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日本人たちが韓国歴史を極甚に歪曲して捏造した植民史観の一つにいわゆる ‘任那日本府説(任那日本府説)’がある. 日本の古代大和[邪馬壱] 王国の神功王后(神功王后)が 3世紀中葉新羅を征伐して新羅国王の降参を受けたし 4〜6世紀に大和王国が韓半島の洛東江と纎津江の間 6街だと(六加羅)を征腹して任那日本府という一種の総督府を置いて直轄植民地で約 200年間統治したというのだ. 百済と新羅も任那日本府を通じて大和王国に信服(臣服)して朝貢を捧げたし, 高句麗も任那日本府に朝貢を捧げたというのだ. 日帝(日帝)は 19世紀末韓国を侵略する時任那日本府説を侵略的道具で使った. すなわち, 日本が韓国を植民地に占領しようとすることは 4〜6世紀の植民地旧領土(旧疆土)を復旧しようとするのだと日本国民の韓国侵略精神教育に任那日本府説を使った. しかし当代の史料を見れば歴史的真実は任那日本府説と正反対という事実に驚くようになる.



‘三国志(三国志)’ 偽書(魏書) 東夷伝(東夷伝) 辺猿組(弁辰條)に見れば辺猿(弁辰) 12ヶ国が登場する. このなかにビョンジンミオヤマグック(弁辰彌烏邪馬国)は今の慶北高令地方にあった弁韓の小王国だった. この名称で辺猿は弁韓(弁韓)・辰韓(辰韓)の合成語で, 未小山(彌烏邪馬)は古代辺猿語(弁辰語)だ. ミオは王族系統の意味で野馬は不足人だった. 筆者は弁韓 12ヶ国が 6がラに改編された時期にビョンジンミオヤマグックの野馬族一部が日本列島に渡って建てた小王国が大和小王国だと見る.



韓国歴史学界では弁韓 12ヶ国が 6がラに改編された原因と過程を明らかに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ところで付与族(夫余族)の移動経路を見れば一部が南下して高句麗を建国してまた百済を建国した後他の限り付与族軍団が陸路で竹嶺・條令を越えて洛東江と纎津江の間に南下して弁韓 12国を征服吸収融合して最高貴族将軍たちと王族が 6がラを建国した跡が見える.



この時先発隊がいわゆる金首露(金首露)で彼が建国したがラグックが金官家だと(金官加羅)だ. 付与の最高貴族場である街(加)たちはそれぞれ 5個がラの国を建てて付与王族は未小山国席に任那(任那)を建てて 6街だと連盟が樹立された. この時任那は ‘賃金国’の意味なのをもう日帝(日帝)の学者たちも明らかにした事がある. 行きなさいという ‘街(付与の最高貴族場呼称)の国’という意味の普通名詞でその前に付ける呼称が国名前と見られる.



弁韓 12ヶ国が 6がラに改編される時弁韓 12ヶ国支配勢力は一部が投降して征服者に融合されたが一部はその後新しい定着地を尋ねて日本列島に渡ったように見える. 三国志(三国志) 倭人伝(倭人伝)に弁韓 12ヶ国と名前が等しい大和国(耶馬壱国), 旧野菊(狗〓国), アンヤグック(安邪国), 旧露国(狗奴国 または 楽奴国) など 4個国名前が出る. 日本列島のこの 4個小王国は 6街だと樹立直後弁韓 12ヶ国の一部が日本列島に渡って樹立した分局(分国)入れたことを分かる.



筆者が大和国をビョンハンミオヤマグック(弁韓彌烏邪馬国)の野馬族が日本列島に渡って建てたことだと説明する時, ここで ‘野馬’は不足名前で ‘土’は ‘また’で ‘地’の意味で解釈する. 韓国古代言語で ‘地’は ‘’や ‘’だ. ‘いじめ’と ‘また’は互換される. 大和は ‘野馬族の地(the Land of Yama)’と言う(のは)意味だ. 古朝鮮文明圏では移住民族が新しい定着地で概して自分の不足次に地を付けて国名前を作る慣習があった. フン族が ‘訓の地’という意味でハンガリー(Hungary)を, 不可族が ‘不可族の地’という意味でブルガリア(Bulgaria)を使うように野馬は ‘高い山(高山)’ ‘山’ ‘動産’を意味することと見える.



韓半島の ‘未小山国’ 席に入れ替え樹立された 6がラのひとつの任那をその後日本列島に移住して樹立された ‘大和’で引き続き ‘未まな’に訓読したことは任那の漢文字訓読ではなく ‘未小山や’(‘私’は ‘お吸物’の古代韓国語)の駿馬を訓読で見なければならない. これまた ‘大和’の起源が韓半島の弁韓 ‘未小山国’だったのを補助的に証明してくれる. 結局日本の民族と国家の起源だと言う ‘大和’の起源が韓半島弁韓の ‘未小山国’だ.



三国志倭人伝は大和小王国に対して異例的に詳しい記録を残した. この史料は大和に対して ‘この私でも本来やっぱり男が賃金になったが定着してから 70〜80年間お互いに争うのを多年した. 遂に一女を一緒に立てて君王をしたら, 名前が卑ケフ呼[卑彌呼]だ’と記録した.



が大和小王国がその後発展して日本古代国家を樹立したし, 卑ケフ呼は日本最初の女王で後に ‘神功王后(神功王后)’の原型になった女王だ. 三国志倭人伝によれば卑ケフ呼[卑彌呼]は帰途(鬼道)を仕えて多くの人を夢中になるのに上手かった. すなわち, 巫女(巫女)だった. 年を取っても夫を取らなかった. 弟がいて治国(治国)を補佐した. 女王になった後には人々の前によく現われないで余種類 1000余人で始終かかるようにした. 男はただ一人が食べ物を供給して命令伝達のために出入りするようにした.




筆者は卑ケフ呼が付与族系王族女性だと思う. 名前で ‘ヒ’は ‘日’の日本式発音だ. ‘米’は王族系譜を現わして ‘鼻’は ‘お子さん’だ. 付与の王族は ‘日’さんだった. 百済の王族は ‘付与’さんだったし ‘日’さんは百済の上層貴族だった. 付与族一応が弁韓に下って征服合成して 6がラを樹立してその後未小山国一部が日本列島に入って来て大和小王国を建設したが初めて男性国王の 70〜80年統治を経った後武将たちの合意で付与王族女性卑ケフ呼を女王に推戴したことに解釈される.






三国志(三国志) 倭人伝(倭人伝)によれば卑ケフ呼は西紀 238年帯方郡(帯方郡) 太守に謝絶を送って中国ウィナラの皇帝に供え物をあげて ‘親衛倭王(親魏倭王)’という称号を冊封受けた. この時から大和は ‘大和なぜ(邪馬壱倭)’と呼ばれながら日本列島の中約 30個小王国の中で軍事力は弱いが中原帝国の公認を受けた代表的 ‘倭(倭)’として行世した. 大和の卑ケフ呼[卑彌呼] 女王は 247年には日本列島の中の旧露国(旧奴国)が ‘大和[邪馬壱]’を無力(武力)で征腹しようと脅威するので急に謝絶を帯方郡に送って助けを請じた. ウィナラの皇帝は謝絶壮丁(張政) 仲間と調書(詔書) 及び荒唐(黄幢)を送った. 大和はこの調書と荒唐で背後に強国であるウィナラがあることを誇示して危機を兔れた.




卑ケフ呼が 248年に死ぬと墓を大きい規模で使って男君王を立てた. しかし国の中が不服してまた内乱が始まって 1000余人が死んだ. ここに卑ケフ呼の宗親である 13歳の載せてください[壱与] または多異です[台与]を女王で立てて国を安定させた. ウィナだと謝絶壮丁はこの時まで滞留しながら李要に統治の術を教えて帰った.



三国志倭人伝はウィナだと謝絶壮丁連中が直接大和へ来て数年間滞留して直接観察したものなどを資料にしたから詳細で正確さを日本学者たちも認める史料だ. ところでこの史料に卑ケフ呼女王やこれです女王の政治功績どこにも韓半島南部を侵攻, 占領したとか新羅を征伐して新羅国王の降参を受けたという記録はない. 大和小王国は隣り旧露国の侵入も受け止めにくい位無力(武力)が弱かったので新羅征伐を行う余地もない弱小国だった.



400余年が経って大和王国が剛性されて日本を統一した後歴史定立が必要になると西紀 712年に ‘古事記(古事記)’をおかずして歴代王の系譜を体系化して 8年後の 720年に ‘日本書紀(日本書紀)’を編纂してその内容を補強した. この時古事記で大和の招待男君王を神武王(神武王)で時期を引き上げて高さで卑ケフ呼と載せてください女王に当たる席に神功王后という攝政王后を作ったように見える. このために良心的な日本学者たちは神武王から第9代開化王(開化王)までは仮想の日王(日王)と実在を否定している.



ところで古事記と日本書紀神工期(神功記) 49年(西紀 249年)に神功王后が直接船に乗って魚の助けを借りて新羅に到着したら新羅国王が争う思いもよらなくて自ら身を縛り上げて降伏するので新羅を ‘征伐’真書新羅国王をマルモックイクンで決めたし, この消息を聞いて高句麗国王と百済国王が神功王后を尋ねて来て大和のソボン(西藩)になって永久に朝貢を止めないと言うのでネグァンがドンチァング(内官家屯倉)で決めたがこれが三韓(三韓)というのであり, 毎年新羅国王が 80尺船舶の朝貢を日本国に捧げるのがこのような縁由だと記録されている.



神工皇后が新羅を ‘征伐(征伐)’したという西紀 249年は卑ケフ呼が死んだ 248年の次の年で李要の第1年だ. ウィナだと謝絶が大和を去る直前だ. もしこのおびただしい事件が事実ならウィナだと謝絶が本国に報告したはずで倭人伝に記録されなかった里はずがない. それではどうして古事記と日本書紀編者はこのような歴史捏造をほしいままにしただろうか? もしも日本に根拠資料があっただろうか? 日本書紀のこの部分を筆者が字を一つ一つあかして見ながら読んで悟ったのがある. 日本書紀(日本書紀) 神工皇后期(神功王后記)は卑ケフ呼を称える日本 8世紀初巫女(巫女)の本解釈(敍事巫歌)というのだ. 文章構成と表現, そして荒唐な内容構成が巫子の典型的な本解釈そのままだ. 歴史的事実ではないことは明白だ. もっと研究して見る事だ.





出処 ; シン・ヨンハ(愼〓廈) 漢陽大学校碩座教授 著「また見る韓国歴史」東亜日報文化部 版 (2007年)


신공왕후(神功王后)가 신라를 정벌했다는 일본서기(日本書紀) 기록은 과연 사실일까?

 

 

일본인들이 한국 역사를 극심하게 왜곡하고 날조한 식민사관의 하나에 소위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 있다. 일본의 고대 야마토[邪馬壹] 왕국의 신공왕후(神功王后)가 3세기 중엽 신라를 정벌하여 신라 국왕의 항복을 받았으며 4∼6세기에 야마토 왕국이 한반도의 낙동강과 섬진강 사이 6가라(六加羅)를 정복하여 임나일본부라는 일종의 총독부를 두고 직할 식민지로 약 200년간 통치했다는 것이다. 백제와 신라도 임나일본부를 통해 야마토 왕국에 신복(臣服)하여 조공을 바쳤으며, 고구려도 임나일본부에 조공을 바쳤다는 것이다. 일제(日帝)는 19세기 말 한국을 침략할 때 임나일본부설을 침략적 도구로 사용했다. 즉,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점령하려는 것은 4∼6세기의 식민지 구강토(舊疆土)를 복구하려는 것이라고 일본 국민의 한국 침략 정신교육에 임나일본부설을 사용했다. 그러나 당대의 사료를 보면 역사적 진실은 임나일본부설과 정반대라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변진조(弁辰條)에 보면 변진(弁辰) 12개국이 등장한다. 이 가운데 변진미오야마국(弁辰彌烏邪馬國)은 지금의 경북 고령지방에 있던 변한의 소왕국이었다. 이 명칭에서 변진은 변한(弁韓)·진한(辰韓)의 합성어이고, 미오야마(彌烏邪馬)는 고대 변진어(弁辰語)이다. 미오는 왕족계통의 뜻이고 야마는 부족명이었다. 필자는 변한 12개국이 6가라로 개편된 시기에 변진미오야마국의 야마족 일부가 일본 열도에 건너가 세운 소왕국이 야마토 소왕국이라고 본다.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변한 12개국이 6가라로 개편된 원인과 과정을 밝히지 못했다. 그런데 부여족(夫餘族)의 이동 경로를 보면 일부가 남하해 고구려를 건국하고 다시 백제를 건국한 다음 다른 한 부여족 군단이 육로로 죽령·조령을 넘어 낙동강과 섬진강 사이로 남하해서 변한 12국을 정복 흡수 융합하여 최고 귀족 장군들과 왕족이 6가라를 건국한 흔적이 보인다.



이때 선발대가 이른바 김수로(金首露)이며 그가 건국한 가라국이 금관가라(金官加羅)다. 부여의 최고 귀족장인 가(加)들은 각각 5개 가라의 나라를 세우고 부여 왕족은 미오야마국 자리에 임나(任那)를 세워 6가라 연맹이 수립됐다. 이때 임나는 ‘임금 나라’의 뜻임을 이미 일제(日帝)의 학자들도 밝힌 바 있다. 가라는 ‘가(부여의 최고 귀족장 호칭)의 나라’라는 뜻의 보통명사이고 그 앞에 붙이는 호칭이 나라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



변한 12개국이 6가라로 개편될 때 변한 12개국 지배세력은 일부가 투항하여 정복자에게 융합됐으나 일부는 그 후 새 정착지를 찾아 일본 열도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三國志) 왜인전(倭人傳)에 변한 12개국과 이름이 동일한 야마토국(耶馬壹國), 구야국(狗倻國), 안야국(安邪國), 구노국(狗奴國 또는 樂奴國) 등 4개 나라 이름이 나온다. 일본 열도의 이 4개 소왕국은 6가라 수립 직후 변한 12개국의 일부가 일본 열도에 건너가 수립한 분국(分國)들인 것을 알 수 있다.



필자가 야마토국을 변한미오야마국(弁韓彌烏邪馬國)의 야마족이 일본 열도에 건너가 세운 것이라고 설명할 때, 여기서 ‘야마’는 부족 이름이고 ‘토’는 ‘또’로 ‘땅’의 뜻으로 해석한다. 한국 고대 언어에서 ‘땅’은 ‘ㅱ’나 ‘ㅱ’이다. ‘따’와 ‘또’는 호환된다. 야마토는 ‘야마족의 땅(the Land of Yama)’이란 뜻이다. 고조선 문명권에서는 이주민족이 새 정착지에서 대체로 자기 부족 다음에 땅을 붙여 나라 이름을 만드는 관습이 있었다. 훈족이 ‘훈의 땅’이라는 뜻으로 헝가리(Hungary)를, 불가족이 ‘불가족의 땅’이라는 뜻으로 불가리아(Bulgaria)를 쓰듯 야마는 ‘높은 산(高山)’ ‘산’ ‘동산’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의 ‘미오야마국’ 자리에 교체 수립된 6가라의 하나인 임나를 그 후 일본 열도에 이주해 수립된 ‘야마토’에서 계속 ‘미마나’로 훈독한 것은 임나의 한문자 훈독이 아니라 ‘미오야마나’(‘나’는 ‘국’의 고대 한국어)의 준말 훈독으로 봐야 한다. 이 역시 ‘야마토’의 기원이 한반도의 변한 ‘미오야마국’이었음을 보조적으로 증명해 준다. 결국 일본의 민족과 국가의 기원이라고 하는 ‘야마토’의 기원이 한반도 변한의 ‘미오야마국’이다.



삼국지 왜인전은 야마토 소왕국에 대해 이례적으로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이 사료는 야마토에 대해 ‘이 나라도 본래 역시 남자가 임금이 되었으나 정착한 지 70∼80년간 서로 싸우기를 여러 해 했다. 마침내 한 여자를 함께 세워 군왕을 삼으니, 이름이 히미코[卑彌呼]다’라고 기록했다.



이 야마토 소왕국이 그 후 발전하여 일본 고대국가를 수립했고, 히미코는 일본 최초의 여왕이며 후에 ‘신공왕후(神功王后)’의 원형이 된 여왕이다. 삼국지 왜인전에 의하면 히미코[卑彌呼]는 귀도(鬼道)를 섬기고 뭇 사람을 혹하는 데 능했다. 즉, 무녀(巫女)였다. 나이가 들어도 남편을 취하지 않았다. 남동생이 있어 치국(治國)을 보좌했다. 여왕이 된 후에는 사람들 앞에 잘 나타나지 않고 여종 1000여 명으로 시종 들게 했다. 남자는 오직 한 사람이 음식을 공급하고 명령 전달을 위해 출입하게 했다.




필자는 히미코가 부여족계 왕족 여성이라고 본다. 이름에서 ‘히’는 ‘해’의 일본식 발음이다. ‘미’는 왕족계보를 나타내고 ‘코’는 ‘자녀’이다. 부여의 왕족은 ‘해’씨였다. 백제의 왕족은 ‘부여’씨였고 ‘해’씨는 백제의 상층 귀족이었다. 부여족 일단이 변한에 내려와 정복 합성해서 6가라를 수립하고 그 후 미오야마국 일부가 일본 열도에 들어와 야마토 소왕국을 건설했는데 처음 남성 국왕의 70∼80년 통치를 거친 후에 무장들의 합의로 부여 왕족 여성 히미코를 여왕에 추대한 것으로 해석된다.






삼국지(三國志) 왜인전(倭人傳)에 의하면 히미코는 서기 238년 대방군(帶方郡) 태수에게 사절을 보내 중국 위나라의 황제에게 공물을 바치고 ‘친위왜왕(親魏倭王)’이라는 칭호를 책봉받았다. 이때부터 야마토는 ‘야마토 왜(邪馬壹倭)’라고 불리면서 일본 열도 안 약 30개 소왕국 가운데서 군사력은 약하지만 중원제국의 공인을 받은 대표적 ‘왜(倭)’로서 행세했다. 야마토의 히미코[卑彌呼] 여왕은 247년에는 일본 열도 안의 구노국(舊奴國)이 ‘야마토[邪馬壹]’를 무력(武力)으로 정복하려 위협하므로 급히 사절을 대방군에 보내 도움을 청했다. 위나라의 황제는 사절 장정(張政) 일행과 조서(詔書) 및 황당(黃幢)을 보냈다. 야마토는 이 조서와 황당으로 배후에 강국인 위나라가 있음을 과시해 위기를 면했다.




히미코가 248년에 죽자 무덤을 큰 규모로 쓰고 남자 군왕을 세웠다. 그러나 나라 안이 불복해 다시 내란이 시작되고 1000여 명이 죽었다. 이에 히미코의 종친인 13세의 이요[壹與] 또는 다이요[臺與]를 여왕으로 세워 나라를 안정시켰다. 위나라 사절 장정은 이때까지 체류하면서 이요에게 통치술을 가르치다 돌아갔다.



삼국지 왜인전은 위나라 사절 장정 일행이 직접 야마토에 와서 수년간 체류하며 직접 관찰한 것들을 자료로 했기 때문에 상세하고 정확함을 일본 학자들도 인정하는 사료이다. 그런데 이 사료에 히미코 여왕이나 이요 여왕의 치적 어디에도 한반도 남부를 침공, 점령했거나 신라를 정벌하여 신라 국왕의 항복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야마토 소왕국은 이웃 구노국의 침입도 막아내기 어려울 만큼 무력(武力)이 약했으므로 신라 정벌을 실행할 여지도 없는 약소국이었다.



400여 년이 흘러 야마토 왕국이 강성해져서 일본을 통일한 후 역사 정립이 필요하게 되자 서기 712년에 ‘고사기(古事記)’를 찬하여 역대왕의 계보를 체계화하고 8년 후인 720년에 ‘일본서기(日本書紀)’를 편찬하여 그 내용을 보강했다. 이때 고사기에서 야마토의 초대 남자 군왕을 신무왕(神武王)으로 시기를 끌어 올려 높이고 히미코와 이요 여왕에 해당되는 자리에 신공왕후라는 섭정 왕후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양심적인 일본 학자들은 신무왕부터 제9대 개화왕(開化王)까지는 가상의 일왕(日王)이라고 실재를 부정하고 있다.



그런데 고사기와 일본서기 신공기(神功記) 49년(서기 249년)에 신공왕후가 직접 배를 타고 물고기의 도움을 받으며 신라에 도착하니 신라 국왕이 싸울 엄두도 못 내고 스스로 몸을 결박하여 항복하므로 신라를 ‘정벌’해서 신라 국왕을 말먹이꾼으로 정했으며, 이 소식을 듣고 고구려 국왕과 백제 국왕이 신공왕후를 찾아와서 야마토의 서번(西藩)이 되고 영구히 조공을 그치지 않겠다고 하므로 내관가둔창(內官家屯倉)으로 정했는데 이것이 삼한(三韓)이라는 것이요, 해마다 신라 국왕이 80척 선박의 조공을 일본국에 바치는 것이 이러한 연유라고 기록돼 있다.



신공황후가 신라를 ‘정벌(征伐)’했다는 서기 249년은 히미코가 죽은 248년의 다음 해이고 이요의 제1년이다. 위나라 사절이 야마토를 떠나기 직전이다. 만일 이 엄청난 사건이 사실이라면 위나라 사절이 본국에 보고했을 것이고 왜인전에 기록되지 않았을 리 만무하다. 그러면 왜 고사기와 일본서기 편찬자는 이러한 역사날조를 자행했을까? 혹시라도 일본에 근거자료가 있었을까? 일본서기의 이 부분을 필자가 글자를 낱낱이 캐 보며 읽다가 깨달은 것이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황후기(神功王后記)는 히미코를 기리는 일본 8세기 초 무녀(巫女)의 본풀이(서사무가)라는 것이다. 문장 구성과 표현, 그리고 황당한 내용 구성이 무당의 전형적인 본풀이 그대로다. 역사적 사실이 아님은 명백하다. 더 연구해 볼 일이다.





출처 ; 신용하(愼鏞廈) 한양대학교 석좌교수 著「다시 보는 한국 역사」동아일보 문화부 版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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