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我が民族の歴史が始まった以来幾多の外的の侵犯があったがその時ごとにうちの先祖たちは熱い救国(救国)の意志とすごい闘志で国難(国難)を乗り越えて来た. 国難にあう度に卓越なリーダーシップを発揮して民族的気象を高くふるった救国の英雄はいちいち数え切れないだけ多いが, 李舜臣こそその多い英雄, 豪傑, 忠臣, 烈士の中にもきっての偉人という事実にはその誰も異意を申し立てることができないだろう.

李舜臣(李舜臣)は韓国歴史上最高の戦争英雄で壬辰の乱(壬辰倭乱), 丁酉災乱(丁酉再乱)という未曽有の災いにあって国と同胞の滅亡が目の前に至った時朝鮮水軍を総指揮していろいろの不利な与件の中でも必勝の信念とすごい戦略で勝ちっ放し(連戦連勝)をあげた不世出の名将だった. 彼は貧しい士の息子に生まれて 54年の長くない一生を送る間あらゆる苦難の中でもひたすら忠孝(忠孝), 仁義(仁義)と愛国愛族精神(愛国愛族精神)に一貫した民族の大きい師匠だった.

イギリス海軍兵学校校長を勤めたビルラド(G.A.Billard) 所長(少将)は ¥”朝鮮の李舜臣という海軍提督がネルソン(Horatio Nelson)に劣らないすぐれた指揮官という事実をイギリス人たちは認めにくいが李舜臣が東洋最高の海軍提督という点は否定することができない事実だ.¥”と李舜臣を評価した. 中国係アメリカ人歴史学者でアメリカワシントン州立大学校教授であるレイ硫黄(Ray Hwang) 博士は東洋史 3台戦争英雄で朝鮮の李舜臣(李舜臣), ベトナム多異美瑛王朝のチェンフンダオ[千訓道], 中国明のワンスングファン(袁崇煥)を持ちながらその中でも李舜臣が一番偉い手柄を残した英雄だとほめたたえた.

今日国内外の情勢, 特に再び抜けた政治的, 経済的危機に照らして見る時李舜臣は今まで知られて来た節税の名将, 救国の英雄という面貌に加えてすごいリーダーシップを取り揃えた最高経営者だったという事実を今更節減するようになる. 21世紀という新しい激変の時代, 激動の時代を迎えて強大国たちとの無限競争で生き残るためにしても私たちは東西古今(東西古今)のどんな偉人よりも偉かった聖雄(聖雄) 李舜臣のリーダーシップを通じて国難克服の知恵を捜さなければならないでしょう.

◆ 四天海戦(泗川海戦)と唐布海戦(唐浦海戦)

5月 27日, 全裸左水使(全羅左水使) 李舜臣(李舜臣)は全力の補強のために全裸右水使(全羅右水使) イオックギ(李億祺)に 6月 3日まで左水営で合流することを要請しておいていた. ところが ¥”賊船 10余隻が四天, ゴンヤング等地を侵犯したので南海露梁で避けている.¥”は元均の公文書を受けるようになるとイオックギを待つことができずに 29日にまさに艦隊を出動させた.

李舜臣は空いている左水営を守る留陣場で自分の直属軍官であるユンサゴング(尹思共)を任命して粗放場停車を(丁絶)を左水営のドルモリであるフングヤングに派遣した. またイオックギには戦況が急だから速く付いて来て合流することを要請するなど万般の対備策を用意した後 23尺の伝えることを従えて元均が待っている露梁沖合に出動した.

この時全裸左水営(全羅左道水営) 艦隊の編制をよく見れば中尉場にスンチョン副詞(順天府使) グォンズン(権俊), 中部場に光陽県監(光陽県監) 御影談(魚泳潭), 前部長にバングダブチォムサ(防踏僉使) 李舜臣(李純信), 後部場にフングヤングヒョンガム(興陽県監) ベホングリブ(〓興立), 左部長に落雁軍需(楽安郡守) 信号(申浩), 愚夫場にポソン軍需(宝城郡守) ギムドックグァン(金得光), 左斥候章にノックドマンホ(鹿島万戸) ゾングウン(鄭運), ウチォックフ章に使徒晨辞(社島僉使) ギムワン(金浣), 左別途場に雨後うつらな状態区(李夢亀), ウビョルドザングに女道権官(呂島権管) 金インヨン(金仁英), した後章に軍官ゴアンチェック(高安策)と回声(宋晟), 真実退場に李応化(李応華), 亀船[亀船] 突撃将に二言量(李彦良), イギナム(李奇男) などだった.

29日にスンチョン沖合を通って露梁海峡の方に入って行くと河東潟で待っていた軽傷右水使(慶尚右水使) 元均(元均)がやっと 3尺の軍船を従えて現われた.

李舜臣が元均に聞いた.

¥”敵軍は今どこにありなさい?¥”

すると元均が西の方を示しながら答えた.

¥”倭船が今四天に至りなさい.¥”

そうした渦中に遠く賊船一尺がゴンヤングから出て四千ページで逃げる姿が見えた. 李舜臣が直ちに言い付けた.

¥”あの倭船を追い付きなさい!¥”

賊船を追撃する中今日の泗川市ウブナムミョン潟にボングザックしている賊船 15尺を見つけた. あの時日本軍は陸地にお腹をつけて上陸してブンタングジルを打っていた. 彼らは朝鮮水軍を見ると海辺高い丘に上がって見下ろしてでたらめに弔銃をうった.

板屋船が狭い潟に入ればまともに動くことができなかったので李舜臣は誘引作戦を使って彼らを引っ張り出そうと思った. しかし敵兵たちは朝鮮水軍を追って広い海に出ようと思わないで守勢的な戦法を固守した. ちょうど助手が変わって満ち潮になると李舜臣は二言量(李彦良) などに言い付けて敵陣を攻撃するようにした. 初めて亀船が海上戦闘でその威力を発揮する瞬間だった.

亀船が潟に身近に近付くと日本軍は初めに見る亀船の珍しい姿にしばらく荒てている途中弔銃射撃をしたが銃弾は亀船の鉄板の上をはじけさせられて行くだけだった. 日本軍は亀船で導線(渡船)してお腹を燃やそうと思ったが亀船屋根の上にぎっしりとささった錐とチァングチォックに足裏が突かれて足が抜けて悽惨な光景を演出した. 亀船がまるで無人之境(無人之境)を経つように敵陣を掻き乱して通って砲弾を発射すると賊船が割れて燃えて海の中に沈んだし丘の上の日本軍も砲弾と矢攻撃で数百の死傷者を出してしまった.

しかし日本軍が朝鮮水軍の大長線で弔銃射撃を集中させて戦闘を指揮した李舜臣が左側肩に弾丸を当たる負傷を負うようになった. が戦闘で朝鮮水軍は賊船 13尺を撃沈させて敵兵 3千名余を殺傷する戦果をあげた. 李舜臣の二番目勝捷(勝捷)である四天海戦(泗川海戦)だった.

6月 1日, 艦隊を移動させて今日の統営市シャラン島で夜を過ごして, 翌朝 8時頃統営市山陽面である唐布に至ったら日本軍軍船 30余隻が停泊していた. 敵軍の艦隊はアダケフだね[安宅船]が 9尺, 関部だね[関船]とゴバなの[小早]がそれぞれ 12尺だったが, その樓閣の上に賊将一つが堪えて座っていた. 李舜臣の艦隊は直ちに亀船を先に立たせて猛烈な攻撃を開始した.

中尉場グォンズン(権俊)が敵軍の大長線にお腹を身近に付けるようにして賊将旧塁シマミチユキ[来島通之]に向けて弓矢(弓矢)をうった. ミチユキが左側胸に矢を当たって倒れるとウチォックフ章ギムワン(金浣)と軍官神武性(陳武晟)が賊船で跳びこんでミチユキの首を枕にして, その需給(首級)を刃先にクェオドルオッダ. ここに買うのが衝天した朝鮮水軍が天子総統(天字銃筒)と勝字銃筒(勝字銃筒)をでたらめにうちながら攻勢を強化すると戦意を喪失した日本水軍は乱れているように散らばって逃げるのに忙しかった.

が唐布海戦(唐浦海戦)で李舜臣の艦隊は賊船 21尺を打ち破って敵兵 4千名余を殲滅する勝利をおさめた. この時釜山の方から群がって来た時では 21尺が朝鮮水軍を見ると急に開度に退却して影をひそめた. これらは朝鮮水軍の攻撃を受ける前に皆逃げたように見えなかった.

◆ 賊将の需給(首級)だけ七個を切った第1次タンハン布海戦(唐項浦海戦)

6月 4日には夜明けから霧が立ち込めて活動をするには多方面に不便だった. 李舜臣はもしいるかも知れない時の不意打ちに備えて賊船の動向を探知するためにヨロチォックの斥候船を四方に送った.

その日遅く霧が集まったので李舜臣はまた出動命令を下げた. この時一歩遅れて合流したイオックギが 25尺の軍船を従えて来たので我軍の買うことは空を突くようにした. 朝鮮数だね 51尺の艦隊は威風堂々に波を割って巨済島に航進した.

あの時巨済島の住民 8人が小さな船に乗って来て倭船たちが巨済島を通ってタンハン布に行って停泊しているという情報を伝えた. 李舜臣は直ちにこれらを案内者にして戦艦台を導いて今日の高城郡会華面タンハン布で進撃した. タンハン布にはアダケフだね[安宅船] 9尺, 関部だね[関船] 4尺, ゴバなの[小早] 13尺など皆 26尺の日本伝えることが停泊していた.

その中大長線 1尺は甲板の上に 3階樓閣を建てたが全面には青い一山を建てて樓閣の下には白い花模様を描いた黒い徽章を打った. また朝鮮水軍を見て潟外に出る時のアダケフの 4尺は皆黒い旗(旗)をさしていた.

賊船 4尺が潟外に出て先制攻撃をすると全裸左図数だね(全羅左道水軍)の左部長信号(申浩), 左斥候章ゾングウン(鄭運), 全裸牛島数だね(全羅右道水軍) 所属長興副詞(長興府使) 黄世得(黄世得)が軍船を走って出て合戦をした. こんな渦中にゾングウンが賊船で渡って素早くて早い剣術(剣術)を発揮してあっという間に敵兵 40人余りを片付けて賊将がスなのダケノ−リ[糟屋武則]を一刀のもとに惨殺こんにちはだった.

同時に亀船 2尺が敵陣で突撃して天子総統(天字銃筒)と知者総統(地字銃筒)を大きく力強くkなると他の戦艦たちも 立ち後れるセーラの前を争って賊船を包囲, 攻撃した. 李舜臣は戦闘をする途中に敵軍が前と一緒に借りる費用不利ならば再びお腹を捨てたまま陸に上がって盗みすることが心配になって賊船たちを皆広い海で引っ張り出して殲滅しようと誘引作戦を広げる事にした.

果して朝鮮水軍が潟外で後退することを見た日本水軍は自分たちが乗勢に乗ったとヨギョッウムなのか 3階樓閣の大長線を護衛しながら広い海で追って出た. 時が熟したと判断した李舜臣は遂に総攻撃命令を下げた.

¥”今だ! 賊船をかこんで攻撃しなさい!¥”

後退した朝鮮数だね艦隊は皆船首を回して日本水軍艦隊と対立した. 左右の軍船たちが速力を出して賊船たちに飛びかかって包囲作戦を広げる同時に亀船が先頭に出て突撃した.

敵陣で突撃した亀船が 3階樓閣の敵軍大長線を集中攻撃した. 火砲をうって火田(火箭)で集中攻撃を加えたらいよいよ 3階樓閣がこわれて帳幕と旗たちが余地もなく仏陀消えた. 砲弾と矢に当たった敵兵たちがのべつ幕無しに海に落ちてたまらなかった. 賊将加藤Yoshiaki[加藤嘉明]は負傷を負ったまま辛うじて命を拾ってゴバなの[小早]に乗り換えて逃走した.

アダケフだね[安宅船] 1尺が辛うじて朝鮮水軍の包囲網をくぐって逃げたがその明くる日張りこみしていた朝鮮水軍にかかってこなごなに壊れてしまった. これが第1次タンハン布海戦(唐項浦海戦)で賊船 26尺が皆焚滅されたし倭将の需給(首級)だけベンのも七個にのぼった. であって 6月 7日には栗浦隣近で賊船 5尺を撃破して 6月 10日旅愁の左水営で帰還した.

かくして李舜臣の全裸左図数だね(全羅左道水軍)銀製2次出征で総 4回の戦闘をチルオ賊船 72尺を撃沈させて敵兵 1万 1千名余を死滅(死滅)させる前科(戦果)を記録した. しかし我軍も 13人が戦死して李舜臣とナデョンを含めた 34人の負傷者が出た.

李舜臣は戦死者たちは必ず故郷に行かせて葬るようにしてくれたし, その家族たちには救恤法に頼るようにしたし, 負傷者には十分な薬を主語治療に真心をつくすようにした. また有功将兵たちは 3等級で分けて調整に褒賞を建議した.

と同時に李舜臣は長計を通じて今度出場で釜山の敵軍まで討伐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事情に対してこんなに使った.

¥”カトク島で捜索前を展開したその日釜山等地の倭軍を殲滅したかったが連日倭軍に会って海の上を歩き回りながら争おうとして軍糧がもう落ちて, 軍事たちも疲れるだけでなく負傷者も多かったのでこんな軍事たちで敵軍を攻撃するということが良い計策ではないです.

またヤングサンガングが地税が狭くてやっと 1尺位を収容することができる所なのに, 敵軍が長い間踏み躪ってもう険しい所に陣を張っているので私たちが戦おうとすれば敵軍が応じないだろうで, また私たちが退いたら返って弱点だけ見えるようになるでしょう.

釜山を向けて進撃すると言っても梁山の少なく後を阻むはずなので打倒から来た軍隊として深く入って行って先後に書く迎えるということは万全の計画ではないです......

が以外の思弁も心配しなければならなくてはいたイオックギと議論してまた嘉徳など多くの島を捜索したが結局時の足跡を見つけることができないのですぐ本営に帰って来ました.¥”


李舜臣は今度四天海戦(泗川海戦), 唐布海戦(唐浦海戦), 第1次タンハン布海戦(唐項浦海戦) などの専攻(戦功)で本当に2身幅ザホンデブ(資憲大夫)に任命された.

一方, 李舜臣の艦隊が出場する度に倭軍を避けて山の中に隠れていた避難民たちが殺到し始まりギボしながら自ら軍営に尋ねて来て倭軍の動態を知らせてくれたりした. その時ごとに李舜臣は避難民たちの境遇を可哀そうに思って米と呉服などを分けてやったし, これらを旅愁など後方地域で移住させて安全な生計を開いてくれたりした.

そして長寿たちには去る戦闘での勝利に満足するのも油断しなくて軍事たちを慰めて, 再び急報があればいつでも出動す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警戒心を延ばさないように指示した.

ところで李舜臣は四天海戦(泗川海戦) の時の口は負傷で長い間苦労した. 彼は柳成竜(柳成竜)に送った手紙でこんなに言った.

¥”合戦をする時に気を付けなくて時の銃弾を当たったが死に至るほどひどくけがをしなかったです. 連日よろいを着ていることに傷の穴が広くただれて悪い珍物が与えること流れてまだ服を着ることができないし, 日夜を忘れてもしかボングナム灰汁で, もしか海水で洗って見るがまだあまり車道がないからきまり悪いです.¥”

参照書籍; ファングワンガブ(黄源甲) 著述 ¥”復活する李舜臣¥” エコービーズニス(EcoBusiness) 2004, キム・ジョンデ(金宗代) 著述 ¥”神さま(臣)にはまだヨルドチォックの軍船があります.¥” ブックポス(BookFors) 2001, ツェドソック(崔頭錫) 著述 ¥”壬辰の乱(壬辰倭乱)と李舜臣(李舜臣)¥” 一刻 1999, 金蛍光(金炯光) 著述 ¥”人物に見る朝鮮社(朝鮮史)¥” シアツルパンサ 2003.

{引き続き}


「불패의 명장 이순신(李舜臣)」5.조선 수군의 연전연승(連戰連勝) (2)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외적의 침범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우리 선조들은 뜨거운 구국(救國)의 의지와 비상한 투지로 국난(國難)을 극복해왔다. 국난을 당할 때마다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민족적 기상을 높이 떨친 구국의 영웅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이순신이야말로 그 숱한 영웅, 호걸, 충신, 열사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위인이라는 사실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순신(李舜臣)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는 미증유의 재앙을 당해 나라와 겨레의 멸망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 조선 수군을 총지휘하여 갖가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필승의 신념과 비상한 전략으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올린 불세출의 명장이었다. 그는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54년의 길지 않은 일생을 보내는 동안 온갖 고난 속에서도 오로지 충효(忠孝), 인의(仁義)와 애국애족정신(愛國愛族精神)으로 일관한 민족의 큰 스승이었다.

영국 해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냈던 빌라드(G.A.Billard) 소장(少將)은 "조선의 이순신이라는 해군 제독이 넬슨(Horatio Nelson)에 버금가는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영국인들은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이순신이 동양 최고의 해군 제독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이순신을 평가하였다. 중국계 미국인 역사학자로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교 교수인 레이 황(Ray Hwang) 박사는 동양사 3대 전쟁 영웅으로 조선의 이순신(李舜臣), 베트남 다이비에이 왕조의 첸 훈다오[千訓道], 중국 명나라의 원숭환(袁崇煥)을 들면서 그 중에서도 이순신이 가장 위대한 공훈을 남긴 영웅이라고 칭송하였다.

오늘날 나라 안팎의 정세, 특히 또다시 빠진 정치적, 경제적 위기에 비추어볼 때 이순신은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절세의 명장, 구국의 영웅이라는 면모에 더해 비상한 리더십을 갖춘 최고 경영자였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21세기라는 새로운 격변의 시대,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여 강대국들과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우리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의 그 어떤 위인보다도 위대했던 성웅(聖雄) 이순신의 리더십을 통해 국난극복의 지혜를 찾아야 할 것이다.

◆ 사천해전(泗川海戰)과 당포해전(唐浦海戰)

5월 27일,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李舜臣)은 전력의 보강을 위해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 이억기(李億祺)에게 6월 3일까지 좌수영에서 합류할 것을 요청해 놓고 있었다. 그런데 "적선 10여척이 사천, 곤양 등지를 침범하였으므로 남해 노량으로 피하고 있다."는 원균의 공문을 받게 되자 이억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29일에 바로 함대를 출동시켰다.

이순신은 비어 있는 좌수영을 지킬 유진장으로 자신의 직속 군관인 윤사공(尹思共)을 임명하고 조방장 정걸(丁絶)을 좌수영의 들머리인 흥양에 파견했다. 또 이억기에게는 전황이 급하니 속히 따라와 합류할 것을 요청하는 등 만반의 대비책을 마련한 뒤 23척의 전함을 거느리고 원균이 기다리고 있는 노량 앞바다로 출동했다.

이때 전라좌수영(全羅左道水營) 함대의 편제를 살펴보면 중위장에 순천부사(順天府使) 권준(權俊), 중부장에 광양현감(光陽縣監) 어영담(魚泳潭), 전부장에 방답첨사(防踏僉使) 이순신(李純信), 후부장에 흥양현감(興陽縣監) 배홍립(裵興立), 좌부장에 낙안군수(樂安郡守) 신호(申浩), 우부장에 보성군수(寶城郡守) 김득광(金得光), 좌척후 장에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 우척후 장에 사도첨사(社島僉使) 김완(金浣), 좌별도장에 우후 이몽구(李夢龜), 우별도장에 여도권관(呂島權管) 김인영(金仁英), 한후 장에 군관 고안책(高安策)과 송성(宋晟), 참퇴장에 이응화(李應華), 거북선[龜船] 돌격장에 이언량(李彦良), 이기남(李奇男) 등이었다.

29일에 순천 앞바다를 지나 노량해협 쪽으로 들어가자 하동 포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이 겨우 3척의 군선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이순신이 원균에게 물었다.

"적군은 지금 어디에 있소?"

그러자 원균이 서쪽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왜선이 지금 사천에 이르고 있소."

그러던 와중에 멀리 적선 한 척이 곤양에서 나와 사천 쪽으로 달아나는 모습이 보였다. 이순신이 즉각 명령했다.

"저 왜선을 따라 잡아라!"

적선을 추격하던 중 오늘날의 사천시 읍남면 포구에 벙작하고 있는 적선 15척을 발견했다. 그때 일본군은 육지에 배를 대고 상륙하여 분탕질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 수군을 보자 바닷가 높은 언덕에 올라가 내려다보며 마구 조총을 쏘았다.

판옥선이 좁은 포구에 들어가면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으므로 이순신은 유인작전을 써서 그들을 끌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적병들은 조선 수군을 쫓아 넓은 바다로 나오려 하지 않고 수세적인 전법을 고수했다. 때마침 조수가 바뀌어 밀물이 되자 이순신은 이언량(李彦良) 등에게 명령하여 적진을 공격하도록 했다. 처음으로 거북선이 해상전투에서 그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거북선이 포구에 가까이 다가오자 일본군은 처음 보는 거북선의 희한한 모습에 잠시 당황하다가 조총 사격을 했지만 총탄은 거북선의 철판 위를 퉁겨져 나갈 뿐이었다. 일본군은 거북선으로 도선(渡船)하여 배를 불태우려고 했지만 거북선 지붕 위에 촘촘히 꽂힌 송곳과 창촉에 발바닥이 찔리고 다리가 뚫려 처참한 광경을 연출했다. 거북선이 마치 무인지경(無人之境)을 지나듯 적진을 휘젓고 다니며 포탄을 발사하자 적선이 깨지고 불타며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고 언덕 위의 일본군도 포탄과 화살 공격으로 수백의 사상자를 내고 말았다.

하지만 일본군이 조선 수군의 대장선으로 조총 사격을 집중시켜 전투를 지휘하던 이순신이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는 부상을 입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조선 수군은 적선 13척을 격침시키고 적병 3천여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순신의 두번째 승첩(勝捷)인 사천해전(泗川海戰)이었다.

6월 1일, 함대를 이동시켜 오늘날의 통영시 사량도에서 밤을 보내고, 이튿날 아침 8시쯤 통영시 산양면인 당포에 이르니 일본군 군선 30여척이 정박해 있었다. 적군의 함대는 아다케후네[安宅船]가 9척, 세키부네[關船]와 고바야[小早]가 각각 12척이었는데, 그 누각 위에 적장 하나가 버티고 앉아 있었다. 이순신의 함대는 곧바로 거북선을 앞세우고 맹렬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중위장 권준(權俊)이 적군의 대장선에 배를 가까이 붙이게 하고 적장 구루시마 미치유키[來島通之]를 향해 궁시(弓矢)를 쏘았다. 미치유키가 왼쪽 가슴에 화살을 맞고 쓰러지자 우척후 장 김완(金浣)과 군관 진무성(陳武晟)이 적선으로 뛰어들어 미치유키의 목을 베고, 그 수급(首級)을 칼끝에 꿰어들었다. 이에 사기가 충천한 조선 수군이 천자총통(天字銃筒)과 승자총통(勝字銃筒)을 마구 쏘면서 공세를 강화하자 전의를 상실한 일본 수군은 어지럽게 흩어지고 달아나기에 바빴다.

이 당포해전(唐浦海戰)에서 이순신의 함대는 적선 21척을 쳐부수고 적병 4천여명을 섬멸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부산 쪽에서 몰려오던 적선 21척이 조선 수군을 보자 급히 개도로 퇴각하여 자취를 감추었다. 이들은 조선 수군의 공격을 받기 전에 모두 달아나 보이지도 않았다.

◆ 적장의 수급(首級)만 일곱 개를 베었던 제1차 당항포해전(唐項浦海戰)

6월 4일에는 새벽부터 안개가 끼어 활동을 하기에는 여러 모로 불편했다. 이순신은 혹시 있을지도 모를 적의 기습에 대비하고 적선의 동향을 탐지하기 위해 여러척의 척후선을 사방으로 보냈다.

그날 늦게 안개가 걷혔으므로 이순신은 다시 출동명령을 내렸다. 이때 뒤늦게 합류한 이억기가 25척의 군선을 거느리고 왔으므로 아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듯 했다. 조선 수군 51척의 함대는 위풍당당하게 파도를 가르며 거제도로 항진했다.

그때 거제도의 주민 8명이 작은 배를 타고 와서 왜선들이 거제도를 지나 당항포로 가서 정박하고 있다는 정보를 전했다. 이순신은 즉시 이들을 안내자로 삼아 전함대를 이끌고 오늘날의 고성군 회화면 당항포로 진격하였다. 당항포에는 아다케후네[安宅船] 9척, 세키부네[關船] 4척, 고바야[小早] 13척 등 모두 26척의 일본 전함이 정박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대장선 1척은 갑판 위에 3층 누각을 세웠는데 전면에는 푸른 일산을 세우고 누각 아래에는 흰 꽃무늬를 그린 검은 휘장을 쳤다. 또 조선 수군을 보고 포구 밖으로 나오는 적의 아다케후네 4척은 모두 검은 기(旗)를 꽂고 있었다.

적선 4척이 포구 밖으로 나오며 선제공격을 하자 전라좌도수군(全羅左道水軍)의 좌부장 신호(申浩), 좌척후 장 정운(鄭運), 전라우도수군(全羅右道水軍) 소속 장흥부사(長興府使) 황세득(黃世得)이 군선을 몰고 나가 접전을 벌였다. 이런 와중에 정운이 적선으로 건너가서 민첩하고 빠른 검술(劍術)을 발휘하여 순식간에 적병 40여명을 처치하고 적장 가쓰야 다케노리[糟屋武則]를 단칼에 참살하였다.

동시에 거북선 2척이 적진으로 돌격하여 천자총통(天字銃筒)과 지자총통(地字銃筒)을 우렁차게 쏘자 다른 전함들도 뒤 질세라 앞을 다투어 적선을 포위, 공격했다. 이순신은 전투를 하는 도중에 적군이 전과 같이 전세가 불리하면 또다시 배를 버린 채 뭍으로 올라가 노략질할 것이 걱정되어 적선들을 모두 넓은 바다로 끌어내서 섬멸하고자 유인작전을 펼치기로 했다.

과연 조선 수군이 포구 밖으로 후퇴하는 것을 본 일본 수군은 자신들이 승세를 탔다고 여겼음인지 3층 누각의 대장선을 호위하면서 넓은 바다로 쫓아 나왔다.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이순신은 마침내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지금이다! 적선을 포위하여 공격하라!"

후퇴하던 조선 수군 함대는 모두 뱃머리를 돌려 일본 수군 함대와 맞섰다. 좌우의 군선들이 속력을 내어 적선들에게 달려들어 포위작전을 펴는 동시에 거북선이 선두에 나서 돌격했다.

적진으로 돌격한 거북선이 3층 누각의 적군 대장선을 집중 공격했다. 화포를 쏘고 화전(火箭)으로 집중 공격을 가하니 드디어 3층 누각이 부서지고 장막과 깃발들이 여지없이 불타 없어졌다. 포탄과 화살에 맞은 적병들이 쉴새 없이 바다에 떨어져 죽었다. 적장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는 부상을 입은 채 간신히 목숨을 건져 고바야[小早]에 옮겨타고 도주했다.

아다케후네[安宅船] 1척이 간신히 조선 수군의 포위망을 뚫고 달아났지만 그 이튿날 잠복하고 있던 조선 수군에게 걸려 박살나고 말았다. 이것이 제1차 당항포해전(唐項浦海戰)으로 적선 26척이 모두 분멸되었으며 왜장의 수급(首級)만 벤 것도 일곱 개에 이르렀다. 이어서 6월 7일에는 율포 인근에서 적선 5척을 격파하고 6월 10일 여수의 좌수영으로 귀환했다.

이리하여 이순신의 전라좌도수군(全羅左道水軍)은 제2차 출정에서 총 4회의 전투를 치르어 적선 72척을 격침시키고 적병 1만 1천여명을 사멸(死滅)시키는 전과(戰果)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아군도 13명이 전사하고 이순신과 나대용을 비롯한 34명의 부상자가 나왔다.

이순신은 전사자들은 반드시 고향으로 보내 장사지내게 해주었고, 그 가족들에게는 구휼법에 의지토록 했으며, 부상자에게는 충분한 약을 주어 치료에 정성을 다하도록 했다. 또 유공 장병들은 3등급으로 나누어 조정에 포상을 건의했다.

이와 아울러 이순신은 장계를 통해 이번 출전에서 부산의 적군까지 토벌하지 못한 사정에 대해 이렇게 썼다.

"가덕도에서 수색전을 전개하던 그날 바로 부산 등지의 왜군을 섬멸하고 싶었으나 연일 왜군을 만나 바다 위를 돌아다니며 싸우느라고 군량이 이미 떨어지고, 군사들도 피곤할 뿐만 아니라 부상자도 많았으므로 이런 군사들로 적군을 공격한다는 것이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또 양산강이 지세가 좁아서 겨우 1척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곳인데, 적군이 오랫동안 유린하여 이미 험한 곳에 진을 치고 있으므로 우리가 싸우려면 적군이 응하지 않을 것이고, 또 우리가 물러난다면 도리어 약점만 보이게 될 것입니다.

부산을 향해 진격한다고 해도 양산의 적이 뒤를 막을 것이므로 타도에서 온 군대로서 깊이 들어가서 앞뒤로 적을 맞는다는 것은 만전의 계획이 아닙니다......

이 외의 사변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어 신은 이억기와 의논하고 다시 가덕 등 여러 섬을 수색했으나 끝내 적의 종적을 발견할 수 없으므로 곧 본영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순신은 이번 사천해전(泗川海戰), 당포해전(唐浦海戰), 제1차 당항포해전(唐項浦海戰) 등의 전공(戰功)으로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임명되었다.

한편, 이순신의 함대가 출전할 때마다 왜군을 피해 산중에 숨어 있던 피난민들이 몰려나와 기버하면서 스스로 군영으로 찾아와 왜군의 동태를 알려주기도 했다. 그때마다 이순신은 피난민들의 처지를 가엾게 여겨 쌀과 포목 등을 나누어주었고, 이들을 여수 등 후방지역으로 이주시켜 안전한 살길을 열어주기도 했다.

그리고 장수들에게는 지난 전투에서의 승리에 만족하지도 방심하지도 말고 군사들을 위로하며, 또다시 급보가 있으면 언제라도 출동할 수 있도록 경계심을 늦추지 말도록 지시했다.

그런데 이순신은 사천해전(泗川海戰) 때 입은 부상으로 오랫동안 고생했다. 그는 유성룡(柳成龍)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접전을 벌일 적에 조심하지 않아 적의 총탄을 맞았으나 죽음에 이를 만큼 심하게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연일 갑옷을 입고 있는 데다가 상처의 구멍이 넓게 헐어 궂은 진물이 줄줄 흘러 아직도 옷을 입을 수 없으며, 밤낮을 잊고서 혹 봉나무 잿물로, 혹 바닷물로 씻어보지만 아직 별로 차도가 없으니 민망합니다."

참고서적; 황원갑(黃源甲) 저술 "부활하는 이순신" 에코비즈니스(EcoBusiness) 2004, 김종대(金宗代) 저술 "신(臣)에게는 아직도 열두척의 군선이 있습니다." 북포스(BookFors) 2001, 최두석(崔頭錫) 저술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이순신(李舜臣)" 일각 1999, 김형광(金炯光) 저술 "인물로 보는 조선사(朝鮮史)" 시아출판사 2003.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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