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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は全国に病院を建て、無料で治療していた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no=96795
プレシアン(韓国語) 2009.9.11

[医学史散歩] 全国に慈恵医院を設立しなさい!

明治天皇に感謝申し上げます
私は42歳であって、1907年から痔が発生して6年間薬を試してみたが効果がなかった。
慈しみ深い皇帝の広い徳でこの地域に慈恵医院が設置されたことにより、その恩恵を被り治療を受けた。22日ですべて良くなったので治療を通じて民を救おうと思うその神聖な恩恵に感謝して、永遠に忘れないことを約束します。


 慈恵医院で治療を受けた患者が書いた感謝の手紙だ。ここで彼が感謝しようと思った皇帝は誰であろうか?
1897年、朝鮮は従来の事大関係を脱して大韓帝国になった。国王も皇帝になった。それならこの人が感謝しようと思った皇帝は高宗?
でなければ、高宗の後を引き継いだ純宗? 皆ちがう。
この韓国人が感謝を表明した対象は、日本の明治天皇だ。なぜこの人は日本の王に感謝の手紙を送ったのだろうか?
彼が治療を受けた慈恵医院が大韓帝国でなく、日帝によって設立されたためだ。


慈恵医院の設置
 慈恵医院は1909年12月、全羅北道全州市、忠清北道清州市、1910年1月、咸鏡南道咸興市に各々設立された。1910年に10か所が増設されて計13か所、すなわち各道ごとに1か所ずつ設立された。慈恵医院が設立されたことで、地方民らは中央で建設した医療機関で治療を受け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った。1920年代中盤、道立医院に改編され、1945年の解放の頃その数は46か所に増えた。各道ごとに3か所だった。

慈恵医院は草創期に患者を無料で診療した。設立目的自体が貧しい人々の診療にあったためだ。無料診療の恩恵は韓国人らがより幅広く利用した。
 日本人の場合、府・群庁、憲兵隊、警察署、居留民団、学校組合の証明書が必要だったが、韓国人の場合、特別な証明書がなくても診療を受けることができた。



平安北道の慈恵医院(義州)と江原道の慈恵医院(春川)



慈恵医院の巡回診療
 慈恵医院は診療の恩恵を広げるために特別な努力をした。巡回診療であった。医師と助手が所属地域の主要所在地を訪問して患者を診療した。毎年1回または2回程度訪問し、1か所で大体1週間から3週間留まった。慈恵医院の所在地から遠方に居住する住民のために施行した出張診療を公式化したのだった。

 慈恵医院が増設されて巡回診療が成り立ちながら、各地方の居住民が受ける医療恩恵の範囲は広くなっていった。

 1910年に入院患者1万965人、外来患者6万2609人、計7万3574人が医療恩恵を受けたが、1918年には入院患者8135人、外来患者33万900人、計33万9035人が治療を受けた。8年で総患者数がほぼ4.6倍に近い増加率を見せたのだ。診療対象の拡大傾向は継続的につながった。明確に慈恵医院は韓国人に恩恵だった。

 しかし問題はあった。開院が心急いて行なわれ付帯施設を完備できない場合が多かった。使われていない官庁の建物を応急に修理して院務を開始したりもした。ひどくは患者を受け入れる病室を用意することが出来ない所もあった。医者たちも問題であった。軍医らが大挙診療に従事したためだ。

慈恵医院と日本軍医


朝鮮総督府医院長 藤田嗣章

 実は慈恵医院の設立自体が日本陸軍の支援のおかげで可能だった。朝鮮駐留軍が医療器具と薬品5万ウォン分を統監部に寄付することによって、慈恵医院が設立されたのだ。設立議論を進めたのも朝鮮駐留軍付軍医部長で併合後に総督府医院長になった藤田嗣章であった。

 日本軍医らは日本政府が特別に養成した医師であるだけに一般の医師より優秀だという評価を受けた。だが彼らの主な対象は負傷者の治療であった。外科経験に比べて内科経験が不足するほかはなかった。しかも彼らの治療対象は軍人である成人男性だった。軍人らに対する診療経験は豊富だが婦人と小児科の経験が不足していたことは事実だった。軍医らが一般人を対象にした診療で持つ限界は明らかだった。
 韓国人にはまた他の苦痛があった。言葉が通じなかった。通訳がいるといっても日本人医師に自らの苦痛を十分に理解させ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韓国人患者らは「言葉と情がよく通じない医療機関で診療を受けるのは嫌」という評価が出てきた。言葉と文化が違う日本医者たちが韓国人に馴染んだ相手になることは無かった。

慈恵医院の運営予算


公州慈恵医院長 田中徳次郎

 さらに慈恵医院の設立目的だった無料診療の恩恵も順次減っていった。1910年から1917年まで60〜80%を占めた無料患者の比率は1920年代中盤を過ぎると10%に落ちた。1940年代に至ると5%以下に落ち込んでいた。皆予算のためだった。

慈恵医院が設立された当時から運営予算に対してはうるさかった。ずっと「国庫で負担するべきか適当な時期に地方予算に移すか」を巡り意見が入り乱れていた。結論は独立運営だった。自主的に運営費を充当しろとの要求であった。

 具体的には診療費と薬の価格を徴収し、さらに値上げを通じて収入を拡大する方案が検討された。結局、慈恵医院は従来割引をしていた薬の価格と診療費を上げた。

道立医院への転換
慈恵医院の運命は1920年代初期をたどりながら決定された。まず、日本本国で財政緊縮が成り立った。1923年、関東大地震は緊縮の程度を強化させた。日本本国の資金で財政不足を補充していた総督府は、日本本国で始まった財政緊縮の余波をそのまま抱き抱えるほかはなかった。総督府は自身の負担を最小化しようとした。その結果は慈恵医院の運営主体を道に移管するということだった。慈恵医院は1925年、道立医院になった。

道立医院は収益中心の運営を始めた。1925年以後に設立された道立医院に対しては、既存の慈恵医院が受けた基金の支援までなかった。自らの収益によって病院を運営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運営費の調達のために多様な方式が動員された。医療スタッフには患者を熱心に診療して親切に待遇しなさいという篤励が成された。早期に退院できる患者を長期間入院させる便法が強行されたりもした。


清州の道立医院の診療光景

 開業医らは競争相手に変わってしまった道立医院を批判した。道立医院の前身は慈恵医院であり、慈恵医院は本来、貧しい患者、頼る所ない患者を救済するために設立されたものと声を高めた。だが、その批判は通じなかった。1930年代に入り日本は戦争を拡大させていった。戦争費用は福祉に投与される予算を削った。韓国人らは自らが受ける診療に対して適切な価格を支払わ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もうこれ以上の“慈恵”はなかった。
“慈恵”の後に隠れていた意味は?


元山医院

 この文の初めに言及した感謝の手紙に戻ろう。痔の苦痛は体験してみた人だけが分かるという。トイレに行くべきかを考えただけでも苦痛だという話がある。6年もの間経験したその苦痛を、1か月にもならない時間で治療をしたというから感謝する心が生まれないことはない。感謝は当然の人間の道理だ。

 だが、この手紙が載せられた<朝鮮総督府救療機関>(1912) を読んでみると、日本人患者の感謝の手紙を探すことはできない。絶対的な数では韓国人より少なかったが、相対的な比率では高かった日本の患者の手紙がないのはなぜであろうか?

 それは韓国人患者の感謝が自発的であったのではは無かった、という証拠ではないか

 日帝は“慈恵”という名の下、地方民に対する診療を広げていた。だが、その恩恵は無料ではなかった。韓国人らは診療の主体の医師、総督、ひいては天皇に感謝を表明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しかも植民支配が確固になりながら当初、韓国人が受けた恩恵は減った。医療はもうお金なしでは在り得ない対象に成っていった。


日帝期の道立医院現況(1925年以前は慈恵医院)
1909年12月:全北全州、忠北清州
1910年01月:咸南咸興
1910年09月:京畿水原、忠南公州、全南光州、慶北大邱、慶南晋州、黄海海州、
江原春川、平南平壌、平北義州、咸北京城(1920年南に移転)
1912年08月:江原江陵
1912年10月:全南済州、慶北安東、平北楚山、咸北会寧
1916年02月:全南小鹿島慈恵医院
1918年:咸北会寧医院出張院診療所
1922年02月:全北群山、全北南原、全南順天
1922年09月:慶南馬山
1922年12月:平北江界
1923年01月:慶北金川
1923年08月:咸北城津
1923年11月:咸南恵山鎭
1925年04月:京畿開城
1926年08月:平南鎭南浦
1926年12月:平南新義州
1930年06月:忠南大田
1930年07月:黄海沙里院
1931年04月:江原鉄原
1931年06月:咸北会寧医院出張院診療所
1932年05月:京畿仁川(仁川府立病院に移管)
1933年07月:咸南元山(元山府立病院に移管)
1933年10月:京畿利川
1936年03月:京畿安城
1936年12月:忠南洪城、咸南北青
1937年05月:忠北清州医院清州分院
1938年03月:平南安住
1938年12月:江原長箭
1938年12月:龍井延吉診療所(満州国に委譲)
1939年10月:江原三陟
1940年11月:平北朔州
1941年07月:慶北浦項
1942年01月:江原原州
1943年05月:黄海南天



일제는 무료로 한국인을 치료하고 있던

일제는 전국에 병원을 지어 무료로 치료하고 있던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no=96795
프레시안(한국어) 2009.9.11

[의학사 산책] 전국에 자혜의원을 설립해 주세요!

메이지천황에 감사 말씀드립니다
나는 42세에 있고, 1907년부터 치질이 발생해 6년간약을 시험해 보았지만 효과가 없었다.
사랑해 깊은 황제의 넓은 덕으로 이 지역에 자혜의원이 설치된 것에 의해, 그 혜택을 입어 치료를 받았다.22일에 모두 좋아졌으므로 치료를 통해서 백성을 구하려고 하는 그 신성한 혜택에 감사하고, 영원히 잊지 않는 것을 약속합니다.


 자혜의원에서 치료를 받은 환자가 쓴 감사의 편지다.여기서 그가 감사하려고 한 황제는 누구일까?
1897년, 조선은 종래의 사대 관계를 벗어나 대한제국이 되었다.국왕도 황제가 되었다.그렇다면 이 사람이 감사하려고 한 황제는 고종?
(이)가 아니면, 고종의 오래가 이은 순종? 모두 다르다.
이 한국인이 감사를 표명한 대상은, 일본의 메이지천황이다.왜 이 사람은 일본의 왕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낸 것일까?
그가 치료를 받은 자혜의원이 대한제국이 아니고, 일제에 의해서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자혜의원의 설치
 자혜의원은 1909년 12월, 전라북도 전주시, 충청북도 청주시, 1910년 1월, 함경남도 함흥시에 각각 설립되었다.1910년에 10이나 곳이 증설되어 합계 13이나 곳, 즉 각 도 마다 1이나 곳씩 설립되었다.자혜의원이 설립된 것으로, 지방민등은 중앙에서 건설한 의료 기관에서 치료를 받을 수 생기게 되었다.1920년대 중반, 도립 의원에 개편되어1945년의 해방의 무렵 그 수는 46이나 곳에 증가했다.각 도 마다 3이나 곳이었다.

자혜의원은 초창기에 환자를 무료로 진료했다.설립 목적 자체가 궁핍한 사람들의 진료에 있었기 때문이다.무료 진료의 혜택은 한국인등이 보다 폭넓게 이용했다.
 일본인의 경우, 부·군청, 헌병대, 경찰서, 거류민단, 학교 조합의 증명서가 필요했지만, 한국인의 경우, 특별한 증명서가 없어도 진료를 받을 수 생겼다.



평안 북도의 자혜의원(도리주)과 강원도의 자혜의원(하루카와)



자혜의원의 순회 진료
 자혜의원은 진료의 혜택을 펼치기 위해서 특별한 노력을 했다.순회 진료에서 만났다.의사와 조수가 소속 지역의 주요 소재지를 방문해 환자를 진료했다.매년 1회또는 2회 정도 방문해, 1이나 곳에서 대개 1주간부터 3주간 머물었다.자혜의원의 소재지에서 먼 곳으로 거주하는 주민을 위해서 시행한 출장 진료를 공식화했던 것이었다.

 자혜의원이 증설되고 순회 진료가 성립되면서, 각지방의 거주민이 받는 의료 혜택의 범위는 넓어지고 갔다.

 1910년에 입원 환자 1만 965명, 외래 환자 6만 2609명, 합계 7만 3574명이 의료 혜택을 받았지만, 1918년에는 입원 환자 8135명, 외래 환자 33만 900명, 합계 33만 9035명이 치료를 받았다.8년에 총환자수가 거의 4.6배에 가까운 증가율을 보였던 것이다.진료 대상의 확대 경향은 계속적으로 연결되었다.명확하게 자혜의원은 한국인에 혜택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있었다.개원이 마음 안달해 행해져서 부대 시설을 완비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사용되지 않은 관청의 건물을 응급에 수리해 원무를 개시하기도 했다.몹시는 환자를 받아 들이는 병실을 준비할 수 할 수 없는 곳도 있었다.의사들도 문제였다.군의관등이 대거 진료에 종사했기 때문이다.

자혜의원과 일본 군의관


조선 총독부 병원장 후지타 상속인장

 실은 자혜의원의 설립 자체가 일본 육군의 지원 덕분에 가능했다.조선 주류군이 의료 기구와 약품 5만원분을 통감부에 기부하는 것에 의해서, 자혜의원이 설립되었던 것이다.설립 논의를 진행시켰던 것도 조선 주류군 첨부 군의관 부장으로 병합 후에 총독부 병원장이 된 후지타 상속인장이었다.

 일본 군의관외는 일본 정부가 특별히 양성한 의사인 만큼 일반의 의사보다 우수하다고 하는 평가를 받았다.하지만 그들의 주된 대상은 부상자의 치료였다.외과 경험에 비해 내과 경험이 부족할 수 밖에 없었다.게다가 그들의 치료 대상은 군인인 성인 남성이었다.군인들에 대한 진료 경험은 풍부하지만 부인과 소아과의 경험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었다.군의관등이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진료로 가지는 한계는 분명했다.
 한국인에게는 또 다른 고통이 있었다.말이 통하지 않았다.통역이 있다고 해도 일본인 의사에 스스로의 고통을 충분히 이해시킬 수 없었다.한국인 환자등은「말과 정이 잘 통하지 않는 의료 기관에서 진료를 받는 것은 혐」이라고 하는 평가가 나왔다.말과 문화가 다른 일본 의사들이 한국인에 친숙해 진 상대가 되는 것은 없었다.

자혜의원의 운영 예산


공주자혜병원장 타나카 도쿠지로

 한층 더자혜의원의 설립 목적이었던 무료 진료의 혜택도 차례차례 줄어 들고 갔다.1910년부터 1917년까지 60~80%를 차지한 무료 환자의 비율은 1920년대 중반을 지나면10%에 떨어졌다.1940년대에 이르면5% 이하에 침체되어 있었다.모두 예산이기 때문에였다.

자혜의원이 설립된 당시부터 운영 예산에 대해서는 시끄러웠다.쭉 「국고에서 부담해야할 것인가 적당한 시기에 지방 예산으로 옮길까」를 순회 의견이 혼잡하고 있었다.결론은 독립 운영이었다.자주적으로 운영비를 충당하라고의 요구였다.

 구체적으로는 진료비와 약의 가격을 징수해, 한층 더 가격 인상을 통해서 수입을 확대하는 분 안이 검토되었다.결국, 자혜의원은 종래 할인을 하고 있던 약의 가격과 진료비를 올렸다.

도립 의원에의 전환
자혜의원의 운명은 1920년대 초기를 더듬으면서 결정되었다.우선, 일본 본국에서 재정긴축이 성립되었다.1923년, 관동 대지진은 긴축의 정도를 강화시켰다.일본 본국의 자금으로 재정 부족을 보충하고 있던 총독부는, 일본 본국에서 시작된 재정긴축의 여파를 그대로 껴안을 수 밖에 없었다.총독부는 자신의 부담을 최소화하려고 했다.그 결과는 자혜의원의 운영 주체를 길에 이관하는 것이었다.자혜의원은 1925년, 도립 의원이 되었다.

도립 의원은 수익 중심의 운영을 시작했다.1925년 이후에 설립된 도립 의원에 대해서는, 기존의 자혜의원이 받은 기금의 지원까지 없었다.스스로의 수익에 의해서 병원을 운영해야 했다.운영비의 조달을 위해서 다양한 방식이 동원되었다.의료 스탭에게는 환자를 열심히 진료해 친절하게 대우해 주세요라고 하는 독려가 이루어졌다.조기에 퇴원할 수 있는 환자를 장기간 입원시키는 편법이 강행되기도 했다.


청주의 도립 의원의 진료 광경

 개업 의사등은 경쟁 상대로 바뀌어 버린 도립 의원을 비판했다.도립 의원의 전신은 자혜의원이며, 자혜의원은 본래, 궁핍한 환자, 의지하는 곳 없는 환자를 구제하기 위해서 설립된 것과 소리를 높였다.하지만, 그 비판은 통하지 않았다.1930년대에 들어와 일본은 전쟁을 확대시키고 갔다.전쟁 비용은 복지에 투여되는 예산을 깎았다.한국인등은 스스로가 받는 진료에 대해서 적절한 가격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이제 더이상의“자혜”는 없었다.
“자혜”의 후에 숨어 있던 의미는?


원산의원

 이 문장의 처음에 언급한 감사의 편지로 돌아오자.치질의 고통은 체험해 본 사람만을 알 수 있다고 한다.화장실에 가야할 것인가를 생각한 것만으로도 고통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6년의 사이 경험한 그 고통을, 1개월도 안 되는 시간에 치료를 했다고 하기 때문에 감사하는 마음이 태어나지 않는 것은 없다.감사는 당연한 인간의 당연하다.

 하지만, 이 편지가 실린<조선 총독부구료기관>(1912)을 읽어 보면, 일본인 환자의 감사의 편지를 찾을 수 없다.절대적인 수에서는 한국인보다 적었지만, 상대적인 비율에서는 높았던 일본의 환자의 편지가 없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한국인 환자의 감사가 자발적인 것은은 없었다, 라고 하는 증거가 아닌가

 일제는“자혜”라고 하는 이름아래, 지방민에 대한 진료를 펼치고 있었다.하지만, 그 혜택은 무료는 아니었다.한국인등은 진료의 주체의 의사, 총독, 나아가서는 천황에 감사를 표명해야 했다.게다가 식민 지배가 확고하게 되면서 당초, 한국인이 받은 혜택은 줄어 들었다.의료는 이제(벌써) 돈없이는 있을 수 없는 대상으로 되고 갔다.


일제기의 도립 의원 현황(1925년 이전에는자혜의원)
1909년 12월:전북 전주, 충북 청주
1910년 01월:함남 함흥
1910년 09월:경기 수원, 충남 공주, 전남 광주, 경북대구, 경남 진주, 황해 해주,
에하라 šœ센, 평남 평양, 헤이북 도리주, 함북 경성(1920년남으로 이전)
1912년 08월:강원 강릉
1912년 10월:전남 제주, 경북 안동, 히로시북초산, 함북 회령
1916년 02월:전남 오가시마자혜의원
1918년:함북 회령 의원 출장원진료소
1922년 02월:전북 군산, 전북 남원, 전남 쥰텐
1922년 09월:경남 마산
1922년 12월:평키타에계
1923년 01월:경북 카네카와
1923년 08월:함북성진
1923년 11월:함남 에산진
1925년 04월:경기 개성
1926년 08월:평남진남포
1926년 12월:평남 신의주
1930년 06월:충남 대전
1930년 07월:황해사리원
1931년 04월:강원철원
1931년 06월:함북 회령 의원 출장원진료소
1932년 05월:경기 인천(인천 부립 병원에 이관)
1933년 07월:함남원산(원산부립 병원에 이관)
1933년 10월:경기 이천
1936년 03월:경기 안죠
1936년 12월:충남홍성, 함남북파랑
1937년 05월:충북 청주 의원 청주 분원
1938년 03월:평남 안주
1938년 12월/`F강원장전
1938년 12월:용이노부길진료소(만주국에 위양)
1939년 10월:강원3척
1940년 11월:평북삭주
1941년 07월:경북 포항
1942년 01월:강원 원주
1943년 05월:황해 남쪽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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