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人間の接近を易しく承諾しない地パミール高原...

西紀 747年にこのパミールを越えてヒンドゥークシ山脈を突破してパキスタン北部を占領した唐長寿があった. その名前は高仙芝(高仙之). 新党で(新唐書)には高仙芝が高句麗人だと記録されている.

イギリスの考古学者スタイン(Sir Mark Aurel Stein, 1862 ‾ 1943) 博士は当時の遠征を置いてハンニバルとナポレオンの遠征よりもっと偉い業績だったと賛嘆を惜しまなかった.

タシュケントでシルクロードに付いて中国ないしに入って行けば燦爛たる古代文化の遺跡の開かれるのにそれは千あまりのものの石穴で成り立っている敦煌石穴だ. 敦煌石穴には二つの羽毛になった遭遇官を使った人物が壁画に描写されている.

歴史学者たちはこの人物を高句麗の使臣で見ている. 高句麗人がシルクロードに付いてこの敦煌を経て行って東西交流をしたという証拠だ.

高仙芝は 751年から 755年まで書案に住みながら宣揚部屋とヤングアプローチ部屋という二彩衣邸宅を下賜受けた. 当時に唐で異民族にこんな待遇を受けた人物は珍しかった.

高句麗は中国唐と四度戦争をして三度を勝って一度を生じた. しかしその一度の敗北によって高句麗の存在は歴史で消える.

党は 20万名の高句麗人を強制移住させるのにヤングズタングに多い高句麗人が押送された. この時高仙芝のお父さんである考査係は雁書君の将校に起用される.

トルパンで雁書都護府のチソがあったが後にクチァで移される. これによって高仙芝一家もクチァに移動したことに推定される.

当時雁書都護府は現在の新彊ウィグル自治区を管轄した機関だ. 高仙芝はクチァで成長してお父さんに付いて雁書君に入隊する.

新党書の高仙芝熱戦には次のように記録されている.

高仙之基高句麗人容貌佳秀弓奇馬二 十世猷撃将軍(高仙芝は高句麗人で顔つきが美しくて弓術とギマスルに上手くて 20余勢に遊撃将軍に上がった.)

高仙芝は雁書節度使ブモングヤングチァルの神さまなのでオンギジンスサになってトルパンに赴任する. 740年には雁書君がティエンサンサンメック西の方のダルヘブ征伐に出る時, 急先ぽうに参戦して功を立てて雁書都護府の割り符道士に昇進するようになる.

当時吐蕃が北で突厥と関係を結んで中央アジアの覇権を虎視消消と狙っていた. 吐蕃が北部パキスタンにあった素髪率国と同盟を結んで唐依西域貿易路を遮断しようと思うと唐朝廷では雁書都護府に西域征伐領を下げる. ここに高仙芝はヘングヤングゾルドサに任命されて引っ越し業, ボングサングチォング, 単数室, 張無価, ソックワンギョングなど長寿たちといっしょに軍事 1万名余を従えて素髪率国を向けて行軍する.

高仙芝の軍隊はヒンドゥークシ山脈を越えてオシックニックグックで全軍を詳細どおり編成, 吐蕃軍事たちの集結誌である煙雲補で進撃した. ワカンギェゴックで吐蕃君 1万名余とでくわした遠征軍は合戦あげく敵兵 8千名余を惨殺して 1千名余を生け捕る戦果をあげる. サルハド戦闘で勝利をおさめた高仙芝はカラコラム山脈を越えて素髪率国で進撃しようというちょっと無謀な計画を立てる. これによって雪崩に会って多くの犠牲者を出しながらも遠征軍は結局飛ぶ鳥も越すことができないというダルコトリョングを突破してギルギトにある素髪率国を占領したのだ. この時高仙芝の軍隊は素髪率国を支援するために進軍して来た吐蕃君の進路を遮断するために彼らと戦闘をしながら素髪率国で向けるすべての登校を切ってしまった. このようにして素髪率国が追後に吐蕃と交渉することができる唯一の道が混むようになったのだ.

が消息を聞いて西域イスラム国家 72ヶ国が唐に降伏するようになる. 高句麗は消えたが西域で高句麗の歴史はまた始まっていた.

高仙芝は戦勝報告書を作成してすぐ調整で伝達する. 自分を無視して任意的に報告書を提出した高仙芝に対してブモングヤングチァルはひどい不満を持ち始めたし, ふたりの仏画はブモングヤングチァルが他の地域に移転しながら易しく終わる. そして高仙芝が新しい雁書節度使に任命される.

750年今のウズベキスタンタシュケントにあったソックグック, トカだとなどがサラセンの影響力が大きくなると唐依支配を脱しようと思った. すると唐朝廷からまた出征命令を下逹受けた高仙芝は軍事 10万名を従えて二番目西域征伐に出る. あまり苦労しない戦闘あげく簡単にソックグックを占領した高仙芝は引き続き突起の時, トカだとなども征腹して西域小菊たちとサラセンの間の交渉を阻んだ.

世界は 8世紀中葉, 糖菓サラセン帝国が軸を成していた. パミール高原で勢力を伸ばしながら挑戦するサラセンと中央アジアの交易圏を安全に守ろうとする唐はどうせ世界覇権をおいて衝突するしかなかった. 唐朝廷でソックグックワングナグチァビシに対する死刑を執行するとナグチァビシの息子はサラセンに支援を要請した. サラセン帝国はアプラシアブ支配権確保のために隣近小菊たちと連合軍を形成する. この時, 連合軍を総指揮した長寿はホラサン総督おせじムスリムの腹心であるジアドイーブンいかした.

高仙芝は 7万軍事を従えてサマルカントを征腹した後, ティエンサンサンメックを登程してタシュケント西北部にあるタラ須恵書イーブンサルリの 30万大軍と避けることができない一戦をした. 一番目交戦で高仙芝は丘陵の中に落とし穴をほっておいてアラブ連合軍の電車部隊を誘引して全滅させる勝利をおさめる. しかし二番目交戦で不意に夜襲を敢行したカロ−ルルク族の襲撃で軍事 4万名余を失って退却するようになる. 敗北が分からなかった高仙芝において初めと同時に最後の敗北だった.

中国の歴史学者フイタオ教授は ¥”非常に重要な戦争だ. 学者たちはこの戦闘がイスラム文化を洞方へ伝えるのに決定的な役目をしたと言う. タルラス戦闘以後イスラム勢力が東に進出して今のように発展す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ったのだ.¥”と言った.

唐はタルラス戦闘敗北以後, 中央アジアでの影響力が急速に弱くなった. その代わりアラブ圏軍隊が駐屯しながらシルクロードは相当部分サラセン帝国の支配を受けるようになる.

タルラス戦闘の影響は全然違った所で現われて世界文明の歴史に変化を駆って来るようになる. すぐ中国の伝統紙製造技術が西側で伝えたのだ. タルラスゾントでアラブ連合軍の虜になった唐軍事たちの中多い製紙技術者たちが含まれていたし人々がサマルカントでひかれて来て紙を生産するようになったのだ.
タルラス戦闘で知られ始めた第地術はシルクロードに付いてサマルカントとバグダッドを経ってダマスカスで伝える. そして 12世紀初にはヨーロッパにまで伝わって西洋の学問を起こす元肥になる.

個人的には高仙芝の惨めな敗北が返って東で文化史に大きな線を引いたのだ.

タルラス戦闘以後雁書節度使で解任された高仙芝は長安で移住してたとえ敗軍之将だがその間の功を認めた燎宗皇帝からウウリムデザンググンという官職とともに邸宅を下賜受けるようになる.

高仙芝が長安に帰って来て隠居している頃, 唐の皇帝燎宗は国事の面倒を見ないで虞美人草との愛に陷って調整は内紛に包まれた.

高仙芝が長安にとどまってから 4年目ドエドンヘに冬服節度使アンノックサンが汎洋で反乱を起こして唐は一帯混乱に落ちこんだ.

高仙芝は叛軍討伐の責任を引き受けて部員数になって 10万名の軍事を召集, チォンムグンだから名付けて出場するようになる.

昔の部下大将だったボングサングチォングが射手官で叛軍と交戦をしている途中敗れて退却すると高仙芝は天然この頃の銅管で陣を張って叛軍と戦う準備をした. そして叛軍に得にできる事をあらかじめ防止するために軍糧を二ヵ月分の分量だけ残して皆焼却してしまった.

すると減軍ビョンヤングソングと言う(のは)者が高仙芝をおとし入れて国庫を貪ったという悔しい濡れ衣を着せた. かくして高仙芝はチンの中で棒状青果一緒に惨刑にあってしまう.

高仙芝の最後とともに銅管は陷落されて唐も徐徐に沒落の道を歩く.

シルクロードは高仙芝が支配した時一番盛んだったし彼が去りながら衰退を繰り返えした.

高仙芝の遠征結果で西側に伝わった製紙技術はその後ヨーロッパルネサンスの起爆剤になって, 西洋文物は早く発展して行った.

世界文明社に大きな跡を残した高仙芝. 彼は高句麗人だった. 韓国歴史にも世界史に足跡を残した偉い人物がいたのだ. 私たちが彼の名前を憶えなければならない理由もここにある.


세계 문명의 역사를 뒤바꾼 고구려의 후예 고선지(高仙之)

 

인간의 접근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땅 파미르 고원...

서기 747년에 이 파미르를 넘고 힌두쿠시 산맥을 돌파하여 파키스탄 북부를 점령한 당나라 장수가 있었다. 그 이름은 고선지(高仙之). 신당서(新唐書)에는 고선지가 고구려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영국의 고고학자 스타인(Sir Mark Aurel Stein, 1862 ~ 1943) 박사는 당시의 원정을 두고 한니발과 나폴레옹의 원정보다 더 위대한 업적이었다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타슈켄트에서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 내지로 들어가면 찬란한 고대 문화의 유적이 펼쳐지는데 그것은 천여개의 석굴로 이루어져 있는 돈황 석굴이다. 돈황 석굴에는 두개의 깃털로 된 조우관을 쓴 인물이 벽화에 묘사되어 있다.

역사학자들은 이 인물을 고구려의 사신으로 보고있다. 고구려인이 실크로드를 따라 이 돈황을 거쳐가며 동서교류를 했다는 증거다.

고선지는 751년부터 755년까지 서안에 살면서 선양방과 영안방이라는 두채의 저택을 하사받았다. 당시에 당나라에서 이민족으로 이런 대우를 받은 인물은 흔치않았다.

고구려는 중국 당나라와 네차례 전쟁을 벌여 세번을 이기고 한번을 졌다. 그러나 그 한번의 패배로 인해 고구려의 존재는 역사에서 사라진다.

당은 20만명의 고구려인을 강제이주시키는데 영주땅에 많은 고구려인이 압송되었다. 이때 고선지의 아버지인 고사계는 안서군의 장교로 기용된다.

투르판에서 안서도호부의 치소가 있었으나 후에 쿠차로 옮겨진다. 이에 따라 고선지 일가도 쿠차로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안서도호부는 현재의 신강위구르 자치구를 관할했던 기관이었다. 고선지는 쿠차에서 성장하여 아버지를 따라 안서군에 입대한다.

신당서의 고선지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高仙之基高句麗人容貌佳秀弓奇馬二十世猷擊將軍(고선지는 고구려인으로 용모가 아름답고 궁술과 기마술에 능해 20여세에 유격장군에 올랐다.)

고선지는 안서절도사 부몽영찰의 신임으로 언기진수사가 되어 투르판에 부임한다. 740년에는 안서군이 톈산산맥 서쪽의 달해부 정벌에 나설때, 선봉장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우고 안서도호부의 부절도사로 승진하게 된다.

당시 토번이 북으로 돌궐과 관계를 맺고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토번이 북부 파키스탄에 있던 소발률국과 동맹을 맺어 당의 서역 무역로를 차단하려 하자 당나라 조정에서는 안서도호부에 서역 정벌령을 내린다. 이에 고선지는 행영절도사로 임명되어 이사업, 봉상청, 단수실, 장무가, 석원경 등 장수들과 더불어 군사 1만여명을 거느리고 소발률국을 향해 행군한다.

고선지의 군대는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오식닉국에서 전군을 세부대로 편성, 토번 군사들의 집결지인 연운보로 진격했다. 와칸계곡에서 토번군 1만여명과 마주친 원정군은 접전 끝에 적병 8천여명을 참살하고 1천여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린다. 사르하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고선지는 카라코람 산맥을 넘어 소발률국으로 진격하자는 다소 무모한 계획을 세운다. 이에 따라 눈사태를 만나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도 원정군은 결국 나는 새도 넘지 못한다는 다르코트령을 돌파하여 길기트에 있는 소발률국을 점령한 것이다. 이때 고선지의 군대는 소발률국을 지원하기 위해 진군해온 토번군의 진로를 차단하기 위해 그들과 전투를 벌이면서 소발률국으로 향하는 모든 등교를 끊어버렸다. 이렇게 해서 소발률국이 추후에 토번과 교섭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막히게 된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서역 이슬람 국가 72개국이 당나라에 항복하게 된다. 고구려는 사라졌지만 서역에서 고구려의 역사는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고선지는 전승보고서를 작성하여 바로 조정으로 전달한다. 자신을 무시하고 임의적으로 보고서를 제출한 고선지에 대해 부몽영찰은 심한 불만을 갖기 시작했고, 두사람의 불화는 부몽영찰이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면서 쉽게 끝난다. 그리고 고선지가 새 안서절도사에 임명된다.

750년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 있던 석국, 토카라 등이 사라센의 영향력이 커지자 당의 지배를 벗어나려 했다. 그러자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다시 출정명령을 하달받은 고선지는 군사 10만명을 거느리고 두번째 서역정벌에 나선다. 그리 힘들이지 않은 전투 끝에 간단하게 석국을 점령한 고선지는 이어 돌기시, 토카라 등도 정복하여 서역 소국들과 사라센 간의 교섭을 막았다.

세계는 8세기 중엽, 당과 사라센 제국이 축을 이루고 있었다. 파미르 고원으로 세력을 뻗치며 도전하는 사라센과 중앙아시아의 교역권을 안전하게 지키려는 당나라는 어차피 세계패권을 놓고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당나라 조정에서 석국왕 나구차비시에 대한 사형을 집행하자 나구차비시의 아들은 사라센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사라센 제국은 아프라시압 지배권 확보를 위해 인근 소국들과 연합군을 형성한다. 이때, 연합군을 총지휘한 장수는 호라산 총독 아부 무슬림의 심복인 지아드 이븐 살리였다.

고선지는 7만 군사를 거느리고 사마르칸트를 정복한 뒤, 톈산산맥을 등정하여 타슈켄트 서북부에 있는 탈라스에서 이븐 살리의 30만 대군과 피할 수 없는 일전을 벌였다. 첫번째 교전에서 고선지는 구릉 속에 함정을 파놓고 아랍 연합군의 전차부대를 유인하여 전멸시키는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두번째 교전에서 느닷없이 야습을 감행한 카롤루크 족의 습격으로 군사 4만여명을 잃고 퇴각하게 된다. 패배를 몰랐던 고선지에게 있어 처음이자 마지막 패배였다.

중국의 역사학자 후이타오 교수는 "매우 중요한 전쟁이다. 학자들은 이 전투가 이슬람 문화를 동쪽으로 전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탈라스 전투 이후 이슬람 세력이 동쪽으로 진출해 지금처럼 발전할수 있게 된 것이다."고 말했다.

당나라는 탈라스 전투 패배 이후, 중앙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이 급속도로 약해졌다. 그 대신 아랍권 군대가 주둔하면서 실크로드는 상당부분 사라센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탈라스 전투의 영향은 전혀 다른 곳에서 나타나 세계 문명의 역사에 변화를 몰고 오게 된다. 바로 중국의 전통 종이 제조 기술이 서방으로 전파된 것이다. 탈라스전투에서 아랍 연합군의 포로가 된 당나라 군사들 가운데 많은 제지 기술자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들이 사마르칸트로 끌려와 종이를 생산하게 된 것이다.
탈라스 전투로 알려지기 시작한 제지술은 실크로드를 따라 사마르칸트와 바그다드를 거쳐 다마스커스로 전파된다. 그리고 12세기 초에는 유럽에까지 전해져 서양의 학문을 일으키는 밑거름이 된다.

개인적으로는 고선지의 비참한 패배가 도리어 동서 문화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것이다.

탈라스 전투 이후 안서절도사에서 해임된 고선지는 장안으로 이주하여 비록 패군지장이지만 그간의 공을 인정한 현종 황제로부터 우우림대장군이라는 벼슬과 함께 저택을 하사받게 된다.

고선지가 장안에 돌아와 은거하고 있을 무렵, 당나라의 황제 현종은 나랏일을 돌보지 않고 양귀비와의 사랑에 빠져 조정은 내분에 휩싸였다.

고선지가 장안에 머문지 4년째 되던해에 동복절도사 안녹산이 범양에서 반란을 일으켜 당나라는 일대 혼란에 빠져들었다.

고선지는 반란군 토벌의 책임을 맡아 부원수가 되어 10만명의 군사를 소집, 천무군이라 명명하고 출전하게 된다.

옛 부하장수였던 봉상청이 사수관에서 반란군과 교전을 벌이다가 패하고 퇴각하자 고선지는 천연요새인 동관에서 진을 치고 반란군과 싸울 준비를 했다. 그리고 반란군에게 득이 되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군량을 두달치의 분량만 남기고 모두 소각해버렸다.

그러자 감군 변영성이란 자가 고선지를 모함하여 국고를 탐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씌웠다. 이리하여 고선지는 진중에서 봉상청과 함께 참형을 당하고 만다.

고선지의 최후와 함께 동관은 함락되고 당나라도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는다.

실크로드는 고선지가 지배했을때 가장 번성했고 그가 떠나면서 쇠퇴를 거듭했다.

고선지의 원정결과로 서방에 전해진 제지기술은 그후 유럽 르네상스의 기폭제가 되고, 서양문물은 빠르게 발전해갔다.

세계 문명사에 커다란 흔적을 남긴 고선지. 그는 고구려인이었다. 한국 역사에도 세계사에 족적을 남긴 위대한 인물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그의 이름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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