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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은 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는가? Ⅱ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찌기 개화사상에 눈을 떴던 안중근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옥중에서 쓴 그의 자서전 "안응칠 역사"는 그가 러일전쟁 이후에야 비로소 일본의 진의를 알게 됐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전쟁 승리 후인 1905년 12월 이토 히로부미는 현해탄을 건넜다. 초대 조선통감으로 부임한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대한제국에 대한 구상이 자리잡고 있었다.

부임 직후 이토는 고종 황제와 대신들이 참여한 시정 회의때마다 일본은 한국을 병합할 필요도 생각도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한국정부와 한국인들의 무능력을 비난하고 나섰다. 그러나 그는 우치다 료헤이 등 우익 낭인들을 앞세워 일진회 등 친일단체들을 조직, 치밀한 공작정치를 펼쳐나갔다. 일진회 회원들은 직접 의용군으로 나서기도 했는데, 이토는 친일세력들을 한국 병합의 첨병으로 활용했다.

강 교수 "일진회 소속의 송병준이 상공부 대신이 되고 이완용이 수상이 되고 이런 식으로 해서 한국의 매족세력들을 병합의 추동세력으로 이용해 나가는데 교활한 정치력이 발휘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1907년에 헤이그 밀사사건이 일어났다. 고종이 이상설 등 밀사 세명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보내어 일본의 불법성을 알리도록 한 것이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이토는 고종을 찾아와 격앙된 목소리로 이번 사건이 일본에 대한 적대행위라면서 책임을 추궁한다. 한 나라의 황제에게 호통을 칠만큼 이토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헤이그 밀사사건의 여파는 실로 엄청났다. 이토와 조정을 장악한 친일세력들의 강압으로 결국 고종이 폐위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리고 정미 7조약을 체결, 이토는 대한제국의 군대까지 해산한다. 그러자 일본의 폭압적 지배에 맞서 전국 각지에서 의병항쟁이 벌어졌고 대대적인 의병토벌작전을 명령한 이토는 체포된 의병들을 참혹하게 학살한다.

계몽운동에 헌신하던 안중근은 이때부터 무장투쟁을 결심한다. 암울한 조국의 현실을 목도한 안중근, 그는 항일투쟁을 위해 만주로 향하게 되는데, 당시 간도에는 한국의 지식인들이 학교를 세워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항일투쟁을 벌이던 근거지였다. 안중근 역시 이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주도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간도 지방의 의병들은 한국 국경이 맞닿아 있는 두만강 일대를 넘나들며 산발적으로 항일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들의 공격 목표는 국경 근처의 일본군 기지와 초소, 그 무렵 안중근은 진재덕의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엄인섭과 더불어 열차례 국내 진공작전을 펼쳐 상당한 전과를 올리게 된다. 당시 허얼빈 총영사관의 항일운동 주요인사 명단에는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항일투쟁의 중심에 그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안중근이 대한의용군 좌익장으로 있던 그 무렵 그의 남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일본에 대한 적대감이 절정이었던 그 시기에 너나 할것없이 체포된 적군은 처참하게 처형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안중근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포로들을 석방했다고 한다. 그가 안응칠 역사에 썼던 포로에 대한 석방은 평화주의자였던 그의 면모를 엿보게 한다.

안중근 "현재 만국공법에 사로잡은 적병을 죽이는 법은 전혀 없다. 어디다 가두어 뒀다가 뒷날 배상을 받고 돌려보내주는 것이다. 더구나 그들이 말하는 것이 진정에서 나오는 의로운 말이라, 놓아주지 않고 어쩌겠느냐."

이후 일본군과의 교전에 참패한 안중근은 연해주로 이동한다. 그는 크라스티노에서 11명의 동지들을 모아 단지동맹을 결성한다. 조국을 위해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리던 안중근 그는 동지들에게 손가락을 잘라 결의를 다질 것을 제안했다. 손가락을 자른 이들은 그 피로 미리 준비한 태극기에 "大韓獨立"이란 글자를 쓰고 만세를 외쳤다. 무엇이 그렇게 절박했던 것일까.

일본의 한국 병합이 가시화될 무렵, 자신의 행적을 자탄하던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근거지를 옮겼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는 한국인 집성촌이 많아 어느때보다도 독립운동의 기운이 높았던 곳이었다.

그런데 안중근에게 마침내 기회가 왔다. 현지 신문에 이토가 만주에 온다는 기사가 실린 것이다. 그것은 하늘이 내려준 마지막 기회였다. 시모노세기를 출발 배로 여순항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는 운명을 모른채 달려오고 있었다. 이토가 봉천, 장춘을 거쳐 허얼빈으로 향하던 무렵,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 채가구에 동지들을 배치하고 자신은 허얼빈에서 기다렸다.

10월 26일 아침 9시, 이토가 탄 열차가 허얼빈 역에 도착했다. 역전에서 러시아의 재무상 코코프체프의 영접을 받은 이토는 9시 30분경 사열을 위해 열차에서 내려섰다. 열차에서 내려 환영 행렬쪽으로 갔던 이토는 사열을 위해 행렬 말미에 서있던 이토를 향해 걸어왔고, 바로 이때 러시아 군인들 뒤에 서있던 안중근이 뒤쳐나와 방아쇠를 당겼다. 두사람 간의 거리는 불과 5,6m 세발의 총성이 울리면서 이토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당시 이토의 얼굴을 정확히 알지 못했던 안중근은 이토가 쓰러진 후에도 일행을 향해 다시 여러 발의 총탄을 발사했다. 그중 세발이 이토의 몸을 관통했다. 일본의 식민지나 다름없었던 한국의 한 청년이 일본 제국주의의 교만함을 향해 권총을 쏜 것이었다. 이토를 저격한 것은 안중근이었지만, 그것은 한국병합을 꿈꾸던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항일세력의 단죄였다.

장석흥 국민대학 교수 "일반인이 외교관으로 온 이토를 처단한 것이 아니고 항일독립전쟁의 과정에서 적군의 지휘관을 전쟁터에서 사살한 것으로 평가한다면 우리가 허얼빈 의거의 의미를 제대로 찾을수 있지 않나 생각한다."

그러나 역사는 그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목숨을 건 항거에도 불구하고 이토를 저격한 10개월 후인 1910년 8월 일본은 한국을 병합했다. 그후 일각에서는 안중근이 이토를 살해함으로써 한국병합이 앞당겨졌다는 시각들도 있었으나 그것은 결코 사실이 아니었다.

사키 류조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이 한국 병합으로 이어졌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하지만 한국 병합은 이미 이토 암살 이전에 결정되어 있던 것이었고, 이토의 죽음이 병합을 이룬 것은 아니었다."

이토 사토루 세이게이 고등학교 교사 "교과서에 이토 히로부미 암살이 한국 병합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는 식으로 나와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학계의 연구에 의하면 이미 그 이전에 한국 병합이 내각회의에 결정되었다는 것이 통설로 되어있고 또 나도 학생들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허얼빈 의거가 있기 6개월 전인 그해 4월 도쿄에 있던 이토의 집을 당시 고무라 외상과 가츠라 수상이 은밀히 방문했다. 그들은 이 자리에서 이토에게 신속한 한국 병합을 건의했고 예상 외로 이토는 그들의 제의를 쉽게 허락했다.

안자이 교수 "일본이 겉으로는 한국을 빨리 독립시켜 하나의 나라로 만들 것을 주장했지만 독립시킨 다음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려는 전략이 복선으로 깔려 있었던 것이다. 그런 흐름 속에서 강화도 사건, 을사조약, 임오군란, 갑신정변, 청일전쟁 등이 일어났고 그것을 간압하는 정책을 펼칠때 일괄적으로 조선을 지배하려는 정책을 취한 것으로 볼수있다."

메이지 정부 초기 이토는 급진적인 한국 병합론자들과는 달리 점진적인 한국 병합론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것은 주변 열강들의 저항없이 한국을 병합하려 했던 노회한 정치인의 술책이었을 뿐, 한국 병합이란 목표는 동일했다.

정재정 서울시립대학 교수 "한국의 독립과 영토를 보장한다. 황실의 안녕을 보장한다. 이런 식으로 기만을 했던 것이다. 실제로 그런 얘기를 해가면서 그 이후에 일어진 일들은 한국의 주권을 하나하나 박탈해가는 과정이었고 그 선봉장에 섰던 인물이 이토였다."

향후 일본 제국주의의 헌법을 만든 것도 이토였으며, 일본은 어떠한 재제없이도 침략 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다.

따라서 이토 사후에도 국왕이 군통수권을 유지하던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침략 전쟁을 벌인다. 이어 대동아 경영을 기치로 중국본토 침략을 개시하는 등 일본은 패권주의의 열망 속에 군국주의로 치달았다. 이리하여 20세기 중엽 제국주의 일본은 중국본토는 물론 동남아와 멀리 태평양을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안중근은 이미 일본의 독주를 궤뚫어보고 있었다. 그는 옥중에서 집필한 동양평화론의 서문에 침략전쟁을 일삼는 일본 제국주의의 운명을 독부의 환(患)이란 표현을 써 예견하고 있다. 1945년 8월, 일왕 히로히토는 마침내 백기를 들었다. 서른 한살의 나이에 운명을 달리했던 안중근 그는 대체 어떤 식견과 포부를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었을까. 그의 인품과 사상적 깊이는 그가 옥중에서 주변사람들에게 써준 유묵을 통해 알려지고 있다.

오다가와 전 아사히 신문 편집위원 "안중근은 대단히 뛰어난 민족주의자였지만, 그렇다고 결코 고립된 민족주의자였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것은 안중근이 옥중에서 쓴 동양평화론에서 알수 있듯이 국제협정 속에서 동양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신속한 사형 집행으로 완성되지 못했지만 그가 옥중에서 집필한 동양평화론은 동양 평화에 대한 그의 철학과 원대한 구상을 보여준다.

장 교수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것은 그것이 일본과 같이 침략의 형태로 동양의 정세를 결정짓는 것이 아니고 동양의 여러 나라들이 인도주의적 가치 위에서 서로 연대하여 동양 평화를 지키는 것이고 또 그러한 동양 평화는 궁극적으로는 세계 평화를 유지하는 한 방법으로 이해할수 있을 것이다."

 

이토 저격 사건과 관련된 당시 일본 외무성의 문서, 이 가운데 남아있는 안중근의 옥중 소회는 문명을 중히 여기면서 동양 각국이 서로의 주권을 인정하는 가운데 평화를 이룩해야 한다는 그의 사상을 담고있다.


 

이시다 교수 "안중근이 생각하는 문명관은 양육강식이 아닌 보편적인 도덕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문명관을 바탕으로 동양의 각 나라 국민들이 서로 협력하며 자주독립을 하는 것이 진정한 평화라고 보는 것이다."

1백여년전 이토로 상징되는 일본의 제국주의는 동양의 평화를 위협했다. 그리고 지금 일본의 재무장은 다시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 평화의 위기 조성과 암울했던 지난 역사를 다시 떠올리게 하고 있다.

따라서 백여년전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신제국주의의 물결 속에 아직 유효하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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