チョン・ゼジョンソウル市立大国史学と教授は “韓日歴史学界でニントク王を注目する理由は彼が日本古代国家のフレームを完成した人でもあるが韓半島で渡った百済到来人たちと非常に密接で特別な関係を結んで古代韓日交流の非常に重要な役目をした人だから”と言いながら “到来人が大挙住んだ大阪を首都にするほどに王室次元で韓半島との交流の門をぱっと開いた象徴的な人”と言った.
百済王室とニントク王室の関係はニントク王陵で発見された各種遺物たちが百済武寧王陵古墳で発見された遺物たちと非常にそっくりだという事実が出ながらもっと確信を持つようにした. 代表的なことが青銅鏡(東京・銅鏡)だった. 1872年ニントク王陵で出土されたことが 1971年百済武寧王陵で発掘されたこととほとんど似ていて韓日歴史学者たちから ‘双子’ ‘複製品’ 音を聞いた位だった. 韓国三国時代や古代日本王の墓で発見される青銅鏡は王の権威を象徴する墓私の副葬品と知られている.
双子遺物はまたあったから正しく二つの墓でそれぞれ出たファンドデも(取っ手あげく丸やかな掛けがねが走った大きい刀)だった. 掛けがね中に三足付いた鳥が一匹ずつ入っていることがまったく同じだった. こんな様式は中国では見られなくて韓半島で伝来されたという学説が有力だ.
정재정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는 “한일 역사학계에서 닌토쿠 왕을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일본 고대 국가의 틀을 완성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한반도에서 건너간 백제 도래인들과 매우 밀접하고 특별한 관계를 맺어 고대 한일 교류의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라며 “도래인이 대거 살던 오사카를 수도로 삼을 정도로 왕실 차원에서 한반도와의 교류의 문을 활짝 열었던 상징적인 사람”이라고 했다.
백제 왕실과 닌토쿠 왕실의 관계는 닌토쿠 왕릉에서 발견된 각종 유물들이 백제 무령왕릉 고분에서 발견된 유물들과 매우 흡사하다는 사실이 나오면서 더욱 확신을 갖게 했다. 대표적인 것이 청동거울(동경·銅鏡)이었다. 1872년 닌토쿠 왕릉에서 출토된 것이 1971년 백제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것과 거의 비슷해 한일 역사학자들로부터 ‘쌍둥이’ ‘복제품’ 소리를 들었을 정도였다. 한국 삼국시대나 고대 일본 왕의 무덤에서 발견되는 청동거울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무덤 내 부장품으로 알려져 있다.
쌍둥이 유물은 또 있었으니 바로 두 무덤에서 각각 나온 환두대도(손잡이 끝에 둥그런 고리가 달린 큰 칼)였다. 고리 안에 세 발 달린 새가 한 마리씩 들어가 있는 것이 똑같았다. 이런 양식은 중국에서는 볼 수 없어 한반도에서 전래됐다는 학설이 유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