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전, 내지 거주 한국인의 가장 많은 지역이 오사카부였다고 하는 것은 예상 대로입니다만, 그 한국인의 사상 운동에 대해 이러한 사료가 있습니다.
쇼와 16년(1941년) 1월에 오사카부 지사는 반정청으로부터 3변장치에 교대했습니다만, 그 때의『지사 사무인계서』 안의『특별 고등경찰과 관계 사무인계서류』에『 내선경찰 개황내선계』라는 것이 있어, 쇼와 10년에 나온 지사 근본 방침이나 한국인의 상황, 쿄와 사업에 대해 기술됩니다.
그 중의 제4장「한국인 사상 운동 상황」는, 제1절로 공산주의 운동, 제2절로 민족주의 운동, 제3절로 국가 사회주의 운동, 제4절로 노동 운동, 제5절로 종교 단체의 활동, 제6절로 학생 운동에 대해 기술하고 있습니다만, 이 중에서, 당시라도 우익적 사상으로 되어 있던 국가 사회주의 운동과 한국인 의 것인지인가 비교적 붙어 보겠습니다.
덧붙여 본문중의□는, 사료 소장원인 오사카부 공문서관이, 개인정보나 인권에게 관련되는 문제라고 하는 것으로 복자로서 처치하고 있습니다.이제(벌써) 시효이겠지, 라고는 생각합니다만.
제3절 국가 사회주의 운동
1, 우익 국가 사회주의 진영내에 어 오는 한국인의 활동은 구태 의연으로서 신장하지 않고 그들은 이합집산상없는에 의각 단체 수뇌부보다 환영두근에 선거기 다른 방편으로서 가입을 승인하는 정도로 해 현재 대일본 생산당계지부에 선인 당원4〇이름을 껴안아 있을 수 있는 것도 독자적인 활동 없고 기외 각 우익 단체에 기생충적으로 소수앞가맹 다투는 것도 유명 무실의 존재인에 지나 바구니 상황 |
2, 일본 혁신당계에 있어라고는 오사카 히가시나리 지부 준비회의□로 쇼와 13 연초무렵보다 조직 활동을 일으켜 선갑□□□를 중심으로 대부분 선인으로 연설회의 개최 슬로건 |
3, 대일본 청년당에 어라고는 킨키 연합 회장에게 원혁신당 에토 겐쿠로 소장을 영에 오사카부련유세 부장에게 원사대당원 오사카시의 이와타 유즈루 취임해 당세력의 확대 교화에 의무개ゝ있어 |
4, 국 수대중당에 있어라고는 올해 5월 15일 총재 사사가와 료이치명으로 지령을 발표해 당무, 조직, 정보, 유세, 조사, 청년, 노농, 서무, 회계, |
「선내에 국 수대중당지부 설치의 의사없는이나 선내에 어라고는 지부 설치를 요망하는 것 상당수 있어 자신으로서도 당원 획득에 노력과 자신을 유」 |
취지의 신청을 때문인 모양으로 해□□□□는다른 취지 당수 사사가와 료이치에게 상의해인 결과 |
「최소 한도 당원 햐쿠나 이상 획득의 가능성아지부 설치의 요망에 응두」 |
(이)라는 회답을 때문인 사실 있어 추이 주의중 |
일본 혁신당의 한국인은 열심히 활동한 것 같습니다만, 기세는 지속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대일본 청년당의 한국인은 회비 체납등에서 불활발같네요.덧붙여 킨키 연합 회장에게 추대 된 에토 겐쿠로 소장은 에토 신페이의 조카에 해당하는 인물이며, 육군 소장을 거쳐 나라현 선출의 중의원 의원이 되어, 미노베들길의 천황 기관설을 공격한 것으로 유명합니까.
국 수대중당은, 전후도 우익계의 거물로서 군림해 경정 사업을 설립, 좌지우지한 것으로도 알려진 사사가와 료이치가 총재입니다.당내에 반도부라고 하는 부국을 마련해 한국인 당원의 획득에 힘을 쓰고 있습니다.「비행대들외원」라고 하는 것은 어딘가 안2같은 네이밍입니다만, 일전에들년에 사사가와가 비행기로 유럽방문 해 Mussolini와 회견했던 것이 배경에 있는 네이밍일지도 모르겠네요.
이와 같이, 내지 거주 한국인은 민족 독립 운동이나 좌익 운동 뿐만이 아니라 우익 운동에도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사와―☆사료 정리중