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壬辰の乱(壬辰倭乱)と丁酉災乱(丁酉再乱)で朝鮮水軍を総指揮して祖国を危機で旧恨忠武公(忠武公) 李舜臣(李舜臣). 彼は南海岸あちこちで 23回の海上戦闘をチルオ一度も敗れないで皆勝利をおさめて災害圏を掌握, 7年戦争を朝鮮の勝利に導いた主役だった. 彼が成した 23回の承前(勝戦)の中一番歴史に道の輝く戦闘は 1597年 9月にあったミョングリャング海戦(鳴梁海戦)だった. イギリスの海軍兵学校教材では鳴梁海戦をB.C. 408年のサルラミス海戦, 1588年のカレー海戦, 1805年のトラファルガー海戦といっしょに世界海戦社に一番偉い勝利で評価している.

イギリスの海軍兵学校校長ゲニオルビルラド所長は ¥”東洋にもネルソンに比べるに値する海軍指揮官があるという事実をイギリス人たちは認めにくいが李舜臣が東洋歴史で一番偉い海戦英雄であることは否定することができない事実だ.¥”と言った.

戦艦 12尺と軍事 120人余りの兵力で戦艦 133尺, 軍事 3万名余の敵軍をマッアサウン不可思議な勝利ミョングリャング海戦. 敵軍は戦艦 31尺が撃沈されて 8千名余の死傷者ができる被害を被ったが我軍はただ一隻の戦艦も撃沈されなかったし戦死者 2人と負傷者 3人で軽微な避けて着ただけだった. しかし今日私たちはこのような奇蹟の勝利に対してあまり境外心を感じていない. 果して忠武公はどんなにこのような勝算ない不可能な戦闘を勝利に導くことができただろうか?

忠武公は彼の著書 ¥”乱中日記(乱中日記)¥”にその日の緊迫だった合戦の瞬間をこんなに少ない.

¥”賊船に何重で取り囲まれてこれからどうするか分からない. 軍事たちは皆思索になってお互いの顔だけ眺めるだけ... 残り軍船たちも怖がって進撃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壬辰の乱が起きた以後忠武公が総指揮した朝鮮三道水軍連合船団は 1592年 5月から 1594年 4月まで 21回の海上戦闘を支払うようになるのに, もっと驚くべきなことは 1592年 5月 7日にあった玉浦海戦から 9月釜山津海戦まで朝鮮水軍の伝えることは一隻も被害を被らなかったというのだ. 1597年 7月 16日朝鮮水軍の唯一の敗戦(敗戦)だった七川量海戦を除いたら我軍が一番多い被害を被った戦闘が釜山津海戦だったが当時 100人余りの死傷者ができたが戦艦 173尺の中一隻も時の攻撃によって沈沒されなかったのだ. 朝鮮水軍が初めて戦艦で被害を被った戦闘が 1593年 4月のウングポ海戦だったが時の砲撃を受けて沈んだのではなくギョックグンドルの間違いによって方向を過ち取った戦艦ドチォックがお互いに衝突して転覆したことにこの事実だけ見ても当時朝鮮水軍の全力がいくら莫強したのか見当をつけることができる.

それならどうして当時倭国水軍は朝鮮水軍との海戦で無気力に敗れるしかなかったのか? それは朝鮮と倭国の主力艦船で差がある.

日本九州の北海岸にある名古屋性は豊臣秀吉が朝鮮侵攻の出兵基地をこちらに決めて積んだ城だ. ここには壬辰の乱の時の名古屋性姿が分かる屏風が一つがあるのに名古屋城中の人々と家屋構造などがこの屏風に描写されている. ここには甲板の上に家屋が建てられている安宅船と言う(のは)お腹がグリョジョイッヌンデ長さが 30余mである安宅船は当時倭国水軍の主力艦船だった.

が滲む 2ツンググゾで甲板の上で戦闘をする兵士は約 2百名余位だったし甲板の下で櫓を漕ぐギョックグンは約 100人余り位だったと言う.

ここに対立する朝鮮水軍の主力艦船である板屋船は約 300人身近に上船することができたし表では安宅船と別に差がなさそうだ. しかし船を作る方式ではすごい差がある. 板をどんなに連結するのかによって配意堅固性は決まる. 板屋船の最大の特徴は木針で連結するというのだ. 板の下の部分を ¥”¥”字であごを切ってやってさらに板を付けた後真実木針を上の板から下の板でネリョコッドッが打ちこむ. 一方安宅船は金くぎを朴板を連結させる. 板 2個をそのまま並んで付けて金くぎで真っすぐ 博雅 連結する. 厚い板をイオブッで底を作って引き継いで横面を止める. 甲板は 2ツンググゾだが横面からの衝撃が弱い構造だ.

朝鮮の板屋船は厚くて四角い板を引き継いで平たい底を作って 7個の板でお腹を止める. お腹が潰れないように張衰老骨格を堅たくする. 安宅船が 1個の帆柱である一方, 板屋船は 2個の帆柱を使った.

朝鮮水軍は倭国水軍との戦闘で安宅船が板屋船より弱いということを見抜いて配意前髪を賊船の横面にそのまま突き飛ばす攻撃をよく試みた. これを党派(撞破) 攻撃と言う. 党派で賊船のそば部分を破って甲板の下に海水が入って来るようにして徐徐に賊船が沈むようにする攻撃方法だった. 壬辰の乱と丁酉災乱の時に倭軍が個人火器で使った武器は弔銃だった. 弔銃の威力で戦争初期に朝鮮陸軍はおびただしい被害を被って敗北を繰り返えした. しかし朝鮮水軍は違った. すぐ倭国水軍を落とすようにしたし弔銃を顔負けにさせた莫強した武器があった. すぐ火砲(火砲)だ.

朝鮮水軍の特徴は火砲をお腹に装着しながら射撃するというのだ. これは当時海戦の様相がもう近代的段階に立ち入ったことを意味するというのだった. 朝鮮水軍が使った火砲の中一番威力的な火砲は天子総統で長さが 130cm, 重さが 298kgで一度発射するのに使われる火薬は 1.1kgだ. 重さ 30kgの次大戦を 400余mほど放すことができる威力を持っている.

しかし倭国水軍の主力武器は弔銃だった. しかし弔銃は陸地前でその威力を遺憾無く発揮することができたがすごい火力の朝鮮数だね前では無用の物に過ぎなかった. 当時倭国は火砲を作る技術がなかったし西洋から持ちこんだ砲架あったが船体が丈夫ではなくて配意梁に砲をぶら下げておいて書か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しかしいくら優秀な戦艦, 優秀な武器でも ¥”戦艦 12尺, 軍事 120人余り VS 戦艦 133尺, 軍事 3万名余¥”は手におえにくい全力の差だ. それなら当時朝鮮水軍にはもう一つの武器があったはずだ. それは何だったろうか?

南海と進度を引き継ぐ進度大橋の下がすぐウルドルモックだ. こちらは潮流が早くて水勢がお前無税語かなりの滲む過ぎ去ることができない. 果して日本の九老シマ水軍はウルドルモックの早い水勢が分からなくて渡ろうと思ったのだろう. しかし日本四国のミヤゴブ地域は九老シマ水軍の足だまりでウルドルモックの形態と驚くべきな位にそっくりで潮流の速度もウルドルモック劣らず非常に早い. それなら彼らはこんな早い水勢にもう慣れたという根拠になる.

しかし地形地税を利用することができる戦略家である忠武公は狭いにわか造り類のウルドルモックを活用する悲壮のカードを準備していた. ミョングリャング海戦当時七川量海戦で戦死したイオックギの後を引き継いで全裸左水使に上がった金億追加自分の行績を直接記録した ¥”玄武空室期¥”という本を見れば一番幅が狭い所に鉄鎖を設置して賊船をかかるようにしたという記録が見える. 手元鉄鎖は進度大橋があった席, 幅が一番狭いこちらにかけたはずだ. 両方にマックゲを 博雅おいて鉄索は水に浸るように隠しておいて倭国水軍を待つのだ.

魚卵陣で出発した 133尺の倭軍大船団は右水営に立ち入る早い満ち潮に乗って早い速度でウルドルモックに立ち入る. 触りなく押し寄せた倭軍戦艦たちは考えもしない鉄鎖にかかってきちんきちんと積もってお互いにぶつかって余地もなく割れる. 午後 1時頃, 水路が停止する. しかし倭国水軍は呉道歌もできなかったまま混乱に陷っている. この時朝鮮水軍が進んで猛烈な砲撃を加える. また引潮になる瞬間, 停止した水路が逆に変わって倭国水軍の方で早く流れる. 有利だった潮流さえ不利になると倭国水軍は極度に士気が落ちる. 朝鮮水軍はトネリョがは倭国水軍を追撃してずっと火砲射撃をして完全に殲滅してしまう.

鎖とウルドルモックの水を汲む利用したこの作戦で倭国水軍は手も使って見られずに大敗したし朝鮮水軍はただ一隻の避けてもなしに通快な勝利をおさめたのだ.

世界海戦思想その類例がない偉い承前, ミョングリャング海戦はこんなに誕生したのだ.



세계 전쟁사상 4대 해전 가운데 하나인 명량 해전(鳴梁海戰).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정유재란(丁酉再亂)에서 조선 수군을 총지휘하여 조국을 위기에서 구한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그는 남해안 곳곳에서 23회의 해상전투를 치르어 한차례도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를 거두어 재해권을 장악, 7년 전쟁을 조선의 승리로 이끈 주역이었다. 그가 이룩한 23회의 승전(勝戰)가운데 가장 역사에 길이 빛날 전투는 1597년 9월에 있었던 명량 해전(鳴梁海戰)이었다. 영국의 해군사관학교 교재에서는 명량해전을 기원전 408년의 살라미스 해전, 1588년의 칼레 해전, 1805년의 트라팔가 해전과 더불어 세계 해전사에 가장 위대한 승리로 평가하고 있다.

영국의 해군사관학교 교장 게니얼 빌라드 소장은 "동양에도 넬슨에 견줄만한 해군 지휘관이 있다는 사실을 영국인들은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이순신이 동양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해전 영웅인 것은 부정할수 없는 사실이다."고 말하였다.

전함 12척과 군사 120여명의 병력으로 전함 133척, 군사 3만여명의 적군을 맞아싸운 불가사의한 승리 명량 해전. 적군은 전함 31척이 격침되고 8천여명의 사상자가 생기는 피해를 입었으나 아군은 단 한척의 전함도 격침되지 않았으며 전사자 2명과 부상자 3명으로 경미한 피해만 입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기적의 승리에 대해 그다지 경외심을 느끼지 않고 있다. 과연 충무공은 어떻게 이러한 승산없는 불가능한 전투를 승리로 이끌수 있었을까?

충무공은 그의 저서 "난중일기(亂中日記)"에 그날의 긴박했던 접전의 순간을 이렇게 적고 있다.

"적선에 몇 겹으로 둘러싸여 앞으로 어찌 될지 알수가 없다. 군사들은 모두 사색이 되어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뿐... 나머지 군선들도 겁을 먹고 진격하지 못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후 충무공이 총지휘한 조선 삼도 수군 연합선단은 1592년 5월부터 1594년 4월까지 21회의 해상전투를 치르게 되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1592년 5월 7일에 있었던 옥포 해전에서부터 9월 부산진 해전까지 조선 수군의 전함은 한척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것이다. 1597년 7월 16일 조선수군의 유일한 패전(敗戰)이었던 칠천량 해전을 제외한다면 아군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던 전투가 부산진 해전이었는데 당시 100여명의 사상자가 생겼지만 전함 173척 가운데 한척도 적의 공격에 의해 침몰되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 수군이 처음으로 전함에서 피해를 입었던 전투가 1593년 4월의 웅포 해전이었는데 적의 포격을 받고 침몰한 것이 아니라 격군들의 실수로 인해 방향을 잘못 잡은 전함 두척이 서로 충돌하여 전복된 것으로 이 사실만 보더라도 당시 조선 수군의 전력이 얼마나 막강했었는지 짐작할수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당시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과의 해전에서 무기력하게 패배할 수 밖에 없었는가? 그것은 조선과 일본의 주력 함선에서 차이가 난다.

일본 큐슈의 북쪽 해안에 있는 나고야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침공의 출병기지를 이곳에다 정하고 쌓았던 성이다. 여기에는 임진왜란 때의 나고야성 모습을 알수있는 병풍이 하나가 있는데 나고야성안의 사람들과 가옥구조 등이 이 병풍에 묘사되어 있다. 여기에는 갑판 위에 가옥이 지어져 있는 안택선이란 배가 그려져있는데 길이가 30여m인 안택선은 당시 일본 수군의 주력 함선이었다.

이 배는 2층구조로 갑판 위에서 전투를 벌이는 병사는 약 2백여명 정도였으며 갑판 아래에서 노를 젓는 격군은 약 100여명 정도였다고 한다.

이에 맞서는 조선 수군의 주력함선인 판옥선은 약 300명 가까이 승선할수 있었으며 겉으로는 안택선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배를 만드는 방식에서는 굉장한 차이가 난다. 판자를 어떻게 연결하느냐에 따라 배의 견고성은 결정된다. 판옥선의 가장 큰 특징은 나무못으로 연결한다는 것이다. 판자의 아랫부분을 "ㄴ"자로 턱을 깎아내고 그위에 판자를 붙인 다음 참나무못을 위 판자에서 아래 판자로 내려꽂듯이 박는다. 반면 안택선은 쇠못을 박 아 판자를 연결시킨다. 판자 2개를 그대로 나란히 붙이고 쇠못으로 똑바로 박 아 연결한다. 두꺼운 판자를 이어붙여 바닥을 만들고 이어서 옆면을 세운다. 갑판은 2층구조지만 옆면으로부터의 충격이 약한 구조다.

조선의 판옥선은 두껍고 네모난 판자를 이어서 평평한 바닥을 만들고 7개의 판자로 배를 세운다. 배가 찌그러지지 않게 장쇠로 골격을 단단히 한다. 안택선이 1개의 돛대인 반면, 판옥선은 2개의 돛대를 사용하였다.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과의 전투에서 안택선이 판옥선보다 약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배의 앞머리를 적선의 옆면에 그대로 들이받는 공격을 자주 시도했다. 이것을 당파(撞破) 공격이라 한다. 당파로 적선의 옆부분을 깨뜨려서 갑판아래에 바닷물이 들어오게 만들어 서서히 적선이 가라앉게 하는 공격방법이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에 왜군이 개인화기로 사용하던 무기는 조총이었다. 조총의 위력으로 전쟁 초기에 조선 육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으며 패배를 거듭했다. 그러나 조선 수군은 달랐다. 바로 일본 수군을 떨게했고 조총을 무색하게 한 막강한 무기가 있었다. 바로 화포(火砲)이다.

조선 수군의 특징은 화포를 배에 장착하면서 사격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해전의 양상이 이미 근대적 단계에 들어섰음을 의미한다는 것이었다. 조선 수군이 사용한 화포 가운데 가장 위력적인 화포는 천자총통으로 길이가 130cm, 무게가 298kg이며 한번 발사하는데 사용되는 화약은 1.1kg이다. 무게 30kg의 차대전을 400여m가량 날려보낼수 있는 위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일본 수군의 주력무기는 조총이었다. 그러나 조총은 육지전에서 그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었으나 굉장한 화력의 조선 수군 앞에서는 무용지물에 불과했다. 당시 일본은 화포를 만들 기술이 없었고 서양에서 들여온 포가 있었으나 선체가 튼튼하지 못해 배의 들보에다 포를 매달아놓고 써야만 했다.


 

그러나 아무리 우수한 전함, 우수한 무기라도 "전함 12척, 군사 120여명 VS 전함 133척, 군사 3만여명"은 감당하기 힘든 전력의 차이이다. 그렇다면 당시 조선 수군에게는 또다른 무기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남해와 진도를 잇는 진도대교 아래가 바로 울돌목이다. 이곳은 조류가 빠르고 물살이 너무세어 웬만한 배는 지나가지 못한다. 과연 일본의 구로시마 수군은 울돌목의 빠른 물살을 모르고 건너려고 했던 것일까. 하지만 일본 시코쿠의 미야고부 지역은 구로시마 수군의 근거지로 울돌목의 형태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고 조류의 속도도 울돌목 못지않게 매우 빠르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런 빠른 물살에 이미 익숙했다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지형지세를 이용할줄 아는 전략가인 충무공은 좁은 급조류의 울돌목을 활용할 비장의 카드를 준비하고 있었다. 명량 해전 당시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한 이억기의 뒤를 이어 전라좌수사에 오른 김억추가 자신의 행적을 직접 기록한 "현무공실기"라는 책을 보면 가장 폭이 좁은 곳에다 철쇄를 설치하여 적선을 걸리게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수중 철쇄는 진도대교가 있던 자리, 폭이 가장 좁은 이곳에 걸었을 것이다. 양쪽에 막게를 박 아놓고 쇠줄은 물에 잠기게 숨겨놓고 일본 수군을 기다리는 것이다.

어란진에서 출발한 133척의 왜군 대선단은 우수영으로 들어서는 빠른 밀물을 타고 빠른 속도로 울돌목으로 들어선다. 거침없이 밀려오던 왜군 전함들은 생각지도 않은 철쇄에 걸려 차곡차곡 쌓이며 서로 부딪혀 여지없이 깨진다. 오후 1시경, 물길이 정지한다. 그러나 일본 수군은 오도가도 못한채 혼란에 빠져있다. 이때 조선 수군이 전진하며 맹렬한 포격을 가한다. 다시 썰물이 되는 순간, 정지했던 물길이 거꾸로 바뀌어 일본 수군 쪽으로 빠르게 흐른다. 유리하던 조류마저 불리해지자 일본 수군은 극도로 사기가 떨어진다. 조선 수군은 떠내려가는 일본 수군을 추격하며 계속 화포사격을 하여 완전히 섬멸해버린다.

쇠사슬과 울돌목의 물길을 이용한 이 작전으로 일본 수군은 손도 써보지 못하고 대패하였으며 조선수군은 단 한척의 피해도 없이 통쾌한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세계 해전사상 그 유례가 없는 위대한 승전, 명량 해전은 이렇게 탄생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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