이 와중에 판옥선과 협선 각 한 척이 썰물에 빠져 일본 수군에게 나포되는 손실을 입기도 했다. 이순신이 이렇게 조정의 어리석은 명령을 단 한번도 거역하지 않고 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선조는 이순신이 조정을 속였다느니 출전을 하지 않았다느니 적군을 치지 않았다느니 하는 생트집을 잡았던 것이다.

당시 이순신의 처지를 생각하면 필자는 치미는 분노와 함께 눈물을 금할 수 없다. 그의 적은 일본군만이 아니었다. 힘이 되어줘야 할 국왕과 대신, 장수들까지 이순신을 적대시하여 해칠 기회만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타는 불에 기름을 붓듯 원균까지 이순신을 헐뜯는 장계를 보냈는데, 그 뒷부분은 이렇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수백명의 수군으로 영등포 앞으로 나가 몰래 가덕도 뒤에 주둔하면서 날랜 배를 가려 뽑아 삼삼오오 짝을 지어 절영도 밖에서 무위(武威)를 떨치고 100여명이나 200여명씩 대해에서 위세를 떨치면 청정(淸正)은 평소 수전(水戰)이 불리한 것에 겁을 먹고 있었으니 군사를 거두어 돌아갈 것이라 생각합니다.

원컨대 조정에서 수군으로써 바다 빧에서 맞아 공격해 적으로 하여금 상륙하지 못하게 한다면 반드시 걱정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는 신이 쉽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에 적군과 싸운 적이 있어서 이런 일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제 잠자코 있을 수 없어 감히 우러러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원균은 이렇게 해서 자신이 통제사가 된 다음에는 상부에서 아무리 출동을 하라고 해도 소 죽은 귀신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먼저 육군 30만명을 동원하여 안골포와 가덕도의 적군을 쳐야 한다면서 딴전을 피웠던 것이다.

당시 조정은 전란으로 나라가 망하기 직전에 이르렀음에도 동서로 갈라진 당뱅은 피난 중에도 그칠 줄 몰랐고, 국왕 선조는 오늘은 동인의 손을 들어줬다가 내일은 서인의 손을 들어줬다 하면서 자신의 왕권안보에만 관심을 쏟았다. 그런데 이순신이 흉계에 빠질 무렵에는 원균의 비호세력인 김응남(金應南), 윤두수(尹斗壽)를 중심으로 한 서인의 발언권이 더욱 강했다. 어전회의 때마다 서인은 이순신을 모함하는 반면 원균을 천거하기에 갖은 안간힘을 썼다.

◆ 한심하고 개탄스러운 어전회의

김응서(金應瑞)의 보고를 받은 직후인 1월 23일에 열린 어전회의에서는 이런 말들이 오고 갔다.

이 발언록을 읽어 보면 참으로 기막히다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자들이 일국의 임금이요, 조정 대신일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선조(宣祖) "한산도의 장수는 편안히 드러누워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윤두수(尹斗壽) "이순신은 왜적(倭敵)을 겁내는 것이 아니로 실상은 나아가 싸우기를 꺼리는 것입니다."

이산해(李山海) "이순신은 정운(鄭運)과 원균(元均)이 없기 때문에 머뭇거리게 된 것입니다."

김응남(金應南) "정운은 이순신이 싸움에 나서지 않기 때문에 죽이려고 하자 이순신이 겁을 내어 어쩔 수 없이 싸웠는데 해전에서 연승(聯勝)한 것은 정운이 격려해서 된 것이라고 정언신(鄭彦信)이 늘 정운의 사람됨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조 "이제 이순신에게 가등(加藤)의 머리를 잘라올 수 있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다만 군선을 거느리고 위세를 부리면서 기슭으로만 돌아다니며 종시 성의를 보이지 않으니 참으로 개탄할 일이로다! 이순신이 가등(加藤)의 상륙을 방관(傍觀)하여 다시 전란(戰亂)이 일어나게 되었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겠는가!"

선조와 대신들의 이러한 대화 내용은 정말 개탄할 일이었다. 이순신이 요시라의 말에 따라 가토 기요마사를 잡지 못하고, 정운과 원균이 없어서 감히 출전을 못하고 있다는 터무니없는 헛소리를 경쟁하듯 늘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을 실각시키려고 온갖 못된 꾀를 짜내던 서인 가운데 특히 윤두수(尹斗壽), 윤근수(尹根壽) 형제는 원균과 족친 관계였다. 원균과 윤근수가 동서라고도 하고, 또는 처남매부 간이라고도 한다.

어쨌든 일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나흘이 지난 1월 27일 어전회의에서는 이처럼 완전히 쐐기를 박는 대화가 오고 갔다.

선조(宣祖) "전라도 등지는 전혀 방비가 없고, 또 수군으로 한 명도 오는 자가 없다니 어찌 된 일인고?"

유성룡(柳成龍) "그곳에는 호령이 잘 행해지지 않기 때문에 군사들이 곧 나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윤두수(尹斗壽) "이순신은 조정의 명령을 무시하고 싸움을 꺼려 물러나서 한산도만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번 큰 계획이 실시될 수 없었으므로 어느 누가 통탄치 않겠습니까?"

정탁(鄭琢) "이순신은 과연 죄가 있습니다."

선조 "이제는 설사 가등(加藤)의 머리를 손에 들고 온다고 해도 결코 그 죄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야!"

유성룡 "이순신은 동리 사람이라 신이 젊어서부터 잘 알았는데 능히 자기 직책을 다할 사람으로 보았으며, 또 평소 희망이 반드시 대장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선조 "글은 아는가?"

유성룡 "강직해서 남에게 굴복할 위인이 아니기에 신이 천거는 했습니다만 임진년(壬辰年)의 전공(戰功)으로 정헌(正憲)까지 올린 것은 지나친 일이었습니다."

선조 "이순신은 용서할 수 없어!"

김응남(金應南) "수군으로는 원균만한 자가 없으니 그대로 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유성룡 "원균은 나라를 위한 정성도 적지 않습니다."

선조 "원균을 통제사로 삼아 수군의 선봉에 세워야겠어."

김응남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정탁 "이순신이 참으로 죄가 있기는 합니다만 이런 위급한 때에 대장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선조 "이순신은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어! 무신(武臣)으로 조정의 명령을 업신여기는 버릇을 징계하여 다스리지 않으면 안돼! 해야 할 일은 속히 하는 것이 옳다. 원균을 즉시 통제사에 임명한다."

그렇게 해서 그날 어전회의는 원균을 통제사로 기용하는 것으로 결론을 보았다.

◆ 이순신의 파면과 하옥

2월 4일에는 사헌부에서 이순신을 하옥하여 정죄해야 한다는 주청을 올렸고, 6일에 선조(宣祖)는 이런 명령을 내렸다.

"선전관에게 표신(標信)과 밀부(密符)를 주어 잡아오게 하라. 또 원균과 교대한 뒤에 잡아오고, 만일 전쟁 중이면 싸움이 끝나고 쉬는 틈을 보아 잡아오도록 하라."

이순신은 이처럼 난리가 나면 도망이나 치고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공론이나 일삼는 임금과 대신들의 아우성에 따라 해임되고 "조정을 속이고 적을 치지 않았다"는 등의 죄목을 뒤집어쓴 채 선전관에게 잡혀 올라가게 되었다. 그는 후임자인 원균에게 군사, 무기, 군량 등은 정확히 인계하고 그 달 26일 돼지우리 같은 남거에 실려 수많은 백성과 군사들이 비통하게 울부짖는 가운데 서울로 끌려갔다.

이순신행록(李舜臣行錄)에 따르면 당시 이순신이 후임 통제사 원균에게 인계한 물품은 군량미 9천 914석, 화약 4천근, 총통 3백정 등이었다. 이 가운데 군량미는 영내에 있는 것이고, 총통도 전함에 장착된 것은 제외한 것이었으며, 이 밖에 휘하에 있는 병사와 전함 및 무기와 장비들도 일일이 수량을 밝혀 정확히 인계하였다.

선조실록(宣祖實錄)에 따르면 당시 조선 삼도수군(朝鮮三道水軍)은 전함 130여척에 격군 1만 3천여명으로 나와 있다.

이순신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선전관에게 붙잡혀 서울로 끌려간다는 소문이 퍼지자 수많은 백성들이 길가에 쏟아져 나와 앞길을 가로막고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통제사 영감! 저희를 두고 어디로 가십니까?"

"장군! 이제 앞으로 우리 백성들은 어찌 살라고 하십니까?"

이순신이 서울로 압송된 것은 3월 4일이었다. 그는 그날 저녁에 바로 의금부 감옥에 갇혔다.

당대의 명필(名筆)로 알려진 석봉(石峰) 한호(韓濩)가 감옥에 찾아와 이렇게 위로하며 걱정했다.

"주상(主上) 전하(殿下)께서 극도로 진노하시고, 또 조정의 여론도 엄중하여 사태가 어찌 될지 알 수 없으니 어쩌면 좋겠소?"


그러자 이순신이 이렇게 대답했다.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오. 죽게 되면 죽어야지 어쩌겠소?"

이순신의 죄명은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업신여긴 죄, 적을 놓아주어 나라를 저버린 죄, 남의 공로를 빼앗고, 제멋대로가 아닌게 없고 꺼리는게 없는 죄 등 네가지였다. 이순신은 투옥된 지 8일 뒤인 3월 12일에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기망했다는 죄목은 국왕 선조의 자의적인 해석에 따른 것이고, 적을 놓아주었다는 죄목도 이미 자세히 설명했듯이 전적으로 허구에 불과했다. 또 남의 공로를 빼앗았다는 말은 부산포의 왜군 진영에 불을 지른 것과 개전 초의 전공(戰功)이 모두 원균의 것인데, 이순신이 가로챘다는 것이니, 네가지 죄목 모두 근거도 없고 황당무계한 죄목이었다. 이는 나중에 모두 혐의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국왕 선조는 이처럼 객관적이며 실체적인 진실에 따라 신하를 처벌하려는 것이 아니라 죽이고 싶은 신하에게는 무슨 죄목이든 덮어씌워 죽여야만 속이 시원했던 것이다.

◆ 의병대장 김덕령의 억울한 죽음

이에 앞서 의병대장 김덕령(金德齡)의 억울하고 원통한 죽음도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왜냐하면 선조(宣祖)가 김덕령을 역적으로 몰아 죽인 사건이 이순신을 죽이려 했던 경우와 그 정황이 매우 비슷했기 때문이다.

김덕령은 1567년 11월 29일에 오늘의 광주직할시 북구 충효동인 석저촌에서 김붕섭(金鵬燮)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나주목사를 지낸 김윤제(金允梯)와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배웠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과거를 보지 않았다. 그는 집안이 가난했지만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한데다가 또한 효자로 이름났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을 때 그의 나이 26세였다. 그는 형 덕홍(德弘)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군사 6백명을 모았다. 부대를 이끌고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로 올라갔을 때 형이 김덕령에게 말했다.

"나는 이미 죽기를 작정한 몸이고 또 너보다는 오래 살았으니 내가 먼저 죽는 것이 옳겠구나. 내가 아무리 생가해봐도 또 다시 병석에 누워 계신 어머니를 두고 형제가 둘씩이나 죽을 곳을 찾아 나선 것은 잘못인 듯하다. 그러니까 너는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모시는 것이 좋겠다."

김덕령이 듣고 형의 말이 옳다고 여겨 두 형제는 작별을 했다. 형은 고경명(高敬命)의 휘하에서 그 다음달에 벌어진 금산전투(錦山戰鬪)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이듬해에 형의 전사 소식을 들은 어머니의 병세가 악화되어 돌아가시고 말았다. 김덕령은 상복을 입은 채 다시 의병을 일으켜 5천여명의 군사를 모았다.

김덕령은 몸집이 작은 편이었지만 용력이 뛰어나고 무술도 능한 천부적인 장수감이었다. 그는 곽재우(郭再祐)와 더불어 권율 휘하에서 영남방어작전에 참가하기도 했고 , 또 이순신 장군을 도와 수륙합동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조정에서는 그의 전공(戰功)을 높이 평가해 선전관이니 형조좌랑이니 하는 벼슬과 더불어 익호장군(翼虎將軍)이라는 칭호를 주고, 그가 인솔하는 의병부대에게도 충용군(忠勇軍)이라는 부대명칭을 특별히 내려주었다.


그런데 강화교섭이 시작되자 전황은 지리멸렬 소강상태에 빠져버리고, 성격이 불같이 급한 김덕령은 그것이 너무나 못마땅했다. 그는 한때 홧병이 나서 병석에 눕기도 했다. 그러던 중 군율을 엄하게 시행하다 군졸 하나가 곤장을 맞고 죽는 사건이 벌어졌다. 또 탈주병을 잡으려고 그 아비를 잡아다 곤장을 치자 죽어버린 사건도 생겼다. 군사를 함부로 죽이는 인물이라 처형해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김덕령은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선조가 그의 전공(戰功)을 생각하여 석방했으므로 본진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다가 엉뚱하게도 1596년 7월에 충청도에서 일어난 이몽학(李夢鶴)의 반란에 연루되어 또 다시 잡혀 올라가게 되었다. 상관의 명령에 따라 토벌군을 이끌고 갔던 김덕령이 오히려 반란군과 내통했다는 터무니없는 죄를 뒤집어쓴 것이었다. 선조가 친히 국문하는데 이런 대화가 오고 갔다.

선조(宣祖) "너는 역적 한현, 이몽학의 무리와 결탁하여 나라가 위급한 틈을 타 반역을 꾀했다. 이제 숨김없이 사실대로 고하라."

김덕령(金德齡) "시시비비는 분명해야 하거늘 어찌 조금도 감추겠습니까. 신은 나라를 위해 친척을 작별하고 선영을 버리고 온갖 고초를 겪었습니다. 나라에서는 오히려 상을 베푸셔야 할 것입니다. 신이 헛된 이름을 지녔기에 적도들이 신을 시기하고 모함한 듯합니다. 7월 14일에 도원수의 명령에 따라 적도들을 치기 위해 달려갔으나 이미 진압되어 본진으로 돌아간 것밖에는 아무 죄가 없습니다."


그러나 선조는 김덕령이 역적과 내통했음이 분명하니 즉시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예나 이제나 재주란 오로지 저보다 뛰어난 사람을 시기하고 모함하는 것밖에는 모르는 소인배들이 높은 자리에 앉아 임금에게 맞장구를 쳤다.

유성룡이 나서서 김덕령의 죄란 역적들이 찍어다 붙인 것에 불과하니 시일을 두고 자세히 조사해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무슨 미운털이 박혔는지 선조는 김덕령 같은 자는 고문을 당하다가 죽어도 괜찮다는 극언을 했다. 선조는 이처럼 엽기적인 인물이었다.

나중에 저승에 가서 선조가 먼저 간 김덕령에게 사과를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여섯 차례의 무자비한 고문을 당한 끝에 일세의 영웅 김덕령은 마침내 천추의 한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그때 아까운 나이 29세였다.

참고서적; 황원갑(黃源甲) 저술 "부활하는 이순신" 에코비즈니스(EcoBusiness) 2004, 김종대(金宗代) 저술 "신(臣)에게는 아직도 열두척의 군선이 있습니다." 북포스(BookFors) 2001, 최두석(崔頭錫) 저술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이순신(李舜臣)" 일각 1999, 김형광(金炯光) 저술 "인물로 보는 조선사(朝鮮史)" 시아출판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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