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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が伽揶を征腹したと?

4世紀後半なぜに変化が起きた. この事実は論難の余地がない. 変化はとても急激なのだった. 3世紀の中国四書には ‘日本にものがない’と記録されている. ところで急に多い言葉の存在が立証されたのだ. この言葉は船に積まれて韓国で海を渡って来たのだ. 高句麗隣り北方地域の付与族が道たちよ使った背が短いモンゴル語なのに, 付与族が韓半島西部地域(百済で知られた所)を占領して釜山近く伽揶地域で広がった時にも付与族が同行して通った. 韓国古代史に ‘東部になって行って海で消えた’と言う記録がある. しかし日本史はこれを回避する.

百済地域を征腹した付与族はそのまま残って暮したり一部は ひいては伽揶族を征伐, その所で立地を堅固に押し堅めた後もっと勇ましい一部は 369年海向こう日本の領土に行った. 大胆にも言葉が同乗する船を作って海を渡った人々は 4世紀の最大の船団部隊だったし作戦は成功した.

日本の御用史学者たちはもちろんこれを ‘付与族の日本征伐’で記録しなかった. するが ‘古事記’と ‘日本書紀’の神功王后, 神武及び多くの王台の記録にはこの事実が数えきれなく反映されている.

8世紀当代支配者の伝統性を立てるための歴史書き取りで事実は歪曲されて 180度引っ繰り返って ‘日本が伽揶(未まな)を征伐した’と記録された. 事実は彼と正反対で伽揶が日本を征伐したことなのにね!

立つ前 18 年百済建国で 6甲子, すなわち 360年以後を見れば当時付与騎馬族のこんな動きとおおよそ符合する. 中国漢滅亡以後東アジア全域で歴史改編の所要が持続した時であったことを思わなければならない. 秦の国と高句麗の間で苦しんだ付与族は南下しながら滅亡したナクラン族と合流して歳を殖やしたのか分からない.

日本で言ういわゆる ‘歴史’によるようならばズングエチォンファングは 362年死んだ. 彼の統治以後神功王后(呉キナだダラシ公州)の攝政がつながった. 神工は韓国で出生した王女だ. 神工と彼女の息子誤診王(ホムだわなのまたはイワレヒコノ−スメだと米してからも王子でも殖やす)の出演は日本の歴史書でその連帯が正確に二つの甲子である 120年前に繰り上げられた.

 

しかし全体的な歪曲に比べればこの位は朝飯前だ. 彼らによれば神工が伽揶(未まな)を征腹してこちらを ‘日本(日本という名前ができる前に)’が支配したというのだ. 実際では 369年に伽揶に基盤を置いた付与族が海向こう九州に渡ってなぜを征伐した.

付与族船団の航海方向を逆に回しておいた事実をもっともらしくするために日本史では ‘神功王后が大邱まで上がって新羅と伽揶を征腹したし新羅王は自発的に降伏した’と付け加えた. もちろんこれは皆捏造だ. なぜは韓半島に侵入して大邱まで上がってから方向を振ってまた南下しながら新羅と百済を征腹した事がない.

神武天皇 = イワレ王子 = 誤診天皇

8世紀日本私邸たちは ‘百済期(百済期)’を参考したはずだ. 付与族は大邱を征腹してずっと南下した. 彼らは満洲の本拠を発った以来ずっとモンゴル語に乗って移動した. 付与は南側に広がっていた馬韓原住民を圧して百済地域で戦利品を得た後洛東江流域の足だまりや釜山に発った.

 

このような付与族の征服活動全体が日本四書には ‘イワレ王子の大和同情(東征)’に記録されている. イワレ王子は後日神武(神武)天皇と言う(のは)名前と知られる. ここでイワレの ‘これと’は今も岩(岩)を意味して ‘レ(余, 余)’は族属と言う(のは)意味の言葉なのを注目する必要がある.

神武天皇と言う(のは)名前は ‘古事記’と ‘日本書紀’が編纂された以後の 800年頃に来てからこそ初めて登場する. イワレ, すなわち付与岩王子が過ぎ去った道には示唆するところがある. 彼は九州で出発して日本内海に沿って東に 400km 越えるように離れた国の大和平原で航海したのだ. 近道な時高区島の南側太平洋海に入って来ることができるが当時配意性能上内海を沿って入っていくのがずっと安全だった.

 

イワレ王子の同情速度は遅かった. あちこちで原住民の抵抗にぶつかったことと見える. ‘日本書紀’によればイワレ王子の同情は 4年, ‘古事記’によれば 16年がかかった. 遂に彼の部隊は大阪とヨドガングに上陸したがここで長年の原住民(多分彌生族であるでしょう)の抵抗を受けて敗れた.

 

 

ここに彼らが奉ずる海衣女神アマデラス五味加味が日がのぼる東を向けて進軍して来たことを腹を立てて敗れたと思って伊豆(紀伊)半島でお腹を回して日を背いて西の方から上陸した. 福岡県東区を古墳の壁画にたぶん神武とヤダノ−glas(八咫烏)の伝説を描いた, 三足付いたからすが神武のお腹を導く絵がある. この時イワレ王子の二人の兄弟が暴風に巻き込まれてたまらなかった. 彼らのお母さんは竜王の娘だったと言う.

 

試練がマンアだが遂に器にお供えを盛って祭祀を執り行なうようになった. イワレ王子も土器を直接もたらした. 再び支払った戦闘が負け色が濃くなった時金色羽毛が走った年間(枚を言う)がイワレ王子の弓に落ちて敵方を眩しくしたおかげさまで勝った. 今日日本軍部の最高徽章は金色年間勲章だ. イワレヒコノ−スメだと米してからも(磐余(余)彦) 王子, すなわち神武天皇は誤診天皇を言う. 日本史をふやすために誤診天皇の活動を神武という仮想人物に貼り付けて記録したのだ.

 

イワレ王子(誤診天皇)は畝傍山に鞍された. 今も毎年 4月チォサフッナル王室の祭官が出て山と川, 海で出るお供えで祭祀を執り行なう. 祭官たちはその祭祀が現在の日本天皇家門が大きい徳を口は外国人征服者にあげることなのは夢にも思わないだろう.

 

ところで初歴史書に彼の同情(東征)に関する記録はすごく細密に記録された一方, 彼の治世に対する記録はあまりない. しかし彼の息子ニンドク(仁徳)王の統治に対してはたくさん記録されている. ニンドクワングは最大の陵墓を逐造した. この陵墓は競走古墳の物より大きい. 日本には規模が違う 2000余機宜古墳があるのに韓半島に近い九州北部の後期彌生時代墓はちっぽけだ. しかし 5世紀になりながら古墳は急におびただしい規模で大きくなる. この大型ゴブントルが皆大阪国地域に分布していることは注目するに値する事実だ.


No 4. 일본인도 모르는 ‘진짜’ 일본 고대사

일본이 가야를 정복했다고?

4세기 후반 왜에 변화가 일어났다. 이 사실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변화는 아주 급격한 것이었다. 3세기의 중국사서에는 ‘일본에 말이 없다’고 기록돼 있다. 그런데 갑자기 많은 말의 존재가 입증된 것이다. 이 말들은 배에 실려 한국에서 바다를 건너온 것이다. 고구려 이웃 북방지역의 부여족이 길들여 사용하던 작달막한 몽고말인데, 부여족이 한반도 서부지역(백제로 알려진 곳)을 점령하고 부산 근처 가야지역으로 퍼지던 때에도 부여족이 대동하고 다녔다. 한국 고대사에 ‘동부여가 바다로 사라졌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일본사는 이를 회피한다.

백제지역을 정복한 부여족은 그대로 남아 살기도 하고 일부는 나아가 가야족을 정벌, 그곳에서 입지를 굳건히 다진 뒤 더 용감한 일부는 369년 바다 건너 일본땅으로 갔다. 대담하게도 말이 동승할 배를 만들어 바다를 건너간 이들은 4세기의 가장 큰 선단부대였으며 작전은 성공했다.

일본의 어용 사학자들은 물론 이를 ‘부여족의 일본 정벌’로 기록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신공왕후, 진무 및 여러 왕대의 기록에는 이 사실이 수없이 반영돼 있다.

8세기 당대 지배자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한 역사 쓰기에서 사실은 왜곡되고 180도 뒤집어져 ‘일본이 가야(미마나)를 정벌했다’고 기록됐다. 사실은 그와 정반대로 가야가 일본을 정벌한 것인데 말이다!

서기전 18 년 백제 건국에서 6갑자, 즉 360년 이후를 보면 당시 부여 기마족의 이런 움직임과 대략 부합한다. 중국 한나라 멸망 이후 동아시아 전역에서 역사 개편의 소요가 지속되던 때였음을 생각해야 한다. 진나라와 고구려의 틈바구니에서 시달리던 부여족은 남하하면서 멸망한 낙랑족과 합류하며 세를 불렸을지 모른다.

일본에서 말하는 이른바 ‘역사’에 따를 것 같으면 중애천황은 362년 죽었다. 그의 통치 이후 신공왕후(오키나지 다라시 공주)의 섭정이 이어졌다. 신공은 한국에서 출생한 왕녀다. 신공과 그녀의 아들 오진왕(호무다 와게 또는 이와레 히코노 수메라 미코도 왕자로도 불린다)의 출연은 일본의 역사서에서 그 연대가 정확히 두 갑자인 120년 전으로 앞당겨졌다.

그러나 전체적인 왜곡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약과다. 그들에 따르면 신공이 가야(미마나)를 정복하고 이곳을 ‘일본(일본이라는 이름이 생기기도 전에)’이 지배했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369년에 가야에 기반을 둔 부여족이 바다 건너 규슈로 건너가 왜를 정벌했다.

부여족 선단의 항해 방향을 거꾸로 돌려놓은 사실을 그럴 듯하게 만들기 위해 일본역사서는 ‘신공왕후가 대구까지 올라가 신라와 가야를 정복했으며 신라왕은 자발적으로 항복했다’고 덧붙였다. 물론 이는 모두 날조다. 왜는 한반도에 침입해 대구까지 올라갔다가 방향을 틀어 다시 남하하면서 신라와 백제를 정복한 일이 없다.

진무천황 = 이와레 왕자 = 오진천황

8세기 일본 사가들은 ‘구다라기(백제기)’를 참고했을 것이다. 부여족은 대구를 정복하고 계속 남하했다. 그들은 만주의 본거지를 떠난 이래 계속 몽고말을 타고 이동했다. 부여는 남쪽에 퍼져 있던 마한 원주민을 제압하고 백제 지역에서 전리품을 얻어낸 뒤 낙동강 유역의 근거지나 부산으로 떠났다.

이러한 부여족의 정복활동 전체가 일본사서에는 ‘이와레 왕자의 야마토 동정(東征)’으로 기록돼 있다. 이와레 왕자는 후일 진무(神武)천황이란 이름으로 알려진다. 여기서 이와레의 ‘이와’는 지금도 바위(岩)를 뜻하며 ‘레(余, 餘)’는 족속이란 의미의 말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진무천황이란 이름은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편찬된 이후인 800년경에 와서야 처음 등장한다. 이와레, 즉 부여 바위왕자가 지나간 길에는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는 규슈에서 출발해 일본 내해를 따라 동쪽으로 400km 넘게 떨어진 나라의 야마토 평원으로 항해한 것이다. 지름길인 시고쿠섬의 남쪽 태평양 바다로 들어올 수 있지만 당시 배의 성능상 내해를 따라 들어가는 것이 훨씬 안전했다.

 

이와레 왕자의 동정 속도는 느렸다. 곳곳에서 원주민의 저항에 부딪혔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이와레 왕자의 동정은 4년, ‘고사기’에 따르면 16년이 걸렸다. 마침내 그의 부대는 오사카와 요도강에 상륙했지만 여기서 오랜 원주민(아마 야요이족일 것이다)의 저항을 받아 패했다.

 

이에 그들이 받드는 해의 여신 아마데라스 오미가미가 해 뜨는 동쪽을 향해 진군해온 것을 노여워해 패했다고 생각하고 이즈(紀伊)반도로 배를 돌려 해를 등지고 서쪽으로부터 상륙했다. 후쿠오카현 동굴 고분벽화에 아마도 진무와 야다노 가라스(八咫烏)의 전설을 묘사한, 세 발 달린 까마귀가 진무의 배를 인도하는 그림이 있다. 이때 이와레 왕자의 두 형제가 폭풍에 휘말려 죽었다. 그들의 어머니는 용왕의 딸이었다고 한다.

 

시련이 많아지만 마침내 그릇에 제물을 담아 제사를 지내게 됐다. 이와레 왕자도 토기를 직접 빚었다. 또다시 치른 전투가 패색이 짙어졌을 때 금빛 깃털이 달린 연(매를 말한다)이 이와레 왕자의 활에 내려앉아 적들을 눈부시게 만든 덕분에 이겼다. 오늘날 일본군부의 최고 휘장은 금빛 연 훈장이다. 이와레 히코노 수메라 미코도(磐餘(余)彦) 왕자, 즉 진무천황은 오진천황을 말한다. 일본사를 늘리기 위해 오진천황의 활동을 진무라는 가상 인물에 갖다붙여 기록한 것이다.

 

이와레 왕자(오진천황)는 우네비산에 안장됐다. 지금도 매년 4월 초사흗날 왕실의 제관이 나와 산과 강, 바다에서 나는 제물로 제사를 지낸다. 제관들은 그 제사가 현재의 일본 천황가문이 큰 덕을 입은 외국인 정복자에게 올리는 것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첫 역사책에 그의 동정(東征)에 관한 기록은 대단히 세밀하게 기록된 반면, 그의 치세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다. 하지만 그의 아들 닌도쿠(仁德)왕의 통치에 대해서는 많이 기록돼 있다. 닌도쿠왕은 가장 큰 능묘를 축조했다. 이 능묘는 경주고분의 것보다 크다. 일본에는 규모가 다른 2000여 기의 고분이 있는데 한반도에 가까운 규슈 북부의 후기 야요이 시대 무덤은 자그마하다. 그러나 5세기가 되면서 고분은 갑자기 엄청난 규모로 커진다. 이 대형 고분틀이 모두 오사카 나라지역에 분포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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