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日帝(日帝) 御用史学者たちの ‘任那日本府説(任那日本府説)’もそのユイルハン根拠である ‘日本書紀(日本書紀)’ 欽命期(欽明記)を読んで見れば ‘神功王后(神功王后) 新羅征伐説(新羅政伐説)’と似たり寄ったりに捏造されたことなのを分かる.




第一, 日本列島で ‘日本(日本)’という用語を初めて作って使ったことは 7世紀末〜8世紀初だ. これは日本学者たちもすべて認めるのだ. ところでこれに先たち 4〜6世紀にどうに ‘日本府(日本府)’という名称の機関が韓半島に設置されることができたのか? 名称から ‘日本書紀’ 編者が捏造したのだ.



第二, 日本大和[邪馬壱] 王国が 4〜6世紀に韓半島の 6街だと(六加羅)を占領して直轄植民地を作って任那日本府という総督府を置いて 200年間も統治したらこのおびただしい事件を韓国と中国の史書(史書)らが1行でも扱わないわけがない. また日本書紀にただ 8年先立って編纂された ‘古事記(古事記)’でも扱わなかったわけがない. ところでそういう記録がただ一言もなくてただ日本書紀にだけ出るということは任那日本府が歴史的事実ではなく日本書紀編者が ‘神工皇后新羅征伐説’と似たり寄ったりに捏造したことなのを示唆することだと言える.



第三, 日本書紀欽命期には日本列島の仕事が韓半島内事件のように多数記録されている. 例えば欽命期(欽明記) 23年(553年) 8月初に日本の欽命王(欽明王)が大将軍を送って高句麗を打ったが高句麗国王は垣根を越して逃げだして大和の大将軍は高句麗宮廷を占領して国王の寝室帳幕 7個, 鉄獄(鉄屋・屋根の上に上げる鉄製置物) 1個, 美女円(媛)と侍女午前者(吾田子)を奪って来て欽命王に捧げたと記録されている.



‘任那日本府説’を構えた日製御用学者たちのようにこの記録を韓半島平壌の高句麗記事に解釈すれば大和王国の欽命王が 553年に韓半島の高句麗首都平壌を襲撃, 占領したことになって明白な歴史捏造になるでしょう. 高句麗が大和王国に首都や王宮を襲撃・占領された事がなかったからだ. 高句麗は距離が遠くて非常に剛性したのであつかましい日製御用史学者たちも日本書紀のこの明瞭な高句麗宮城占領記事を持ってからも車馬 ‘大和王国の高句麗首都征伐説’を作り上げ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しかしもしこの記録を日本列島に移住して間大和王国近所の高句麗移住民村の村長家襲撃事件だと解釈すればその短い距離や大将軍の捕獲物の零細な規模が説明される. 当時日本列島には韓半島で渡った移住民が自治村, 小分け国を多数形成して暮していた. のような欽命期の任那(任那) 関係記事たちもこのような移住民自治村, 小分け国の記事ではないか?



第四, 韓国歴史で実在したがラグック(加羅国)は任那を含んで 6街だと, 任那を引けば 5街だと体系だった. ところで日本書紀(日本書紀) 欽命期(欽明記)の任那日本府が統治したという任那は 10個がラチェギェに行きなさい(加羅), アンラ(安羅), 死だ(斯二岐), すべてだと(多羅), まどろむよ(卒麻), 高次(古嵯), 自他(子他), サンバンハ(散半下), ゴルチァン(乞おかず), ヨックリェ(稔礼) など 10仮ラーガ共存したことになっている.



日帝(日帝) 御用史学者たちは日帝強制占領期間に総掛かりされて彼らの 10個がラを韓半島に非情しようと総力を傾けたが 4個位を似ているように捜し出して残りは皆失敗した. 一方 1960年代 ‘三韓・三国の日本列島内分局説’を申し立てた北朝鮮金日成総合大学学校の金錫亨教授とその弟子たちは日本列島の中で日本書紀の 10個がラグックを基肥(吉備) 地方を中心に皆捜し出しただけなくいくつがラギェヨル小分け国をもっと捜し出した. 日本書紀が任那日本府を置いて統治したという 10個がラグックは韓半島内の 6仮ラーガではなく日本列島で移住して入って行った 6街だと系列移住民たちの小分け国たちと係わるゴッイオッウムが証明されたわけだ.



五番目, 日本書紀(日本書紀) 欽命期(欽明記) 2年(532年)には任那日本府とともに ‘アンライルボンブ(安羅日本府)’が併存して新羅に降伏した任那の復興対策会議が挙論されるかと言えばアンライルボンブ官吏が欽命王(欽明王)の歟責を受ける記事が出る. これが韓半島内仕事だったら矛盾した記述だ. 韓半島でアンラはアラがだと(金海歌だとまたはハム安価だと)で任那は本家だと(ゴリョングがだと)として 532年に新羅に併合されたことはアンラがラで任那はそのずっと後 30年後の 562年に新羅に併合されたからだ. 任那日本府とともにアンライルボンブが 532年以後記事にも出るのでこれは韓半島の中の仕事になれない.



これだけではなく日本府の内容も任那またはアンラの役人たちと連絡する大和朝廷の 2人位の連絡所位に過ぎないのに記録されている. だからこれが事実なら任那日本府やアンライルボンブは日本列島の中で大和朝廷の日本列島の中がラギェヨル移住民自治村の連絡事務所みたいなことに過ぎない.



六番目, 日本書紀には 630年まで任那が存在してずっと大和朝廷に朝貢することに記録されている. しかし任那(ゴリョングがだと)が新羅に併合されて消えたことはこれより 70余年先に進んだ 562年(新羅真興王在位 23年, 日本欽命王在位 32年)の仕事だった. これまた日本書紀の任那日本府が韓半島ではなく日本列島の中にあった機関だったし任那も日本列島の中の小分け国任那なのを立証する記録だ.



ここまでに見ても日本の大和政権が 4〜6世紀に韓半島南部に直轄植民地を設置して任那日本府という総督府を置いて 200年間統治したといういわゆる任那日本府説は事実ではなくて日製御用私邸たちが捏造した虚構なのが明明白白したのだ.




日本が 1945年敗戦した後皇国史観に基づいた歴史捏造に対して日本史学係でも反省が起きた. その結果の一つが日本民族の起源を韓半島で求めて明らかにしながら出た江上ナミオ(江上波夫) などの ‘騎馬民族日本征服説’だ.




が学説は韓半島から騎馬民族が 4世紀初に日本北九州(北九州) 地方に移動して入って来て大和王国を立てたがこれが第10対日本国王である崇神王(崇神王) 焚きなさいというのだ. したがってこの学説は古事記と日本書紀の第1代〜第9代日王(日王)を加工人物で見た. そして第15代日王(日王)である応身王(応神王) 時同情(東征)をしてギナイ(畿内) 地方に移動したことで説明する. 行きなさい→北九州→ギナイ地方で繋がれる馬具(馬具) 出土品が同一類型という点が証拠だった. 江上は ‘神工皇后新羅征伐説’や ‘任那日本府説’も加工の物で見た.



騎馬民族説がここで終わったら科学的研究で終わったはずなのに江上はここに満足しないで ‘ウェハンヨンハブワンググックソル(倭韓連合王国説)’を申し立てた. その要旨は韓半島濃い王(辰王)の後裔という意識を持った崇神王が 4世紀初日本列島に渡って来て北九州に首都と本拠を置いて韓半島行きなさい(加羅) 地方と北九州地方を一緒にするウェハンヨンハブワンググック(倭韓連合王国)を設立したというのだ. この王国が剛性されて 4世紀末〜5世紀初韓半島で高句麗の南下を阻む主導勢力になったがその証拠がグァンゲトホテワングビ(広開土好太王碑)の ‘倭(倭)’ 記事というのだ.



しかしウェハンヨンハブワンググックソルも 6街だと地方が日本の植民地ではなく北九州と対等な領土だったという変化だけであって歴史的事実と無関係な加工の歴史だ. ウェハンヨンハブワンググックが韓半島南部と日本北九州にかけて 200年や尊属したら国号でもあったはずなのにこれを証明するただ1行の記録もないからだ. 韓半島に存在した 6街という小菊ごとに固有名称があったし任那はその中高令地方の小王国だった. 北九州にあった国は弁韓で渡った弁韓(弁韓)の旧野菊(狗耶国)の分局で 4世紀末〜5世紀初には ‘グヤウェ(狗邪倭)’と呼ばれるようになった小王国で 6がラで完全に分離独立された別個の小王国だった. 4世紀末〜5世紀初グヤウェが百済と仮ラーガ同盟して新羅を攻撃した時百済の要請に応じて小規模の救援病を送ってから新羅の救援要請に応じた高句麗光ヶ土豪太王(広開土好太王)の強軍にほとんど全滅された事があった. この時も百済軍の砲でが 8000人が越えたというやけどして分かるように主力君はもちろん数万名医百済軍だったし援兵である倭軍はやっと 1000人未満の補助的援兵だった. この時倭軍はウェハンヨンハブワンググックの軍隊ではなく北九州グヤウェグック(狗耶倭国)の使い捨て派遣援兵に過ぎなかったのでホテワングビムンがウェハンヨンハブワンググック実在の証拠がなれないのだ.




このように大韓帝国ではない日本帝国主義侵略者たちが韓国を侵略する時日帝御用史学者たちが侵略道具で考案した任那日本府説を 2007年の日本中高校教科書に収録して韓国侵略精神を教育, 鼓吹して日本文部科学省がこのような韓国歴史歪曲を勧奨または督励しているからまことにゲタンスロウン仕事に違いない.





出処 ; シン・ヨンハ(愼〓廈) 漢陽大学校碩座教授 著「また見る韓国歴史」東亜日報文化部 版 (2007年)


일본 어용학자들의 악의적인 한국 고대사 날조

 

 

일제(日帝) 어용사학자들의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도 그 유일한 근거인 ‘일본서기(日本書紀)’ 흠명기(欽明記)를 읽어 보면 ‘신공왕후(神功王后) 신라정벌설(新羅政伐說)’과 유사하게 날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첫째, 일본 열도에서 ‘일본(日本)’이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어서 사용한 것은 7세기 말∼8세기 초다. 이것은 일본 학자들도 다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앞서 4∼6세기에 어떻게 ‘일본부(日本府)’라는 명칭의 기관이 한반도에 설치될 수 있었겠는가? 명칭부터 ‘일본서기’ 편찬자가 날조한 것이다.



둘째, 일본 야마토[邪馬壹] 왕국이 4∼6세기에 한반도의 6가라(六加羅)를 점령해 직할 식민지를 만들고 임나일본부라는 총독부를 두어 200년간이나 통치했다면 이 엄청난 사건을 한국과 중국의 사서(史書)들이 한 줄이라도 다루지 않을 리가 없다. 또 일본서기에 단지 8년 앞서 편찬된 ‘고사기(古事記)’에서도 다루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런데 그러한 기록이 단 한마디도 없고 오직 일본서기에만 나온다는 것은 임나일본부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일본서기 편찬자가 ‘신공황후 신라정벌설’과 유사하게 날조한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일본서기 흠명기에는 일본 열도의 일이 한반도 내 사건처럼 다수 기록돼 있다. 예컨대 흠명기(欽明記) 23년(553년) 8월 초에 일본의 흠명왕(欽明王)이 대장군을 보내 고구려를 쳤는데 고구려 국왕은 담장을 넘어 도망가고 야마토의 대장군은 고구려 궁중을 점령해 국왕의 침실 장막 7개, 철옥(鐵屋·지붕 위에 얹는 철제 장식물) 1개, 미녀 원(媛)과 시녀 오전자(吾田子)를 빼앗아 와서 흠명왕에게 바쳤다고 기록돼 있다.



‘임나일본부설’을 꾸민 일제 어용학자들처럼 이 기록을 한반도 평양의 고구려 기사로 해석하면 야마토 왕국의 흠명왕이 553년에 한반도의 고구려 수도 평양을 습격, 점령한 것으로 되고 명백한 역사 날조가 될 것이다. 고구려가 야마토 왕국에 수도나 왕궁을 습격·점령당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거리가 멀고 매우 강성했으므로 후안무치한 일제 어용사학자들도 일본서기의 이 명료한 고구려 궁성 점령 기사를 갖고서도 차마 ‘야마토 왕국의 고구려 수도 정벌설’을 꾸며 내지 못했다.



그러나 만일 이 기록을 일본 열도에 이주해 간 야마토 왕국 부근의 고구려 이주민 마을의 촌장 집 습격 사건이라고 해석하면 그 짧은 거리나 대장군의 노획물의 영세한 규모가 설명된다. 당시 일본 열도에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이주민이 자치촌, 소분국을 다수 형성해 살고 있었다. 같은 흠명기의 임나(任那) 관계 기사들도 이러한 이주민 자치마을, 소분국의 기사가 아닐까?



넷째, 한국 역사에서 실재했던 가라국(加羅國)은 임나를 포함해서 6가라, 임나를 빼면 5가라 체계였다. 그런데 일본서기(日本書紀) 흠명기(欽明記)의 임나일본부가 통치했다는 임나는 10개 가라체계로 가라(加羅), 안라(安羅), 사이기(斯二岐), 다라(多羅), 졸마(卒麻), 고차(古嵯), 자타(子他), 산반하(散半下), 걸찬(乞찬), 염례(稔禮) 등 10가라가 공존한 것으로 돼 있다.



일제(日帝) 어용사학자들은 일제강점기에 총동원돼 그들의 10개 가라를 한반도에 비정하려고 총력을 기울였으나 4개 정도를 비슷하게 찾아내고 나머지는 모두 실패했다. 반면 1960년대 ‘삼한·삼국의 일본열도 내 분국설’을 제기한 북한 김일성종합대학교의 김석형 교수와 그 제자들은 일본 열도 안에서 일본서기의 10개 가라국을 기비(吉備) 지방을 중심으로 모두 찾아냈을 뿐 아니라 몇 개 가라계열 소분국을 더 찾아냈다. 일본서기가 임나일본부를 둬 통치했다는 10개 가라국은 한반도 내의 6가라가 아니라 일본 열도로 이주해 들어간 6가라 계열 이주민들의 소분국들과 관련된 것이었음이 증명된 셈이다.



다섯째, 일본서기(日本書紀) 흠명기(欽明記) 2년(532년)에는 임나일본부와 함께 ‘안라일본부(安羅日本府)’가 병존하여 신라에 항복한 임나의 부흥대책회의가 거론되는가 하면 안라일본부 관리가 흠명왕(欽明王)의 견책을 받는 기사가 나온다. 이것이 한반도 내 일이었다면 모순된 기술이다. 한반도에서 안라는 아라가라(김해가라 또는 함안가라)이고 임나는 본가라(고령가라)로서 532년에 신라에 병합된 것은 안라가라이고 임나는 그 훨씬 뒤 30년 후인 562년에 신라에 병합됐기 때문이다. 임나일본부와 함께 안라일본부가 532년 이후 기사에도 나오므로 이것은 한반도 안의 일이 될 수 없다.



이뿐만 아니라 일본부의 내용도 임나 또는 안라의 관리들과 연락하는 야마토 조정의 2명 정도의 연락소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므로 이것이 사실이라면 임나일본부나 안라일본부는 일본 열도 안에서 야마토 조정의 일본 열도 안 가라계열 이주민 자치촌의 연락사무소 같은 것에 불과하다.



여섯째, 일본서기에는 630년까지 임나가 존재해 계속 야마토 조정에 조공하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임나(고령가라)가 신라에 병합돼 사라진 것은 이보다 70여 년 앞선 562년(신라 진흥왕 재위 23년, 일본 흠명왕 재위 32년)의 일이었다. 이 역시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가 한반도가 아니라 일본 열도 안에 있던 기관이었고 임나도 일본 열도 안의 소분국 임나임을 입증하는 기록이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4∼6세기에 한반도 남부에 직할 식민지를 설치하고 임나일본부라는 총독부를 두어 200년간 통치했다는 소위 임나일본부설은 사실이 아니며 일제 어용사가들이 날조한 허구임이 명명백백한 것이다.




일본이 1945년 패전한 후 황국사관에 의거한 역사 날조에 대해 일본 사학계에서도 반성이 일어났다. 그 결과의 하나가 일본 민족의 기원을 한반도에서 구하여 밝히면서 나온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등의 ‘기마민족 일본정복설’이다.




이 학설은 한반도로부터 기마민족이 4세기 초에 일본 기타큐슈(北九州) 지방으로 이동해 들어와 야마토 왕국을 세웠는데 이것이 제10대 일본 국왕인 숭신왕(崇神王) 때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학설은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제1대∼제9대 일왕(日王)을 가공인물로 보았다. 그리고 제15대 일왕(日王)인 응신왕(應神王) 때 동정(東征)을 하여 기나이(畿內) 지방으로 이동한 것으로 설명한다. 가라→기타큐슈→기나이 지방으로 연결되는 마구(馬具) 출토품이 동일 유형이라는 점이 증거였다. 에가미는 ‘신공황후 신라정벌설’이나 ‘임나일본부설’도 가공의 것으로 보았다.



기마민족설이 여기서 끝났으면 과학적 연구로 끝났을 터인데 에가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왜한연합왕국설(倭韓聯合王國說)’을 제기했다. 그 요지는 한반도 진왕(辰王)의 후예라는 의식을 가진 숭신왕이 4세기 초 일본 열도에 건너와 기타큐슈에 수도와 본거지를 두고 한반도 가라(加羅) 지방과 기타큐슈 지방을 아우르는 왜한연합왕국(倭韓聯合王國)을 설립했다는 것이다. 이 왕국이 강성해져서 4세기 말∼5세기 초 한반도에서 고구려의 남하를 막는 주도 세력이 됐는데 그 증거가 광개토호태왕비(廣開土好太王碑)의 ‘왜(倭)’ 기사라는 것이다.



그러나 왜한연합왕국설도 6가라 지방이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라 기타큐슈와 대등한 영토였다는 변화뿐이지 역사적 사실과 무관한 가공의 역사다. 왜한연합왕국이 한반도 남부와 일본 기타큐슈에 걸쳐서 200년이나 존속했다면 국호라도 있었을 터인데 이를 증명할 단 한 줄의 기록도 없기 때문이다. 한반도에 존재했던 6가라는 소국마다 고유 명칭이 있었고 임나는 그 가운데 고령지방의 소왕국이었다. 기타큐슈에 있던 나라는 변한에서 건너간 변한(弁韓)의 구야국(狗耶國)의 분국으로 4세기 말∼5세기 초에는 ‘구야왜(狗邪倭)’라고 불리게 된 소왕국으로 6가라에서 완전히 분리 독립된 별개의 소왕국이었다. 4세기 말∼5세기 초 구야왜가 백제와 가라가 동맹해 신라를 공격했을 때 백제의 요청에 응해 소규모의 구원병을 보냈다가 신라의 구원 요청에 응한 고구려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강군에게 거의 전멸당한 일이 있었다. 이때도 백제군의 포로가 8000명이 넘었다는 데서 알 수 있듯 주력군은 물론 수만 명의 백제군이었고 원병인 왜군은 겨우 1000명 미만의 보조적 원병이었다. 이때 왜군은 왜한연합왕국의 군대가 아니라 기타큐슈 구야일본(狗耶倭國)의 일회성 파견 원병에 불과했으므로 호태왕비문이 왜한연합왕국 실재의 증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대한제국 말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이 한국을 침략할 때 일제 어용사학자들이 침략 도구로 고안한 임나일본부설을 2007년의 일본 중고교 교과서에 수록해 한국 침략 정신을 교육, 고취하고 일본 문부과학성이 이러한 한국 역사 왜곡을 권장 또는 독려하고 있으니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출처 ; 신용하(愼鏞廈) 한양대학교 석좌교수 著「다시 보는 한국 역사」동아일보 문화부 版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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