以下は可能な限り足跡を追った。
・月氏 匈奴に滅ぼされ、西に逃れた大月氏と残留した小月氏に分かれる。
・大月氏が鳥孫に滅ぼされて、さらに西に逃げる。残留したのがたぶん弓月と思われる。
『資治通鑑』卷第199 に弓月の記録がある。
「秋,七月,西突厥沙钵罗可汗寇庭州,攻陷金岭城及蒲类县,杀略数千人。诏左武候大将军梁建方、右骁
卫大将军契苾何力为弓月道行军总管,右骁卫将军高德逸、右武候将军薛孤吴仁为副,发秦、成、岐、雍
府兵三万人及回纥五万骑以讨之。」
・弓月、豆満江を渡る。
雄略天皇の御世、 渡来系の豪族秦氏「禹豆満佐=うずまさ」の号を与えられた。
豆満とある。
・弓月、秦韓に月支国をなす。(たぶん)
・弓月の君、日本渡来
『日本書紀』
応神天皇14年に弓月君が百済から来朝して窮状を天皇に上奏した。弓月君は百二十県の民を率いての帰化を希望していたが新羅の妨害によって叶わず、葛城襲津彦の助けで弓月君の民は加羅が引き受けるという状況下にあった。しかし三年が経過しても葛城襲津彦は、弓月君の民を連れて帰還することはなかった。そこで、応神天皇16年8月、新羅による妨害の危険を除いて弓月君の民の渡来を実現させるため、平群木菟宿禰と的戸田宿禰が率いる精鋭が加羅に派遣され、新羅国境に展開した。新羅への牽制は功を奏し、無事に弓月君の民が渡来した。
・弓月の君(秦hata)氏、九州の豊後に秦王国をなす。
『隋書俀国伝』
「又東至秦王國 其人同於華夏」
また東の秦王国に至る。その人は中国人と同じ
・秦(hata)氏
渡来人として、全国的に技術的に大活躍したのは、みなさんご存じの通り(略す)
이하는 가능한 한 발자국을 쫓았다.
·월씨 흉노에게 멸해지고 서쪽으로 피한 대월지와 잔류한 오즈키씨로 나누어진다.
·대월지 거위손자에게 멸해지고, 한층 더 서쪽으로 도망친다.잔류한 것이 아마 궁월이라고 생각된다.
「자치통감」권 제 199 에 궁월의 기록이 있다.
「가을, 7월, 서돌궐사??가한구정주, 공함금?성급포??,?약어 수천인.?남자가 무사, 무예를 중시 여김 문안 드림 대장?량건방, 오른쪽?
?대장?계?무슨력?궁월도교??관, 오른쪽??장?고?일, 오른쪽무후장?설고?인?부,?진, 성, 기, 옹
부병3만명급회?5만?이?지.」
·궁월, 두만강을 건넌다.
유랴크 천황의 세, 도래계의 호족 진씨 「우두만좌=야」의 호가 주어졌다.
두만과 있다.
·궁월, 진 한국에 월지국을 이룬다.(아마)
·궁월의 너, 일본 도래
「일본 서기」
응신천황 14년에 유즈키노 기미가 (쿠다라)백제에서 와 입궐해 궁상을 천황에 상주했다.유즈키노 기미는 백이10현의 백성을 인솔한 귀화를 희망하고 있었지만 신라의 방해에 의해서 실현되지 않고, 가쓰라기노 소쓰히코 의 도움으로 유즈키노 기미의 백성은 가야가 인수한다고 하는 상황하에 있었다.그러나 3년이 경과해도 가쓰라기노 소쓰히코는, 유즈키노 기미의 민을 동반해 귀환할 것은 없었다.거기서, 응신천황 16년 8월, 신라에 의한 방해의 위험을 제외하고 유즈키노 기미의 백성의 도래를 실현시키기 위해, 평군목토숙녜와 목표 토다숙녜가 인솔하는 정예가 가야에 파견되어 신라 국경에 전개했다.신라에의 견제는 공을 세워, 무사하게 유즈키노 기미의 백성이 도래했다.
·궁월의 군(진hata) 씨, 큐슈의 분고에 진왕국을 이룬다.
「수서?국 전」
또 동쪽의 진왕국에 이른다.그 사람은 중국인과 같다
·진(hata) 씨
도래인으로서 전국적으로 기술적으로 대활약한 것은, 여러분 아시는 바대로(생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