奴隷労働力が豊富だった古代ローマでは水車は余り使われない機械の認識だった。
高句麗の僧曇徴が碾磑(てんがい)という水車で動く臼を造ったといわれているので新羅、百済の方はどうだったか解らないが600年代には満州、朝鮮北部に水車の概念があった事が解る。
この碾磑は日本では余り普及しなかった。
9世紀に日本で全国に灌漑用水車を作らせた記述がありかなり早い段階から普及が進んでいる。
日鮮で水車の普及の差を生み出した原因は奴隷制度の有無かもしれない。
조선에서 왜 물방아가 보급하지 않았는지
노예 노동력이 풍부했던 고대 로마에서는 물방아는 남아 사용되지 않는 기계의 인식이었다.
고구려의 승려 무대막이 연애(라고 가 있어)라고 하는 물방아로 움직이는 맷돌을 만들었다고 말해지고 있으므로 신라, 쿠타라는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600년대에는 만주, 조선 북부에 물방아의 개념이 있던 일이 안다.
이 연애는 일본에서는 남아 보급하지 않았다.
9 세기에 일본에서 전국에 관개 용수차를 만들게 한 기술이 있는 곳이든지 빠른 단계로부터 보급이 진행되고 있다.
일선으로 물방아의 보급의 차이를 낳은 원인은 노예 제도의 유무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