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貢は東アジアで近代化以前数千年間行われた国際秩序及び外交秩序の一番代表的な形態でした.
よく朝貢を力の論理による屈従と屈服の行為で解釈しているが....
約 15‾20余年の前からは経済的観点での解釈が主流をなしています.
朝貢は当時国際貿易の形態で
政治的には中原大陸の 皇統一和 国際秩序に編入して, 収容する意味で, 経済的には中原に偏重された生産の配分を意味すると言います.
実際中原の皇帝国は周辺国の朝貢を受ければその物品の最小 10‾20倍を 皇恩を下げるという意味で返してやったと言います.
も政治軍事的に弱小な相対国の安保と平和を保障してくれるという意味もありました.
高級の最新情報, 学問, 技術も封建主義社会では支配層が集中, 独占していたから
民間交流よりは朝貢貿易を通じる交流が圧倒的に效率的で迅速でした.
それで 唐と 明の時代には中原と直接的, 定期的に朝貢関係を持つということは文化的, 外交的, 政治的先進国を意味することでもありました.
現代で UN 会員国とか... アメリカと同盟関係とか... ほとんどそんな意味だったと見られます.
このように国際貿易とその分配が国家によって完全で徹底的に統制されることが当時には正常で, 效率的で先進的なのでした.
韓半島の国々が中原地域以外に海洋地域(日本, 沖繩, ベトナムなど)と交流がなかったのではないが,
現在のような貿易業の商人によったのではなくて, 王室の統制の下給与を支払ってもらう一種の調逹業者たちのような人々によって成り立ちます.
性理学的価値観も民間交易と商業の発達を阻害する要因中の一つであったが.....
朝鮮は性理学的以上世界を追い求める士の国だったし, 士農工商という職業の差別が明確だった社会でした.
士: 学者
農: 農業人
工: 製作技術者
商: 商人
個人の商人はほとんど泥棒のような取り扱いを受けました. 現在と比べようとすると共産主義式経済観念を持っていたから, 実物を生産しないで財貨を取得する行為を否定したことで評価したのです.
とにかく数千年間続けたこのようなシステムが大きい変化を迎えるようになったということはみんな分かるんです.
ヨーロッパが大航海時代と産業革命を経りながら地中海と西ヨーロッパ地域の産業生産性が飛躍的発達を成すようになって
過去東アジアの中原, 中央アジア, ペルシアと東欧を貫いた国際的文化, 物流の流れを大西洋とアフリカ大陸海岸の海洋交易路が圧倒するようになります.
東アジアにもそういう変化の影響を一番先に受けたことが 18世紀日本列島です.
中央集権体系が弱かった日本は朝貢貿易は発達しなかったが. 自然に民間交易 rootがよく揃っていたし,
相変らず大陸の rootに寄り掛かっていた中原と韓半島よりはずっと先立って海を通じてヨーロッパと交流が成り立っていたんです.
朝鮮も壬辰の乱, 通信社交流及び 清の登場でそういう変化の風が吹き始めたし, 先覚者たちもいました.
三浦 貿易港を開港して海洋を通じる民間の交易をホがヘッダドンジ...
政治的に相変らず日本を 下対したが, 当時日本の驚くべきな経済的, 技術的発展の姿とその背景を王室に報告して, 真言するとか...
王室と士大夫の権威と独占に割れ目が発生しながら 良人の 大農がドングザングヘッダドンジ....
日本と地理的, 社会的与件があまりにもあんまり違い 朝鮮が日本と等しい変化の道を歩くことはできなかったはずです.
しかし, 既存の朝貢を通じる貿易と国際交流だけでもなだらかに維持, 発展したら 朝鮮の言葉でがそんなに惨めではなかったようです.
内部の政治的状況で 清との外交と交流さえ 明の時代とは比べることができない位に硬直されて... すなわち, 中原との朝貢貿易もむちゃくちゃになります.
結局中原の豊かな物資を王室と支配層が供給受けることができないから, 民に対する経済的主導権と支配力が弱くなって...既得権を守るためにむしろ内部収奪が強化されて....
性理学的価値は支配と独占の強化スーダンで変質固着化になります.
民間経済の拡張が既存支配層たちの権威と影響力を脅威するようになろう...抑制と干渉をほしいままにするようになって
ここに不満を解くことは 三浦 貿易港の外国人 貿易商(日本人が中心)野が暴動を起こすとこれを言い訳で唯一の海洋交易路であった 三浦マジョ閉鎖するようになります.
以後話は勢道政治, 興宣大院君... みんな存じる歴史です.
大陸と 事大関係で成功的な外交, 交易システムに成功して, 満洲と南方で交隣関係に成功して,
朝貢貿易を基本フレームにする当時の国際関係で 朝鮮は大きく成功して 16世紀まで豊饒と発展を成しました.
조공은 동아시아에서 근대화 이전 수천년간 행해지던 국제질서 및 외교 질서의 가장 대표적인 형태였습니다.
흔히들 조공을 힘의 논리에 따른 굴종과 굴복의 행위로 해석하고 있는데....
약 15~20여년 전부터는 경제적 관점에서의 해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조공은 당시 국제무역의 형태로
정치적으로는 중원 대륙의 皇統一和 국제 질서에 편입하고, 수용하는 의미이고, 경제적으로는 중원에 편중된 생산의 배분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실제 중원의 황제국은 주변국의 조공을 받으면 그 물품의 최소 10~20배를 皇恩을 내린다는 의미로 되돌려 주었다고 합니다.
또한 정치군사적으로 약소한 상대국의 안보와 평화를 보장해 준다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고급의 최신 정보, 학문, 기술 역시 봉건주의 사회에서는 지배층이 집중,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민간 교류 보다는 조공 무역을 통한 교류가 압도적으로 효율적이고 신속했습니다.
그래서 唐과 明의 시대에는 중원과 직접적, 정기적으로 조공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문화적, 외교적, 정치적 선진국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현대에서 UN 회원국이라든지... 미국과 동맹관계라든지... 거의 그런 의미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국제무역과 그 분배가 국가에 의해 완전하고 철저하게 통제되는 것이 당시에는 정상적이고, 효율적이며 선진적인 것이었습니다.
한반도의 국가들이 중원지역 이외에 해양 지역(일본, 오키나와, 베트남 등)과 교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현재와 같은 무역업의 상인에 의한 것이 아니고, 왕실의 통제아래 급여를 지급받는 일종의 조달업자들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성리학적 가치관도 민간 교역과 상업의 발달을 저해하는 요인 중의 하나였는데.....
朝鮮은 성리학적 이상세계를 추구하는 선비의 나라였고, 士農工商이라는 직업의 차별이 명확하던 사회였습니다.
士: 학자
農: 농업인
工: 제작 기술자
商: 상인
개인의 상인은 거의 도둑과 같은 취급을 받았습니다. 현재와 비교하자면 공산주의식 경제관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실물을 생산하지 않고 재화를 취득하는 행위를 부정한 것으로 평가했던 것입니다.
아무튼 수천년간 이어지던 이러한 시스템이 큰 변화를 맞이 하게 되었다는 것은 다들 아실겁니다.
유럽이 대항해시대와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지중해와 서유럽 지역의 산업 생산성이 비약적 발달을 이루게 되고
과거 동아시아의 중원, 중앙 아시아, 페르시아와 동유럽을 관통하던 국제적 문화, 물류의 흐름을 대서양과 아프리카 대륙 해안의 해양 교역로가 압도하게 됩니다.
동아시아에도 그러한 변화의 영향을 가장 먼저 받은 것이 18세기 일본 열도입니다.
중앙집권체계가 약했던 일본은 조공무역은 발달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민간 교역 root가 잘 갖추어져 있었고,
여전히 대륙의 root에 의존하고 있던 중원과 한반도 보다는 훨씬 앞서 바다를 통해 유럽과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지요.
朝鮮도 임진왜란, 통신사 교류 및 淸의 등장으로 그러한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선각자들도 있었습니다.
三浦 무역항을 개항해서 해양을 통한 민간의 교역을 허가했다던지...
정치적으로 여전히 일본을 下對했지만, 당시 일본의 놀라운 경제적, 기술적 발전상과 그 배경을 왕실에 보고하고, 眞言하거나...
왕실과 사대부의 권위와 독점에 균열이 발생하면서 良人의 大農이 등장했다던지....
일본과 지리적, 사회적 여건이 너무나 판이하게 다른 朝鮮이 일본과 동일한 변화의 길을 걷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존의 조공을 통한 무역과 국제 교류만이라도 원활하게 유지, 발전되었다면 朝鮮의 말로가 그렇게 비참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내부의 정치적 상황으로 淸과의 외교와 교류조차 明의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경직되고... 즉, 중원과의 조공무역도 형편없어집니다.
결국 중원의 풍부한 물자를 왕실과 지배층이 공급받지 못하니, 백성에 대한 경제적 주도권과 지배력이 약해지고...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오히려 내부 수탈이 강화되고....
성리학적 가치는 지배와 독점의 강화 수단으로 변질 고착화 됩니다.
민간 경제의 확장이 기존 지배층들의 권위와 영향력을 위협하게 되자...억제와 간섭을 자행하게 되고
이에 불만을 품은 三浦 무역항의 외국인 貿易商(일본인이 중심)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이를 핑계로 유일한 해양 교역로 였던 三浦마져 폐쇄하게 됩니다.
이후 이야기는 세도정치, 흥선대원군... 다들 잘 아시는 역사입니다.
대륙과 事大관계로 성공적인 외교, 교역 시스템에 성공하고, 만주와 남방으로 교린관계에 성공하고,
조공무역을 기본틀로 하는 당시의 국제관계에서 朝鮮은 크게 성공해서 16세기까지 풍요와 발전을 이루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