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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무력독립운동(武力獨立運動) 기지건설(基地建設)

 

1907년 일제(日帝)의 강압으로 해산당한 대한제국군(大韓帝國軍)은 해산 당일 서울과 지방에서 치열한 항일전(抗日戰)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무수한 병력과 막강한 화력에 밀려 패전(敗戰)하게 되자 이들 장병들은 즉각 각지의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의병들의 전투력 향상에 도움을 주면서 효과적인 항일전(抗日戰)을 전개하였다. 정규적인 군사 교육을 받았고 전투 유경험자인 한국군 장병들은 종래의 의병항쟁(義兵抗爭)으로는 일제의 강력한 군사력에 대항하기 어렵다고 보고 소규모의 의병으로 효과적인 유격전(遊擊戰)을 벌이도록 하였다. 그전에 유생들이나 농민들이 주가 되던 의병들은 수백명의 부대를 편성하여 일본군과 전면전(全面戰)을 벌임으로써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한국군 장병들이 의병항쟁에 참전하면서 전투의 양상이 달라졌다. 적게는 5명 이내, 많으면 10여명 정도의 규모로 일본군을 기습공격하고 재빨리 은신하는 전법(戰法)을 사용함으로써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이에 일본군은 대규모의 병력을 투입하여 소위 의병대토벌작전(義兵大討伐作戰)을 전개하였다. 이 작전은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잔악하고 악독한 군사작전으로 의병이 출몰하였거나 은신할 가능성이 있는 지역은 무차별 공격을 가하여 초토화시키는 것이었다. 이 초토화 작전은 의병항쟁의 근거지를 없애는 목적으로 전개되었는데 이 작전으로 의병들은 점차 근거지를 상실하였을뿐만 아니라 수많은 지도자와 장병들을 잃게 되었다.

 

이에 의병들은 새로운 활동기지를 찾아 만주와 연해주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1910년을 전후하여 유인석(柳麟錫), 이진룡(李鎭龍), 조맹선(趙孟善), 박장호(朴長浩), 송상규(宋尙奎) 등의 의병부대가 국경지방을 넘어 이동하였다. 이들은 만주, 연해주 등지에서 토지를 개간하여 생활터전을 마련하고 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운동 인재를 양성하는 한편, 무기를 구입하여 부대를 재정비하여 항일전(抗日戰)을 전개하였다. 당시 이곳에는 의병계통과는 달리 국내에서 결성된 비밀결사단체(秘密結社團體)인 신민회(新民會)에 의하여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독립군 기지가 건설되고 있었으며 개신교(改新敎) 계통의 인사들도 역시 용정촌(龍井村)을 중심으로 기지 건설에 착수하였다. 1919년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이 일어나고 수많은 애국인사들이 모여들자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각기 반일 단체를 조직하고 소속 독립군을 편성하여 본격적인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을 전개하였다.

 

특히 3·1운동을 전후하여 국내외에서 정규적인 군사교욱을 이수한 군사전문가들이 몰려옴으로써 독립군의 활동은 활기를 띠게 되었다. 대부분의 독립군 지도자들은 대한제국군 장교 출신이거나 중국 혹은 일본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인물이었다.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군사 책임자인 양규열(梁圭烈)은 한국군 참령(參領)이었으며, 사령관 이청천(李靑天)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陸軍武官學校) 재학중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日本陸軍士官學校)를 졸업한 후 일본군 중위(中尉)로 복무하다가 만주로 망명한 인물이며, 교관 신팔균(申八均)은 대한제국군 정위(正尉) 출신이다. 대한제국군 출신 이외에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는 앞에서 말한 이청천, 나중소(羅仲昭) 외에 김경천(金慶天) 등이 있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의병항쟁(義兵抗爭)에서 독립전쟁(獨立戰爭)으로 그 맥이 이어지는 데에는 대한제국군 출신들이 가교가 되었으며 특히 이후에 전개되는 독립전쟁은 한국군 출신 장병들과 이들에 의하여 양성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출신 인물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것이다.

 

● 독립군 양성사업(獨立軍養成事業)

 

만주와 연해주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한 독립운동가들은 독립군 부대 정비에 주력하는 한편,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교육에도 심혈을 경주하였다.

 

일제(日帝)가 국권(國權)을 침탈하기 이전부터 이 지역에는 민족 지도자들에 의하여 수많은 교육기관이 설립되어 있었는데 이들 민족학교의 교육목표는 어디까지나 구국인재(救國人材)의 양성에 두고 있어 대부분 군사교육을 겸하고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군사교육 전문기관이 설립된 것은 1910년 이후부터였다. 대표적인 교육기관으로는 만주의 신흥학교(新興學校)와 대전자학교(大甸子學校)를 들 수 있는데 이중 신흥학교는 독립군 양성의 중추역할을 하고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이후 항일독립전쟁(抗日獨立戰爭)은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출신 인물들에 의하여 주도되었던 것이다.

 

신흥학교는 1910년 국치(國恥) 이전 신민회(新民會) 지도자들의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 방략에서 비롯되었다. 신민회는 동회의 독립전쟁 방략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이곳에 학교를 설립하여 구국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목표 아래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를 기지로 선정하였다. 이어 이회영(李會榮), 이시영(李始榮) 등 민족 지도자들과 각 도에서 자원한 1백여호가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이들은 먼저 황무지를 개간하여 생활의 기반을 마련하고 많은 동포들이 이곳으로 이주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자치기관으로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하고 병농일치제(兵農一致制)를 실시하는 한편, 인재 양성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하였다. 1911년 4월에 제1기 졸업생을 배출한 신흥강습소는 1913년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尼河)에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한 후 신흥학교로 개명하였으며 교과과정도 중학반과 군사반으로 나누었다. 이 과정은 얼마 후 변경되어 군사반만을 설치하였다.

 

그후 많은 동포들이 이주함에 따라 입학자가 증가하자 신흥학교는 무엇보다 수용시설의 확장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1917년 통화현 팔리초(八里哨)의 소북대(小北垈)에 분교를 설치하고 이를 신흥학교 백농분교(白農分校)라 하였다.

 

1919년에는 신흥무관학교로 명칭을 개편하고 유하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에 40여간의 교사와 수만평의 연병장을 마련하여 이전하였다. 이는 3·1운동 이후 급증하는 입교지원자를 수용할 시설의 부족 때문이었다. 한편, 고산자에는 2년제 고등군사반을 두어 고급장교를 양성하였으며 합니하에는 초등군사반을 두어 3개월 과정의 일반 훈련반과 6개월 과정의 후보 훈련반을 두었다.

 

신흥무관학교는 신흥강습소 이래 여러 차례 폐교 위기에 직면하였으나 필사적으로 운영을 계속하여 1911년 제1기 졸업생을 배출한 이래 1920년 8월 폐교될 때까지 총 3천 5백여명의 독립군 기간요원을 길러냈다. 또한 1919년 3·1운동을 전후하여 정규적인 군사교육을 받은 유경험자가 속속 모여들었다. 곧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이청천(李靑天), 김경천(金慶天) 등과 중국 육군 강무당 출신인 이범석(李範奭), 그리고 대한제국군 장교였던 신팔균(申八均), 김창환(金昌煥), 이장녕(李章寧) 등이 합세함으로써 명실공히 독립군 사관양성의 기능을 다 할 수 있었다.

 

1일 14시간 정도의 학과교육과 70여리의 야간 행군 등 강도 높은 군사교육이 실시되었다. 교육내용도 정신교육에 치중하여 학과 10%, 교련 20%, 정신교육 50%, 건설 20%였으며 학교 건물 연병장 건설 등은 모두 자체에서 해결하였다.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교육자들을 간략히 살펴보면 교장에 이천민(李天民), 부교장에 양규열(梁圭烈), 학감에 윤기섭(尹琦燮), 훈련감에 김창환(金昌煥), 교성대장(敎成隊長)에 이청천(李靑天), 교관에 남상복(南相復), 이장녕(李章寧), 이세영(李世永), 김경천(金慶天), 신팔균(申八均) 등이 각각 담당하였다.

 

독립군 양성기관으로서 좀더 구체적 사실을 알 수 있는 기관이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서 경영하던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이다.

 

이 연성소의 교육은 전투가 없는 경우 오전 훈련과 오후 훈련으로 나누어 실시하였는데, 오전은 9시에 시작하여 11시까지로 주로 제식훈련과 전술훈련이었으며 오후는 사격술(射擊術), 총검술(銃劍術) 등 총기훈련(銃器訓鍊)과 학과훈련(學科訓鍊)을 밤늦게까지 실시하였다. 또한 이 연성소는 장교훈련뿐 아니라 신병훈련도 담당하였는데 신병에게는 2개월 내지 6개월 정도 집중교육을 시킨 후 부대에 배속시켜싸. 그리고 신병 중에 정신력이나 학력이 부족한 사람은 별도의 교육을 실시하여 보완하게 하였다.

 

연성소 교관들은 대한제국군 장교 출신 또는 중국에서 사관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으며, 대부분 의병항쟁 경력으로 전투 경험을 쌓은 사람들이었다.

 

서대파(西大坡)로부터 왕청하(王淸河) 상리삼리(上里三里)에 있어 서대파 상촌(上村)의 군정서 직영의 무관학교에는 현재 약 4백명의 재학생이 있어서 회색의 군복을 입고 모두 상등병(上等兵)격의 견장을 붙였으며 18세로부터 30세까지의 청년인데 6개월의 강습을 완료하면 모두 소위(少尉) 자격이 되며, 소대의 지휘관이 될 수 있다. 그 교육과정은 정신교육과 역사, 군사학, 병기술과, 지령법 등이었다.

 

이 군정서(軍政署)의 독립군 훈련에서 특이한 사실은 러시아 및 중국군 장교가 훈련을 도와주었다는 점이다. 러시아군 장교는 주로 무기 판매를 위하여 군정서 사관연성소로 왔다가 군정서의 요청에 의하여 독립군의 훈련을 담당하였으며 중국군 장교는 군정서가 훈련담당 교관으로 돈을 주고 임시로 고용한 용병이었다.

 

부대 지휘관은 주로 구한국군(舊韓國軍) 출신이거나 중국에서 정교적인 사관훈련을 받은 사람들이었으며 많은 수가 의병항쟁에 참전하였던 군사지식이 풍부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대원의 훈련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 특히 군정서에는 독립군 지휘관 양성을 휘하여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설치하고 청년 중 특히 우수한 자를 선발하여 입교시켰다. 이 사관연성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서 1만원의 자금을 지원하여 설립된 것으로 소장은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이 겸임하였고 학관은 이장녕(李章寧), 이범석(李範奭), 김규식(金圭植) 등이 담당하였다.

 

독립군 양성기관은 만주와 연해주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상해(上海)의 임시정부에서도 육군무관학교(陸軍武官學校)를 설립, 운영했으며 미국, 하와이 등지에서도 군사요원을 양성하여 만주와 연해주에 파병한다는 목적으로 일찍이 독립군 양성사업이 전개되었다. 대표적인 양성기관으로는 미국 클레어몬트에 있는 한국인 군사훈련반(軍事訓練班, 1910년 10월 설립), 켄자스에 있는 소년병학원(少年兵學院, 1910년 11월 설립), 하와이에 있는 한국 국민군단(韓國國民軍團, 1914년 6월 설립) 등이 있다.

 

● 독립군(獨立軍)의 편성(編成)

 

1919년부터 만주와 연해주에서는 수많은 독립군 부대가 편성되었는데 이들의 조직계통을 살펴보면 대략 네가지 계통으로 구분할 수 있다. 즉 의병과 유생들로 구성된 개신교(改新敎), 대종교(大倧敎) 등 종교를 중심으로 편성된 독립군, 또한 출신 지방별로 뭉쳐서 편성된 독립군, 그리고 나머지는 특별한 연고 관계없이 거주지를 중심으로 편성된 독립군이었다.

 

이러한 독립운동 군사단체(獨立運動軍事團體)들은 구황실(舊皇室)의 복벽(復辟)을 이상으로 하는 보수계와 공화정체(共和政體)를 이상으로 하는 공화계로 나눌 수 있는데 보수계는 주로 의병 유생 출신의 노장년층이며, 공화계는 소장층이 핵심이 되고 있다. 따라서 보수계는 반임정(反臨政) 태도를 지녔으며, 공화계는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또한 독립운동의 방법에 따라 다시 구분할 수 있는데 그것은 시급히 독립군 병력을 국내에 진입시켜 국내에서 일제(日帝) 세력을 몰아내야 한다고 하여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을 서두르는 이른바 급진파의 독립군과, 이와는 달리 먼저 병력 배양에 힘쓰고 일제에 대항할 수 있는 군사력이 준비되면 일거에 독립전쟁(獨立戰爭)을 일으켜 일제를 국내에서 축출하고 국권회복(國權恢復)을 기하자는 이른바 점진파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계통과 이념의 차이는 재만(在滿)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 진영에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눈앞에 도사리고 있는 일제를 효과적으로 축출할 수 있느냐가 더욱 시급하고 절실한 문제였다. 그래서 재만 독립군은 끝내 1개의 대단체(大團體)로 통합되지는 못하였지만 각기 독자적으로 항일투쟁(抗日鬪爭)을 전개하면서 한편으로는 꾸준한 통합운동(統合運動)을 추진하여 나갔다.

 

첫번째 독립군의 통합운동은 1919년 12월 독립군 일부 지도자들에 의하여 일어났다. 좀더 효좌적인 항일전(抗日戰)을 전개하고 통일적인 독립운동기구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목적 아래 평북독판부(平北督辦部),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 대한의용군사회(大韓義勇軍事會), 한족회(韓族會) 등의 간부들이 회합을 열어 통합기관의 설립에 합의하고 1920년 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직속기관으로 교민통치기구인 광복군참리부(光復軍參理部)와 독립군인 광복군사령부(光復軍司令部)를 설치하였다.

 

● 모병사업(募兵事業)

 

1919년에서 1920년 사이에 조만(朝滿) 국경지대와 간도(間島) 지역에서는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 의군부(義軍府),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 평북독판부(平北督辦部), 흥업단(興業團), 야단(野團), 대한의민단(大韓義民團), 혈성단(血誠團) 등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가 형성되었다.

 

대부분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소속 독립군(獨立軍)을 편성하는데 필요한 인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각기 자기단체(自己團體)의 관할지역 안의 주민들에 대하여 징병제(徵兵制)를 실시하고 있었다. 대한국민회는 호구조사를 실시한 후 18세에서 40세까지의 장정을 매호(每戶)당 1명씩 징집하였으며, 한족회(韓族會)에서도 17세~30세까지의 장정 중 선발하여 징집하였다. 주민을 많이 관장하고 있는 단체에서는 5호(戶) 중에서 1명을 징집하고 징집되지 않은 4호는 징집된 호구(戶口)의 생계를 돌보도록 하였다.

 

재만(在滿)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 단체 중에서 가장 조직적으로 징병제를 실시한 단체는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後日의 北路軍政署)였다. 군정서(軍政署)에서는 평균 30호(戶)를 1구(區)로 하여 18세~35세의 건강한 신체를 지닌 자를 매호(每戶)에서 15명~25명을 선발하여 징병검사를 실시한 후 적격자에게는 즉시 입대를 명하고 나머지는 군정서가 필요로 할 때에 즉시 소집에 응하도록 서약하게 하였다. 이어 35세 이상의 자로서 상당한 지식이 있고 주민들로부터 신망을 받고 있는 사람은 각 부대나 각 구의 간부로 임명하였다. 또한 입대자에게는 급료 및 여비로 50원을 지급하였다.

 

이상과 같이 징집을 통한 방법 이외에 자진 입대자와 모병(募兵)에 의한 방법이 있었다. 3·1운동 이후 국내로부터 수많은 청년들이 도만(渡滿)하여 독립군에 자진 참여하고 독립군 간부들은 국내에서 꾸준하게 모병 활동을 전개하여 애국 청년들을 독립군에 흡수하였다. 또 시베리아 연해주(沿海州)로부터도 많은 청년들을 모집하였다. 당시 나코리스트 방면에는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부라고웨시치엔스크 방면에는 금광업에 종사하는 한국 사람들이 많았는데 시베리아 지방의 정국 혼란으로 실직하고 있었다.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이들을 대상으로 초모(招募)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이들에게 독립군에 입대하는 것은 침략국에 정복된 국가를 광복시키는 성스러운 일에 참여하는 영광을 갖게 될 뿐만 아니라 입대 후에도 생활이 보장될 것이라는 점을 설명하여 독립군에 흡수하였다. 군정서에서는 이들이 입대하면 소정의 증명서를 발급하여 이들이 군정서의 독립군임을 증명하였다.

 

독립군의 부대편성은 그 부대의 실정에 알맞게 편성되었다. 지휘관의 군사경력에 따라 대한제국의 편제를 적용하거나, 일본군이나 중국군의 편제를 적용하거나 또 부대의 규모와 지역 사정에 따라 부대를 운영하기 편리한 방법으로 독자적인 편제를 사용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독립군 편제는 일반적으로 소대(小隊), 중대(中隊), 대대(大隊)로 편성하였다.

 

대한독립군은 소속 부대를 4개 중대로 편성하고 그 명칭을 남만주(南滿州) 제1사단(師團)이라 하였으며, 의군부와 대한독립군은 3개 중대로, 통의부(統義府)의 의용군은 3개 소대를 1중대로 하여 4개 중대로, 참의부(參議府)는 5개 중대, 정의부(正義府)는 4개 중대로 편성하였다. 그런데 신민부(新民府)는 5개 대대로 편성하였는데 대대의 규모나 대대 이하의 편성은 기록에 나타나 있지 않다. 부대편성에서 특이한 것은 광복군사령부의 부대편성이다. 광복군사령부는 소속 독립군을 1영(營)에서 6영까지로 나누어 지방에 분산 주둔케 하였다.

 

독립군의 편성 규모를 가장 상세히 알 수 있는 것은 대한군정서로서 동(同) 부대는 창설 초기 병력이 적었을 때는 25명을 1개 소대로 하고, 2개 소대 50명을 중대로 하였으며, 2개 중대 100명을 대대로 편성하였다. 그러나 뒤에 병력이 증강되자 50명을 소대로 하고, 1개 소대를 1개 중대로, 그리고 4개 중대를 1개 대대로 하였으며 각 제대(梯隊)에는 대장(隊長) 1명을 두어 부대를 지휘하게 하였다.

 

초기에는 총병력 5백여명이 장총 5백정, 권총 4십정, 기관총 3문으로 비교적 착실하게 장비를 갖추었으며 군자금도 10만원을 준비하고 있었다. 군정서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병력증강을 꾀하였는데 국내에서도 독립군 모병 활동을 착실하게 수행하여 매일 수십명의 장정이 입대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 8월에는 총병력이 1천 6백명을 돌파하였으며 장비로는 장총 1천 8백정(1정당 탄환은 8백발), 권총 150정, 기관총 7문, 대포 3문과 다수의 수류탄을 보유하여 재만 독립군 중 최강의 부대로 성장하였다.

 

독립군의 개인장비는 소총 1정, 탄환 5백발, 수류탄 1개 그리고 비상식량으로 정요(精要) 6승(升)과 신발 1켤레씩을 휴대하였다. 그리고 대한군정서는 전(全)독립군을 4개 대대로 편성하였는데 이 중 1부대는 각 지방과의 통신연락 및 주변 경계임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 군자금과 무기조달

 

독립군에게 무엇보다 제일 긴요한 것은 군자금이었다. 군자금 준비는 부대의 세력을 좌우할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의 성패를 가늠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무기와 군수품을 마련하기 위하여는 상당한 액수의 자금이 소요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독립군이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은 군자금의 조달이었다. 만주에서의 군자금조달의 대상은 물론 재만교민(在滿僑民)들이었다. 그리하여 대한군정서는 재만교민에 대하여 재산 정도에 따라 납세형식으로 일정액을 징수하였다. 대개 빈민층이 많은 교민들에게 일시불로 징수하기 어려워 분납제(分納制)를 적용하였는데 1년에 전후기(前後期)로 나누어 분납하게 하였다. 대개 토지 5정보(町步) 이상을 소유한 부유한 교민들에게는 재산정도에 따라 100월 이상을 할당하여 납부하게 하였으며 일반빈민들에게는 호당 평균 조 2말과 짚신 2켤레를 징수하였다.

 

대한독립군은 5등급으로 나누어 1등 5원, 2등 3원, 4등 1원 5각, 5등 5각반을 징수하였으며 화룡현(和龍縣)에서 결성된 대한독립이사회는 3등급으로 나누어 부호(富戶)는 곡식 5두와 금 10원을, 빈호(貧戶)는 3두와 5원, 극빈호(極貧戶)는 5승과 1원을 징수하였다. 또 홍범도(洪範圖) 부대는 각 호에 곡식 3두와 짚신 1족을, 연길현(延吉縣)에서 군자금 모금만을 전담하기 위하여 결성된 독립단총재소(獨立團總財所)는 5원에서 100원까지 여러 등급으로 구분하여 기부금을 징수하였다. 또 이범윤(李範允)의 광복단(光復團)에서는 매호에 곡식 1두를 징수하고 또 3등급으로 나누어 1등은 5원, 2등은 2원 50전, 3등은 80전을 징수하였다.

 

또 재만 독립군은 부족한 자금을 국내에서 모금하였다. 군정서의 국내 모금 활동 상황을 보면 군정서는 대원 중에서 엄선된 인물을 국내에 파견하여 모금 활동을 전개하도록 하였는데 상당한 학식과 신망이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그 사람을 원적지로 파견하고 그 곳에서 친척이나 그 지방 지면인사(地面人士)들에게 독립운동 자금의 필요성을 설득하여 그들로부터 의연금을 받아내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모금 활동은 어디까지나 국민들에게 항일독립운동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거나 국민의 애국심에 호소하여 자발적인 협조를 부탁하는데 있었고 강제적인 징수는 아니었다. 독립군의 강제적인 모금 활동의 대상은 친일파이거나 독립운동에 비협조적인 부호들에게 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간도지방 독립군의 모금에는 상당한 부작용이 일었다. 그것은 간도지방에는 여러 군데의 독립운동 단체가 조직되어 있어 이들 각 단체가 제각기 모금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교민들에게 이중삼중의 부담을 주었을뿐 아니라 그 중에는 독립군을 빙자한 무뢰배들이 독립운동 단체의 간판만을 걸어놓고 교민을 총기(銃器)로 위협하여 강제로 재산을 약탈함으로써 교민들의 민심을 독립운동으로부터 이반시키는 사례가 종종 발생했다. 그리하여 독립운동가들은 이들 가짜 독립운동가들로부터 교민을 보호하여야만 했으며 각 단체가 통합하여 질서있는 독립운동을 전개해야만 했다.

 


1920·30년대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항일독립전쟁(抗日獨立戰爭) ⑴

1.무력독립운동(武力獨立運動) 기지건설(基地建設)

 

1907년 일제(日帝)의 강압으로 해산당한 대한제국군(大韓帝國軍)은 해산 당일 서울과 지방에서 치열한 항일전(抗日戰)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무수한 병력과 막강한 화력에 밀려 패전(敗戰)하게 되자 이들 장병들은 즉각 각지의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의병들의 전투력 향상에 도움을 주면서 효과적인 항일전(抗日戰)을 전개하였다. 정규적인 군사 교육을 받았고 전투 유경험자인 한국군 장병들은 종래의 의병항쟁(義兵抗爭)으로는 일제의 강력한 군사력에 대항하기 어렵다고 보고 소규모의 의병으로 효과적인 유격전(遊擊戰)을 벌이도록 하였다. 그전에 유생들이나 농민들이 주가 되던 의병들은 수백명의 부대를 편성하여 일본군과 전면전(全面戰)을 벌임으로써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한국군 장병들이 의병항쟁에 참전하면서 전투의 양상이 달라졌다. 적게는 5명 이내, 많으면 10여명 정도의 규모로 일본군을 기습공격하고 재빨리 은신하는 전법(戰法)을 사용함으로써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이에 일본군은 대규모의 병력을 투입하여 소위 의병대토벌작전(義兵大討伐作戰)을 전개하였다. 이 작전은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잔악하고 악독한 군사작전으로 의병이 출몰하였거나 은신할 가능성이 있는 지역은 무차별 공격을 가하여 초토화시키는 것이었다. 이 초토화 작전은 의병항쟁의 근거지를 없애는 목적으로 전개되었는데 이 작전으로 의병들은 점차 근거지를 상실하였을뿐만 아니라 수많은 지도자와 장병들을 잃게 되었다.

 

이에 의병들은 새로운 활동기지를 찾아 만주와 연해주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1910년을 전후하여 유인석(柳麟錫), 이진룡(李鎭龍), 조맹선(趙孟善), 박장호(朴長浩), 송상규(宋尙奎) 등의 의병부대가 국경지방을 넘어 이동하였다. 이들은 만주, 연해주 등지에서 토지를 개간하여 생활터전을 마련하고 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운동 인재를 양성하는 한편, 무기를 구입하여 부대를 재정비하여 항일전(抗日戰)을 전개하였다. 당시 이곳에는 의병계통과는 달리 국내에서 결성된 비밀결사단체(秘密結社團體)인 신민회(新民會)에 의하여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독립군 기지가 건설되고 있었으며 개신교(改新敎) 계통의 인사들도 역시 용정촌(龍井村)을 중심으로 기지 건설에 착수하였다. 1919년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이 일어나고 수많은 애국인사들이 모여들자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각기 반일 단체를 조직하고 소속 독립군을 편성하여 본격적인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을 전개하였다.

 

특히 3·1운동을 전후하여 국내외에서 정규적인 군사교욱을 이수한 군사전문가들이 몰려옴으로써 독립군의 활동은 활기를 띠게 되었다. 대부분의 독립군 지도자들은 대한제국군 장교 출신이거나 중국 혹은 일본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인물이었다.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군사 책임자인 양규열(梁圭烈)은 한국군 참령(參領)이었으며, 사령관 이청천(李靑天)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陸軍武官學校) 재학중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日本陸軍士官學校)를 졸업한 후 일본군 중위(中尉)로 복무하다가 만주로 망명한 인물이며, 교관 신팔균(申八均)은 대한제국군 정위(正尉) 출신이다. 대한제국군 출신 이외에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는 앞에서 말한 이청천, 나중소(羅仲昭) 외에 김경천(金慶天) 등이 있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의병항쟁(義兵抗爭)에서 독립전쟁(獨立戰爭)으로 그 맥이 이어지는 데에는 대한제국군 출신들이 가교가 되었으며 특히 이후에 전개되는 독립전쟁은 한국군 출신 장병들과 이들에 의하여 양성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출신 인물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것이다.

 

● 독립군 양성사업(獨立軍養成事業)

 

만주와 연해주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한 독립운동가들은 독립군 부대 정비에 주력하는 한편,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교육에도 심혈을 경주하였다.

 

일제(日帝)가 국권(國權)을 침탈하기 이전부터 이 지역에는 민족 지도자들에 의하여 수많은 교육기관이 설립되어 있었는데 이들 민족학교의 교육목표는 어디까지나 구국인재(救國人材)의 양성에 두고 있어 대부분 군사교육을 겸하고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군사교육 전문기관이 설립된 것은 1910년 이후부터였다. 대표적인 교육기관으로는 만주의 신흥학교(新興學校)와 대전자학교(大甸子學校)를 들 수 있는데 이중 신흥학교는 독립군 양성의 중추역할을 하고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이후 항일독립전쟁(抗日獨立戰爭)은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출신 인물들에 의하여 주도되었던 것이다.

 

신흥학교는 1910년 국치(國恥) 이전 신민회(新民會) 지도자들의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 방략에서 비롯되었다. 신민회는 동회의 독립전쟁 방략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이곳에 학교를 설립하여 구국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목표 아래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를 기지로 선정하였다. 이어 이회영(李會榮), 이시영(李始榮) 등 민족 지도자들과 각 도에서 자원한 1백여호가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이들은 먼저 황무지를 개간하여 생활의 기반을 마련하고 많은 동포들이 이곳으로 이주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자치기관으로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하고 병농일치제(兵農一致制)를 실시하는 한편, 인재 양성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하였다. 1911년 4월에 제1기 졸업생을 배출한 신흥강습소는 1913년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尼河)에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한 후 신흥학교로 개명하였으며 교과과정도 중학반과 군사반으로 나누었다. 이 과정은 얼마 후 변경되어 군사반만을 설치하였다.

 

그후 많은 동포들이 이주함에 따라 입학자가 증가하자 신흥학교는 무엇보다 수용시설의 확장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1917년 통화현 팔리초(八里哨)의 소북대(小北垈)에 분교를 설치하고 이를 신흥학교 백농분교(白農分校)라 하였다.

 

1919년에는 신흥무관학교로 명칭을 개편하고 유하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에 40여간의 교사와 수만평의 연병장을 마련하여 이전하였다. 이는 3·1운동 이후 급증하는 입교지원자를 수용할 시설의 부족 때문이었다. 한편, 고산자에는 2년제 고등군사반을 두어 고급장교를 양성하였으며 합니하에는 초등군사반을 두어 3개월 과정의 일반 훈련반과 6개월 과정의 후보 훈련반을 두었다.

 

신흥무관학교는 신흥강습소 이래 여러 차례 폐교 위기에 직면하였으나 필사적으로 운영을 계속하여 1911년 제1기 졸업생을 배출한 이래 1920년 8월 폐교될 때까지 총 3천 5백여명의 독립군 기간요원을 길러냈다. 또한 1919년 3·1운동을 전후하여 정규적인 군사교육을 받은 유경험자가 속속 모여들었다. 곧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이청천(李靑天), 김경천(金慶天) 등과 중국 육군 강무당 출신인 이범석(李範奭), 그리고 대한제국군 장교였던 신팔균(申八均), 김창환(金昌煥), 이장녕(李章寧) 등이 합세함으로써 명실공히 독립군 사관양성의 기능을 다 할 수 있었다.

 

1일 14시간 정도의 학과교육과 70여리의 야간 행군 등 강도 높은 군사교육이 실시되었다. 교육내용도 정신교육에 치중하여 학과 10%, 교련 20%, 정신교육 50%, 건설 20%였으며 학교 건물 연병장 건설 등은 모두 자체에서 해결하였다.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교육자들을 간략히 살펴보면 교장에 이천민(李天民), 부교장에 양규열(梁圭烈), 학감에 윤기섭(尹琦燮), 훈련감에 김창환(金昌煥), 교성대장(敎成隊長)에 이청천(李靑天), 교관에 남상복(南相復), 이장녕(李章寧), 이세영(李世永), 김경천(金慶天), 신팔균(申八均) 등이 각각 담당하였다.

 

독립군 양성기관으로서 좀더 구체적 사실을 알 수 있는 기관이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서 경영하던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이다.

 

이 연성소의 교육은 전투가 없는 경우 오전 훈련과 오후 훈련으로 나누어 실시하였는데, 오전은 9시에 시작하여 11시까지로 주로 제식훈련과 전술훈련이었으며 오후는 사격술(射擊術), 총검술(銃劍術) 등 총기훈련(銃器訓鍊)과 학과훈련(學科訓鍊)을 밤늦게까지 실시하였다. 또한 이 연성소는 장교훈련뿐 아니라 신병훈련도 담당하였는데 신병에게는 2개월 내지 6개월 정도 집중교육을 시킨 후 부대에 배속시켜싸. 그리고 신병 중에 정신력이나 학력이 부족한 사람은 별도의 교육을 실시하여 보완하게 하였다.

 

연성소 교관들은 대한제국군 장교 출신 또는 중국에서 사관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으며, 대부분 의병항쟁 경력으로 전투 경험을 쌓은 사람들이었다.

 

서대파(西大坡)로부터 왕청하(王淸河) 상리삼리(上里三里)에 있어 서대파 상촌(上村)의 군정서 직영의 무관학교에는 현재 약 4백명의 재학생이 있어서 회색의 군복을 입고 모두 상등병(上等兵)격의 견장을 붙였으며 18세로부터 30세까지의 청년인데 6개월의 강습을 완료하면 모두 소위(少尉) 자격이 되며, 소대의 지휘관이 될 수 있다. 그 교육과정은 정신교육과 역사, 군사학, 병기술과, 지령법 등이었다.

 

이 군정서(軍政署)의 독립군 훈련에서 특이한 사실은 러시아 및 중국군 장교가 훈련을 도와주었다는 점이다. 러시아군 장교는 주로 무기 판매를 위하여 군정서 사관연성소로 왔다가 군정서의 요청에 의하여 독립군의 훈련을 담당하였으며 중국군 장교는 군정서가 훈련담당 교관으로 돈을 주고 임시로 고용한 용병이었다.

 

부대 지휘관은 주로 구한국군(舊韓國軍) 출신이거나 중국에서 정교적인 사관훈련을 받은 사람들이었으며 많은 수가 의병항쟁에 참전하였던 군사지식이 풍부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대원의 훈련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 특히 군정서에는 독립군 지휘관 양성을 휘하여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설치하고 청년 중 특히 우수한 자를 선발하여 입교시켰다. 이 사관연성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서 1만원의 자금을 지원하여 설립된 것으로 소장은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이 겸임하였고 학관은 이장녕(李章寧), 이범석(李範奭), 김규식(金圭植) 등이 담당하였다.

 

독립군 양성기관은 만주와 연해주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상해(上海)의 임시정부에서도 육군무관학교(陸軍武官學校)를 설립, 운영했으며 미국, 하와이 등지에서도 군사요원을 양성하여 만주와 연해주에 파병한다는 목적으로 일찍이 독립군 양성사업이 전개되었다. 대표적인 양성기관으로는 미국 클레어몬트에 있는 한국인 군사훈련반(軍事訓練班, 1910년 10월 설립), 켄자스에 있는 소년병학원(少年兵學院, 1910년 11월 설립), 하와이에 있는 한국 국민군단(韓國國民軍團, 1914년 6월 설립) 등이 있다.

 

● 독립군(獨立軍)의 편성(編成)

 

1919년부터 만주와 연해주에서는 수많은 독립군 부대가 편성되었는데 이들의 조직계통을 살펴보면 대략 네가지 계통으로 구분할 수 있다. 즉 의병과 유생들로 구성된 개신교(改新敎), 대종교(大倧敎) 등 종교를 중심으로 편성된 독립군, 또한 출신 지방별로 뭉쳐서 편성된 독립군, 그리고 나머지는 특별한 연고 관계없이 거주지를 중심으로 편성된 독립군이었다.

 

이러한 독립운동 군사단체(獨立運動軍事團體)들은 구황실(舊皇室)의 복벽(復辟)을 이상으로 하는 보수계와 공화정체(共和政體)를 이상으로 하는 공화계로 나눌 수 있는데 보수계는 주로 의병 유생 출신의 노장년층이며, 공화계는 소장층이 핵심이 되고 있다. 따라서 보수계는 반임정(反臨政) 태도를 지녔으며, 공화계는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또한 독립운동의 방법에 따라 다시 구분할 수 있는데 그것은 시급히 독립군 병력을 국내에 진입시켜 국내에서 일제(日帝) 세력을 몰아내야 한다고 하여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을 서두르는 이른바 급진파의 독립군과, 이와는 달리 먼저 병력 배양에 힘쓰고 일제에 대항할 수 있는 군사력이 준비되면 일거에 독립전쟁(獨立戰爭)을 일으켜 일제를 국내에서 축출하고 국권회복(國權恢復)을 기하자는 이른바 점진파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계통과 이념의 차이는 재만(在滿)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 진영에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눈앞에 도사리고 있는 일제를 효과적으로 축출할 수 있느냐가 더욱 시급하고 절실한 문제였다. 그래서 재만 독립군은 끝내 1개의 대단체(大團體)로 통합되지는 못하였지만 각기 독자적으로 항일투쟁(抗日鬪爭)을 전개하면서 한편으로는 꾸준한 통합운동(統合運動)을 추진하여 나갔다.

 

첫번째 독립군의 통합운동은 1919년 12월 독립군 일부 지도자들에 의하여 일어났다. 좀더 효좌적인 항일전(抗日戰)을 전개하고 통일적인 독립운동기구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목적 아래 평북독판부(平北督辦部),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 대한의용군사회(大韓義勇軍事會), 한족회(韓族會) 등의 간부들이 회합을 열어 통합기관의 설립에 합의하고 1920년 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직속기관으로 교민통치기구인 광복군참리부(光復軍參理部)와 독립군인 광복군사령부(光復軍司令部)를 설치하였다.

 

● 모병사업(募兵事業)

 

1919년에서 1920년 사이에 조만(朝滿) 국경지대와 간도(間島) 지역에서는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 의군부(義軍府),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 평북독판부(平北督辦部), 흥업단(興業團), 야단(野團), 대한의민단(大韓義民團), 혈성단(血誠團) 등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가 형성되었다.

 

대부분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소속 독립군(獨立軍)을 편성하는데 필요한 인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각기 자기단체(自己團體)의 관할지역 안의 주민들에 대하여 징병제(徵兵制)를 실시하고 있었다. 대한국민회는 호구조사를 실시한 후 18세에서 40세까지의 장정을 매호(每戶)당 1명씩 징집하였으며, 한족회(韓族會)에서도 17세~30세까지의 장정 중 선발하여 징집하였다. 주민을 많이 관장하고 있는 단체에서는 5호(戶) 중에서 1명을 징집하고 징집되지 않은 4호는 징집된 호구(戶口)의 생계를 돌보도록 하였다.

 

재만(在滿)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 단체 중에서 가장 조직적으로 징병제를 실시한 단체는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後日의 北路軍政署)였다. 군정서(軍政署)에서는 평균 30호(戶)를 1구(區)로 하여 18세~35세의 건강한 신체를 지닌 자를 매호(每戶)에서 15명~25명을 선발하여 징병검사를 실시한 후 적격자에게는 즉시 입대를 명하고 나머지는 군정서가 필요로 할 때에 즉시 소집에 응하도록 서약하게 하였다. 이어 35세 이상의 자로서 상당한 지식이 있고 주민들로부터 신망을 받고 있는 사람은 각 부대나 각 구의 간부로 임명하였다. 또한 입대자에게는 급료 및 여비로 50원을 지급하였다.

 

이상과 같이 징집을 통한 방법 이외에 자진 입대자와 모병(募兵)에 의한 방법이 있었다. 3·1운동 이후 국내로부터 수많은 청년들이 도만(渡滿)하여 독립군에 자진 참여하고 독립군 간부들은 국내에서 꾸준하게 모병 활동을 전개하여 애국 청년들을 독립군에 흡수하였다. 또 시베리아 연해주(沿海州)로부터도 많은 청년들을 모집하였다. 당시 나코리스트 방면에는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부라고웨시치엔스크 방면에는 금광업에 종사하는 한국 사람들이 많았는데 시베리아 지방의 정국 혼란으로 실직하고 있었다.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이들을 대상으로 초모(招募)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이들에게 독립군에 입대하는 것은 침략국에 정복된 국가를 광복시키는 성스러운 일에 참여하는 영광을 갖게 될 뿐만 아니라 입대 후에도 생활이 보장될 것이라는 점을 설명하여 독립군에 흡수하였다. 군정서에서는 이들이 입대하면 소정의 증명서를 발급하여 이들이 군정서의 독립군임을 증명하였다.

 

독립군의 부대편성은 그 부대의 실정에 알맞게 편성되었다. 지휘관의 군사경력에 따라 대한제국의 편제를 적용하거나, 일본군이나 중국군의 편제를 적용하거나 또 부대의 규모와 지역 사정에 따라 부대를 운영하기 편리한 방법으로 독자적인 편제를 사용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독립군 편제는 일반적으로 소대(小隊), 중대(中隊), 대대(大隊)로 편성하였다.

 

대한독립군은 소속 부대를 4개 중대로 편성하고 그 명칭을 남만주(南滿州) 제1사단(師團)이라 하였으며, 의군부와 대한독립군은 3개 중대로, 통의부(統義府)의 의용군은 3개 소대를 1중대로 하여 4개 중대로, 참의부(參議府)는 5개 중대, 정의부(正義府)는 4개 중대로 편성하였다. 그런데 신민부(新民府)는 5개 대대로 편성하였는데 대대의 규모나 대대 이하의 편성은 기록에 나타나 있지 않다. 부대편성에서 특이한 것은 광복군사령부의 부대편성이다. 광복군사령부는 소속 독립군을 1영(營)에서 6영까지로 나누어 지방에 분산 주둔케 하였다.

 

독립군의 편성 규모를 가장 상세히 알 수 있는 것은 대한군정서로서 동(同) 부대는 창설 초기 병력이 적었을 때는 25명을 1개 소대로 하고, 2개 소대 50명을 중대로 하였으며, 2개 중대 100명을 대대로 편성하였다. 그러나 뒤에 병력이 증강되자 50명을 소대로 하고, 1개 소대를 1개 중대로, 그리고 4개 중대를 1개 대대로 하였으며 각 제대(梯隊)에는 대장(隊長) 1명을 두어 부대를 지휘하게 하였다.

 

초기에는 총병력 5백여명이 장총 5백정, 권총 4십정, 기관총 3문으로 비교적 착실하게 장비를 갖추었으며 군자금도 10만원을 준비하고 있었다. 군정서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병력증강을 꾀하였는데 국내에서도 독립군 모병 활동을 착실하게 수행하여 매일 수십명의 장정이 입대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 8월에는 총병력이 1천 6백명을 돌파하였으며 장비로는 장총 1천 8백정(1정당 탄환은 8백발), 권총 150정, 기관총 7문, 대포 3문과 다수의 수류탄을 보유하여 재만 독립군 중 최강의 부대로 성장하였다.

 

독립군의 개인장비는 소총 1정, 탄환 5백발, 수류탄 1개 그리고 비상식량으로 정요(精要) 6승(升)과 신발 1켤레씩을 휴대하였다. 그리고 대한군정서는 전(全)독립군을 4개 대대로 편성하였는데 이 중 1부대는 각 지방과의 통신연락 및 주변 경계임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 군자금과 무기조달

 

독립군에게 무엇보다 제일 긴요한 것은 군자금이었다. 군자금 준비는 부대의 세력을 좌우할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의 성패를 가늠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무기와 군수품을 마련하기 위하여는 상당한 액수의 자금이 소요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독립군이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은 군자금의 조달이었다. 만주에서의 군자금조달의 대상은 물론 재만교민(在滿僑民)들이었다. 그리하여 대한군정서는 재만교민에 대하여 재산 정도에 따라 납세형식으로 일정액을 징수하였다. 대개 빈민층이 많은 교민들에게 일시불로 징수하기 어려워 분납제(分納制)를 적용하였는데 1년에 전후기(前後期)로 나누어 분납하게 하였다. 대개 토지 5정보(町步) 이상을 소유한 부유한 교민들에게는 재산정도에 따라 100월 이상을 할당하여 납부하게 하였으며 일반빈민들에게는 호당 평균 조 2말과 짚신 2켤레를 징수하였다.

 

대한독립군은 5등급으로 나누어 1등 5원, 2등 3원, 4등 1원 5각, 5등 5각반을 징수하였으며 화룡현(和龍縣)에서 결성된 대한독립이사회는 3등급으로 나누어 부호(富戶)는 곡식 5두와 금 10원을, 빈호(貧戶)는 3두와 5원, 극빈호(極貧戶)는 5승과 1원을 징수하였다. 또 홍범도(洪範圖) 부대는 각 호에 곡식 3두와 짚신 1족을, 연길현(延吉縣)에서 군자금 모금만을 전담하기 위하여 결성된 독립단총재소(獨立團總財所)는 5원에서 100원까지 여러 등급으로 구분하여 기부금을 징수하였다. 또 이범윤(李範允)의 광복단(光復團)에서는 매호에 곡식 1두를 징수하고 또 3등급으로 나누어 1등은 5원, 2등은 2원 50전, 3등은 80전을 징수하였다.

 

또 재만 독립군은 부족한 자금을 국내에서 모금하였다. 군정서의 국내 모금 활동 상황을 보면 군정서는 대원 중에서 엄선된 인물을 국내에 파견하여 모금 활동을 전개하도록 하였는데 상당한 학식과 신망이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그 사람을 원적지로 파견하고 그 곳에서 친척이나 그 지방 지면인사(地面人士)들에게 독립운동 자금의 필요성을 설득하여 그들로부터 의연금을 받아내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모금 활동은 어디까지나 국민들에게 항일독립운동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거나 국민의 애국심에 호소하여 자발적인 협조를 부탁하는데 있었고 강제적인 징수는 아니었다. 독립군의 강제적인 모금 활동의 대상은 친일파이거나 독립운동에 비협조적인 부호들에게 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간도지방 독립군의 모금에는 상당한 부작용이 일었다. 그것은 간도지방에는 여러 군데의 독립운동 단체가 조직되어 있어 이들 각 단체가 제각기 모금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교민들에게 이중삼중의 부담을 주었을뿐 아니라 그 중에는 독립군을 빙자한 무뢰배들이 독립운동 단체의 간판만을 걸어놓고 교민을 총기(銃器)로 위협하여 강제로 재산을 약탈함으로써 교민들의 민심을 독립운동으로부터 이반시키는 사례가 종종 발생했다. 그리하여 독립운동가들은 이들 가짜 독립운동가들로부터 교민을 보호하여야만 했으며 각 단체가 통합하여 질서있는 독립운동을 전개해야만 했다.

 

독립군 부대의 규모가 점점 커짐에 따라서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군자금 부족현상은 나날이 심각해져 갔다. 이에 독립군은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국내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강제모금하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대대로 부작용이 나타나게 되었다.

 

독립군은 부대유지비뿐만 아니라 총기(銃器)와 탄약(彈藥)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에 처음에는 국민들의 자발적인 의연금에 의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차츰 강제적 모금의 방법을 병행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독립군이 군자금의 마련과 동시에 시급히 추진한 것이 무기의 구입이었다. 당시 무기를 구입할 수 있는 주된 길은 시베리아나 연해주로부터였다. 당시 이곳은 적군(赤軍)과 백군(白軍)간의 내전으로 혼란이 극심하였을 뿐만 아니라 군으로부터 많은 무기가 유출되어 무기판매상들에 의하여 비밀리에 거래가 성립되고 있었다. 따라서 독립군이 무기를 구입하는 것은 자금만 있으면 얼마든지 가능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시베리아로 출병하였던 체코슬로바키아군이 시베리아에서 철군하면서 막대한 무기를 싼값에 독립군에 판매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군은 지난날 헝가리 제국주의의 압제 밑에 짓밟힌 자신들의 노예 생활을 회상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려고 투쟁하고 있는 한국 독립군에 대하여 많은 동정을 베풀고 자신들의 무기를 판매하여 주었던 것이다.

 

당시 무기의 가격은 일정하지가 않았는데 무기상이나 중간 무기상으로부터 구입하는 것은 고가(高價)였다. 무기구입에 있어 제일 어려운 것이 운반이었다. 철도를 이용하여 소만국경(蘇滿國境)까지 운반되면 그곳에서 본부까지 직접운반하였다. 중국과 일본 군경(軍警)의 감시를 피하여 산간지방으로 운반하였는데 산간지방에서는 마적단(馬賊團)의 무기탈취를 피하여야만 하였다. 그리하여 독립군은 별도로 무기운반대를 편성하여 운반 도중에 발생되는 사고에 대비하였다. 이 운반대는 마을에서 신체가 건강한 사람 1명씩 소집하여 조직하였는데 이 운반대는 무장된 독립군의 경호를 받으며 무기를 운반하였다.

 

독립군의 무기는 러시아제 총기(銃器)가 과반수를 차지하였으며 그밖에 일본제, 미국제, 독일제 총기도 가지고 있었다. 기록상에 나타나 있는 독립군의 무기를 보면 러시아식 장총(長銃)과 기병총(騎兵銃), 일본의 38식 장총과 1930년대식 보병총(步兵銃), 무라타[村田]식 장총, 중국제 장총이 있으며, 브로우닝, 스미스, 모젤, 콜드 권총(拳銃) 등 미국제와 러시아제 5연발 및 7연발~12연발 권총, 일본제 권총 등도 보이고 있다.

 

한편, 독립군의 근거지는 대부분 방어전(防禦戰)을 벌이기에 유리하고 일본군의 습격을 피할 수 있는 곳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근거지에는 자력으로 병영과 연병장을 건설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군무부(軍務部)의 문서 기록에 나타나 있는 것을 보면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의 근거지는 백초구(百草溝)에서 동북방 135리, 대왕구(大旺溝)로부터 90리 지점의 울창한 산림으로 뒤덮인 양봉산(養棒山)이라 불려지는 산록에 있었다. 이곳은 그다지 높은 고지는 아니었으나 동방으로 약 100리에 훈춘(琿春) 차구에 이르며 동북방 150리에는 경수천자(倞水泉子) 방면으로 통하는 교차로에 위치하고 있어 어느 쪽으로나 적군의 공격을 방어하기에 쉬운 군사적 요충지에 자리를 잡았다. 대한군정서는 이곳에 병영을 건설하고 연병장을 만들어 본부로 삼았다.


 

해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위원 신재홍(申載洪) 박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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