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외적의 침범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우리 선조들은 뜨거운 구국(救國)의 의지와 비상한 투지로 국난(國難)을 극복해왔다. 국난을 당할 때마다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민족적 기상을 높이 떨친 구국의 영웅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이순신이야말로 그 숱한 영웅, 호걸, 충신, 열사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위인이라는 사실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순신(李舜臣)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는 미증유의 재앙을 당해 나라와 겨레의 멸망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 조선 수군을 총지휘하여 갖가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필승의 신념과 비상한 전략으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올린 불세출의 명장이었다. 그는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54년의 길지 않은 일생을 보내는 동안 온갖 고난 속에서도 오로지 충효(忠孝), 인의(仁義)와 애국애족정신(愛國愛族精神)으로 일관한 민족의 큰 스승이었다.

영국 해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냈던 빌라드(G.A.Billard) 소장(少將)은 “조선의 이순신이라는 해군 제독이 넬슨(Horatio Nelson)에 버금가는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영국인들은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이순신이 동양 최고의 해군 제독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이순신을 평가하였다. 중국계 미국인 역사학자로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교 교수인 레이 황(Ray Hwang) 박사는 동양사 3대 전쟁 영웅으로 조선의 이순신(李舜臣), 베트남 다이비에이 왕조의 첸 훈다오[千訓道], 중국 명나라의 원숭환(袁崇煥)을 들면서 그 중에서도 이순신이 가장 위대한 공훈을 남긴 영웅이라고 칭송하였다.

오늘날 나라 안팎의 정세, 특히 또다시 빠진 정치적, 경제적 위기에 비추어볼 때 이순신은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절세의 명장, 구국의 영웅이라는 면모에 더해 비상한 리더십을 갖춘 최고 경영자였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21세기라는 새로운 격변의 시대,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여 강대국들과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우리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의 그 어떤 위인보다도 위대했던 성웅(聖雄) 이순신의 리더십을 통해 국난극복의 지혜를 찾아야 할 것이다.

◆ “눈물의 임금” 명종

그런저런 곡절 끝에 중종(中宗)은 그 이듬해인 1544년 11월에 재위 39년 만에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죽었다. 당시 중종의 나이는 57세요, 그 뒤를 이어 즉위한 인종(仁宗)은 30세였다.

1520년에 태어나 6세에 세자로 책봉되어 갖은 풍파를 겪다가 마침내 즉위한 인종은 슬기롭고 너그러운 인품에 효성이 지극하고 학문을 사랑한 훌륭한 인격자였다. 그런 까닭에 인종은 불과 8개월밖에 재위하지 못했지만 사람들로부터 성군(聖君)이라는 칭송을 들었던 것이다.

인종의 즉위로 대윤과 소윤의 권력투쟁은 일단 대윤의 승리로 돌아갔지만 승리의 기쁨을 즐긴 것도 잠깐이었다. 인종은 즉위 8개월 만인 그 이듬해 1545년 7월 1일에 불과 31세의 한창 나이로 세상을 하직했기 때문이었다.

인종은 죽기 전에 병세가 악화되자 대신들을 불러 이렇게 당부했다.

”과인의 병이 깊어 정신을 차릴 수가 없게 되었으므로 경원대군(慶源大君)에게 전위(傳位)하니 경들은 더욱 힘써 과인의 뜻에 따라주기 바라오.”

인종은 후사가 없었다. 그의 정비인 인성왕후(仁聖王后) 박씨는 소생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인종이 죽고 경원대군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눈물의 임금” 명종(明宗)이다.

명종은 불과 11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므로 그 뒤 국정(國政)은 모후인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스스로 섭정으로서 수렴청정을 했고, 이에 따라 조정은 소윤, 즉 윤원형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여 좌지우지했다.

문정왕후의 섭정은 공식적으로 명종이 20세가 되는 8년 동안이지만, 명종이 이복형 인종과 닮은 꼴로 워낙 심약했기 때문에 그 이후에도 문정왕후는 1565년에 65세로 죽을 때까지 절대권력을 휘둘렀다.

문정왕후가 정적인 대윤 세력을 몰락시킨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킨 것도 바로 이순신이 탄생한지 5개월째인 1545년 8월이었다.

문정왕후는 1547년에는 이른바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을 기화로 또다시 수많은 사람을 죽이거나 귀양 보냈다.

그리고 명종이 20세가 되자 국법에 따라 수렴, 곧 섭정의 발을 걷어 올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치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난 것도 아니었다. 권력은 예나 이제나 마약과도 같아서 한번 움켜쥐면 좀처럼 놓기 싫어하는 마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조정이 권텩다툼으로 날 새는 줄 모르는 사이에 민생은 도탄에 바져 백성들의 곤궁한 형쳔은 이루 다 형용할 수 없었다.

권력자들의 압제와 탐관오리들의 수탈에 헐벗고 굶주리다 못한 양민이 곳곳에서 도적으로 변신하고 도적들이 무리를 이루었는데, 그 당시 가장 세력이 강하고 이름난 도적의 우두머리가 바로 의적(義賊)으로 불리는 임꺽정(林巨正)이었다.

임꺽정은 1559년부터 1562년까지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경기도, 강원도를 넘나들며 눈부시게 활약했는데, 백성들은 임꺽정을 영웅으로 생각한 반면, 그를 잡으려고 이리저리 허둥대며 뛰어다니는 관군들은 되레 도둑떼처럼 여겼으니 이것이 바로 천심(天心)과 마찬가지인 민심의 이반이 불러온 결과가 아니고 무엇이랴.

이순신이 소년시절을 보낼 당시 나라 안의 시대적 배경이 그러했다.

◆ 백년내전(百年內戰)으로 단련된 일본의 군사력.

그러면 당시 이웃 나라인 중국과 일본의 사정은 어떠했는가.

조선왕조가 개국 이후 200여년 동안 전쟁의 위협을 잊은 채 문약(文弱)에 흘러 우물 안 개구리처럼 나라 밖의 정세는 전혀 모르고 권력투쟁에만 몰두하는 사이에 일본은 각지에 군웅이 할거하여 거의 100년에 걸친 내전(內戰)인 이른바 전국시대(戰國時代)를 보내고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임진왜란(壬辰倭亂)도 그에 따른 일종의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가 교토[京都]에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를 세운 것은 1338년의 일이었다. 무로마치 막부의 세력이 갈수록 약화되자 막부에서 임명해 각 지방에 내려보낸 영주인 슈고다이묘[守護大名]들이 앞을 다투어 자신의 세력을 확대해나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독립한 다이묘[大名]들이 치열한 영토 쟁탈전을 벌이다가 1467년에 이른바 오닌[應仁]의 변란(變亂)이 일어났다. 이때 전국의 다이묘들이 교토 주변에 몰려들어 동군(東軍)과 서군(西軍)으로 나뉘어 11년간 내전을 벌임으로써 일본의 전국시대가 본격화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군웅의 할거하여 100년 동안 이어진 전국시대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 의해 통일의 토대가 다져지고, 1572년에 무로마치 막부가 붕괴되고 일본 국토의 절반 이상이 그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가면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는 1582년에 교토의 혼노시[本能寺]에서 부하 장수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배반으로 살해되었다.

그러나 노부나가가 죽자 그의 심복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그 이듬해에 야마자키전투[山崎戰鬪]에서 승리, 아케치 마쓰히데를 제거하고 1583년에는 오다가[織田家]의 원로 시바다 가츠이에[柴田勝家]까지 몰락시킨 뒤 전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7년 뒤인 1590년에는 마침내 일본 전국을 통일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최고 권력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의 나이 55세 때였다.

그리고 그 2년 뒤인 1592년에 마침내 조선 침략을 시작했던 것이다.

일본의 군사력이 꾸준히 강화된 것은 이와 같은 100년간의 전국시대를 통해 군사들이 백전연마(百戰硏磨)의 강병으로 변모한 덕분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무시할 수 없는 점은 그 사이에 서양으로부터 신무기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니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임진왜란 초기에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 철포(鐵砲), 곧 조총(鳥銃)이었다.

일본에 조총이 처음 들어온 것은 1543년 포르투갈의 선원들이 큐슈[九州]의 다네가시마[種子島]에 상륙해 조총과 탄약과 그 제조법을 전해준 것이 시초였다. 이렇게 전해진 조총은 큐슈 사카이[堺]지방의 철공소에서 대량생산되기 시작했고, 이는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전세가지 좌우하기에 이르렀다.

가장 좋은 예가 바로 1575년에 벌어진 나가시노전투[長篠戰鬪]였다. 이 싸움에서 오다 노부나가는 3천 5백명의 조총병들을 목책 뒤어 숨겨두었다가 무서운 기세로 돌진하는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賴]의 기마부대를 일제사격으로 순식간에 전멸시켰던 것이다.

이때부터 일본의 용병술은 창과 칼을 들고 서로 접전(接戰)을 펼치는 종래의 전법에서 조총을 앞세운 부대단위 전법으로 양상이 전혀 달라졌다.

한편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중국 명나라의 사정은 겹치는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국력이 소진되고 내리막길로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조선왕조보다 24년 앞선 1368년에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이 원(元) 제국을 본래의 근거지인 몽골 초원으로 쫓아버리고 건국한 명(明)은 200년 가까이 평화 속에서 학문과 예술을 발전시키고 한족(漢族)에 의한 중화제국의 영화(榮華)를 회복하는 듯했으나 당파간의 정권다툼과 관료들의 부패, 환관의 발호에 따른 왕권의 약화로 정치와 국가 기강이 문란해지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내우에 겹쳐 외환도 뒤따랐다. 북쪽에서는 몽골족이 다시 힘을 길러 수시로 변방을 침범하는가 하면, 남쪽 해안지방으로는 倭寇들이 쉴 새 없이 노략질을 자행하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1592년에 명나라의 황제는 열세번째 임금인 신종(神宗)이었다.

그리고 그해 3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한달 전에도 서북방 국경에서 몽골족이 반란을 일으켜 명나라 조정은 그 뿌리가 조선인인 이여송(李如松)을 보내 이를 가까스로 진압했다.

일본이 명나라를 치러 갈 길을 빌려달라는 구실로 임진왜란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군국(君國)을 자처하던 명나라가 구원병을 급히 보내지 못한 데에는 이러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충남 아산에서 청년기 보내

이순신(李舜臣)이 태어나고 자랄 무렵 그의 가세는 매우 궁핍했다. 갈수록 형편이 곤궁해지자 아버지 이정(李貞)은 식구들을 데리고 현재 현충사 자리인 충남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의 처가로 낙향하게 되었다.

이순신은 이곳에서 32세에 무과에 급제할 때까지 보냈으니, 백암리야말로 그의 고향이나 다름없었다.

이순신은 그의 나이 20세 때에 보성군수(寶城郡守)를 지낸 방진(方震)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순신 장군의 배필답게 방씨 부인도 어렸을 때부터 침착하고 영특하였다.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방씨 부인이 12세 때의 일인데, 화적(火賊)들이 방진의 집으로 쳐들어왔다. 그녀의 아버지 방진은 활을 쏘아 화적들을 물리치려고 했다. 그러다가 화살이 모두 떨어지고 말았다. 아버지는 화살을 더 가져오라고 시켰지만 아무리 찾아보아도 화살이 보이지 않았다. 이는 화적들과 내통한 그 집 여종이 나머지 화살을 모두 감추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이어린 방씨 처녀가 기지를 발휘하여 재빨리 다락으로 올라가더니 베짜는 데 사용하는 댓가지들을 마루로 던지며 소리쳤다.

”아버님, 여기 화살이 많사옵니다!”

댓가지들이 마루에 떨어지면서 요란한 소리를 내니 화적들은 아직도 화살이 많이 남은 줄 알고 모두 달아나고 말았다.

이순신이 병법과 무술을 닦는 데에는 장인인 방진과 부인의 격려와 도움이 컸다고 전한다.

이순신이 32세 때까지 청년기를 보낸 충남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방화산 기슭의 옛 집터에는 전국 각지에 있는 이순신의 사당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대표적인 현충사(顯忠祠)가 있다.

현충사는 본래 이순신 장군이 순국한 지 108년이 지난 1706년에 이곳에 이순신의 사당을 세우고 그 이듬해에 숙종(肅宗)이 친필 액서 “현충사(顯忠祠)” 석 자를 내린 것이 최초였다.

그리고 200여년 간 추모의 향화가 이어졌으나 1910년 일제(日帝)가 대한제국을 병합한 뒤에는 이곳 땅이 모두 일본인에게 넘어가고 사당도 헐려 없어질 위기에 빠졌다.

이에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와 이충무공유적보존회(李忠武公遺蹟保存會)가 나서서 전국적인 모금운동을 벌여 1932년에 현충사를 재건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945년 광복 이후 해마다 양력 4월 28일 이순신 장군의 탄신일에 제전을 올리고 있다. 그 뒤 1966년부터 1974년까지 대대적인 현충사 성역화작업을 벌여 사당을 중건하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현충사 경내에는 본전, 옛 집과 궁술장(弓術場), 이순신 장군의 셋째 아들 이면의 묘, 충무정, 구본전과 유물관, 정려와 가묘 등이 있다. 유물전시관에는 이순신 장군의 두 자루 대장도(大長刀), 옥로와 허리띠, 난중일기(亂中日記) 및 교지와 비석 탁본 등 문헌, 거북선 모형과 각종 무기류, 한산해전도(閑山海戰圖) 등이 보관 전시되고 있다.

참고서적; 황원갑(黃源甲) 저술 “부활하는 이순신” 에코비즈니스(EcoBusiness) 2004, 김종대(金宗代) 저술 “신(臣)에게는 아직도 열두척의 군선이 있습니다.” 북포스(BookFors) 2001, 최두석(崔頭錫) 저술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이순신(李舜臣)” 일각 1999, 김형광(金炯光) 저술 “인물로 보는 조선사(朝鮮史)” 시아출판사 2003.

{계속}


「불패의 명장 이순신(李舜臣)」1.출생 당시의 국내 정세 (2)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외적의 침범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우리 선조들은 뜨거운 구국(救國)의 의지와 비상한 투지로 국난(國難)을 극복해왔다. 국난을 당할 때마다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민족적 기상을 높이 떨친 구국의 영웅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이순신이야말로 그 숱한 영웅, 호걸, 충신, 열사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위인이라는 사실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순신(李舜臣)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는 미증유의 재앙을 당해 나라와 겨레의 멸망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 조선 수군을 총지휘하여 갖가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필승의 신념과 비상한 전략으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올린 불세출의 명장이었다. 그는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54년의 길지 않은 일생을 보내는 동안 온갖 고난 속에서도 오로지 충효(忠孝), 인의(仁義)와 애국애족정신(愛國愛族精神)으로 일관한 민족의 큰 스승이었다.

영국 해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냈던 빌라드(G.A.Billard) 소장(少將)은 "조선의 이순신이라는 해군 제독이 넬슨(Horatio Nelson)에 버금가는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영국인들은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이순신이 동양 최고의 해군 제독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이순신을 평가하였다. 중국계 미국인 역사학자로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교 교수인 레이 황(Ray Hwang) 박사는 동양사 3대 전쟁 영웅으로 조선의 이순신(李舜臣), 베트남 다이비에이 왕조의 첸 훈다오[千訓道], 중국 명나라의 원숭환(袁崇煥)을 들면서 그 중에서도 이순신이 가장 위대한 공훈을 남긴 영웅이라고 칭송하였다.

오늘날 나라 안팎의 정세, 특히 또다시 빠진 정치적, 경제적 위기에 비추어볼 때 이순신은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절세의 명장, 구국의 영웅이라는 면모에 더해 비상한 리더십을 갖춘 최고 경영자였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21세기라는 새로운 격변의 시대,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여 강대국들과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우리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의 그 어떤 위인보다도 위대했던 성웅(聖雄) 이순신의 리더십을 통해 국난극복의 지혜를 찾아야 할 것이다.

◆ "눈물의 임금" 명종

그런저런 곡절 끝에 중종(中宗)은 그 이듬해인 1544년 11월에 재위 39년 만에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죽었다. 당시 중종의 나이는 57세요, 그 뒤를 이어 즉위한 인종(仁宗)은 30세였다.

1520년에 태어나 6세에 세자로 책봉되어 갖은 풍파를 겪다가 마침내 즉위한 인종은 슬기롭고 너그러운 인품에 효성이 지극하고 학문을 사랑한 훌륭한 인격자였다. 그런 까닭에 인종은 불과 8개월밖에 재위하지 못했지만 사람들로부터 성군(聖君)이라는 칭송을 들었던 것이다.

인종의 즉위로 대윤과 소윤의 권력투쟁은 일단 대윤의 승리로 돌아갔지만 승리의 기쁨을 즐긴 것도 잠깐이었다. 인종은 즉위 8개월 만인 그 이듬해 1545년 7월 1일에 불과 31세의 한창 나이로 세상을 하직했기 때문이었다.

인종은 죽기 전에 병세가 악화되자 대신들을 불러 이렇게 당부했다.

"과인의 병이 깊어 정신을 차릴 수가 없게 되었으므로 경원대군(慶源大君)에게 전위(傳位)하니 경들은 더욱 힘써 과인의 뜻에 따라주기 바라오."

인종은 후사가 없었다. 그의 정비인 인성왕후(仁聖王后) 박씨는 소생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인종이 죽고 경원대군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눈물의 임금" 명종(明宗)이다.

명종은 불과 11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므로 그 뒤 국정(國政)은 모후인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스스로 섭정으로서 수렴청정을 했고, 이에 따라 조정은 소윤, 즉 윤원형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여 좌지우지했다.

문정왕후의 섭정은 공식적으로 명종이 20세가 되는 8년 동안이지만, 명종이 이복형 인종과 닮은 꼴로 워낙 심약했기 때문에 그 이후에도 문정왕후는 1565년에 65세로 죽을 때까지 절대권력을 휘둘렀다.

문정왕후가 정적인 대윤 세력을 몰락시킨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킨 것도 바로 이순신이 탄생한지 5개월째인 1545년 8월이었다.

문정왕후는 1547년에는 이른바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을 기화로 또다시 수많은 사람을 죽이거나 귀양 보냈다.

그리고 명종이 20세가 되자 국법에 따라 수렴, 곧 섭정의 발을 걷어 올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치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난 것도 아니었다. 권력은 예나 이제나 마약과도 같아서 한번 움켜쥐면 좀처럼 놓기 싫어하는 마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조정이 권텩다툼으로 날 새는 줄 모르는 사이에 민생은 도탄에 바져 백성들의 곤궁한 형쳔은 이루 다 형용할 수 없었다.

권력자들의 압제와 탐관오리들의 수탈에 헐벗고 굶주리다 못한 양민이 곳곳에서 도적으로 변신하고 도적들이 무리를 이루었는데, 그 당시 가장 세력이 강하고 이름난 도적의 우두머리가 바로 의적(義賊)으로 불리는 임꺽정(林巨正)이었다.

임꺽정은 1559년부터 1562년까지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경기도, 강원도를 넘나들며 눈부시게 활약했는데, 백성들은 임꺽정을 영웅으로 생각한 반면, 그를 잡으려고 이리저리 허둥대며 뛰어다니는 관군들은 되레 도둑떼처럼 여겼으니 이것이 바로 천심(天心)과 마찬가지인 민심의 이반이 불러온 결과가 아니고 무엇이랴.

이순신이 소년시절을 보낼 당시 나라 안의 시대적 배경이 그러했다.

◆ 백년내전(百年內戰)으로 단련된 일본의 군사력.

그러면 당시 이웃 나라인 중국과 일본의 사정은 어떠했는가.

조선왕조가 개국 이후 200여년 동안 전쟁의 위협을 잊은 채 문약(文弱)에 흘러 우물 안 개구리처럼 나라 밖의 정세는 전혀 모르고 권력투쟁에만 몰두하는 사이에 일본은 각지에 군웅이 할거하여 거의 100년에 걸친 내전(內戰)인 이른바 전국시대(戰國時代)를 보내고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임진왜란(壬辰倭亂)도 그에 따른 일종의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가 교토[京都]에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를 세운 것은 1338년의 일이었다. 무로마치 막부의 세력이 갈수록 약화되자 막부에서 임명해 각 지방에 내려보낸 영주인 슈고다이묘[守護大名]들이 앞을 다투어 자신의 세력을 확대해나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독립한 다이묘[大名]들이 치열한 영토 쟁탈전을 벌이다가 1467년에 이른바 오닌[應仁]의 변란(變亂)이 일어났다. 이때 전국의 다이묘들이 교토 주변에 몰려들어 동군(東軍)과 서군(西軍)으로 나뉘어 11년간 내전을 벌임으로써 일본의 전국시대가 본격화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군웅의 할거하여 100년 동안 이어진 전국시대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 의해 통일의 토대가 다져지고, 1572년에 무로마치 막부가 붕괴되고 일본 국토의 절반 이상이 그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가면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는 1582년에 교토의 혼노시[本能寺]에서 부하 장수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배반으로 살해되었다.

그러나 노부나가가 죽자 그의 심복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그 이듬해에 야마자키전투[山崎戰鬪]에서 승리, 아케치 마쓰히데를 제거하고 1583년에는 오다가[織田家]의 원로 시바다 가츠이에[柴田勝家]까지 몰락시킨 뒤 전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7년 뒤인 1590년에는 마침내 일본 전국을 통일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최고 권력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의 나이 55세 때였다.

그리고 그 2년 뒤인 1592년에 마침내 조선 침략을 시작했던 것이다.

일본의 군사력이 꾸준히 강화된 것은 이와 같은 100년간의 전국시대를 통해 군사들이 백전연마(百戰硏磨)의 강병으로 변모한 덕분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무시할 수 없는 점은 그 사이에 서양으로부터 신무기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니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임진왜란 초기에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 철포(鐵砲), 곧 조총(鳥銃)이었다.

일본에 조총이 처음 들어온 것은 1543년 포르투갈의 선원들이 큐슈[九州]의 다네가시마[種子島]에 상륙해 조총과 탄약과 그 제조법을 전해준 것이 시초였다. 이렇게 전해진 조총은 큐슈 사카이[堺]지방의 철공소에서 대량생산되기 시작했고, 이는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전세가지 좌우하기에 이르렀다.

가장 좋은 예가 바로 1575년에 벌어진 나가시노전투[長篠戰鬪]였다. 이 싸움에서 오다 노부나가는 3천 5백명의 조총병들을 목책 뒤어 숨겨두었다가 무서운 기세로 돌진하는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賴]의 기마부대를 일제사격으로 순식간에 전멸시켰던 것이다.

이때부터 일본의 용병술은 창과 칼을 들고 서로 접전(接戰)을 펼치는 종래의 전법에서 조총을 앞세운 부대단위 전법으로 양상이 전혀 달라졌다.

한편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중국 명나라의 사정은 겹치는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국력이 소진되고 내리막길로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조선왕조보다 24년 앞선 1368년에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이 원(元) 제국을 본래의 근거지인 몽골 초원으로 쫓아버리고 건국한 명(明)은 200년 가까이 평화 속에서 학문과 예술을 발전시키고 한족(漢族)에 의한 중화제국의 영화(榮華)를 회복하는 듯했으나 당파간의 정권다툼과 관료들의 부패, 환관의 발호에 따른 왕권의 약화로 정치와 국가 기강이 문란해지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내우에 겹쳐 외환도 뒤따랐다. 북쪽에서는 몽골족이 다시 힘을 길러 수시로 변방을 침범하는가 하면, 남쪽 해안지방으로는 倭寇들이 쉴 새 없이 노략질을 자행하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1592년에 명나라의 황제는 열세번째 임금인 신종(神宗)이었다.

그리고 그해 3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한달 전에도 서북방 국경에서 몽골족이 반란을 일으켜 명나라 조정은 그 뿌리가 한국인인 이여송(李如松)을 보내 이를 가까스로 진압했다.

일본이 명나라를 치러 갈 길을 빌려달라는 구실로 임진왜란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군국(君國)을 자처하던 명나라가 구원병을 급히 보내지 못한 데에는 이러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충남 아산에서 청년기 보내

이순신(李舜臣)이 태어나고 자랄 무렵 그의 가세는 매우 궁핍했다. 갈수록 형편이 곤궁해지자 아버지 이정(李貞)은 식구들을 데리고 현재 현충사 자리인 충남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의 처가로 낙향하게 되었다.

이순신은 이곳에서 32세에 무과에 급제할 때까지 보냈으니, 백암리야말로 그의 고향이나 다름없었다.

이순신은 그의 나이 20세 때에 보성군수(寶城郡守)를 지낸 방진(方震)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순신 장군의 배필답게 방씨 부인도 어렸을 때부터 침착하고 영특하였다.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방씨 부인이 12세 때의 일인데, 화적(火賊)들이 방진의 집으로 쳐들어왔다. 그녀의 아버지 방진은 활을 쏘아 화적들을 물리치려고 했다. 그러다가 화살이 모두 떨어지고 말았다. 아버지는 화살을 더 가져오라고 시켰지만 아무리 찾아보아도 화살이 보이지 않았다. 이는 화적들과 내통한 그 집 여종이 나머지 화살을 모두 감추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이어린 방씨 처녀가 기지를 발휘하여 재빨리 다락으로 올라가더니 베짜는 데 사용하는 댓가지들을 마루로 던지며 소리쳤다.

"아버님, 여기 화살이 많사옵니다!"

댓가지들이 마루에 떨어지면서 요란한 소리를 내니 화적들은 아직도 화살이 많이 남은 줄 알고 모두 달아나고 말았다.

이순신이 병법과 무술을 닦는 데에는 장인인 방진과 부인의 격려와 도움이 컸다고 전한다.

이순신이 32세 때까지 청년기를 보낸 충남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방화산 기슭의 옛 집터에는 전국 각지에 있는 이순신의 사당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대표적인 현충사(顯忠祠)가 있다.

현충사는 본래 이순신 장군이 순국한 지 108년이 지난 1706년에 이곳에 이순신의 사당을 세우고 그 이듬해에 숙종(肅宗)이 친필 액서 "현충사(顯忠祠)" 석 자를 내린 것이 최초였다.

그리고 200여년 간 추모의 향화가 이어졌으나 1910년 일제(日帝)가 대한제국을 병합한 뒤에는 이곳 땅이 모두 일본인에게 넘어가고 사당도 헐려 없어질 위기에 빠졌다.

이에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와 이충무공유적보존회(李忠武公遺蹟保存會)가 나서서 전국적인 모금운동을 벌여 1932년에 현충사를 재건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945년 광복 이후 해마다 양력 4월 28일 이순신 장군의 탄신일에 제전을 올리고 있다. 그 뒤 1966년부터 1974년까지 대대적인 현충사 성역화작업을 벌여 사당을 중건하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현충사 경내에는 본전, 옛 집과 궁술장(弓術場), 이순신 장군의 셋째 아들 이면의 묘, 충무정, 구본전과 유물관, 정려와 가묘 등이 있다. 유물전시관에는 이순신 장군의 두 자루 대장도(大長刀), 옥로와 허리띠, 난중일기(亂中日記) 및 교지와 비석 탁본 등 문헌, 거북선 모형과 각종 무기류, 한산해전도(閑山海戰圖) 등이 보관 전시되고 있다.

참고서적; 황원갑(黃源甲) 저술 "부활하는 이순신" 에코비즈니스(EcoBusiness) 2004, 김종대(金宗代) 저술 "신(臣)에게는 아직도 열두척의 군선이 있습니다." 북포스(BookFors) 2001, 최두석(崔頭錫) 저술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이순신(李舜臣)" 일각 1999, 김형광(金炯光) 저술 "인물로 보는 조선사(朝鮮史)" 시아출판사 2003.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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